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105
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다섯째 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앞에서 네 번까지는 말과 말에 올라탄 자가 나오나 여기부터는 직접 환상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영혼’을 보았습니다. 순교자를 가리킵니다. 순교자(witness)를 가리키는 헬라어 ‘마르튀스’(μάρτυς)에는 증인(martyr)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죽임을 당한 이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상황을 오늘 우리가 역사적 사실로 이해할 수는 있으나 공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순교는커녕 크게 손해나는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순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순교를 실제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정신과의 투쟁이 곧 순교입니다. 무한 경쟁과 성장주의로 치닫는 이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는 삶 말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본질을 지향하는 사람이기에 소유와 소비를 향한 무한 질주에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저항과 대결 의식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지요. 요한이 본 ‘죽임을 당한 영혼들’ 안에 저도 포함되었기를, 아직은 아니라면 앞으로 그런 영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고백이 종교적 교언영색으로 끝나지 않기를!
공동번역 [6:9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떼셨을 때에 나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번역 [6:9 그 어린 양이 다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또 그들이 말한 증언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정목사님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순교가 예수님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것만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무한경쟁,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적 정의 등등에 대해서도 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성경과 교회 안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척박한 사회 현실 앞에 당당히 맞서고 펼쳐 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맞이한 봄은 행복하게 노래 할 수 없습니다.
3.1 독립만세, 4.3제주항쟁, 4.19 학생의거, 5.18 광주민주 항쟁, 6.10 민주 항쟁 등은 우리가 외친 평화의 복음이었다고 봅니다.
이제 앞으로 세상을 향해 제가 외쳐야 할 복음에 대해 신중히 고민해야 겠습니다.
주님의 도움심을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