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자(使者), 3월28일 [3]
2006년 3월28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주님의 사자(使者) 만약 마가복음이 학위 논문이었다고 한다면 불합격 처리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면서 엉뚱하게 말라기서의 글을 인용했으니까 말입니다. 마가가 선지자 이사아의 글이라고 인용한 본문 2절은 말라기서 3장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글은 3절에 나옵니다. 마가가 착각을 일으켰는지, 아니면 알고 있었지만 굳이 구분해서 두 사람의 원작자를 거론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했...
12월14일 논리의 필요성
2006년 12월14일 논리의 필요성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막 3:23)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고 돌아다니는 서기관들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순순히 따라온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중간에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지 이제 예수님은 매우 불쾌한 상황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자기를 비난하는 모든 말에 시시비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아무리 입장이 곤란하더라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선지자 이사야, 3월26일 [1]
2006년 3월26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 요즘 논문을 쓰는 사람들이 각주를 달듯이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의 속을 내가 뚫어볼 수는 없지만, 아마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할 독자들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선지자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은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들은 왕이며, 종교적인...
몰아내는 힘, 성령, 4월20일 [3]
2006년 4월20일 몰아내는 힘, 성령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2)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이겠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성령 임재의 시기로 잡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이미 성령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오순절 운운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굳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정당화하려면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했던 성령이 오순절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구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
요한복음 6장 [5]
8월25일 요 6장 지난 7월 마지막 주일(26일)부터 어제 8월 넷째 주일(23일)까지 전체 다섯 주일 중에서 네 주일의 설교 본문이 요한복음 6장이었다. 6:1-15, 6:24-35, 6:35과 41-51, 6:56-69이 그것이다. 이렇게 내가 연속적으로 한 성경을, 더구나 한 장을 설교 본문으로 선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교회력에 따라서 주어진 세 군데의 본문 중에서 한 군데를 택하기 때문에 중복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번에는 약간의 다른 변수도 있었지만 이왕 요한복음의 중심 사상을 언급했으니 가능한 좀더 길게 가보자는 생각으로 ...
6월19일- 귀신 [4]
2006년 6월19일 귀신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예수님은 앞서 회당에서도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셨고, 이제 시몬의 집에서도 역시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복음서의 이런 보도 앞에서 지성적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약간 당혹스럽습니다. 과연 이런 보도를 그대로 믿어도 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탈신화화(脫神話化)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고대인들의 신화적 표상으로 묘사된...
들짐승과 함께!, 4월30일 [2]
2006년 4월30일 들짐승과 함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언급이 마가복음에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들짐승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정황적으로 볼 때 이 들짐승은 광야에 사는 것들일 텐데, 토끼일까요? 사슴일까요? 조금 사나운 늑대일까요? 마가가 무슨 의미로 들짐승 이야기를 여기에 첨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짐승이 전혀 어울리...
교회에 나가는 이유(2)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사실 솔직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소. 사람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중적인 행동과 판단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자기 합리화에도 빠르기 때문이오. 그런 동물은 지구에 사람이 유일하지 싶소. 이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솔직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거요. 교회에 나가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거요. 그걸 확신하는 사람도 있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
5월17일- 회개와 복음 (4) [3]
2006년 5월17일 회개와 복음 (4)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어제 묵상의 마지막은 신앙적인 업무를 대폭적으로 축소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관심을 쏟는 것이 회개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대목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할 마당에 그런 일들을 줄이라는 게 말이 될까요?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 그런 축소가 왜 회개인가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오해되는 것은 그리스도인...
예수 어록(017)-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3) [2]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3)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우선 번역이 마뜩찮다. 당시에 ‘여자여!’라는 호칭이 낮춰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말로는 낮춤말로 들린다. 서술되는 대목에서 예수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으니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번역해도 괜찮았다. ‘여자여!’라고 불렀다면 다음 문장도 극존칭인 ‘있나이까?’라고 하지 말고 ‘있...
6월5일- 잠잠하라. [3]
2006년 6월5일 잠잠하라.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5)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는 “잠잠하라.”이며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입니다. 이런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꾸짖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은 귀신의 실체를 인정하셨다는 말이 되는군요. 귀신의 실체 문제는 앞에서 잠간 다루기도 했고, 또 뒤에서 축귀,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다시 언급하게 될 테니까 여기서는 이만 접겠...
예수의 믿음 [6]
11월5일(화)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 제목에 따르면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 각자의 믿음은 물론 중요하다.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세상적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3]
2006년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뜻한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세례요한이 선포한 설교의 핵심이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서 이 회개라는 사상을 배웠다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런 내막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세례 요한에게서 나름대...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4]
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
5월16일- 회개와 복음 (3) [2]
2006년 5월16일 회개와 복음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 본문의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면 회개는 복음을 믿는 것의 전제 조건입니다. 혹은 회개가 복음의 선행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의 회개 경험이 없다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논리를 따라오지 못할 것 같은 노파심이 들어, ...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2]
2006년 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세속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오지로 떠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인들의 어록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명령문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
복음 (3) 3월25일 [1]
2006년 3월25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3> 저는 앞서 출애굽과 포로귀환을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는 구약의 해석이 신약에서는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혹시 이 말에 오해가 있을까 해서 변명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억압된 삶의 구조가, 그런 것들은 대개 경제와 정치에 연관된 것인데, 해방의 구조로 바꾸는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분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차별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구조를 바꿔나가는 일은 ...
5월13일 하나님의 나라 (10) [2]
2006년 5월13일 하나님의 나라 (10)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한 이 성서묵상은 오늘로 일단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이며 목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긴 합니다. 어제 언급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여전히 보충 발언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타종교의 문제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평화와 오늘의 폭력 문제도 다루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윤리 문제도 할 말...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복음 묵상(17) [3]
우리는 일반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질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걸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마 4:18-22, 막 1:16-20, 눅 5:1-11절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요한의 권면으로 예수를 따르게 되었고, 자기 형인 베드로를 예수에게 인도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게바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이다. 이런 개명 이야기가 공관복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