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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3일 하나님의 때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 마가는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의 첫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말씀 중에서 첫 마디는 바로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때, 즉 시간은 연대기적인 의미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사건 발생적인 의미인 ‘카이로스’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단순히 2006년 5월3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카이로스를 인식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크로노스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시간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주로 빛의 속도에 의해서 계산됩니다. 만약 우리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현재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은 불가역성에 의해서 지배받기 때문에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도 상대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가 시간을 카이로스로 본다는 것은 그렇게 비합리적인 게 아닙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그런 기준에 따라서 시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차원에서 시간을 보는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간 이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영적인 시간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시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흡사 연애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두 사람이 나누는 애정의 농도에 따라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밀착 관계에 따라서 흘러가는 게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대개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단지 신앙생활의 노하우만 늘어났을 뿐이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시간이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면적 삶의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고, 심화가 없다면, 그런 상태에서 외면적인 시간만 간다면 결국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이런 생명의 시간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 그리고 생명계 전체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과연 이런 하나님의 시간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까요? 오늘의 생명공학은 하나님의 생명 운동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오늘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철저하게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살아가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역동화 하는 일에, 주기도문의 형식에 따라서 말한다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
2천 년 전에 찼다고 한 ‘때’가 오늘 더욱 무르익었나요? 하나님의 때는 결코 크로노스의 계산법대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또한 그 때는 이 역사의 시간과 비례해서 흐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움직일 것이며,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때가 확연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여전히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상응해서 살아간다면 지금 이 순간이 곧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얼마나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 마가는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의 첫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말씀 중에서 첫 마디는 바로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때, 즉 시간은 연대기적인 의미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사건 발생적인 의미인 ‘카이로스’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단순히 2006년 5월3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카이로스를 인식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크로노스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시간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주로 빛의 속도에 의해서 계산됩니다. 만약 우리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만 있다면 현재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고 합니다. 이론적으로만 본다면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은 불가역성에 의해서 지배받기 때문에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시간도 상대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가 시간을 카이로스로 본다는 것은 그렇게 비합리적인 게 아닙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그런 기준에 따라서 시간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차원에서 시간을 보는 것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간 이해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영적인 시간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시간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흡사 연애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두 사람이 나누는 애정의 농도에 따라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흘러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간은 하나님과의 밀착 관계에 따라서 흘러가는 게 아닐까요? 안타깝게도 대개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거의 변화가 없습니다. 단지 신앙생활의 노하우만 늘어났을 뿐이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시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시간이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면적 삶의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고, 심화가 없다면, 그런 상태에서 외면적인 시간만 간다면 결국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이런 생명의 시간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 그리고 생명계 전체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이 과연 이런 하나님의 시간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까요? 오늘의 생명공학은 하나님의 생명 운동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오늘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철저하게 의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살아가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역동화 하는 일에, 주기도문의 형식에 따라서 말한다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지요.
2천 년 전에 찼다고 한 ‘때’가 오늘 더욱 무르익었나요? 하나님의 때는 결코 크로노스의 계산법대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또한 그 때는 이 역사의 시간과 비례해서 흐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움직일 것이며, 또한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때가 확연하게 드러날 수도 있고, 여전히 숨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인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에 상응해서 살아간다면 지금 이 순간이 곧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얼마나 인식하고 살아갑니까?
"이런 점에서 성서가 시간을 크로노스로 본다는 것은 그렇게 비합리적인 게 아닙니다."
(맨 밑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크로노스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목사님! 혹시 '카이로스'를 '크로노스'로 잘못 적으신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