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조회 수 4399 추천 수 30 2006.05.20 23:22:18
2006년 5월20일 “나를 따라오라!” (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7)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뿌리째 흔들었습니다. 이 말씀에 의지해서 세속에서 이루고 싶었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오지로 떠난 이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인들의 어록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말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명령문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나’를 가리키는 예수에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절대적인 중심입니다. 이 예수는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을 가리킵니다. 이 예수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 그의 운명이 그리스도교의 뿌리이면서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불교는 약간 다릅니다. 역사적인 인물인 싯다르타는 불교의 태두로서 중요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앙에서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불교신자들의 내면에 부처가 내재해 있으니까, 실제의 부처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아무도 예수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며, 그분에 의해서만 구원이 유효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뻔 한 말을 뭐하려 하는가, 하고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그렇게 믿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영혼을 기울이고 있는 분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에 관해서 알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믿으려고만 합니다. 자기의 신앙경험만 의존할 뿐입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노력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도로 병이 나았다든지, 방언을 한다든지, 교회를 크게 키웠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만 그런 일들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속칭 ‘남녀호랑개교’(?)로 일컬어지는 일련정종 신도들도 그들의 주문을 통해서 병이 치료되었다는 간증을 합니다.
저는 그런 종교 일반에서 발생하는 일들의 가능성 여부나 가치판단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본질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자기 안의 부처를 찾아 나서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며, 신의 도움으로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바알 종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원칙적으로 예수가 누군가에 관한 질문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를 일단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알아야 하고, 그에게서 발생한 구원론적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근거한 신앙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가 소위 <경배와 찬양> 유의 감상주의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심리적 영성입니다. 또는 지도력 개발과 상담학이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모두 무엇입니까? 그게 예수, 예수 사건, 예수 운명을 깊이 이해하고, 그와 하나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런 데 한눈을 파는 사람에게는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 그의 통치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종말론적 희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대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두 손 들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르면서 위로를 받으면 충분합니다. 트집 잡듯이 한 마디 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라 당신의 탄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는 사랑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말도 되지 않은 사랑타령을 늘어놓는 신파조 티브이 드라마와 비슷한 감수성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유행에 휩쓸린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홍수처럼 이런 데 휩쓸린 신자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가 아니라 자기의 종교적 만족이 최고의 관심이 되어 버린 마당에 다시 그들을 끌어다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치유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의 신비를 들여다보라고 말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공연한 말이 많았는지 모르겠군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그 “나”가 오늘 우리에게서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수님만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건에서 일어난 생명의 신비와 구원의 신비만을 따라가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이런 게 정상인지 모릅니다. 제정신 똑바로 차린 사람 중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겠지요.

주님, 예수만이 우리 삶의 모든 것입니다. 아멘.

[레벨:7]늘오늘

2006.05.21 04:10:35

‘나를 따르라.’
‘그와 함께라면 무조건 좋다.’라는 그런 인물과의 만남,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지식이나 체험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니고,
보복이 두려워 따를 수밖에 없는 동원령이 아니고,
그와 함께할 때, 모든 의미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 어떤 고통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나는,
그런 인물을 직접 만나 그와 함께 떠나는 신나는 여행.

분명 그런 인물이었을 예수와, 나 사이에는,
세월보다 더 두꺼운 숱한 해석들과 해석자들,
그보다 더 두꺼운,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 자리합니다.
선택과 결단의 능력이 내게 있는 것일까요?
선택과 결단을 하는 것이 나일까요?
나를 휘말아 흘러가는 이 모든 신비 앞에서,
나더러 ‘예수를 따르라.’는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나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나를, 세상을, 예수라는 이름을, …

[레벨:0]riveroad

2006.05.24 11:01:03

다비아에 가끔 글 올리시는 정세웅 님께 신학을 가르치셨던(?) 어떤 분이
설교 중에 말씀하시더군요. "나를 따라오라!"와 연결되는 것 같아서 아래에 붙입니다.

(*아래는 제가 이해한 대로 편집요약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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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예수 믿냐? 너 정말 하느님 믿냐고? "
"네가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
"그 고집불통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느님께서
자기들 말 잘 안 들어주시면 이랬다저랬다 했는데,
하느님한테 좋은 것만 달라고 하는 네가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
나는 하느님 믿는다고 말 못해.
믿는 시늉을 한다고 하면 몰라."

"그러나, 나는 하느님 뜻을 따르고 싶어.
나는 하느님 못 믿어도,
하느님은 나를 믿으신다는 거는 말 돼잖아."

"나는 확고부동하게 하느님 못 믿지만,
'하느님은 나를 믿으신다!'
그거는 믿을 수 있으니까 그거는 말이 돼니까,
희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한번 살아볼 만하잖아.
나는 못 믿지만 나를 믿어주는 하느님,
그분 뜻에 따라 한번 살아보지 않을래?
그런 인생 괜찮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하느님 못 믿어도,
나는 기독교신자야."
"나는 하느님 못 믿지만,
내 인생 하느님 뜻따라 살려고 고집부리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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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그 어떤 유려한 말보다
더 제 가슴을 녹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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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축구대회 유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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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6일- 회개와 복음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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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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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에 나옵니다. 오래 전 다른 세 분 신학자들과 함께 제가 공역한 책입니다. 금년 성탄 전후에 다비안들과 함께 읽어보려고 여기에 싣습니다. 성탄절 기도 주님이신 우리의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높이시려고 낮아지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풍요롭게 하시려고 가난해지셨나이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 옆으로 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셨나이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나이다. 당신은 하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사시려고 땅으로 내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도, 8월17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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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의 시(2)- 꿈꾸는 당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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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일, 수 마종기의 시(2) 제목: 꿈꾸는 당신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것을 당신은 어디서 구해 빈 터를 채우는가 내가 덮어주지 못한 곳을 당신은 어떻게 탄탄히 매워 떨리는 오한을 이겨내는가. 헤매며 한정없이 찾고 있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곳에 있기에 당신은 돌아눕고 돌아눕고 하는가. 어느 날쯤 불안한 당신 속에 들어가 늪 깊이 숨은 것을 찾아주고 싶다. 밤새 조용히 신음하는 어깨여, 시고 매운 세월이 얼마나 길었으며 약 바르지 못한 온몸의 피멍을 이불만 덮은 채로 참아내...

노무현(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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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회개와 복음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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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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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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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3일 손 마른 사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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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18일 사랑하는 아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하늘로부터 울린 그 소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더 정확히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핵심은 이미 마가가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아들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로 해석됩니다. ‘해석’이...

옥중서간(12)

  • 2010-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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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이체커의 <물리학의 세계상>을 아직도 탐독하고 있다. 신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의 보충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졌다. 즉 인식의 한계가 부단히 확대되면서 항상 신이 옆으로 내밀리고, 거기에 따라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것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서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은 미해결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에서 우리를 붙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신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

나태주의 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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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나태주의 시 여기 아주 짧은 시 한편을 소개한다. 이 시도 ‘외우고 싶은 명시 50편’에 담겨 있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의 ‘행복’이다. 아주 소박하지만 진실된 행복에 대한 노래다. 행복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저녁때- 시인들은 아침보다 저녁을 주목한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저녁을 특별한 순간으로 주목하지 않는다. 저녁 이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5월13일 하나님의 나라 (10) [2]

  • 2006-05-13
  • 조회 수 4432

2006년 5월13일 하나님의 나라 (10)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한 이 성서묵상은 오늘로 일단락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초석이며 목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긴 합니다. 어제 언급한 부활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여전히 보충 발언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타종교의 문제나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평화와 오늘의 폭력 문제도 다루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윤리 문제도 할 말...

하나님의 때, 5월3일 [3]

  • 200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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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3일 하나님의 때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오늘 마가는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의 첫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 말씀 중에서 첫 마디는 바로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때, 즉 시간은 연대기적인 의미인 ‘크로노스’가 아니라 사건 발생적인 의미인 ‘카이로스’입니다. 성서의 시간은 단순히 2006년 5월3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적인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카이로스를 인식하기...

6월12일- 시몬의 장모 [1]

  • 200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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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12일 시몬의 장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여수께 여짜온대 (막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누웠다는 보도만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 일행이 시몬 형제의 집을 방문한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이 여자는 왜 딸의 시댁에 온 것일까요? 사돈댁에서 산다는 건 아주 불편한 일인 텐데 말입니다. 이 여자의 운명이 좀 기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돈댁에서 살게 된 것인지 아니면 병이 들어 일시적으로 잠시 들른 건지 우리는 지금 정확한 걸 모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잘 고...

죽음을 앞둔 이들을 위해, 8월11일, 토

  • 2012-08-11
  • 조회 수 4417

주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이들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저는 그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일지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불안해할지 평안해할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낄지 이루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저도 결국 그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해질 사람으로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릴 뿐입니다. 주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그들의 영혼을 외롭지 않도록 친구처럼 맞아주십시오. 이 땅에 살면서 겪었던 모든 아픔을 씻어주...

3월18 수혼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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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4414

2009년 3월18 수혼법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급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12:20-22) 신명기 25:5절 이하에 나오는 율법은 아주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때 아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말하자면 수혼법(嫂婚法, levirate marriage)에 관한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하지 말고 남편의 형...

갈라지는 하늘, 4월15일 [3]

  • 2006-04-15
  • 조회 수 4413

2006년 4월15일 갈라지는 하늘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0)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순간에 나타난 특별한 현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늘이 갈라진 것이며, 둘째는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왔으며, 셋째는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첫 번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 물속에 잠겼다가 올라오는 순간에 하늘이 갈라졌다고 합니다. 도대체 하늘이 어떻게 갈라졌다는 것일까요? 하늘이 갈라질 수 있나요? 간혹 먹...

근본주의(2) [4]

  • 2010-07-06
  • 조회 수 4409

제임스 바(James Barr)라는 신학자는 근본주의의 특징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보고 있소. 1) 성서 안에는 어떠한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성서 무오성에 대한 특별한 강조. 2) 현대 신학이나 방법론 및 비판적 성서 연구의 결과나 해석에 대한 반발. 3) 자신들의 종교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확신. 제임스 바의 설명은 크게 어긋나지 않소. 이런 근본주의 속성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소. 위의 세 가지 특징을 부언하리다. 첫째, 근본주의자들은 성서를 문자적인 차원에서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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