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91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9절 문장에는 주어가 생략되었습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앞에 ‘주님께서는’이나 ‘어린 양은’이 들어가야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당신’이라는 단어가 함축되었습니다.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라는 표현도 어떤 뜻인지 대략 느낌은 오지만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방언’과 ‘언어’, 그리고 ‘나라’와 ‘민족’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다르게 들립니다. 번역이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는 말은 비밀 가득한 인류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밝혀진다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지식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이런 주장을 언어도단이라고 여겼겠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는 늘 시대정신과 대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메시아인지에 대한 변증이 늘 새롭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껏해야 도덕성을 선전하거나 종교적 감수성에 호소하는 종교로 전락한다면 우주와 인류 역사 전체와 대결했던 초기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무시하는 겁니다.
“루터교가 현대사회에 던지는 제안”이라는 부제를 단 『진정한 기독교』의 ‘번아웃된 신자들과 영적 세속주의자들’이라는 단락에는 신앙에 관심이 있으나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국교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설명합니다. 인상 깊은 한 대목을, 약간 길게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인쇄된 찬송가집 대신 디지털 스크린으로 바꾸기 시작했다고 생각해보라. 그들은 이 변화가 지역 내의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몇몇 젊은이가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그러면 교회는 본당 입구에 커피숍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추가 조치는 불만을 품었던 얼마간의 사람을 참여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시도가 매우 효과적인 것을 보고서 커피숍을 예배 공간 안에까지 들여고 스크린을 더 자주 사용한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을 조금씩 향상시킨다. 더 많은 커피 기계를 들여오고 우유 거품을 커피 위에 더 올리고 경배와 찬양 곡을 더 폭넓게 고르고, 화소가 더 높은 대형 스크린을 사용한다. 스크린이 최대로 커지고 커피숍이 지역 내 어느 커피 전문점과도 겨룰 수 있을 때까지 교회는 이 패러다임을 계속한다. 드디어 극댓값에 다다른다. 이제 이 교회는 최상의 커피와 최대 스크린을 가진 교회가 된다.(38~39쪽)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는 표현이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피에 어떤 주술적인 능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피는 예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의 죽음이 죄의 종으로 묶여서 살던 사람들을 해방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해 무덤에 묻혔던 그 예수가 제자들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살아 있는 자’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이를 더 압축해서 말하면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서 종말론적인 생명이 현실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추상적인 이론으로 들릴지 모르겠군요.
루터교가 미국 교회에 대해 한 말을 들으니 버가모 교회가 생각납니다.
버가모’라는 뜻은 ‘이중 결혼’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사랑, 즉 세속화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세상과 연합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적인 음행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는 모두 그 안에 커피숍을 가지고 있는 데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풍요와 다산의 바알 신앙이 버젓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교인들은 그냥 지나치고 있습니다.
지금 선지자 엘리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지 마라고 말합니다.
천하무이도 기세무이관(天下無二道 基世無二觀) 천하에는 두 도, 즉 두 길이 있을 수 없다. 기독교도 좋고 세상도 좋은 두 관점이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