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28)- 교회비판자들

조회 수 4038 추천 수 4 2010.06.05 22:35:28

     계몽주의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권위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비판자들이나 옹호자들은 종종 교회의 권위주의 형태를 교회의 실체로 오해한다.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이외의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판단할 자유가 있다. 이것은 삶의 정치적 형태만이 아니라 교회 조직과 교리들에도 허용된다. 자유라는 은사와 특권은 교회의 선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적 결정들, 그리고 성서 문서들, 더 나가서 예수 자신의 메시지에 대해서도 행사되어야 한다. 우리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도 인간이 모든 무제약적인 권위로부터 자유롭다는 원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자유를 확립시킨 메시지 자체가 인간에 의해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도 다른 모든 권위 주장과 마찬가지로 비판적 검토를 받아야 한다. 인간의 정치적, 지적 실존의 전 영역에는 이 비판적 반성에서 면제될 수 있는 특권 영역은 없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도 이 비판으로부터 보호받을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판적 검토를 통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전혀 사람에게 낯선 분이 아니다. 인간이 만일 하나님을 배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과 운명을 배반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게 된다.(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2 쪽)

 

     한국사회 안에 기독교(개신교회)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세력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잘 알고 있을 거요. 내가 알고 있는 한 로마가톨릭교회나 불교를 ‘안티’하는 사이트는 없소. 우리 기독교에만 그런 사이트가 있다는 건 도대체 무얼 의미하는 거겠소. 이 사회의 기본적인 반기독교적인 정신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소. 가장 큰 책임은 우리에게 있소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글에서 언급했으니 오늘은 그만 둡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이나 이들과 맞상대해서 옹호하는 이들이나 똑같이 오해하고 있는 점은 현재 교회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앙행태를 기독교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오. 예컨대 레드컴플렉스가 그 중의 하나요.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신앙을 수호한다고 주장하는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마치 반공주의와 똑같은 것처럼 말한다오. 안티 기독교 단체도 그런 행태를 기독교 자체로 보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거요. 이런 문제가 어디 한 둘이겠소. 조금 지적으로 세련된 기독교 비판자들은 기독교가 성속이원론이나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오. 그런 행태가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오. 본질이 아닌 것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일은 허깨비와 싸우는 것과 똑같소.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의 그 어떤 권위주의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오.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면 당연히 비판받아야 하오. 기독교 교리도 무조건 수호될 수 없소. 루터나 칼뱅이 말했다는 것으로 권위가 확보하는 게 아니오. 진리의 빛에서 조명 받아야 한다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권위를 확보하는 게 아니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의 목사들은 정직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소. 그들이 강단에서 설교라는 권위에 안주한 채 온갖 잡설을 쏟아낼 때가 많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하면서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소.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이는 설교도 많소. 설교는 비판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오. 비판을 부정하는 것은 진리 앞에서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요. 물론 여기서 설교에 트집을 잡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오. 진리논쟁을 피하지 말라는 것이오. 위에서 판넨베르크가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그 어떤 비판도 다 견뎌낼 수 있소. 그대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소. “설교비평이 두려우면 설교하지 마시오.” (2010년 6월5일, 토요일, 더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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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7]paul

2010.06.06 07:43:30

목사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 곳 다비아 계시판에서도 한때 좀 떠들썩 했듯이 한국에서는 기독교도 많지만 그에 반해 안티 기독교도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안티 기독교 싸이트에도 자주 가보곤 하고 또한 그들의 글도 참 좋아합니다. 제가 안티 기독교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주로 기독교인을 욕할 때 입니다. 주로 모모 목사가 무슨 발언을 하였네, 또는 무슨 좋지 않은 일을 하였네이죠. 저 역시 그런 글을 읽을 때 그런 행동을 한 기독교인을 나쁘게 보게 되고 또 저 자신을 돌아 보게 만듭니다.


둘째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 주로 성경에 대한 -- 공격이죠. 요새는 안티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원만한 목사님 뺨치죠. 그들은 거의 성경을 외운것처럼 말씀을 인용합니다. 저는 여기서 성경의 다른 해석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도 볼 수 있겠구나.


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켈빈을 믿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때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하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 보려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런 나쁜 글은 읽으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그런 나쁜(?) 말에 넘어갈 신앙이라면 이미 신앙이 약한것 아닐까요? 어떤때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고 또 어떤 구절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기 때문이 아닌, 도저히 납득이 안가도 그래도 믿게 될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인함일까요? 아님 저의 맹목적인 믿음인가요? 말씀을 가지고 고민해 보고 하나님의 의도를 그 말씀에서 읽으려고 노력하고 하나님께 의지 할때 하나님께서 도리어 좋아 하시지 않으실까요?


저의 관점이 바른 건가요 잘못된 건가요? 저의 신앙에 대한 태도에 목사님과 여러분의 인도와 비판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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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10.06.06 20:04:45

가톨릭과 불교에는 없는 안티 그룹의 존재들의 집중포화에 대하여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성에 대한 사단적인 큰 반증이라고 여기는 우산을 마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적이 많을수록 우리의 진리성이 공고하다는 것으로 여기므로

내부의 성찰은 필요치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권위와 자유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요,

자유가 은사와 특권이라는 것을 오랜 신앙 생활에서 들어보지도 못하여서

자유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새삼스럽습니다.

진리가 자유케 한다...

그리고 제 안에서 솟아오르는 권위적인 성향에 저 자신도 놀랍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어느새 제 속에 자라버린 권위의 싹 앞에

이 묵상을 따라가며 알아채고 자르고 있네요.

권위는 인간의 죄성에서 자라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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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10.06.07 12:42:05

학원차에 탄 중고생과 경비아저씨로부터 각각 인격적 무시를 당한 적이 있는데요

후자는 그러려니 넘어간 반면

전자때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어리면 저보다 못하다는 제 안의 권위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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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5일 잠잠하라.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5)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는 “잠잠하라.”이며 다른 하나는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입니다. 이런 표현에 의하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꾸짖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은 귀신의 실체를 인정하셨다는 말이 되는군요. 귀신의 실체 문제는 앞에서 잠간 다루기도 했고, 또 뒤에서 축귀, 치유,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다시 언급하게 될 테니까 여기서는 이만 접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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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7일- 귀신 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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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7일 귀신 발작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 1:26) 귀신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지만 옛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요즘도 어린아이들, 특히 소녀들이 귀신 이야기를 자주 하긴 합니다. 심지어는 가족사진에 오랜 전에 죽은 사람이 나타났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공중파를 타기도 합니다. 그런 걸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이 불안하기도하고, 불확실하다는 의미이겠지요. 오늘 이야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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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서로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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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8일 서로 묻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27) 오늘 본문의 구조는 22절과 흡사합니다. 두 구절이 모두 예수님의 권위에 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22절의 가르침과 27절의 명령에 권위가 있었다는 건 곧 기존의 것과 달랐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다른 걸 가르치셨으며,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축귀능력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권위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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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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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9일- 귀신이 순종하는 언어의 능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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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9일 귀신이 순종하는 언어의 능력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막 1:27)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 중에서 시몬 형제와 안드레 형제를 제자로 삼은 것 말고는 최초의 이야기가 바로 이 회당 사건입니다. 이 회당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줄이면 ‘언어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앎의 새로운 지평을...

6월9일- 귀신이 순종하는 언어의 능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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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0일- 예수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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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10일 예수의 소문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막 1:28) 21절부터 시작한 예수님의 회당 사건이 이제 28절에서 끝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여기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핵심이 바로 28절 말씀이겠지요.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갈릴리의 한 촌 나사렛에서 자란 예수에 관한 소문이 아직 유대까지는 못 내려갔지만 공생애 초기 단계에서 갈릴리에 전 지역에 퍼졌다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 사건이 쇼킹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은 어떻게 비쳤을...

6월10일- 예수의 소문

  • 200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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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1일- 시몬 형제의 집 [1]

  • 200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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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11일 시몬 형제의 집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막 1:29) 회당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야고보 형제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앞서 17,18절에서 시몬 형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를 위해서 세속적인 세계를 버리는 일종의 출가(出家)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적인 진리를 선택한 사람들은 출가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구도는 자신의 온 영혼을 투자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입...

6월11일- 시몬 형제의 집

  • 200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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