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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8년 11월11일 어린아이 같은 사람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어제의 묵상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마가복음 기자는 막 9:36,37절에서 어린아이를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위 구절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자’가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 당시에 어린아이들이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소외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세리와 죄인 같은 이들이겠지요.
위의 설명으로 ‘이런 자’의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반사회적인 사람들도 이런 자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 어린이 유괴범 같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중에서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일까요? 그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서는 사회과학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입니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반역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이런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교회는 세상의 반역으로 기능해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보다 더 무시당한 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어제의 묵상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마가복음 기자는 막 9:36,37절에서 어린아이를 신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위 구절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자’가 누구를 가리킬까요? 그 당시에 어린아이들이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제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주류에서 소외된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소외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세리와 죄인 같은 이들이겠지요.
위의 설명으로 ‘이런 자’의 의미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반사회적인 사람들도 이런 자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 어린이 유괴범 같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로부터 소외된 이들 중에서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자’일까요? 그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성서는 사회과학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본문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뿐입니다.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반역입니다. 그 나라는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세상이니까요.
이런 하나님 나라에 의존하는 교회는 세상의 반역으로 기능해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분보다 더 무시당한 이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반 고호의 편지를 읽고 있는데,
그는 동생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를" 떠돌이 개"라고 표현했어요.
매독에 걸린 임신한 창녀를 사랑하고 현실감 없이 살던 그는
엄격한 목사였던 아버지에게도 받아들여지지않고, 주변사람들에게도 짐스런
개같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일컬었는데 가슴이 찡하도록 그의 소외감이 전해졌어요.
그의 편지에서 저는 오히려 자연에, 생명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다가간 사람임이 뜨겁게 느껴집니다.
비록 그가 살아 생전 화가로 대접받지 못했고 광기어린 삶을 살다가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할지라도...!
오늘 목사님의 묵상을 대하다보니 일치점이 느껴져서 반가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