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아담과 이브

조회 수 11064 추천 수 156 2006.08.02 08:13:15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

위의 본문은 J문서가 전하는 인간 창조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이다. 창 2:4절로부터 시작되는 이 전승은 언어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1장의 설명과 달리 야훼 하나님을 예술가로 묘사한다. 야훼는 흙으로 남자인 사람을 만드신 다음에 또 다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날짐승을 만드셨다. 아담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제 남자와 여자는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야만 했다. 성서 기자는 그 전승의 마지막 진술을 바로 위에서 인용한 문장으로 채웠다. 아담과 이브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말이다.
우리가 시비를 걸듯이 말한다면 그 당시에는 아담과 이브 이외에 아무도 없을 때였으니까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성서 기자가 부끄러움을 거론한 이유는 뒤이어 언급하게 될 인간 타락과의 연결고리를 제공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야훼의 부르심을 받고 아담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이어지는 야훼의 추궁은 다음과 같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야훼와 아담의 대화는 선문답처럼 들린다. 벗은 것이 왜 두렵다는 것일까? 3장7절은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선악과를 통해서 눈이 밝아진 것이 두려움의 단초인 셈이다. 눈이 밝아졌다는 건 사물의 실체를 바로 인식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왜 문제인가?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내려면 그런 사물에 대한 인식이 없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이 짧은글에서 이런 질문을 모두 검토할 수는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벌거벗음과 부끄러움, 그리고 두려움의 관계만 조금 따라가 보자.
오늘날에도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갓난아이, 심한 정신지체인, 부부관계를 이룬 사람, 나체촌 사람들, 나체 모델, 공중목욕탕에 들어간 사람들, 포르노 필름을 찍는 장면의 배우들 등등이다. 수영장이나 터키탕 같은 곳에서는, 또는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원시림에서는 전라는 아니지만 거기에 버금가는 차림이라 하더라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런 걸 전제한다면 오늘도 상황에 따라서 벗은 것 자체가 인간에게 반드시 부끄러움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다면 우리의 일상에서 벌거벗음은 대개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왜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까? 이걸 나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건 문화적인 현상이다. 어떤 민족은 자기 신체를 많이 노출시키고 있지만 어떤 민족은 가능한대로 가리고 살아간다. 여성들이 배꼽티를 입고서도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차도르를 걸쳐야만 겨우 돌아다니는 사회가 있다. 이런 차이는 분명히 인간 본질이라기보다는 문화에 의해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문명과 담을 쌓은 원시민족이라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완전히 벗은 민족은 없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문명이라도 싹튼 민족은 몸을 충분히 가렸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벌거벗음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인간 본질에 속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 본문이 지적하고 있듯이 말이다.
문화에 속하든지 본질에 속하든지 벌거벗음으로 인한 부끄러움은 인간 삶의 분명한 현상이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은 주로 성(性)과 연관된다. 남성들은 웃통을 벗어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반면에 여성들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여성의 특징이 가슴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아랫도리를 벗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런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성을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에 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신체를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명의 도구인 성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인간만 벌거벗음을 부끄러움으로 여긴다. 이게 선악과를 취한 아담의 자손이 겪어야 할 심판인지, 아니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물에게 내린 은총인지 누가 판단할 수 있으랴.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원래 인간은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 22:30)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부활의 생명이 현실화하는 그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금 우리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기준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옷을 입은 천사를 보았나? 라파엘의 그림 천사상은 옷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는 바울의 진술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참여하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옷도 없고 성도 없고 신체적 차이도 없고, 결국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없다. 이런 삶이 재미없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속단하지는 마시라. 자신이 모른다고 해서 참된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그런 기쁨과 평화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작은 경험으로 거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벌거벗은 어린아이의 자유를 우리가 이 현실에서 이미 보고 있지 않은가!

[레벨:23]브니엘남

2007.02.19 19:21:26

성경에서 옷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아서(사 64:6)
시 45:13-14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전 9: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렘 23:6 여호와 우리의 의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눅 5: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성경에서 옷은 "우리의 어떠함을 덮는 것"을 의미하거나 "행함과 생활에서의 우리의 어떠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죄가 없을 때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럽지 않는 것은 우리의 어떠함이 항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고 난 후에 우리의 어떠함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 가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옷은 여호와 우리의 의이신 칭의의 옷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칭의의 옷-신부의 속옷-만이 아니라, 신부의 겉옷인 예복(세마포 옷; 마 22;11, 계 19:8)을 입기 원하신다. 신부의 겉옷인 예복(세마포 옷)은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삶 안에서의 옳은 행실, 즉 행함과 생활에서의 우리의 어떠함, 곧 그리스도를 사는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빌 1:21).

이에 대한 것이 시편 45;13-14절에 잘 나와 있다.
45:13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45:14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 금으로 수 놓은 옷: 금으로 가공된 옷(짜넣어진 옷); 칭의의 옷
2. 수 놓은 옷; 세마포 옷

우리는 칭의의 옷, 즉 신부의 속옷과 겉옷인 예복,즉 세마포 옷을 다 입고 혼인 잔치에 부름을 받아야 쫒겨남이 없을 것이다. 온전한 예복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자.

할렐루야 다시 오실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마라나타.


[레벨:28]첫날처럼

2007.03.05 01:44:38

삶은 "가면무도회" 라는 생각을 항상 해봅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비정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맨몸이 드러나듯 자신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지극히 두렵습니다... 너무도 겹겹이 둘러싼 옷과 가면으로 오히려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가 힘들어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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