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1)

조회 수 5202 추천 수 81 2004.06.30 22:51:59




가상칠언(架上七言) (1), 마 27:3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거기 섰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고 합니다. 엘로힘의 "엘"과 임마누엘의 "엘", 또는 엘샤다이의 "엘"은 모든 고대 근동지역에서 거룩하고 능력 있는 신에 대한 명칭으로 불려지던 것입니다. 좋은 뜻의 이 단어를 자식들의 이름에도 붙여주곤 했겠지요.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거의 죽음의 상태에 빠진 예수님이 약간 흐린 발음으로 내쏟은 이 호소가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의 도움을 받으려 한 마지막 몸부림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님의 이  절규를 아주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우선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이런 나약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하나님 만세!"를 외치다가 죽는 게 누가 보기에도 훨씬 떳떳한 것으로 보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몇 가지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 때문에 억울한 죽음 앞에서 이러한 하소연을, 또는 원망을 할 수밖에 없었을 지 모릅다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되면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을 회의하게 마련입니다만, 예수님이 그런 십자가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렇게 외마디 비명을 질러댔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이 있긴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토로했다는 사실에서 십자가의 죽음이 주는 두려움 운운 하는 이들이 있는데, 별로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죽음 자체는 비록 두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상당히 많은 유대의 민족주의자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민족의 독립을 외쳤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억울한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만약 예수님이 죽음의 고통 때문에 "엘리, 엘리"하고 외쳤다면 그런 애국자나 철학자들보다 정신적으로 허약하다는 말이 됩니다.



둘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런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내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감상적인 차원으로, 너무나 도식적인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태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약성서가 예언한 것이며,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것을 지나차게 기계적인 역사진행으로 몰아가면 십자가 사건의 보다 심원한 의미를 손상하게 됩니다. 만약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여긴다면 자체적으로 모순에 빠집니다.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받아야 하는가? 사랑과 전능의 하나님이 시간을 질질 끌지 말고, 또한 굳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지 말고 직접 인류를 구원하면 되지 않는가? 십자가 사건이 빼도박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의 숙명이었다고 한다면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십자가 사건을 통한 인류 구원은 감상적 차원이 아니며, 또한 인간 예수가 감당해야만 했던 운명도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을 위한 길이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사건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열려진 것으로서 구원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한 역사적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역사는 고정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종말에 이르기까지 열러진 길을 갑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역사적 책임이 큽니다. 역사를 구원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멸망의 길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셋째, "엘리, 엘리"라는 예수님의 절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유기(遺棄)가 오히려 구원의 단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말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종교적으로 정화된 의미의 십자가가 아니라 2천년 전 그 당시의 의미로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다면 이러한 버림받음의 사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구원의 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당시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사도바울도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 했습니다(고전 1:23).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거리끼는 사건이며 미련한 것으로 여기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십자가는 모든 것의 좌절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이 십자가로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 역사의 반전에 기대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서 모든 것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판넨베르크는 어느 글에선가 이렇게 진술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이제 인간의 가장 비참한 실패도 더 이상 실패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 자신에게는 실패와 성공을 가늠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 바로 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이상하게도 십자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성공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소위 "청부론"이 불거지기 까지 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신앙적으로 건강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요. 이런 주장은 기독교 신앙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명분만 있지, 실제로는 물질만능주의적 시대정신과 결탁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경구인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지 말라"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늘 이런 시대정신의 유혹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은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문제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이 말에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출세했다든지, 망했다든지라는 우리의 판단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은 숨겨진 방식으로 자신의 구원 행위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십자가에서 발견합니다. 이 세상에 지금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소연 하는 예수님보다 더 비참한 지경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가난하든 병들었든 외롭든 상관없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태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로 인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 버리고 맙니다. 교회도 여전히 그것을 놓치고 허둥대며 쓸데 없는 것에 힘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도 새싹 돋듯 일어나는 생명과 구원의 기쁨이 가상칠언 첫 말씀에 들어 있는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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