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架上七言) (3)

조회 수 4131 추천 수 87 2004.06.30 22:52:35




가상칠언(架上七言) (3), 눅 23:43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골고다 언덕에 준비된 십자가 틀은 세 대였습니다. 간혹 그런 장면을 실루엣으로 처리한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자 극 처럼 희뿌연 배경에 검은 색의 십자가와 그 주변의 풍경이 단지 명암으로만 구분된 그림말입니다. "고독의 끝"이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싯구처럼 슬픔의 끝에는 눈물도 없고 몸부림도 없고, 단지 침묵만 흐를 뿐입니다. 신의 아들이 인간에 의한 죽임을 당한 그 사건은 우리의 기를 막히게 만듭니다.

그 당시에 이런 십자가 처형이 흔한 일이 아니었을텐데 동시에 세 명이나 십자가에 달렸다는 사실은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십자가형은 일반 범죄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반국가사범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역시 로마의 체제에 도전한 어떤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행악자"라고 묘사하고 있지만 십자가형이라는 사실만 보더라고 단순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강도나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라기 보다는 유대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체포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날은 바로 유월절이 시작되는 때였기 때문에 로마 총독도 이런 날은 피해서 사형을 집행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이야 유대인들의 요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다른 두 사람 까지 동시에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총독의 입장에서 예수도 이런 반국가사범들과 똑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에게 내린 십자가형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요? 누가복음 기자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에 복음서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누가의 편집의도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게 성서읽기의 바른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로 함께 매달린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보인 반응이 상반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비아냥거립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같이 죽어가는 마당에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의 심성이 매우 거칠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야박한 세상을 살다보니까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죽음에 임박해서도 이렇듯 냉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도 여전히 자기의 감정적인 분노를 노출시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사람의 주장은 그렇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그리스도)는 승리자입니다. 구체적으로 로마의 힘을 분쇄시키고 유대가 온 세계를 명실상부하게 다스릴 수 있는 날을 끌어오는 분이 메시야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너와 우리를 구원해 보아라."고 비아냥거리는 이 사람도 이런 유대의 구원을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정의를 위해서 자기의 인생을 던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 예수는 그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고 마는 무력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려면 무언가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죽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실상 지금도 사람들은 이런 구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원하는 프로레타리아의 해방을 가져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복지를 구현하고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복지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기적 행태에서 벗어나 철저하게 사회 속에 들어가려는 그들의 노력을 부정할 필요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격려를 보내고 박수를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정신과 전혀 다른 인간의 일이 되고 맙니다. 가장 무력한 상태의 징표라 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이 세상을 구원해보라는 요구를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이 사람의 요구대로 로마를 밀어내고 유대가 세계를 다스리게 된다면 유대는 또 다른 로마가 될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해서 힘과 힘의 대결일 뿐이지 이 세상에 참된 구원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인간의 악한 행위만이 아니라 선한 행위까지도 무력하게 만드는, 그래서 전혀 다른 차원의 구원방식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것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이런 구원을 향한 희망에 근거할 때만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자선과 봉사는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다른 한 사람은 먼저 사람의 말을 나무라면서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소연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지 어떤지 잘 모릅니다. 다만 "당신의 나라" 운운하는 대목에서 어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가졌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을 향해서 오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상실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두려움일 뿐입니다. 스올(음부)이라는 곳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낙원 사상은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낙원이 곧 하나님의 나라일까요? 최후의 심판이 끝난 다음에 이루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낙원일까요? 여기에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얽혀 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당장 심판을 받고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는지, 아니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일정한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더구나 낙원이나 천당이나 이런 곳에서도 여전히 지금 우리가 이 지상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연속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즉 그곳에서도 물을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즐거워하는지, 남녀의 성관계가 가능한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장가 가거나 시집 가는 일이 없이, 거룩한 영과 영원한 기쁨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런 궁극적인 문제들은 아직 숨겨져 있는 비밀입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는 그런 생명의 세계에서 맛보게 될 흔적만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기쁨이 현실에서도 자주 경험되고 있다는 게 이에 대한 반증입니다. 나머지는 그분의 약속에 의지해서 믿고 살아갈 뿐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인식과 믿음의 변증법적 관계틀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더불어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상호적으로 연결된다는 말씀입니다. 인식만으로 모든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면, 그렇다고 믿음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게 될 때" 생각해 달라고 요청한 이 사람처럼 예수를 통한 세계 인식을 분명히 해야하며, 아직 신비요 비밀인 낙원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이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낙원에 있게 될 약속이 현실화 될 것입니다.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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