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오자가 나오면 교정해서 사용하십시오.
표지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복된 주일에 귀한 예배가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2023.01.29주보.hwp
2023.01.29 18:32:40
오늘 설교 제목은 '삶의 무게'였습니다.
별로 매력적인 제목은 아닙니다.
삶의 신비, 또는 삶의 지혜라고 했으면 좀더 나아보였을지요.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게 늘 어렵습니다.
아예 제목 없이 설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시인들도 제목 정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화가들도 마찬가지겠고요.
제목 정하기도 설교 행위에 속한다고 보고
설교 내용을 압축할 수 있는 제목을 찾아봐야겠지요.
'삶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이자 '실존의 무게'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무게를 피하는 길을 찾습니다.
생명과 우리의 실존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외면하고
믿음 만능주의에 떨어지거나 가벼운 행동주의에 떨어집니다.
'삶의 무게'라는 제목에는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라는 당위와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불가능성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를 사랑으로 바꿔도 됩니다.
사랑이라는 당위와 그럴 능력이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힘들어합니다.
그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에
오늘 본문에서 미가가 당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했듯이
멋진 종교 의식 안으로 도피합니다. 예배가 도피처가 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가벼운 위안을 얻을 수 있으나
영혼의 참된 만족은 얻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는 어떤 확실한 대답을 제시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곤란한 실존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을 향해서 구도적으로 나아간다는 결론도
손에 잘 잡히지 않겠지요.
어쨌든지 설교자의 운명은 시지푸스의 신화와 비슷합니다.
시지푸스는 무거운 바위를 끌고 산위로 올라가다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끌어올리고,
그런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설교자만이 그리스도인 모두가 그렇겠지요.
삶의 무게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가 감당한 무게만큼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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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은 '삶의 무게'였습니다.
별로 매력적인 제목은 아닙니다.
삶의 신비, 또는 삶의 지혜라고 했으면 좀더 나아보였을지요.
설교 제목을 정하는 게 늘 어렵습니다.
아예 제목 없이 설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시인들도 제목 정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화가들도 마찬가지겠고요.
제목 정하기도 설교 행위에 속한다고 보고
설교 내용을 압축할 수 있는 제목을 찾아봐야겠지요.
'삶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이자 '실존의 무게'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무게를 피하는 길을 찾습니다.
생명과 우리의 실존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외면하고
믿음 만능주의에 떨어지거나 가벼운 행동주의에 떨어집니다.
'삶의 무게'라는 제목에는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라는 당위와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불가능성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담겨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를 사랑으로 바꿔도 됩니다.
사랑이라는 당위와 그럴 능력이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힘들어합니다.
그 힘든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에
오늘 본문에서 미가가 당시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했듯이
멋진 종교 의식 안으로 도피합니다. 예배가 도피처가 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가벼운 위안을 얻을 수 있으나
영혼의 참된 만족은 얻지 못합니다.
오늘 설교는 어떤 확실한 대답을 제시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곤란한 실존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을 향해서 구도적으로 나아간다는 결론도
손에 잘 잡히지 않겠지요.
어쨌든지 설교자의 운명은 시지푸스의 신화와 비슷합니다.
시지푸스는 무거운 바위를 끌고 산위로 올라가다가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다시 끌어올리고,
그런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설교자만이 그리스도인 모두가 그렇겠지요.
삶의 무게가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가 감당한 무게만큼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