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21강(080605) 받아쓰기 - 기독교의 윤리적 지평

안녕하세요? 6월 5일이군요. 오늘 포함해서 네 번 강의가 남았습니다. 주일까지 합하면 여덟 번이군요. 빨리 지나갔습니다. 우리 한 달만 인내심을 갖고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우리가 같이 선택한 책도 끝나가는군요. 오늘 10장입니다. 기독교의 윤리적 지평입니다. 그냥 기독교의 윤리, 기독교 신앙과 윤리하면 되지 왜 지평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하고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 학자들, 인문학자들은 말을 쉬운거를 어렵게 만드는 못된 습관이 있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지평이라는 말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식하지는 않는데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나왔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평이라고 하는 말은요. 영어나 독어로 같습니다. 저는 독일어도 쓰겠습니다. 조금더 독일어가 익숙해서요. 호리존트. 차원이라고 하는 말이죠.

오늘은 캠코더 켰습니다. 여기 보니까 녹화중이라고 되어 있네요. 지난 주일저녁에는 뭐 좀, 주일이니까 하루 종일 교회 예배드리고 마음도 거기 뺐겼구요. 촛불 그런 것 때문에 어수선했어요. 그래도 직전까지는 생각을 했는데 놓쳤어요.

호리존트라고 하는 이 단어를 제가 무의식적으로 쓴 것 같지만 네? 그렇지만 않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해야 될 말의 전반하고 연관되는 건데요. 호리존트는 어느 지평이거든요. 차원입니다. 요거를 우리 일상적인 말로 바꾸기는 쉽지 않는데요. 세계, 어떤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음악에도 세계가 있고 미술, 그림에도 세계가 있구요. 영화에도 세계가 있고 시에도 세계가 있고 다 세계가 있습니다. 바둑에도 세계가 있는 것 아시죠? 조폭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을 겁니다. 어떤 것이 있는거죠. 세계 말고 다른 단어는 뭐 있을까요? 그런게 있는게 있는데 이거는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태어나서 움직입니다. 왜 제가 이 단어를 썼느냐 하면 기독교 윤리라고 하는 것은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움직이는 어떤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윤리 도덕 이런 것들은 다 비슷해서 하지마라 하라 이러한 규범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냐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무론 그런 입장의 윤리학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규범윤리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요. 예. 이것을 한두 마디로 딱 끊어서 말하기는 힘든데 그래도 어쨌든 규범윤리라고 말하는 거는 인간의 행동을 규칙, 규범에 맞게 끌어가면 된다고 하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현재, 현재윤리에서 과거 윤리라고 하더라도 과거 학문이라고 하더라도요. 이런 윤리학이 언제 드러났느냐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상당히 오래되었고 조금 구체적이 최근 모르겠습니다만 헬라시대에서도 그런 윤리문제가 있었으니까요. 조금 복잡하기는 한데 어쨌듯 규범윤리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있다고 하더라도 저의 입장은 윤리가 고정되어 있는 어떤 원칙 principle 규칙 이런 것들이 아니라 어떤 세계라고 하는겁니다. 그래서 호리존트라고 붙인거죠. 다 기독교 신앙하고 맞물려 돌아가는 건데요. 신앙은 접어놓고 윤리, 기독교 윤리라고 볼때도 정말 윤리적인 사람은 규칙에 딱딱 맞춰서 컴퓨터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그걸 기본윤리라고 다르게 이야기한다면 상황윤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상황, 규범은 주로 텍스트에 중심을 둔다면 text, 어떤 원칙, 텍스트가 있죠. 이거는 텍스트와 대조되는 것으로 context라고 애기 하는데요. 상황에서 바람직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삶의 자세를 상황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윤리적 세계라고 하는 것은 규범윤리와 상황윤리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구요. 오히려 더 성령론적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훨씬 더 역동적인 방향을 이야기합니다. 성령론적인 윤리요. 신학자 흉내내느라고 아무거나 막 갖다가 부치는 것 같죠. 말들을 막 붙여갖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혹시 강의를 드는 사람들 중에 신학생들이 있다면 빨리 용어들을 잘 익혀 갖고 이해해 갖고 용어도 다 세계가 있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 칭의 종말 다 세계가 있구요. 다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딱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건 호리존트예요. 지평이예요. 계속 움직입니다. 그거는 아마 제가 사실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들이라고 하나다면 열린 마음으로 그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런것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이 세계가 얼마나 변화가 많구요. 그리고 새롭고 신비로운지 우리가 어떤 원칙이런 걸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 이거는 뭐 공부를 많이 해서 안해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거는 우리가 알수 있는 문제이거든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조금더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사실은 삶에 다 들어 있어어요. 고거  안으로 한 발 한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학위를 딴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러한 세계를 좀 맛보는 건데 그런 것을 안하고도 그거를 알 수 있습니다. 신학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니까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는 가 하는 것들을 계시다 종말이다. 전문적인 용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거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걸 느끼게 됩니다. 다만 그냥 어떤 답답한 신앙, 축자 영감설에 빠진다거나 교리문답을 달달 외우는 것으로 만족한다거나 막혀져 있는거죠. 그런 상태에 있으면 그건 열리지가 않습니다. 성령론적 윤리, 이렇게 애기해서 신학생들에게 제가 한마디 하려고 한거죠. 이런 것들을 조합함으로서 어떤 신앙의 세계를 더 넓혀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신학이라고 하는겁니다.

그러니까 이 윤리라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뭐냐? 그거죠. 우리 생명을 이끌어가는 성령과 교제함으로서, 성령의 말걸음에 대해서 우리가 마땅한 대답을 할 줄 아는 그런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이 그 생명과 진리의 영인 성령 쪽으로 나가는 그러한 능력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는 딱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촛불집회가 많이 있는데요. 거기에 나가야 말아야 되는거냐 딱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자기가 판단해야 합니다. 나가는 사람이 윤리적이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이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겁니다. 그 반대로 나가지 않는 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구요. 거기 나가서 으샤 하는게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겁니다. 그렇다면 좋고 나쁘고 아무것도 없고 자기 멋대로 하라고 하는거냐? 그런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성령론적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강의를 나가지 않고 제목만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아서 미안합니다. 요 제목이 제가 오늘 강의를 하려고 들여다보니까 제목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설명한겁니다. 윤리는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거나 일률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든다거나, 군대 사회처럼 말이죠. 학칙에 맞게 딱딱 맞도록 살게 한다거나 사회의 풍속 잘하게 하는, 삼강오륜들  있잖습니까? 도덕규범들이잖습니까? 그런 것들을 잘 따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오는 삶 앞에서 생명지향적으로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판단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 거다 라는 거를 말씀드리려고 하는거죠. 고거 이 제목에 들어있는 뜻입니다.

윤리적 세계로 우리가 들어간다. 예. 이거는 인제 우리 질문 이렇게 시작해야 되겠죠. 신앙과 윤리관계. 그냥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 강의안을 여러분들 읽어보시면 되니까요. 제가 강의도 나가기는 하겠습니다만 일단 전체적인 것을 머리속에 그려 넣으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이 좋으면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고 말을 하기도 하구요. 어떤 때는 저 사람은 신앙은 좋은데 행동은 개차반이야 그런 말도 합니다. 그런데 이 신앙과 윤리가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전제하는 거죠. 과연 정말 그러냐 하는 것을 질문해야 합니다. 그거는 마땅한 일인데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로 살고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으로 살고 그래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한다면 그건 여러가지 면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은 전제적인 이야기인데 우리는 지금 뭐를 전제한다 안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더 진솔하게 이런 문제들을 이야기해보자고 하는거예요.

우리 신앙이 좋으면 정말 윤리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 되는거에요? 뭐 별로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한국 기독교 신자들이 별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낫지 못하다는 사실을 불편하게 저도 생각하구요. 가능하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좀 그래도 괜찮은 윤리적 기준을 세운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거기는 그렇게 동의를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실제적으로는 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게 우리의 딜렘마예요. 분명히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되는데 다르게 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르게 살 가능성도 별로 많지 않는겁니다.

제가 인류역사를 되돌아본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국가가 비기독교 국가보다 더 윤리적이었다고 결코 우리가 말할 수 없어요. 미국 이런 나라들은 개신교와 가톨릭이 강하구요 기독교 국가가 아니더라도 상당히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죠.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 공화당 대통령이 되고 부시이후로 미국의 보수주의, 온건한 복음주의, 보수주의 이런 쪽의 기독교가 중추적인 큰 힘도 발휘하고 그랬습니다. 미국이 윤리적인 국가냐? 이거 자신없죠. 쇠고기 파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여튼 자기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겁니다. 우리는 무조건 그런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죠. 우리보다 약한 나라 인도라든지 방글라데시라든지 베트남에서 온 외국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대하는 태도를 본다면 미국의 부도덕한 비윤리적인 자기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들을 우리가 손가락질할 만한 입장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미국의 잘못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거죠. 어쨌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과 기독교 윤리는 상당히 연관이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별로 그렇게 나타나지 못하다고 하는 이 딜렘마 우리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이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네. 우선 이 강의안을 조금 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제 우리가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관적 판단이거든요. 어떤 것이 더, 어떤 행위가 더 가치가 있는거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가치에 대한 판단이 없다면 윤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윤리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연속에 던져진 존재들로 자연에 충실하게 그렇게 살아갑니다. 배고프면 무조건 잡아 먹어야 합니다. 무조건요. 사자가 옆에 있는 노루나 토끼를 잡아먹어야되요. 노루가 지금 임신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자연의 요구에 충실한 겁니다. 반면 그들은 배가 부르면 옆에 토끼가 지나가더라도 잡아먹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자연의 메커니즘 속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죠. 그러나 인간만 좀 달라요. 자기 행위에 대한 가치론 적인 판단을 하는데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을 하는데 판단을 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 연관되기 때문이죠. 만약에 혼자 있다면, 무인도에 떨어져 있거나 명상만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면 사막의 성자들처럼 말이죠. 그들에게는 윤리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 관계쪽에서 어떤 행위가 가치가 있느냐 그런 것은 인간만이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윤리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제가 강의안에서말한 것처럼 말이죠. 윤리는 결국 인간관계다.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떤 행위의 가치관적 판단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제 그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이게 어려운 것이예요. 이게 현대 사회는 옛날에 비해서 복잡하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판단도 또 달라지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 아직 윤리문제가 그러니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 말씀이죠. 예. 인제 제가 복잡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게 어려운 문제라고 했는데. 가치론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데 우리가 윤리의 문제를 몇 가지 규범을 던져주고 따라라 군대처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냥 우리가요. 시대가 어떤 요구하는 기준들을 따라서 행동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요구 이러한 것들이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요. 사람 개인 개인 사이에서도 다르고 국가와 국가사이에 지역간에 이런 충돌이 일어나서 모두에게 타당한, 모두가 인정할 만한 행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충돌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일반적인 가장 보편적인 윤리라고 한다면 사랑, 평화, 정의 관념적인 그런 것들인데요. 이런 것들을 기초로 놓고 구체적인 행위들이 나오겠지요. 이런 것들도 계속 서로 충돌하게 되니까.

예를 들자면 제가 이런 예를 들었어요. 1960년대의 베트남전에서 참전한 한국국인들의 용감무쌍한 활약상이 있잖습니까? 미국의 요구를 받은 우리 국군은 그 당시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하는 생각으로 갔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끔직한 사건들이었거든요. 같은 사건을 놓고 서로가 총돌하고 있습니다. 그게 어떤 것이 윤리적이냐 하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요. 기독교 윤리를 이야기할 때 몇가지 기준들을 한번 세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가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가지 기준들요.

첫번째는 존재와 행위입니다. 이런 구도에서 윤리의 문제를 좀 생각해 봐야 되는거죠. 존재라고 하는 말을 제가 여러번 사용했는데요. 그래도 아직까지 확 잡히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좀 더 많이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행위 이거는 아주 정확하죠 우리들에게 겉으로 드러난 행위들 행위 그 자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 그런것들이죠. 조금 더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존재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와 있는대로 나무 이구요. 그리고 행위는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래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애기했구요. 이게 좋은 나무인지는 아닌지는 열매를 봐야 한다 그런 말씀이었어요. 이 두개가 다른거죠. 분명히요. 다르긴 한데 깊숙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해서요 우리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존재가 새로와져야 거기서 나와는 열매가 다르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건 너무 진부한 이야기죠.

잘 아는 이야기인데 여기 제 강의안에 나오는 한 예수님의 비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윤리적인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종교적이구요. 종교적이라는 것은 경건한 종교성이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어요. 신앙도 좋고 행동도 아주 좋고. 이 행동에는 종교적인 행동, 사회적인 행동, 고대 당시에야 이 사람들은 종교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을 구분되지 않고 하나거든요. 그 당시에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물론 복음서는 그걸 조금 과장하기는 했습니다마는 그러나 아주 기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이 탐탁하지 보였을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요. 누가복음 18:11, 12절에 보면 그렇게 기도하는거죠. 하나님 나는 다름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한 사람들과 같지 앟고 세리와도 같지 않는 것을 감사한다. 십일조를 드리고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경건한 그러한 사람들이었구요. 반대로 세리는 지난 주에 설교 내용하고 비슷한 것 같군요. 의인과 죄인과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전혀 그렇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설교의 주제와도 연관되는 군요. 이 세리들이 오히려 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참 어려운 문제예요. 바리새인들이 있구요. 여기 죄인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서 여러가지 기도제목이 내용이 나온 것처럼요. 정말 그럴 듯하게 살았습니다. 이 죄인들은 정말 나쁘게 살았어요. 파렴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애기했을까요? 답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기 때문에 이런 걸로 시간을 끌 필요는 없는데요.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세운 업적에 마음을 두었던 거구요. 이 죄인들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은총에만 기울인거예요. 은총에 의한 의, 혹은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존재와 행위라고 하는 이 제목으로 붙으면 이 바리새인들은 이 행위에 치우친 사람들이고요. 죄인들은 존재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 에리히프롬이 말한 책제목으로 한다면 이 사람들은 소유지향적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들은 존재지향적이었습니다. 이게 겉으로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생활할때도 바리새인들을 인정해줍니다. 교회 잘 나가고요. 헌금 잘 드리구요. 말도 세련되게 하구요. 기도도 열심히 하구요. 새벽기도도 나가구. 여러면에서 모범적인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인정을 하게 되구요. 시원찮은 사람들, 뭐 세속적이거나 하여튼 문제가 있는 이 죄인들에게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 지향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잘 놓쳐요. 이거는 하나님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게 힘들어요. 개차판이고 은총도 의지하지 않고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꼭 그러하다고만 단정하기만 힘들어요.

서울역을 지나보면 노숙자들 보거든요. 대낮부터 술취하고 거기서 자고 요즘은 날씨가 좀 따뜻해져서 잠자리가 좀 나은 것 같습니다. 추울때도 지하도 같은 데 가면 스치로폴이라든지 두꺼운 종이 깔아놓고 자고요. 폐인같은 사람들입니다. 어쩌면요. 그러한 알콜 중독자, 폐인처럼 될 사람들이 은총 지향적일 가능성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교회에 찬송가 성경끼고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드리고 내가 이렇게 변화되어서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구나 하는 것에 대한 감사, 실질적으로 모범적인 행동도 많이 하는 우리같은 기독교인들이 바리새인들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저를 향해서도 하는 이야기예요. 제가 나름대로 이룬것이 있거든요. 좋은 책을 써서, 설교비평해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했다는 것이라든지 그런 것이 남아 있어요. 내가 나타내는 것에 기울어지는 것이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 자기가 이룬 것이 아무것이 없는 상태, 다른 것을 기대하는 거거든요. 그게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네. 제가 강의안 내용과 직접 관계된 거는 말씀드리지 않는데 방향을 말씀드린 거예요. 존재와 행위가 이렇게 연관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존재 지향적인데 여기에서 마땅한 열매가 나와야 하는데 바리새인과 같은 그러한 열매는 아니고요. 그 열매를 판단하기 힘든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누가 판단하겠어요. 그러니까 그건 우리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세뇌가 가능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고상하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서도 중심에는 교만한 자기의가 자리하고 있거든요. 그게 가능합니다. 그걸 우리는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해요. 내가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참 겸손하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  죄인과 같이 주님앞에서는 오직 은총만 기대한다고 말을 하는데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믿고 있는데 무의식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는게 작동하게 될겁니다. 그게 어려운 거예요. 저는 여기서 이거다 저거다 딱딱 끊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를 우리가 끊임없이 빌어야 되고 우리자신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을 신학적 근거에 비춰 보는 것 reflection해 보는 것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없는 순간에 순식간에 우리는 바리새인적인 소유의식에 빠지게 될겁니다. 이런 것은 인격이 좋다고 그래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 단락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으면 좋겠어요.

우리 존재가 변하는 것은 믿음이거든요. 나무가 되는 거니까요. 예수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존재가 새로와 진다고 하는거죠. 그건 믿음인데요. 믿음과 행위의 문제, 믿음은 행위를 규정하며 행위는 믿음을 평가하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구요. 조금 더 부연 설명하자면 존재론적으로는 믿음이 우선하고 인식론적으로는 행위가 앞선다고 할 수 있어요. 어떤것이 앞선다 뒤선다 그 문제가 아니라 서로 결탁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되는거예요.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올바르게 믿으면 당연히 그 근거에서 그 뿌리에서 그 나무에서 열매가 맺기 마련입니다. 그 열매를 자꾸만 여러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양만 자꾸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 근거,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나올 수 있는 바탕이 있는 존재론적 근거이구요. 행위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존재, 우리의 나무됨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거죠. 존재와 인식, 열매 관계였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두 차원, 존재와 인식, 이게 극단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한쪽에는 오직 믿음만하구요. 의지를 비난합니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오직 실천만 강조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에서 일종의 영적 에너지 부족증이 나타납니다. 민주화나 노동현장만 뛰어다니다가 사회봉사에만 치중하다가 그런 일이 조금 해결되면, 민중신학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무엇을 해야 될지 방향감각을 하지 못하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기독교가 사회봉사, 민주화 이런 것을 가열차게 펼쳐 나가야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어떤 시민단체, 경신련이나 흥사단, 와이엠시에이 같은 단체, 요즈음은 NGO라고 하죠. 이런 것하고는 구별되는 거거든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인 믿음, 그리고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우리의 행위, 나무와 열매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면 그게 눈에 보이게 딱 떨어지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윤리를 지평이라고 말씀드리는거예요. 어떤게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는 건지 어떻게 거기서 나오는 참된 열매인지 그거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힘든, 자기 자신도 판단하기 힘든, 그거는 성령만이 판단할 그런 문제입니다. 다만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늘 주님의 용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 관계에 깊이 들어가는지, 그거는 아시겠어요? 그게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아마 신자들이 별로 생각하지 않을걸요. 그냥 내가 기도시간에 맞추어서 기도 잘하고 큐티 잘하고 몇가지 그런 것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려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잠간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하나님 경험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느냐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되어요. 그런 것이 분명하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조금더 다른 말로 그러한 부분이 심화되고 폭넓어 지는 만큼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게 열매가 나오게 될겁니다. 아 이거는 더이상 설명하기 힘든데요. 아 그게 더 설명해야될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불립문자라고 말로다 더 표현이 안됩니다. 더 미묘한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표현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 여러분들이 여태까지 제 강의를 귀담아 들었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전달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차원 어떤 진리와 인식, 행위를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기독교 윤리가 그렇게 몇가지 규범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령론적 차원에서 역동적이고 변화되고 하는 그러한 세계의 문제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가 말씀을 나눈건데요. 앞에서는 그것을 존재와 행위로 이야기했구요. 이번에는 개인과 사회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미국의 유명한 윤리학자가 쓴 고전이 된책,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인데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인격적일 수가 있는데요. 사회 구조가운데서는 부도덕하게 행동하는때가 많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죄, 변화 도덕 윤리적인 문제는 이렇게 낭만적으로 개인이 변화되면 사회가 변화되겠지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그러한 관점이죠. 이 사람의 신학 성향을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학자인데요. 현실주의적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주의라고 하구요. 그러니까 이 죄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는거죠. 이런 것들은 뭐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요. 하나 하나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사람, 신앙적인 사람 만든다고 해서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옥한음목사님이 사랑의 교회를 중심으로해서 30년 동안 제자 훈련을 했습니다만 결과가 뭘까요? 강남지역이 변화되었나요? 사랑의 교회를 통해서 한국사회회가 변화되었을까요?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 사랑의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외에의 다른 교회 사람들이나 혹은 사회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이걸 어떻게 계량기에 달아매시겠습니까? 그러나 전반적으로 본다면 전혀 차이가 없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 옥한음목사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문제는 개인에 대한 것은 강조를 하셨는데 사회적 관점이 아직 약한거죠. 그래도 복음 주의권에 있는 원로급 목사님들중에서는 그래도 사회적인 문제를 어느정도 인식할 수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다 개인윤리로 떨어지는거예요. 그래야 되겠군요. 개인과 사회의 문제는 개인윤리와 사회운리의 차원문제입니다. 하나 하나의 개인의 변화를 더불어서 사회 구조를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인간, 개인과 사회는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거는 교회문제에도 다 마찬가지요. 한국교회 개신교에 많은 문제에 있다고 하면서도 한사람 한사람이 각성하고 새로운 사명감으로 목회를 열심히 잘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마 그것은 굉장히 나이브한 생각입니다. 한국교회가 구조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한 개인 목사가 그것을 뚫고 나가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턱에 거려 있는데 언제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바로 들어가서 다른 것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런 설교 하시겠어요? 그거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한국 교회가 교회구조만 아니라 조금 더 나아가서 이 사회 전체 구조를 바꾸어 나가는 그러한 노력이 있어야 되는데 많이 그런 점에서 부족합니다.

인간의 윤리를 말할 때 그런 점에서 저는 그런 개인적인, 개인의 문제도 중요한데요.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시대적 정신인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메모를 강의 준비하다가 이명박이라고 적어두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정신이 뭐냐 하는거죠. 그 분이 살아왔던 시대가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 군사독재로 다스리던 그때에 입신양명, 고속출세, 그렇게 산 사람이죠. 입지전적 그러한 출세를 한 분입니다. 그분이 살아왔던 삶, 역사가 그러해서 지금도 그러한 것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게 직접 연관된 것은 아닌데 잠깐 생각이 나 메모를 해둔것이 있습니다.

시대차제가 부도덕하면 개인도 역시 부도덕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이러한 문제예요. 이런 문제가 한 두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시대가 왜 중요하냐 하는 것은 몇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시대예요. 로마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전쟁에서 가져온 노획물로 변하게 살았거든요. 그렇다면 그 시대에 로마시민으로 시민권을 갖고 로마시에 살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인격적일지는 모르지만 시대적으로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복아메리카를 무력으로 접수한 청교도들이야기예요. 아메리카를 가서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땅을 빼앗은 거죠.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다가 노예를 삼고요. 그런 거를 근거로 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정도로 힘을 키웠습니다. 어쨌든 북아메리카를 지배한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잘 믿고 청교도로서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시대자체가 악한데 한두 사람을 윤리적이라고 애기 할 수 있을까요? 큰 틀에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세 번째는 우리나라의 분단체제입니다. 지금 남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의 상당한 것들이 남북분단 때문에 그렇게 되는겁니다.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구요. 서울대교수였다가 지금은 은퇴하신 백낙천 교수가 분단체제 개념을 통해서 우리현실을 분석했는데요. 지금은 분단 이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정의를 하더군요. 어쨌든 우리에게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의 투쟁들, 레드 콤플렉스, 그리고 경제적으로 상당히 좋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또 세계에서 가장 앞선 그러한 대학 진학률, 이런 것들을 보이는 것에도 불구하고 개인 개인들은 상당히 계몽된 그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나라 만큼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텐데 그게 아마 분단체제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분단체제 안에서 우리 시대, 오늘 말이죠. 앞으로 2,3백년후에 후손들이 이 시대를 돌아본다면 이 시대안에 살아온 우리들에게서 도덕성을 찾아보기 힘들거예요. 북에서는 숙청을 했고 우리 남쪽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념적인 문제로 죽이고 쫓고 내쫓아내고 했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부도덕한 행위들이거든요. 우리가 직접 그런데 소시민들이 나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시대안에 같이 더불어 살기 때문에 또 그러한 방식으로 물적 토대도 세워지기도 하고 등등 어쨌든 직간접적으로 우리가 다 동범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안에는 쓰지 않았습니다만 네번째로 오늘의 이 신자유주의시대 이것도 총체적인 부도덕
성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소유와 소비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들의 삶을 확인해주는 가장 큰 어쩌면 아주 유일한 근거죠.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삽니다. 모든 삶들을 그쪽으로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후손들은, 이런 시대정신과는 전혀 다르게 살게될 우리 후손들은 아마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아마 여기서 우리의 윤리적인 태도들도 사실 전체 시대정신의 부패로 인해서 부도덕하다고 하는 말을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몇가지 문제들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기독교 윤리가 초등학생들에게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떻게 하라고 하는 몇 가지 규칙을 가르쳐 주는 모범생을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윤리적인 가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작업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존재와 행위의 문제도 그렇고 개인과 사회 이런 문제에서도 그렇구요. 이게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한 두가지 규범들을 딱 내세워서 이렇게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도덕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은 윤리학이 아니라 훈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룬 훈계도 필요하죠. 그러나 훈계만 계속받던 사람들은 윤리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윤리학이 없어요. 사실은요. 있어봐야 규범윤리만 차고 넘치는거죠. 뭐해 뭐 하지마. 계속 그 방식에 신자들이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뭐 할려고 하다가도 해야돼? 말아야돼? 아주 적나라한 거로는 술담배 이거 해야돼? 말아야돼? 늘 이러한 문제에 머물러 있는 있는 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훈계듣고 조금 더 나쁜 방식으로는 잔소리 듣는 것 이거를 윤리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비평에 여러가지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어떤 관점들을 제시하면서 도덕적 설교의 문제도 짚은 겁니다. 이게 거의 잔소리였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신자들은 그게 설교인줄 아는거죠. 장경동 목사님의 말을 빌리면 이혼한 여자, 그런 문제를 다루면서 이혼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했다. 이혼해야 될 경우에는 이혼해야 됩니다. 그러한 것들을 윽박지르듯이 뭐하지마. 뭐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계속 여러분 어린 자녀들도 잔소리 듣고 자라면 나중에 정서적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알죠. 한국 교회 신자들이 그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들었으니까 다른 사람볼때도 또 그렇게 보는거예요. 저사람 왜 저저래 이래 저래 그러한 쪽으로만 보는거죠. 네 그중에서도 좋은 일들이 있으니 그거는 우리가 잘 받아서 챙기도록 하고 그러나 그것이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는 어떤 구체적은 그러한 사안들을 해야 되냐 말아야 되나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직면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윤리라고 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차원에서 상당히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구나. 그런 것들을 잘 습득을 해서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런 관점으로 접근을 할 수 있는거죠. 아 존재와 행위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안에서 이렇게 연결되는구나하는 것을, 그런 것을 좀 습득하게 되면 겉으로 들어난 아주 멋진 행동만 보면서 아 무조건 저거 잘했다고 말하지 않구요.
그렇게 어떤 판단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인제 제가 도덕주의적인 설교 이거 완전히 잔소리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물론 조금 고상하게 말해서 잔소리는 아닐 수도 있어요. 제가 말하다 보니 좀 거칠게 이야기했습니다. 거의 규범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그랬어요.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제 주장에 대해서 나오는 반론은 뭐냐 하면 성서에 그런 이야기 있지 아니하냐 그런 겁니다. 일종의 성서 실증주의 윤리인거예요. 성서에 나와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가르침으로 받아서 전하는 것이죠. 성서 실증주의예요. 물론 성서안에 그런 윤리적인 가르침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이런 것들도 있구요. 산상수훈에 보면 고귀한 가르침들도 있구요. 또 로마서에서도 뒷부분에 가게 되면, 앞부분에 교리가 있고 뒷부분에 윤리 그러한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서에도 있구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때마다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러한 성서에 나와 있는 진술들이 바로 그것을 말하려고 한 건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먼저 해야 됩니다. 성서해석인거예요.

예를 들자면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는 성서의 아홉 가지 열매, 평강, 온유, 사랑 이런 저런것 있잖습니까? 그런것을 바울에 그것을 거기서 열거한 이유는, 그것을 말하기 전에 그것은 기독교적인 덕이 아니라 그 당시 로마 헬라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그러한 덕이었어요. 그걸 그냥 도입한 것뿐이었습니다. 성서에는 그런 것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기독교 윤리로 무조건 받아들여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거는 나쁜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것은 좋은것이지만 좋다고 그래서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게 좀 역설적인 이야기같은데요. 보통 교회가서 나쁜 것이 있느냐?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교회가면 좋은 것 하라고 가르치지 교회가면 좋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게 좋은 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닌거예요.

기독교는 시민종교, 건전한 시민양성, 윤리적인 인간이죠. 시민종교는 아닙니다. 그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그러한 건전한 시민을 양육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정신에 거슬리는 거죠. 십자가가 바로 그거죠. 시대의 말썽꾸러기가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늘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신자유주의 이런 것들이 영어 교육 몰입에다 시작해서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밤늦은 시간까지 수업을 하고 학원 다니고 하는 이런 총체적인 삶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의 모습을 파괴하는 거잖아요. 이런 것에 우리가 어떻게 항거할 수 있는가 하는거죠. 강남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다 반성해 됩니다. 이런 것에서요. 자녀들이 공부 열심히 학원다니고 해서 서울대학교 등등해서 들어가게 되면 축하 예배드리고 하는 게 이런 방식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한다면 그 당시 스캔달이었다고 하는 예수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시민종교가 되어버리고 만거죠. 그러니까 성서에 나와 있다고 그래서 그것을 무조건 가르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왜 그런 것이 그 당시에 가치있는 삶의 근거였느냐는 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거예요. 그래야 오늘 이시에는 어떤 삶이 가치가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거죠. 2천년 3천년전에 있었던 성서 윤리를 그대로 우리들에게 공식 맞추듯이 그대로 가져다가 두드려 맞춘다? 이건 윤리가 아니나. 성서가 우리의 윤리적 전범은 될 수 없어요. 이에 요단락에서 보는 소제목입니다. 왜 그런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아 아까 하다가 놓친 이야기가 있는데. 깜박하고 지나갔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기때문에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남았어요. 할 이야기들을 조금 정리해야 되겠습니다. 성서에 있는 것을 다 대입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거죠. 그러니까 다시 앞에서 이야기한 거가 중요해서 연계시켜서 말씀드린다면 성서에 있는 그 윤리 도덕적인 규범들을 왜 성서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는가를 아는거예요. 그걸 배우는 거예요.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오늘 시대적 정신에서, 혹은 우리의 세계 이해안에서 우리가 결정 해야되는 겁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오늘 윤리문제는 두주에 걸쳐서 하니까 다음주에 이야기하겠습니다.성, Sexuality 이런 문제도요. 동성애 그때 한번 한 이야기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대 2천년전에는 죄, 어떤 결과들로 이야기했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에 들어가는게 윤리학이예요. 오늘 우리는 이 Sexuality,  이 Homosex에 대한 문제는 우리의 생명 이해, 오늘의 삶의 이해로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죠. 그런 것이 없으니까 성서에 있는 그것이 죄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순수해서 좋기는 한데 순수하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지혜로와야 하죠. 옳은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되죠.

성서에 있는 것들이 실질적으로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돼지고기 먹지 말아야 하고요. 그리고 등등 여러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들하고는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많고 물론 맞는 이야기도 많고요. 그러나 우리는 성서안에 있는 것들이 정말 그 당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중요한 규범들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되는거죠. 네. 참 이런 것들이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중요하기도 하고 잘못하면 다 놓쳐요. 이 맥락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시 오늘 제목에 나와 있는대로 지평, 꼭 외워 두세요. 세계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 들은 것중에 이 개념만 여러분들이 이해해서도 한 시간 투자한 것 아깝지 않습니다. 성서가 그런 윤리적 규범들을 말하게 된 데는 어떤 세계가 있는거예요. 그 규범자체가 중요ㄱ한 것이 아닙니다. 그걸 통해서 생명을 이해하는거예요. 생명을 지키는 어떤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놀라와요. 정말 그 당시 그 방식으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이고 그러한 계기들이 되었습니다. 네. 오늘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을 심화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느냐? 오늘 우리들의 생각에도 문제죠. 오해하지 마세요. 성서의 윤리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점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를 규정하는 유일한 전범이 성서가,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윤리적 규범은 없어요. 규범에 이르는 길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해석하는 능력이죠. 현재 처해 있는 정황에 대한 해석,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그 길을 발견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다라고 하셨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그 세계를 들어가는거예요. 그리고 그 길을 알게되고 그리고 그 길을 알면 오늘 우리가 당면해 있는 많은 삶의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 풀어간다는 것은 해석하는 거거든요. 그런 능력이 주어지는 거죠.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냥 들은 풍월로 이건 좋아 나빠 그렇게 이야기하십니까?

며칠전에 김동현판사가, 우리 칼럼니스트 말예요. 만인은 만인에게 책임이 있다. 비슷한 글을 올렸는데요. 깊이 생각하는 젊은 판사, 글이 좋습니다. 너무 생각을 많이해서 문제죠. 너무 생각을 많이 하면 결혼도 잘 못하는 것 같애요. 좋은 젊은 사람인데 여태까지 결혼도 안하고 독신으로 판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많이하고. 비슷한 거거든요. 윤리. 살해? 상해치사인가요? 어떤 사람 범인에 대한 위 모두의 책임에 대한 부분들, 어두움이예요. 그건 밝혀지지 않았어요. 그런 것들도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하지 않는가? 이야기였습니다. 좋다고 생각했구요. 성서인 텍스트와 오늘날의 컨텍스트사이의 길을 내서 우리가 연관, 소통하게 하고 연결해서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천박하게 여기지 않고 독단적이지 않고 그러면서 생명이 풍요롭게 일어날 수 있게 그러한 쪽으로 끌어갈 수 있느냐 하는것이죠.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어요.

이러한 점에서 오늘 마지막 패러그래프입니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여러분,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제가 밝힌 겁니다. 윤리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은 아니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다만 윤리적으로 산다고 하는 자체가 어려운 거예요. 이런 것을 고민하지 않으면 기독교적인 신비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다 뻔 하게 손에 대답을 다 갖고 있다면 그건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독교 윤리라고 해서 성서대로만 뜨거운 신앙체험으로만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나라예요.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할 삶, 삶은 뭐예요? 생명의 문제예요.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독교 윤리의 근거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예요. 성서는 아니야. 하나님 나라는 예예요. 성서는 하나님나라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키고 있어요. 손가락으로 이렇게 가르키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서는 이미 천년전에 쓰여진 문서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거에요. 종말론적이다. 이 말은 곧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와 판단은 이 종말에 비추어 볼때 그 성격이 어떤습니까? 이거 알면 신학자예요. 뭐예요. 잠정적이라는 거예요. 우리 윤리의 잠정성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늘 이안에 머물러 있고. 윤리에 냉소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의 것을 찾되 결정된 것은 없다. 우리의 행위에서. 종말에 비추어서, 종말에 일어나게 될 하나님 나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에 근거해서 오늘 이 현실의 삶에 우리가 참여한다. 그 종말에서 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이 오늘 우리의 삶에 병용하도록 우리가 우리 영성을 개발한다. 그렇게 말하면 되겠습니다. 좀 어려운 문제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는 이런 것들을 근거해서 실질적인 윤리문제. 성윤리와 소유, 청빈 이런 문제들을 좀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일 저녁에 또 뵙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