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청강 소감
(부제: 하늘이 열리다)

제목이 너무 거창합니다. 그래서 이 글이 용두사미가 되지 않을까 살짝 염려가 되면서도 일단 마음이 가는대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영화를 보면 한 줄의 감상문이라도 남겨야 뭔가 매듭을 온전히 지었다는 습관 탓이기도 합니다만 실은 저의 삶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6개월의 강의를 그냥 무덤덤하게 넘겨버리기는 너무도 아쉽고 또 뭔가 똑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정리해 두지 않으면 영원히 잊혀 버릴 수밖에 없는 지금만의 느낌을 살려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강의가 끝난 후 3주 동안 계속 뒤통수를 근질거리게 하였습니다. 게으름으로 뒤척이다 어쨌든 글이 되던 안 되던 정리, 마무리를 하자는 생각으로 자판을 타닥타닥 거려 봅니다.

우연이었던 것 같은 제 삶의 순간 순간이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빈틈없는 섭리였습니다. 아마 작년 말 주일 설교 준비를 하면서 우연히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들어간 다비아 사이트에서 가슴이 떨리는 그러나 잘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비아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서서히 진리의 세계로 발돋움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저의 인생을 향한 분명한 섭리라고 믿습니다. 설교와 성서 묵상, 쪽지 글과 댓글들의 서슬 퍼런 그러면서도 진솔한 신앙의 고민들을 접하면서 다비아 모임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호기심과 아울러 이 모임을 통한 진리의 탐구여행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고픈 간절한 열망이 속에서 타올랐습니다. 그 열망은 바로 동영상 강좌, “기독교가 뭐꼬?”, “포항아카데미 갈라디아서 강해”의 강의 수강으로 이어졌고 부지불식간 저의 2008년 새해는 직장생활, 강좌수강, 받아쓰기, 성경공부, 주일설교 및 예배 이 네 가지가 수레바퀴살이 되어 정신없이 굴러가게 되었습니다. 일과후 탁구, 주말의 한 두시간의 테니스가 그 틈바구니로 비집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삶의 대부분은 한 주 두세번의 강의를 듣고 소화하고 또 강의 듣고 틈틈이 다비아에 산더미처럼 쌓인 주옥같은 글들을 읽으면서 지냈습니다.

배경설명이 너무 길었지요. 이렇게 너스레가 긴 이유는 본론으로 뛰어들기가 너무 겁이 나서입니다. 쫄았다고나 할까요. 겸손한 과객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헛소리를 늘어놓아 물 흐리는 잡객들에게는 과감히 양날 퍼런 진검으로 찌르고 베는 다비아의 고수들앞에 허튼 소리 늘어놓다가 쫑나지 않을까 하는 저어함이 본론을 향해가는 걸음 지척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무식자의 근거 없는 용감함과 바닥을 친 절박감이 용기가 되어 성큼 진일보합니다.

부제로 쓴 ‘하늘 문이 열리다’에서 받은 감격이 아직까지 가슴을 설레게 하니 아무래도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느 때처럼 절기와는 상관없이 해마다 복음서중 하나씩 정하여 강해식으로 진행해 나가던 패턴에 맞추어서 말씀을 준비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때 읽은 마태복음 3장 13-17절 설교 말씀은 생명의 문을 여신 예수님을 비둘기의 메타포로 표현하려 했던 마태공동체의 신앙고백에 저의 눈을 새롭게 뜨게 되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 노래할 이유가 있는 것은 예수님이 생명이 나에게 왔고 그 생명은 곧 기쁨, 화평,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란 것이 화악 다가 왔습니다. 그러자 ‘안개 낀 숲속 길에 햇살이 비쳐 안개가 걷히듯 저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문이 활짝 열릴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시작하시면서 강사 목사님(이하 목사님)은 이 공부의 방향을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사유를 하도록 돕는데 중점을 두도록 한다’고 잡으셨습니다. 그런 기본 방향을 염두에 두셔서인지 교재를 따라 강의는 진행하지만 그때 그때 떠오르는 화두를 붙들고 강의를 진행해 나가는 적이 많았습니다. 목요일에는 주강의, 주일저녁에는 질답시간을 통해 더 깊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골격을 갖고 시작했으나 사실 질문도 뭔가를 알아야 하는 것, 질문에 익숙해 지지 않은 환경가운데서 공부해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이런 저런 이유로 곧 주일 저녁 강의는 목사님이 그때 그때 화두를 잡아서 진행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이 바탕이 된 강의라 등장하는 개념들이 낯설어 따라가지 못하고 허덕이고 이를 고려한 정목사님은 거듭하여 같은 이야기를 이런 저런 경로로 풀어서 설명하렸습니다. 테니스 이야기, 바둑의 프로와 아마의 세계 이야기, 레퀴엠과 같은 음악 이야기, 나아가 안도현, 휠덜런과 같은 시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탁구공, 아파트를 스쳐가는 바람, 빗소리, 개구리 소리, 피어나는 새싹등의 시청각 교재들을 다양하게 사용하셔서 잘 안 잡히는 아득한 신학 개념들과 용어들을 아가 걸음마를 하는 강의생들에게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시키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그 덕택에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신학 용어들 뿐만 아니라 에크 하르트와 같은 영성가와 몰트만, 바르트, 판넨베르크와 같은 신학자들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론, 기독론, 성령론의 기본 조직신학의 골격에서 부터 시작하여 생명과 영생, 구원, 부활, 그리고 종말등 전에는 낯설기만 하고 따로 떨어져 교리로만 달달 외워온 기본 개념들이 숨막힐 정도로 거미줄처럼 탄탄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쪽을 잡고 흔들어도 거미집 전체가 출렁이는 것처럼 어느 한 개념을 잡고 들어가도 결국은 전체를 다 알지 못하고서는 무엇이 확실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아득함이 강의를 수강하는 매순간 수시로 다가왔습니다.

성서축자영감설, 예수천당 불신지옥, 죄의식으로 가득찬 영성등으로 가득찬 플라톤의 동굴에서 벗어나와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상이 밝고 환한 생명의 빛으로 충일한 것을 느낌으로는 알겠는데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에서 오는 어색함, 손에 확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아득함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따라오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이를 다 헤아리고 계신 목사님은 강의 중간 수시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학생들을 독려해나가셨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다음에 따르는 것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강의에서 나온 영성의 정의

어머니 한국 교회에 대한 애정

강의 후의 자신의 방향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