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정리되지도 않는 어쭙잖은 글을 읽으시고 애(愛)플을 달아주신 가을소풍님, 목사님, 달팽이님, 클라라님, 까마귀님 그리고 웃겨님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6개월동안 치열하게 받아쓰기 하던 사람이 쓰던 글이 어떨까 궁금함이 많으셨을 텐데 기대하지 마시고 편안히 읽어주세요. 따르는 글을 애플에 대한 감사로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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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강의를 들으면서 또 듣고 나서 저의 삶에서 생긴 하나의 변화는 그저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무미건조한 삶 자체가 마법으로 새롭게 와 닿은 것입니다. 젊은 시절 구원의 은혜와 부르심의 사명 하나에 집착하여 다른 모든 것을 도외시하고 달려왔던 그 시절의 일상은 구원과 소명이란 도그마의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동영상 강의는 그 도구가 도구로 쓰여질 허술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 자체요 전부인 것을 알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일상의 영성이었습니다.

강의에서 배운 사유의 방식을 따라 일상의 영성, 그 마법 세계로 들어가면 당긴 손수건에서  맨 먼저 마술처럼 팡하고 피어나야 할 꽃은 아무래도 일상, 영성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일 것 같습니다. 보고 느끼며 살아가는 나날의 삶이 일상인가요? 이 진부해 보이는 나날이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계란 것으로, 자기 몸을 버리실 정도로 사랑하신 세계며 성령 하나님의 특심한 열심으로 구원 역사를 완성해나가는 그 은폐된 진리의 세계란 것으로 우주의 무게를 갖고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인지하고 포착할 능력이 생겨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제가 강의를 통해 이해한 일상의 영성입니다. 그러나 그 포착이 쉽지 않고 늘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시공간대를 산다고 해도 삶의 무게와 깊이가 천차만별인 것처럼 일상의 영성은 본대로 느낀 대로 깨달은 대로 각기 제 길을 가게 됩니다.

학문에 왕도가 없듯 이 깨달음의 길도 왕도는 없다고 목사님은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딩된 저는 마음속으로 불만이 가득했었습니다. 왜 똑 부러지게 논리적으로 똑부러지게 답을 주시면 좋지 않는가? 잘 나가시다가도 늘 어느 순간에 이르면 혹시라도 자신의 깨달음조차도 학생들앞에 무한정으로 열려진 진리의 길을 막을까 염려하여 살짝 옆으로 비켜서는 목사님의 겸손이 때로는 답답해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학생들은 우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지요. 홍해가 갈라지고 해와 달이 멈춰서지 않았느냐고 닥달하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달을 가르치는 목사님의 손가락은 너무 답답하다고 아예 달을 따달라고 조르는 학생들의 답답함을 묵묵히 지켜 보시며 스승의 길을 가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강의를 통하여 일상적인 삶속에서 깨닫는 영성의 세계로 눈이 뜨여진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열림인지 모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에 지친 샐러리맨의 인생이 깊은 산, 사람없는 들로 가지 않고서도, 아니 가지 않고 이 자리에 서서 매순간, 매일 매주 마다 밀려오는 시간의 중압감을 전신으로 받아치면서 그 속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이 납니다. 생명을 담지하기 위해 현실과 치열한 씨름을 하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는, 나비처럼 날며 벌처럼 쏠 수 있는 프로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고 고난도 만만치 않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리얼리티를 그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으로 그 길을 흥얼거리며 걸어갑니다. 때론 처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완전히 죽은 것 같은 현실 상황에 질식하지만 그런 현실이 오히려 무덤에서 예수님을 살리사 우리의 주요 심판주로 세우신 하나님을 믿는 부활의 믿음으로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눈이 감겨 있을 때는 나 홀로 부르는 솔로인줄 알았는데 그 생명세계에 조금 눈을 뜨다 보니 이미 많은 이들이 다비아산을 오르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산 정상에는.. 아 구름과 같은 허다한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의 지휘자 성령님의 지휘에 맞춰 주님의 오실 그날 함께 부를 헨델의 메시아를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파 반음을 구분 못하고 음정이 불안하다고 자주 지적을 받는 저 분은 누구실까요?

일상의 영성 확보에 대한 저의 구체적인 이해는 무화의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강의를 통해 실제적인 삶에서 자기(자기 중심, 자기 소유, 자기 만족, 자기 연민, 자기 사랑, 자기의, 자기열정)를 한없이 가볍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 생명, 하나님의 무게를 한없이 무겁게 하는 훈련을 부단히 지속해 나갈 때 몸과 테니스의 라켓과 공의 삼위일치, 바둑의 9단, 마에스트로의 음악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믿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으로 진정한 한 인간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으로서의 완벽한 삶을 살다 비참하게 십자가에 무력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은 시공간 3차원 이 역사속에서 살아가는 이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나의 이 숨막힐듯한 삶을 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나의 보스를 내가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아갈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이 세상은 또 다시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소감의 마무리는 테니스를 치고 와서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