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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예레미야 강해』 22장, 2020년일 8월12일 21:00, 대구샘터교회 수요모임, 키워드: 정의와 공의, 백향목, 율법의 본질, 요시야 아들들, 최초공개- 2020년 8월12일 저녁 9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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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예레미야 강해』 22장, 2020년일 8월12일 21:00, 대구샘터교회 수요모임, 키워드: 정의와 공의, 백향목, 율법의 본질, 요시야 아들들, 최초공개- 2020년 8월12일 저녁 9시
성경공부자료이오니 참고하세요!
개역 렘 22: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니라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 오게 되리라마는
5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서해설 렘 22:1-5
이 단락에서는 21:11-12의 진술을 더 자세하게 낱낱이 펼친다. 이스라엘에서 공평과 정의* 는 통치자들이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으로 확정해 놓으신 것이다. 약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이 요구를 무시한 죄에 대해서는 겔22:6-7 참조). 4절의 약속 말씀(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 )에 대해서는 23:5-6과 해설을 보라.
(용어 해설)
정의 : '의*'를 보라. '의'라는 개념이 보통 형식적인 법 규범을 지키는 것을 겨냥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늘 두 인격체 서로 사이의 '의로운' 관계를 문제 삼는다. 이러한 관계의 - 사람과 사람 사이이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이든 - 이상적인 형태에 상응하게 처신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관계는 서로 사이의 언약* 관계에 근거하는데, 그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지키시고 보존하실 의무를 지시고, 백성은 감사 드리는 마음과 성실함으로써 늘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삶과 구원을 기대하며 제물*과 기도로 하나님만 섬기며 율법*의 여러 계명에 선포된 대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평생 좇을 의무를 진다. 이리하여 하나님 쪽의 '의'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시7:17; 22:31; 111:3; 단9:16), 약속 말씀을 지키신다는 것(시11:7; 사45:19), 자기 백성을 위해 개입하셔서 그들을 건지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삿5:11; 사41:10; 45:8; 51:6)과 그 결과로 평화와 번영과 행복과 복을 주신다는 것이고(시48:10; 사48:18; 61:11; 호10:12), 사람 쪽의 '의'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신9:4; 사1:21['의리']) 선하고 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다(욥35:8; 겔3:20; 엡6:14; 빌1:11).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에 대해서는 '의로운*'의 마지막 단락과 롬1:16-17; 3:21,26 해설을 보라.
율법 : 유대교에서는 모세 오경을 가리켜 '율법'(히브리 말로 '토라'. 대상16:40; 22:12; 대하17:9; 시1편; 119편 참조)이라 한다. 이를 따라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가리켜 '율법과 선지자'(마5:17; 7:12; 11:13; 22:40)라고 했다. 그렇지만 '율법'이란 개념은 또한 구약 성경 전체에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었다(요10:34; 12:34; 롬3:19; 고전14:21). 에스라 시대부터(느8-10장 참조) 모세 율법은 유다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하고 유다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지었다. 그 때 특별히 중요했던 것은 할례* 및 안식일*에 대한 율법 규정과 정결 규정('정결한*')이었다. 모세 율법이 계속 유효한가 하는 문제를 두고서 원시 그리스도교에서는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행15장; 갈2장).
6 나 여호와가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내가 정녕히 너로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을 만들 것이라
7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병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8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9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성서해설 렘 22:6-9
길르앗 지방과 레바논 산지는 울창한 삼림으로 유명했다. 성전과 왕궁을 짓는 데에 쓴 백향목 은 레바논 에서 들여왔다(왕상5:6,8-10 참조). 그런 것에 대한 기쁨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성읍을 폐허로 만드실 수 없는 것이 아닌데, 이는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동의한 의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신들 에 대해서는 출20:3-5 참조).
(용어 해설)
언약 : 언약은 본디 대등한 지위의 당사자들이 맺은 계약 또는 강한 쪽과 약한 쪽이 맺은 봉신 조약에 근거한 법률 관계를 뜻한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언약은 대등한 당사자들의 조약이 아니다. 늘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개인이나 이스라엘 온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 쪽에서는 구원과 복을 확증하시고(이를테면 땅 및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 말씀), 사람 쪽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히 지킬 의무가 있다(창6:19; 9:9,17; 15:18; 17:2,4,9-10; 출19:5-8; 24:8; 레2:13; 신28-32장; 수1:7-9; 24:25-27; 시50:5; 사24:5).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사회적인 불의로써 거듭거듭 깨뜨렸고 그들 스스로는 지속적인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경험에 대한 응답으로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언약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전제를 하나님이 몸소 만드시는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선포한다(렘31:31-34. 거기 해설을 보라). 신약 성경에서는 이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새 언약의 창시자가 되신 것이다.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11 나 여호와가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성서해설 렘 22:10-12
유다 백성은 요시야에게 큰 희망을 걸었으나 요시야는 바로 느고와 싸우다가 죽어(왕하23:29) 온 백성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대하35:24-25 참조). 그의 아들 살룸 이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이었으나, 석 달 만에 느고에게 폐위되어 애굽으로 붙들려 갔다. 죽음도 거기서 맞이한다(왕하23:31-34; 겔19:4).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7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탐남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성서해설 렘 22:13-19
느고는 여호아하스 대신에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임금으로 삼고 여호야김 이라고 불렀다. 여호야김에게는 자기 거처를 사치스럽게 증축하는 것이 백성의 권리와 생명보다 더 중요하였다. 18-19절의 심판 예고는 36:30에서 되풀이된다(이와는 다른 34:5 참조). 나귀 같이 매장 한다는 말은 전혀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왕하24:6에서 여호야김의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다른 임금들의 경우처럼 사람들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니라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2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성서해설 렘 22:20-23
여기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한 여자에 빗대면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불행이 엄청난 만큼 탄식도 엄청나다. 곧 그는 이스라엘 땅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 위에서 울부짖어야 한다는 것이다(헤르몬 산은 바산 에 넣어 생각할 수 있고, 아바림 산지에서 가장 높이 솟은 곳이 느보 산이다. 지도1, 라6). 때는 제1차 포로(주전 598년) 이후인 것 같다. 예루살렘의 동맹국들( 사랑하는 자들 )이 정복당했고 예루살렘을 잘못 이끈 지도자( 목자 )들은 사로잡혀 끌려갔지만(왕하24:10-16 참조), 성읍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채 마치 레바논 위에라도 있듯이 언덕 위에(21:13 참조) 솟아 있다(23절. 6-7절과 해설 참조).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찌라도 내가 빼어
25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6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27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 오지 못하리라
성서해설 렘 22:24-27
여호야긴( 고니야 )이 여호야김의 뒤를 이었다. 여호야긴의 운명에 대해서는 왕하24:8-16과 <예레미야> '안내'를 보라. 13:18에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태후*가 함께 언급된다. 갈대아인* 에 대해서는 용어 해설을 보라
(용어 해설)
태후 : 왕위 세습 때문에 다윗 왕가(와 나라가 나누어진 뒤로는 유다 왕국)에서 현직 임금의 어머니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태후'라는 칭호는 그저 혈연의 정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칭호이다(왕상15:13; 렘22:26, 또 왕상14:21 다음 해설 참조. 렘13:18에서 '왕후'로 옮긴 히브리 낱말도 오히려 '태후'를 뜻하는 듯하다).
갈대아인 : 남부 바벨론(바빌로니아*)의 한 지역(지도4, 바-사4)과 그 주민들을 가리키던 이름이 나중에는 온 바빌로니아에 대해 쓰이게 되었다. 반유목민 부족인 갈대아 사람들은 아주 일찌감치 북부 아라비아와 페르샤 만 사이에 자리를 잡았고 성읍 우르(창11:28)를 차지했다. 한동안(주전 800년쯤) 이들은 앗수르(앗시리아*)사람들의 봉신들이었다. 갈대아 제후 므로닥발라단이 일시적으로(주전 721-710년, 703-702년. 사39장 참조) 바빌로니아의 통치권을 휘어잡았다. 유명한 느부갓네살 2세의 아버지인 나보폴랏살(주전 626-605년)이 다스릴 때 갈대아 사람들은 신 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웠다. 그 때부터 갈대아는 바빌로니아와 같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제사장들은 그들의 천문학적이고 점성술적인 지식으로 이름난 사람들이어서, '갈대아 사람들'이란 호칭을 제사장들과 점성술가들과 학자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으로 쓰게 되었다(단2:10; 3:8; 4:4; 5:7,11의 아람어 본문이 그러하다).
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찌니라
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성서해설 렘 22:28-30
예언자 자신도 24-27절이 여호야긴에 관한 마지막 말씀(24-27절)이라는 사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말씀은 다시 한 번 같은 성격의 말씀(30절)으로 강조되는데, 이 말씀을 예레미야는 크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해 줄 수밖에 없었다(29절). 대상3:17-18에 따르면 여호야긴에게 아들이 일곱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아무도 유다 임금이 되지 못했다. 그 후손의 명단은 마1:12-16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