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0년 1월6일, 저녁 8시

하나님의 성소에서

시편 73편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런 표제가 붙은 시편은 50편, 73편-83편이다. 아삽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왔을 때 헤만, 에단과 함께 찬송하는 직무를 맡았던 레위인으로(대상 6:39;15:19) 언약궤가 적절한 처소에 놓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도록 임명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대상 16:4-6) 다윗 통치 때에 아삽의 아들들은 음악을 통해 예언을 하였으며(대상 25:1,2), 후에 계속해서 그의 자손들이 왕궁에서 음악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으로 전승되었다고 해서 그가 이 시편의 원래 저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편 73편의 주제는 욥기와 비슷한 신정론(神正論, Theodizee)이다. 의로운 자가 고난 받고 악인이 잘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시편 기자는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다. 악인, 교만한 자들이 잘 사는 걸 참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13절)

그러나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모든 의심과 불신앙을 극복할 수 있었다.(17절)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자 악인들의 모든 말, 행위, 업적, 삶이 공허한 것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악인들이 실제로 가난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망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시편 기자의 영적 시야가 달라진 것이다. 그의 시야에서 교만한 자들의 모든 소유와 업적은 ‘꿈’과 같은 것이었다.(20절)

위와 같은 시편 기자의 판단은 옳은가? 이런 시편 기자의 영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시편 기자의 이런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건강하고 부자가 되도록 우리를 돕는 분이 아니다. 그런 조건을 채우는 신은 우상이다. 하나님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생명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존재신비에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세상의 일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 시편기자는 자기를 정확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양심’이 찔렸다고 한다. 주 앞에서 ‘짐승’이었다고 고백한다. 짐승은 자연의 원리대로만 살아갈 뿐이지 영적인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명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짐승보다 앞서지 못할 때가 많다.

시편 기자는 이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영성으로 들어갔다. 하나님이 ‘내 오른 손을 붙드셨’는 것을 알게 되었다.(23절) 그는 온전히 하나님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25절은 외워야 할 구절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루터는 이렇게 번역했다. “나가 오직 당신을 소유한다면, 나는 하늘과 땅에 대해서 질문할 게 하나도 없나이다.”  하늘과 땅에서 요구할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영적으로 만족한다는 뜻이다.

이제 이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교만한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불안해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 그에게는 여호와만이 피난처다. 그를 전하면 살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