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0월5일, 저녁 8시, 시편 142편

부르짖는 기도

 

 

시편 142편은 각 구절이 절절하다. 부르짖는다는 말이 반복되고, 아픔과 절망을 나타내는 단어를 쏟아낸다. 원통함, 토로, 우환, 상함, 올무, 돕는 이 없음 ... 등이다. 탄원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영혼은 두 가지 가능성에 노출된다. 하나는 피폐의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투명의 가능성이다. 142편 기자의 영혼은 물론 투명의 길을 간다.

1절-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부르짖는다고 한다. 6절에서도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부르짖음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여 삼창’이라든지 소리를 크게 질러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부르짖는 기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소리를 지를 수는 있지만 영혼의 깊이에서 드리는 기도는 오히려 소리가 작아진다. 극한의 슬픔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것과 비슷하다. 1b절에 따르면 부르짖음은 ‘간구’와 비슷하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의 영혼은 삶의 본질, 밑바닥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여호와께 드리는 기도라기보다는 투정에 불과하다. 기도의 상투성을 벗어나야 한다.

2절- 시편기자는 원통한 일을 당했고, 그래서 걱정거리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평범한 삶에서는 별로 일어나지 않는 사건으로 그가 고통에 빠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3절- ‘영이 ... 상할 때’는 삶에 대한 모든 의지가 꺾이는 상태를 가리킨다. 시편기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의 ‘길’을 아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의 매우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내 길’을 아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삶이 이해되는 것을 가리킨다. 몰랐던 생명의 깊이가 열리는 경험이다.

4절- 시편기자가 처한 입장은 3절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4절에 묘사된 대로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절대고독 사이에 놓여 있다. ‘오른 쪽’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아는 이, 피난처, 돌보는 이가 없다고 한다.

5절- 시편기자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간다. 하나님이 피난처이고, 세상에서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탈속주의나 성속이원론의 관점이 아니다.

6절- 그는 피난처인 하나님께 1절에 이어 다시 부르짖는다. 그는 자기가 비천하다는 사실과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비천과 약함은 기도의 원동력이다. 마음이 교만하면 기도는 자랑이 될 뿐이다. 시편기자의 이런 기도는 단순히 탄원일 뿐만 아니라 이미 수납되었다는 경험에서 나온 고백이기도 하다.

7절- 마지막으로 시편기자는 자기 영혼을 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옥은 억울하게 갇혀 있는 실제 옥일 수도 있고, 억압적인 상황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다. 의인들이 자기를 두른다는 말은 성전에서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의미한다. 탄원이 결국 감사가 된다. 절망이 희망으로 변한 것이다. 부르짖는 기도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