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0월19일, 저녁 8시, 시편 144편

여호와는 반석이시다

 

 

시편 144편은 18편과 마찬가지로 제왕(帝王)축제의 시라고 알려져 있다. 다윗을, 또는 다윗 왕조를 높이는 시다. 고대 왕정국가에서는 왕과 국가의 일치가 당연했다. 왕을 위해 축제를 열고 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나라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는 뜻이다. 오늘 민주사회에서는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도 독재국가에서는 아직도 국가 지도자를 국가와 일치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 국가 조찬기도회’는 이런 흔적이다.

1-2절, 찬송

왕의 입장에서 드리는 찬송이고 기원이다. 여호와를 ‘나의 반석’이라고 부른다. 시편 곳곳에 나오는 표현이다. 왕의 중요한 업무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적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1절에서 여호와를 전쟁의 신처럼 묘사한다. 2절에서 여호와에 대한 신앙적 규정이 나열된다. 사랑, 요새, 산성, 건지시는 이, 방패.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는 표현 역시 왕의 입장을 보여준다.

3-4절, 고백

제왕축제의 시(詩)지만 왕이 한 인간의 실존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알린다. 4절에서 사람은 ‘헛것’ 같고 사람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없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일수록 이런 상황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높은 자리가 제공하는 교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업적, 지위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5-11절, 간구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묘사가 재미있다.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고, 산에서 연기를 내는 분이며(5절), 번개를 내고, 원수를 흩으시고 화살을 쏘는 분이시다.(6절) 구약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세계이해가 어떤지를 염두에 두고 이런 본문을 읽어야 한다. 당시 사람들은 화산폭발, 번개 등의 물리적 현상을 몰랐다. 그런 현상들은 그들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초월적인 하나님을 그런 물리현상으로 묘사한 것이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초월적인 능력의 담지자로 묘사한 뒤에 전쟁에서의 승리를 간구한다. 11절은 7,8절의 반복이다. 아마 시편을 편집한 사람의 실수로 그렇게 배열된 것 같다. 이방인의 속성은 거짓으로 규정되었다. 거짓은 일반적인 의미의 거짓이라기보다는 우상숭배로 보아야 한다.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라 거짓 신이다. 참 생명이 아니라 거짓 생명을 약속하는 신이다.

12-15절, 축복

12절부터 시의 분위기가 전쟁과 승리로부터 백성의 평화로운 일상의 축복으로 바뀐다. 자녀들(12절), 곡식(13절), 평화(14절)가 거론된다. 당시에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복지 상태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일어난다. 그것을 희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희망이 그런 세상을 향해 나갔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는 점에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