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20강(080529)-인간론

안녕하세요. 오늘 5월 29일이군요. 반갑습니다. 오늘 하루 열심히 사셨어요. 쇠고기가 수입한다고 장관고시가 오늘 공식적으로 나왔어요. 좀 어수선합니다. 좀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 생각도 많고 저도 말할게 많이 있긴 있어요. 수업시간이 짧기 때문에 그런건 내버려둡시다.  해도 나중에 기회있으면 하고요. 조금 기분은 울적하지만 울적하기보다도 좀 답답하지만 그런대로 우리가 또 해결해 나가야 되고 공부시간은 공부대로 해나가야 되겠습니다.

벌써 우리가 6개월 약속했는데 오늘이 5월 마지막 목요일이 됩니다. 참 빠르죠. 6월 한달만 하면 다 끝나게 되는데 우리 수업도 대체적으로 끝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책입니다. 오늘 인간론에  대해서 다 끝나게 되겠군요. 이제 9장이고 전체적으로 12장까지 있는데 그러면 세장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6월에는 한주에 한 장씩 평균 그렇게 나가야 될 것 같군요.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하게 되면 마칠 것 같습니다.

인간이 뭐냐는 그러한 질문인데요. 그거 뭐 하도 이게 본질적인 질문이라서, 그리고 모든것들이 다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두 시간에 끝낼만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일찍 들어온 분들중에서 노래를 들으셨을텐데요. 여기 들어있는 건데요. 무등산풍경소리 4주년 기념음반, <풍경소리> 소낙비라고 하네요. 번안곡이라고 하네요. 이장순씨가 불렀구요.

소낙비

1. 어디에 있었니 내 아들아 어디에 있었니 내 딸들아
나는 안개 낀 산속에서 방황 했었다오 시골의 황토길을 걸어 다녔다오
어두운 숲가운데 서 있었다오 시퍼런 강물 위를 떠 다녔었다오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2. 무엇을 보았니 내 아들아 무엇을 보았니 내 딸들아
나는 늑대의 귀여운 새끼들을 보았소 마굿갓 옆에서 어린애를 보았소
하얀 사다리가 물에 뜬걸 보았소 빈물레를 잡고 있는 요술쟁일 보았소

3. 무엇을 들었니 내 아들아 무엇을 들었니 내 딸들아
나는 비오는 날 밤에 천둥소릴 들었소 세상을 삼킬 듯한 총소리를 들었소
길바닥을 기어가던 신음소릴 들었소 친구를 부르던 목쉰 소릴 들었소

4. 누구를 만났니 내 아들아 누구를 만났니 내 딸들아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개구리를 만났소 검은 개를 끌고 가던 흰사람을 만났소
사랑을 잃어버린 한 남자를 만났소 남편을 찾고 있던 아내를 만났소

5. 어디로 가느냐 내 아들아 어디로 가느냐 내 딸들아
나는 비 내리는 개울가로 돌아갈래요 뜨거운 사막 위를 걸어서 갈래요
빈손을 쥔 사람들을 찾아서 갈래요 무지개를 따다준 소년 따라 갈래요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끝없이 비가 내리네
끝없이 비가 내리네

<소나기/Bob dylan 작곡(A hard rain's gonna fall) 양병집 이장순 번안 작사>
1962년 미소 양국의 냉전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우려감에 대한노래로 hard rain은 미사일이나 폭격을 의미한다고 함.  

요 가사에 보면 아들딸들아 너희들이 무엇을 보았니? 가사가 다 기억에 남지 않네요. 세계의 창에 있는 많은 것을 보고 있는 아이들 자녀들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데요. 그게 다 인간의 삶이죠. 이혼하고 싸우고 죽고 또는 아름답고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별빛을 맞으며 밤새워 이야기를 하구요. 여러가지 우리 인간의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로 기독교적인 인간이해, 그것을 이야기할텐데 그것도 한두가지가 아니겠죠. 오늘 뒷부분에 잠간 이야기하겠습니다만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것, 죄와 인간의 관계 구원의 문제요. 생물학적인 그러한 관점 등등 여러가지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제가 담간 언급했습니다만 기독교신앙 기독교인들이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뭐냐?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구요. 그저 극단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교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기독교가 창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는 말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그냥 한마디로 끊어서 다 해결해버리고 맙니다. 인간과 삶 깊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노력이 전혀 없는거죠.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독단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좋은 뜻으로 이야기하면 순수하고요. 순박하고 조금 나쁜 뜻으로 이야기하면 천박하고 그렇습니다. 두가지 다 양면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위험성입니다. 한쪽으로는 말할 수 없이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좀 접어두고 성서가 말하는 규범대로 살아간다고 하는 점에서 순수할 수 있습니다. 명성가들 신비주의자들 그런 사람들은 다 그런 순수한 삶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구요. 반면에 아주 천박할 수 있거든요. 그게 인제 순수성이 잘못 이용당하면 천박해 지는거죠.

어떻게 보면 이명박 대통령의 인간이해, 세계 이해, 기독교이해가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주 단정적이구요. CEO대통령이라고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능률만 생각하구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그 이윤을 극대화하는 그런쪽으로 모든 것을 몰고 가는 리더쉽이 이 다원적인 요구와 대통령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같이 끌고 가야 되는 이러한 대통령의 리더쉽에 과연 맞겠느냐는 염려스러운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출발하면서 계속 이렇게 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분이 기독교 장로교 소망교회 대표적 장로고요. 그걸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구요. 기독교 신앙을 안으로 감추고 정치인이라고 하는 것은 더 부각시켰으면 그나마 다행일텐데 늘 기회가 있을때마다 기독교 신앙을 내세웠거든요. 저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런 기독교 신앙이 공격적으로 사용될때가 많이 있었는데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바친다든가 이런 방식의 생각들을 명시적으로 표현한적으로 많이 있어서 이것이 상당히 뜨거운 감자예요. 대통령이 문제가 있기는 있는데 무조건 또 잘못되기를 바랄 수도 없고 바라서도 안되구요. 정치가 잘못된다고 한다면 어려운 사람들이 더 어려워지거든요. 그렇다면 결국 독재, 민간독재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잘 되기를 바래야지 이게 중심을 잃어서 카오스로 빠지게 되면 정말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려어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데요. 그러한 조짐들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교회안에서 쌓이고 쌓인 한편으로는 순박한 인간 이해고 다른 편으로 천박한 인간이해로 떨어지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데 주로 천박한 인간이해에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판단할때 그 사람이 안고 있는 어두운 심연들을 별로 잘 생각하지 낳습니다.

부산의 수영로 교회의 정아무개 목사님이신데요. 예를 들라면 그런 분들 아마 제가 한번 이야기를 했었을거예요. 설교시간에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 설교시간에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구요. 그게 설교의 위기이기도 하고 그게 적나라한 우리들의 모습인데요. 상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거나 아주 그렇습니다. 설교외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인제 이분도 그렇거든요. 그날 설교가 관상 얼굴이 어떻고 이렇고 어떻다 이런 이야기를 쭈욱 이야기를 하면서 술집에 있는 여자다들 봐라 얼굴 반반하지 않는 여인이 있나 그러나 그 말년이 좋지를 않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강단에서 한단 말입니다. 술집에서 아니면 홍등가에서 혹은 동성애로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우주보다 귀한 하나의 생명들이잖아요. 그들에게 어떤 삶의 어두움들과 밝음들이 같이 혼합해 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않고 독단적으로 그들의 삶을 매도하는 방식의 이러한 일들을 수영로 교회 목사님이 하시는데요. 그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이해에 대한 천박한 이러한 생각들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가 그 복음의 본질을 오히려 놓치고 있는가 싶습니다.

지난 주일 그런 것들을 조금 말씀드렸는데요. 다른 것들 이야기했지요. 호모에렉투스는 조금 이야기하다가 말고요. 창조와 진화등을 이야기했는데 전반적으로 기독교 이해가 정말 중요하다. 인간의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차원에서 우리가 인간이해가 필요하고요. 고 시점에서 제가 이 점을 짚었죠. 기독교 신학은 원래 신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 늘 제가 일관되게 주장을 했는데 요 대목에서는 제가 인간이해가 중요하다는 말을 제가 붙였는데요 그렇다면 이것이 모순 되는 것 같은데 모순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제가 말씀드렸구요.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이해가 기본적으로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더라도 대개 도케티즘에 빠져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원래 그런것은 아니다. 인간을 이렇게 봐야 되겠군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에서는 현실적적인거예요. 현실주의예요. 이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죠. 오히려 기독교는 하나님 이야기하고 초월 이야기하고 아이디어 이데아, 이상, 관념 이런 쪽으로 나가는 것 같다고 볼 겁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의 인간이해, 인간만이 아니라 이 역사 세계 게시 이해가 아주 현실적인거예요. 현실적이라고 하는 거를 여러분들이 오해를 하지 마십시오. 이게 물질적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구체적이라는 말은 그렇듯한데요. 물질적인 거나 가시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현실적인것, 제가 자주 쓰는 단어 있죠. 리얼한 겁니다. 정말 리얼한겁니다. 그 바탕에서 이야기하거든요. 오늘 강의 뒷부분에 나오게될 죄 문제도 여러분, 이게 기독교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중에서 인간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이구요. 이건 구원론하고도 연관되고 창조론과 심판의 문제까지 연관되니까 종말까지 관계된 전체적인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다 연관되어 있어요. 거미줄 처럼. 요끝에서 저끝까지 요렇게 조렇게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창조로부터 종말까지라든지 성화문제라든지 죄문제 칭의 심지어 성만찬 세례 다 육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게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찾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죄문제도 그러니까 모든 것하고도 연관된다고 하는 것이죠. 신학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죄라고 주제하나만 가지고도 기독교의 창조 성서 계시 성만찬  세례 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다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또 아니면 성만찬이라고 하는 거 이런 주제를 통해서 또 이런 것들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거예요. 아마 제 강의 중에 언제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독교의 이거는 총체적인건데 그걸 커다란 하나의...(강의 녹음이 잠시 끊겼습니다)

이 현실을 뚫어 보는거예요. 예. 뚫어보는것,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러한 사건들, 이브가 선악과를 취한거라든지 많은 죄에 대한 보도들이 성서에 있잖습니까? 그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서기자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가 있었던 거예요. 그 안에서 볼때 왜 형제가 형제를 살해하는가는 그 현실을 본겁니다. 도저히 다른 방식으로는 해명할 수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인간이 왜 그렇게 잔학해지나요? 생각해보세요. 그게 바로 여러분, 죄의 현실을 봐야 되는거예요. 이게 죄의 현실인데, 이걸 기독교신앙은 낭만적으로 보지않고 존재론적으로 보는 거예요. 잘 쓰는 말을 또 쓰는 군요. 존재론적으로 본다. 이게 죄, 인간에게, 그건 현실이잖아요. 죄성이 우리에게 강하게 나타나잖아요. 개인도 그렇고 공동체도 그렇고. 개인보다 사회로 나가면 더 하게 될텐데요.

라인홀드 니버 같은 Moral and Imoral Society에,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착해도 구조안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쇠고기 파동 연관되어서 졸속으로 협상을 했구요. 그리고 계속 꼼수를 쓰고 하는 것 모두 공무원들 있잖아요. 하나 하나 보면 그렇게 이상한 분들은 아닐거예요. 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가거든요.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대로 2차 대전 히틀러 나치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키스하고 아주 좋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하는 인격적으로 나오지만 그 나찌즘이라고 하는 구조에 들어가게 되면 비인간적인 일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됩니다. 이게 얼마나 세련되게 하냐  폭력적으로 하냐 하는 차이가 있지만 이게 인제 한계이거든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인것 같습니다. 어린아이 유괴한다거나 집단적인 폭력을 통해서 내전같은 것이 일어나잖아요.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악을 저지르잖아요. 정말 꼭 필요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자동적으로 죽여요. 그리고 전쟁때에는 특별히 부녀들에 대한 강간 이런 것들이 많이 일어나잖습니까? 평소에는 그런 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도 그러한 상황들이 되면 그렇게 됩니다.

인제 그러한 죄에 현실들이 아주 많은데 성서는 아 이거는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켜서 해결해될 문제가 아니다. 이건 교양적 문제가 아니라 더 근원적이 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게 인제 사탄이라고 할 수 있고 마귀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건 그냥 그렇게 고대인들이 일종의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그런 차원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 신을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보았던 생각하는 어떤 실체로 보앗다고 하는데요. 그러한 방식으로 사탄과 마귀를 이야기한 건데요.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 죄와 악에 존재론적 뿌리가 있다고 하는 통찰력입니다. 여러분 사탄이 마귀가 있다 사탄이 있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거는 고대인들의 인식의 통로였을 뿐이에요. 오늘은 우리가 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오히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의 무의식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겠죠. 그러나 이 말이 사탄 마귀 이게 틀렸다는 말은 아니구요. 이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면 되는거예요.

동정녀 마리아야가 오늘의 생물학적 차원에서 말이 안되는건데요. 그러나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 내용이 뭐냐 그걸 알면되는 거예요. 그걸 모르면 사탄 마귀 심지어는 어떤 경우에 이런 일도 있잖아요. 영안이 있다고 하는 교회 권사님, 주로 여자분들이 많이 그러시는데 기도 세계 하시는 분들 말이죠. 저 사람에게 귀신이 턱에 달렸다든지 등에 달렸다든지 시커먼 게 있다 그런 것까지 말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뭐라고 환청은 잘못된 것을 듣는 거고요. 잘못보는 거는 뭐라고 그럽니까? 똑 같습니다. 우리가 어렸을때 밤에 공동묘지옆을 지난다거나 숲을 지날때 나무에 뭐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잖아요. 그건 제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등에 귀신이 몇마리 붙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병적인 자기 암시를 통해서 반복된 것이 표출되는거죠. 이런 방식, 실체 사탄과 마귀 실체는 그렇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도 기독교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이 뭐냐 찾으면 되는거죠. 우리 현실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악의 근원을 이야기하려고 했던거예요. 그건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보고 있는거죠. 뚫어지게 보고 있는거죠. 죄를 나이브하게 보지 않고 아주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는겁니다. 그래서 존재론적이라고 제가 이야기한 거예요. 이거는 인간이 투쟁해서 이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사탄이 나오고 마귀가 나오는 거죠. 이건 존재론적 힘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투쟁해서 싸운다고 하는 것은 의지로 노력해서 뭐라고 한다는 것이잖습니까? 여러분들 됩니까? 안되죠? 안되요 그거는 우리가 약간 생각을 줄여 갈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의 욕망 이런 것들을 다 이길 수 없습니다. 죄문제는 이미 다 해버렸군요. 나중에 할 건데요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인간이해는 이상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다. 이걸 전제하면서 성서와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 하는 인간이해 몇 가지 관점이 있는데요. 그거는 세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한가지는 미리 이야기했어요. 죄문제요. 마지막 강의 끝날때 이게 어떤 의미냐. 그리고 성서가 죄를 말하지만 사실은 죄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제가 집도록 하고요.

앞에 있는 두가지는 창세기에 나와 있는 보도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흙으로 되어 있다고 하고 하나는 영으로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를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창세기 2:7절 이게 J 문서인데요. 참조로 창세기의 창조보도는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보면 아시겠구요.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리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들이 생령이 되었다.” 3:19절에는 이렇습니다. “얼굴에서 땀이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너가 그것에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으로 돌아가야 함이라 하시니라.” 시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되어 있구요.  이것에 대해서 제가 설명할 필요가 하나도 없겠죠.

흙으로 돌아가는게 분명합니다. 그거를 순순히 받아들이셔야 되요. 아 그런 것을 뭐라고 할 까? 너무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생각하시면 안되고 정말 내가 흙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서 금면류관 받고 배고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그래서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한 삶을 영원히 누리는 그러한 희망을 갖고 우리가 사는거지 흙으로 돌아간다니 그거는 우리의 육체만 해당하는 것이지 우리의 영은 그렇지 않느냐? 그건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또 복잡한 문제인데요. 틀린 말씀도 아니구요.

그러나 일단 영과 육을 따로 나누는 거는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가 아닙니다. 영과 육, 흙은 육은 땅으로 가고 영은 하늘로 가고 이게 그럴듯 하긴 한데 맞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야만 인간이라고 하거든요.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본다면 이거는 플라톤의 생각하고 오히려 가깝습니다. 이 인간이해에서는 기독교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영과 육이 하나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것을 설명하면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성서에서 딱 부러지게 이거다 말하지 않아서 이걸 설명하기 힘들구요. 딱 부러지게 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서도 그것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한다는게 상당히 어렵기는 합니다만 충분히 준비되지 않으면 우리는 삼천포로 빠질 가능성이 많이 있어요. 성서에 이렇게 되어 있다. 몇 군데 정보 구절을 따다가 기독교 가르침이 이거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해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간이 영과 육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닌데요.

어떤 면에서는 구분 되어 있는 것처럼 말도 하구요. 흙은 어디로 들어가고 뭐는 어떻게 되라. 그러한, 영은 또 올라가는 것처럼 이야기하구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인간이 아니예요. 그러나 또 문제는. 또 분명한 우리의 현재 가지고 있는 몸은 흙으로 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썩거든요. 네. 그거는 썩는데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 천당 보통 말하죠.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것처럼 말이죠. 그쪽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거예요. 그거는 성서가 이야기하고 그거는 명확한 거니까요. 이게 그러니까 서로 모순되는 것이죠. 영과 육이 분리되면 인간이 아닌데 분리되지 않으면 육이 썩고 영도 다 없어져 버리게 되는데요. 영이 나눠져야만 일단 그게 분리되어야만 우리 영이 어디간다는 말이 되거든요. 이게 막 헝클어져 있습니다.

저도 지금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잘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없는가 생각이 언뜻 듭니다. 저도 이런 문제들을 교과서에 그냥 나온 대로 그냥 또박또박 이야기하려면 할 수 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실제적으로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을 믿고 말해잖아요. 그래서 조금 혼란스럽지만 제가 혼란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혼란상태가 아닙니다. 엉클어져 있는데, 실타래가 엉크러져 있듯이 제가 시간이 되면 풀어내면 될 것 같습니다. 요 부분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 영과 육으로 되었다고 하는 것이 칼로 무우를 자르듯이 어떻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영과 육이 이렇게 하나로 되어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거예요. 사실은 이에 비밀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그냥 수학공식 풀듯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많은 것을 이해하는 것만큼 다른 것도 풀릴 것 같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처음 시작해서 주욱 가고 있잖습니까? 여기에 있어요. 여기에 나온 거라도 예를 들자면 삼위일체가 나왔고, 바울의 칭의론이 있고, 루터의 그러한 것들 죽죽 있다고 하더라도요. 더 큰 문제는 성서구요. 이런 것들도 마지막까지 다 가봐야 그런 것을 다 드러나게 되어요. 고 맥락을 여러분 빨리 눈치 채셔야 됩니다. 처음부터 다 완료된 것이 없어요. 기독교 신앙도요. 잠정적인 거예요. 불확실하지 않고 확실한 것인데 아직은 잠정적인 것, 요 맥락 아시겠어요? 불완전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완료된 것 은 아닙니다.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신학자와 영성가들이 그런 내용들을 더 많이 풀어가야 되는거죠.

결국 이러한 것의 핵심은 생명을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냐? 생명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독일어로는 레벤이라고 합니다. 생명, 삶 만약에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나가는 이런 방식만의 삶을 생명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마는 거죠. 그러면 죽음이후에 생명은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그거는 아직 우리가 손금 들여다보듯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생명, 그러니까 이거도 인제 창조부터 종말까지 다 연관되는 문제인데 처음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창조로 끝나지 않고 종말까지 다 창조로 보거든요.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잘 들어보십시오. 종말은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때까지 완성된게 아닌거거든요. 생명도 아직 완성된게 아니거거든요. 완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가 영과 육이 어떻게 연관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영의 실체도 우리가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는데요. 제가 강의를 드리면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확실하게 아는 게 아니다는거를 여러번 말을 해서요 지나치게 기독교 신앙이 불확실하다고 하는 점을 강조한게 아닌게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그런게 아니라고 점을 여기서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완료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이 우리에들에게 들어나는 것 만큼 우리는 인간의 영과 육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을 이야기하다가 흙을 이야기하다 또 왔다 갔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느냐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바로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흙이 되는 게 참된 생명을 얻는 길을 가는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흙 말이죠. 그렇게 되는게 참된 생명과 접촉하는 그 생명 안으로 돌입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고 하는 거죠.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제가 지금 끊어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게 받아들이기 힘들걸요. 아. 흙이 되는 것, 그건 정말 생명이 끊어지고 아무것도 아니고 말이죠. 재미도 없고 그게 무슨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냐?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게 고정관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머니 품에서 태어나서 젖먹고 지금까지 살아온 이 방식의 생명에 절대화하고 있어요. 이거 아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수도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그게 인제 이게 우리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입니다. 실존적인 철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피투성, 세상에 던져진자로서 세상 밖의 것을 알지 못하는 한계인 겁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와 있는 것처럼 동굴안에 있다보면 밖의 세계를 모르는 것처럼요. 우리는 이렇게 먹고 살고 노래하고 잡담하고 보고 이러한 삶을 절대적으로 알아서 흙처럼 있는 저것을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큰 착각일수 있어요. 하나님은 저런 방식으로 다 놀라운 생명의 평화를 허락하실 지 누가 그거를 단정적으로 아니다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어제 비가 왔지요. 어제 맞습니다. 강의 영남 신학대학에 신학과 철학 이야기 강의가 있어서 비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며칠전에 화성에 이게 앉았잖아요. 무인 우주선이요. 작년 8월에 쏘아보냈는데 이번에 겨우 도착했다고 합니다. 10개월 걸렸다는 다는 군요. 5억 몇천만키로미터 떨어졌다고 하는데요. 태양에서 지구까지 거리가 1억 5천만 키로로 빛의 속도로 9분정도로 갑니다. 까마득한 거리입니다. 제가 말을 쉽게 하는데 태양에서 지구까지 1억5천만키로, 빛의속도로 초속 30만키로에 9분정도 달려오는 되는데 지구로 부터 화성까지는 더 멀어요. 5억몇천년 걸린다고 합니다. 이상하고 태양이 더 멀 것 같은데 화성이 더 멀다고 합니다. 10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참고적으로 태양으로부터 또 하나의 태양까지 거리가 얼마나 걸리는지 아세요. 지구, 화성 목성은 같은 식구들이예요. 하늘의 별들은 다 태양입니다. 곳곳에 따로 있는 거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이 2-3광년, 빛의 1년동안 가는 것리가 1광년이잖아요. 태양에서 지구에서 9분, 그것을 생각하고 우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9분거리인데 2-3년동안 달려가야할 또 하나의 별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끔찍스러워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이 화성에 간 무인 우주선이 탐사하려고 한 가장 핵심적인 것이 이 지표 말고 한 꺼풀 들어가서 지하 바로 밑에 물이 있는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이 있어야만 지금은 생명이 없지만 생명이 있었을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구에는 이렇게 물이 넘쳐납니다.

네 놀라운 생명 현상이 가득 있는데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보게들 우리가 물처럼 되는 게 정말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는게 아니냐? 그런 가능성을 우리가 닫아두질 말아야 않겠느냐? 하나님 나라를 늘 잘 먹고 잘 사는 쪽으로만 생각하고 지금 살아가는 삶의 복지가 극대화된 그러한 상태로만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명에 대한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생각을 축소시킨거다 좀 열어놓자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생명에 참여하게 할는지 왜 우리가 그것을 독단적으로 가로막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네 그러면 말이 되나요. 아 당신이 말하는 것은 성서적인 입장보다도 일반적인 철학이나 사상이나 일반적인 영성 그러한 오히려 동양적인 그러한 생각이 아니냐 여러분들이 속으로 생각할 수 있겠군요. 그것이 꼭 그렇다 아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아니구요.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지 말자는 그런 뜻이었구요. 생명의 문제가 우리들에게 드러나는 만큼 우리는 인간을 좀 더 가깝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 하지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미래를 겸손한 자세로 기다리고 사십시오. 여러분들이 구상하고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 방식안에서의 삶만은 절대화하지 말고요. 참 어리석은 일이예요. 어린아이들은 늘 그 방식으로 하잖아요. 아버지 엄마하고 계속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자라서도 그렇게 되면 마마보이가 되는거든요. 독립해서 새로운 세계로 나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줄 새로운 세계를 기쁜 마음으로,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됩니다. 그러한 것들이 묵시문학이구요.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셨다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같은 것들인데요. 그때 혼인잔치 하는때 이건 다 메타포예요. 어린양과의 혼인잔치 그 방식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극한의 생명이 세계를 말하려고 하는 거죠.

인간은 흙이다. 고 부분이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이해 한 부분인데 아주 현실적인 인간이해다는 거구요.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흙과 가까와지는 삶을 지금부터 준비하자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지금은 다 흙하고 멀어졌잖아요. 자연으로 돌아가자 그러한 낭만생각은 아니구요. 가장 낮아지는 영성이죠. 흙처럼 되는거니까요. 지금처럼 문명문화의 극대화, 여기서만 우리의 삶을 확인하려고 하다보면 대부분 흙과 멀어지는 삶이라서요. 흙으로 돌아가라는 성서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어요. 흙을 중심으로 한 전통은 인디안들에게서 일수도 있구요. 티벳트의 라다크일수도 있구 많이 있습니다. 참고해보십시오. 인디안의 추장들의 글을 모아놓은 난 여행가가 아니고 나인가? 이런데도 보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흙과 연관되어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흙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이 뭐냐 하는 것은 아까 강의를 하면서 어느 정도 말을 했기 때문에 길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영이 뭐냐?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하는데 영이 뭐냐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은 다 찾지 못했습니다. 그게 이성인지 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그러한 건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는 능력인지, 뭘까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무슨 흙으로 지은, 흙이라기 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형체라기 보다도 Image of God이라고 하잖아요. 형상, 아리스토텔레스 용어를 빌리자면 그건 바로 form이죠. 성서적인 용어로는 image구요. 이미지하고 form이구요. 같은 헬라철학 용어로 에이도스라고도 하고요. 또 플라톤 식으로 이야기 하면 이데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통하는 이야기죠. 그런 근원적인 생명을 가르켜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롬, 에이도스, 이데아.

과연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죠.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 그러한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추상적인 표현이죠. 하여튼 그러한 우리는 이러한 단백질인 이러한 육체, 몸이면서 동시에 이런 것에서 떨어지지 않고 이거에 한정되지 않고 이 육체성을 넘어설 수 있는 또 하나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것을 우리는 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인간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몸과 영, 혹은 영혼으로 이야기하는 이거는 헬라인들에게 보면 이원론적으로 구분되어요. 결론적으로 갈라져야 되거던요. 영혼만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플라톤식으로 말하면 아예 이 영혼은 선재적이에요. 이미 그렇게 있었든 게 인간에게 잠깐 들어왔다가, 인간의 몸에 들어왔다가,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몸은 지옥이예요. 플라톤식으로 이야기해서 이 몸이라고 지옥에 갔었다가, 죽는다고 하는 것은 이 영이 해방받는거다. 이 영은 원래부터 있었던 게, 이데아계에 있었던 것이 잠시 들어왔다가 나가는 거다라고  이런 과정으로 영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이나 신론이나 초월적인 신이해에서는 플라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인간이해에서는 선재설을 거부했어요. 인간의 영도 인간이 만들어질때 피조된거죠. 인간의 영이 선재적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 같이 피조예요. 만들어진 겁니다. 여기서 제가 놓칠뻔 했거든요. 인간이 기본적으로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성서가 말합니다.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 이게 대립되어 있는거죠. 창조주는 모든 자신의 근거를 내부에 가지고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피조물은 모든 존재근거를 외부에 두고 있는 거예요. 스스로는 자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거예요. 피조물입니다. 만들어졌다고. 질그릇과 같은거죠. 우리의 생각이나 모든것에 다 그렇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것예요. 영도 이런 점에서는 피조입니다. 그런데 그 영이 언제 생길까요? 그건 또 생물학이 또 말을 해야 하는데 생물이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는 순간에 생길까요? 만약 그렇게 되다면 피임은, 임신중절 이런거는 윤리학 문제가 되니까 접어두고요. 결합했을때 영혼이 생겼을까요. 배아기 1주일 있어야 배아가 된다면서요. 열흘입니까? 아니면 2개월 그렇게 되어야 영혼이 생길까요. 영원한 미스트리 일겁니다.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앞으로 천년 후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자체 몸과 영의결합이라고 하는 자체가 우리 인식 한계를 뛰어넘기 때문에 그거는 안될거예요. 그 비밀을 아는 것은 신의 비밀, 신의 정원이라고 할까요. 신의 비밀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일거예요. 하나님을 알아야 그걸 알게 될까요?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어요. 마찬가지로 생명을 본사람은 없어요. 이해하시겠죠? 성서도 분명히 하나님을 본자는 죽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계시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고 알아들으면 됩니다. 계시는 하나님자체거든요. 하나님 계시 자체를 받을 수 없어요. 계시를 받으려면 죽어야만 됩니다. 아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계시가 뭔지 모르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죠. 자기의 깨달음이라든지 그런 쪽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인간의 영과 육의 문제는 하나님의 창조에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는 비밀이거든요. 창조는 생명이래서요. 완성되는 순간에나 알 수 있어요. 앞에서도 제가 말씀드렸듯이요. 그거를 우리가 알수 없다. 그거를 안다면 신이 누구인지 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다면 이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돌아가는 먹고 자고 애기 낳고 정치하고 이런 방식의 생명의 생명은, 이러한 것은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 말을 붙이자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의 완성된 다음에 붙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우리가 생명하면 생명이 아닌 것하고 대립적으로 생각하잖아요. 바위 같은 것은 우리가 생명체로 생각하지 않잖아요. 뭔가 자기를 복제할 수 있는 그러한 것들만 우리는 생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런 말도 정확한 것은 아니죠. 생명도 이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앞서 한 이야기와 연관되는데요. 나무, 바위, 강, 흙,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로 어떤 생명의 세계로 운영하시지 않냐 생각할 수 있는거죠. 우리는 꼭 살아있는 거로만 생명을 생각하는 한도에서 레벤 라이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아마 완성된다음에는 정말 완성된다음에는 그 개념은 없어질 거예요. 정말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니까. 새롭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지난 몇 번의 강의에서도 이런말들은 반복해서 말씀 드렸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기억 나시겠습니다만 기억나는 것과 실제로 그 사태쪽으로 들어가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새롭다는 것은 전적인 변화이거든요. 그거를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셔야 그래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 새롭다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드릴게요. Sexuality의 문제인데요. 동성애가 우리 기독교가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드리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이성관 절대화하는 거죠. 그렇게 보니까 동성애자들 저 친구들 보니까 이상하다. 그게 얼마나 유치한 인간이해입니까? 하나님이 생명이 완성된 다음에 어떤 방법으로 이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을지 우리가 그걸 어떻게 우리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겠어요. 전혀 다른 방식, 이성이다 동성이다가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의 생명이 시작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생명이 완성도기 이전에도 지금도 완성된 생명을,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겠군요.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생명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끌어가고 있는거죠. 그거를 빨리 눈치채야죠. 그게 어떤 거냐? 삼각형이다 사각형이다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어린애예요. 정말 그런점에서요. 아주 미숙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히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것이 우리가 왔을 때,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거든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왔을때 그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실은요. 전혀 새롭다고 하는 것 이런 쪽에서 하나님를 계시를, 자기 알림이예요. 자기 노출입니다. 그런 것을 좀 생각해 봐라  그런 뜻입니다.

네 영적인 존재, 이원론적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에서는 뭔가 영이 통전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다. 하나다. 이런 점을 말해야 되는데 과연 그게 어떤 거냐 제가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학책을 보더라도 개념적으로 설명하지 실증적으로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거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성, 생물학적인 육체 이런 것을 초월하는 혹은 그 깊이에 있는, 초월은 이와 상관없이 뛰어넘는 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육체성의 심층에 있는 인간의 능력, 그런 것들을 말하지 않겠느냐 하는데요. 그것도 와봐야, 확실하게 다 드러나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육체와 여러가지 한계를 가진 육체와 구별된 요소,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과 육은 하나로 봐야 되요. 기독교에서는요. 성격이 다른거죠. 육은 이 지구안에서 먹고 살고 하는 원소를 섭취하고 원소가 들어왔다 나갔다 해체되는 이러한 차원이라고 한다면 영은 그것과는 다른 성격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 되겠군요. 말을 하다 보니 제 자기를 찾아간 것 같습니다. 이 두가지 다 생명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생명을 말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육적인 생명도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먹고 마시고 하는 그러한 방식이 있는데, 그거는 드러난 방식이구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또한 그것과 다른 방식의 생명의 힘들을 받아낼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 그걸 우리는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이원론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육체가 영혼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육체가 영혼에게 어떻게 하는지 이 기막힌 관계를 우리가 다 해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아까 생령이 된다고 하셨잖아요. 정말 살아있는 영이 되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바로 영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 소중한거죠.

네. 텍스트로 돌아가서요 다음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생물학자들 중에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순전히 생물학적 작용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거든요. 참고적으로 칼 세이건과 그의 아내인 앤 드루얀, 칼 세이건은 죽었고 아내는 살아 있습니다. 두사람이 공저로 한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영혼의 작용도 뇌의 작용이라고 하는데요. 이거는 그 사람의 주장이니까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현재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영적인 현실성을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흙과 영이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게 된다면 구원이 임하는 게 아닌가. 흙과 영의 구도가 여전히 신비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사랑의 현실성을 지향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기독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충분하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부활 생명을 우리가 약속으로 따르고 있다. 정말 놀라운 평화와 기쁨과 희락이 가득한 생명의 영인 성령과 실질적으로 조금도 착오없이 동행할 수 있는 세계. 이러한 기독교 인간이해가 졸속인가요? 생물학적이나 다른 정치적 인간론, 철학적 인간론에 비해서 좀 무게가 없나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독교, 성서적 인간 이해는 얼마든지 그들과 소통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과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죄라고 하는 현실이 있는데 그건 아까 제가 말씀드렸으니까 그만두고요. 결론적으로 그 죄, 기독교가 성서가 기독교가 죄를 말하는 이유가 뭐냐? 죄 자체를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속에 나타나고 있는 이 죄의 존재론적 근원을 말하려고하는 것이면서 더 근원적으로는 그것이 이미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죄의 속성들은 나타나죠. 극복된 거예요. 여러분들은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죄책감을 주는 것 같은 설교를 듣는다면 잘못된 설교입니다. 죄책감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예요.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것을 필요해요. 사회적 책임감, 마이너리티에 대한 무관심을 가지면 안되겠다는 구체적인 책임감을 가지고 결단하고 자기가 그 일에 앙가주망(사회참여: engagement) 참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뭔가 불안하게 만드는 것, 죄인이야. 이거는 여러분 기독교 복음이 아닙니다. 저는 청중을 세뇌하는 잘못된 심리학적 가르침이죠.


결론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어디냐? 잠깐만요. 시간이 다되었지만 고거만 딱 집고 끝내겠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사도신경해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즘 다비아에 제가 사도신경해설을 한장 한장 올리고 있거든요. 별고 그거 보는 분들이 많지 않더군요. 정말 이런 글들을 많이 읽으셔야 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다 놓치는 것 같애요. 판넨베르크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이 핵심인거예요. 이미 극복되었다고 하는 것을 선포하는 거예요. 옳게 해석했다면 바로 그것은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 자유예요. 죽음, 죄,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낭만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이게 안되더군요. 사람들에게. 이로서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다. 신뢰다. 용서받은자, 은총안에 있는 자들이 누리게 될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 이것은 인간에 근거한 자유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죄의식, 한국 기독교에 뿌리내리고 있는 죄의식은 자기를 부인하거나 생명에 대해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왜곡하는 그러한 현실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죄가 뭐냐 기독교가 말하는것은 기본적으로는 이것이예요.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생명에 대한 긍정이예요. 아시겠어요.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주 주일은 합니다. 제가 서울강의가 끝났기 때문에요. 주일날 같은 시간대에 저녁에 만나겠습니다. 촛불 시위때문에 마음이 그렇습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참여도 좀 해보시구요. 질문있으면 다비아에 올려 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