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622) 받아쓰기- 근본주의의 문제점

캠코더를 똑 바로 잘 하구요. 또 잊어버릴 뻔했네요. 네 되었군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네. 우리들이 만날 시간이 오늘 합해서 3번이군요. 다음 목요일과 다음 주일 29일입니다. 오늘도 잘 지내셨죠? 참 이게 시간이 빠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고 하지만 사실 살아있는지 아닌지 조차 확실하지 않는 그러한 세계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디에서도 살아있다고 하는 확실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인제 우리가 바쁘게 살아갈수록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요즘 제가 이렇게 저렇게 일들로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다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삶이 떠 있지 말고 착 안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삶의 뭐라고 표현해야 될지요. 그 미묘한 예민한 고 계기속으로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건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우리가 숨을 쉰다거나 물을 마신다거나 걷는다거나 향기를 맡는다거나 누구와 같이 대화한다거나 순간 순간이 삶이잖아요. 그런 것들을 실질적으로 깊이 느끼면서 살아야 하는데 많은 경우에는 그걸 다 놓칩니다. 대신 우리가 목표로 하는 어떤 일을 이루는 것에만 몰두 하게 되는거죠. 이렇게 참 열심히 살아도 헛수고 인데 자꾸만 우리는 그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목회생활도 그렇고 일반적인 생활도 말할 것도 없고 그렇죠. 어떻게 하면 그런 정신없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을 이루어가는 그 방향에서 그냥 삶 자체속으로 이렇게 자리를 잡는 그러한 삶의 자세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데요. 이것을 참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네 그건 그렇구요. 오늘도 주일인데 여러분들이 정말 교회에 가서 생명의 예민한 부분 그 쪽에 대한 경험을 얼마나 했는지? 그런 것이 궁금하기도 해서 질문을 드리는 겁니다.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없이 가버리거든요. 저의 옛날 신앙생활을 되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저의 신앙생활, 중고등학교 때부터요.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거든요. 평생동안 교회안에서만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계속 그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았습니다. 주일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뺑뺑이 돌듯이 교회 행사에 매달려 있는거요. 예배와 성가대 연습 각종 회의 기도회 이런 저런 자치단체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회 회의 그리고 어떤 보고 하는 것들, 계속 그런 것들의 반복이더라구요. 기도모임이라고 하는 것도 행사를 위한 것으로 떨어질 수도 있구요. 예배자체도 그렇게 우리들이 목표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고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하고 나면 허전하죠. 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남는 거라고 해봐야 통계 숫자죠. 몇 달지나니까 몇명 늘었다. 어떻다. 그런거죠. 우리의 영성, 우리의 신앙, 정말  삶의 밀착하는 고 부분이거든요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다 놓치고 말아요. 이런 것들은 영적으로 성찰을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이 개인적으로 인격이 괜찮다고 하더라도 이건 주어지는 건 아니예요. 흡사 클래식 음악을, 그거는 거기에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훈련도 받고 계속 음악도 듣고 클래식 음악과 밀착한 시간들이 많아져야 되는 것처럼 그리고 시를 쓰기 위해서는, 제가 나도현 선생의 몇가지 시에 대한 이야기를 몇가지 드렸는데요. 그런 것처럼 집중적인 훈련 그런 것들이 없으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제가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지금은 좀 그래도 낫습니다. 허둥되지 않고 나이도 좀 들기도 했구요. 신앙적으로도 훈련도 좀 쌓여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내가 어떤 교회일이나 다른 일들이라도 내가 목표로 하거나 계획했던 일들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될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고 그냥 내려놓는거죠. 자유롭게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떤 순간에는 어떤 일에 휩싸여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면 정말 소비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늘 생명과 밀착하여 살기는 쉽지 않죠.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죠. 생명과의 밀착, 연애할 때 남자 여자 상대방에게 같이 밀착하듯이 생명과의 밀착,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조금 낯설죠. 생명과의 밀착, 이건 뭐 신앙적인 것보다 예술적이고 철학적인가보다 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만큼 예술적인게 없고 철학적인게 없고 기독교 신앙만큼 인문학적인 세계 이해가 없는 거예요. 생명과의 밀착, 이건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지 아시죠.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기 때문에요. 6개월 정도 강의를 들었으면 정용섭 목사의 세계관, 어떤 신앙, 철학, 신학 이런 것들을 대충 이해하셨을 겁니다. 제가 뭐 뛰어나다 아니다 두 번째 치고 나름대로의 색깔을 갖고 나름대로 일관성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전달되었거예요. 제가 어떤 주제를 말하기 시작하더라도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인가를 좀 아셨을 겁니다. 이제는 6개월 정도 공부했으면 저한테서 들을 게 없어요. 사실은, 생명과의 밀착, 이 생명이라는 것이 바로 성령의 문제구요. 삼위일체론적으로 또 애기해봐야 하겠네요.

이게 신앙훈련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여러가지 다른 각도로 보기도 하고. 또 비슷한 구도라고 하더라도 또 해보고 해보고 하는거 말이죠. 피아노 배우기 위해서는 스케일을 계속 연습해야 하거든요. 다른 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그리고 반음 올려서 계속나간다거나 거꾸로 내리고 자유자재로 일종의 테크닉인데요. 그러한 스케일 연습을, 그거는 사실 음악의 연주자의 높은 단계에 올라가도 그건 합니다. 여러분들이 볼때는 세계적인 연주자는 아무 때도 나와서 연주를 잘 하려니 하는것은 더 착각입니다. 그런 사람들 일수록 더 연습을 해요. 이상하죠?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건 예민한 예술과 문학이나 그림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계속 그렇게 연습합니다. 물론 그래도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그러한 글들을 많이 읽는 경험이 있을 겁니다. 연주하기 직전에 한30분동안에 뭐하느냐? 이런 것들 말이죠. 그런 시간에 옆에 사람하고 잡담하다가 갑자기 나가서 연주를 못한다고 합니다. Concentration 첼리스트들도 마지막 나가기 까지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을 합니다. 그러한 훈련들을 고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계속하는 거예요.

이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도 신자들이 놓치고 있거든요. 우리 기독교 신앙이 정말 영성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여러분 영성,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생명이고 영 생명 성령 하나님 창조 종말 이게 정말 전체 세계를 말하는 것들이거든요. 이 영성을 완전히 싸구려 상품처럼, 어떤 도구처럼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조금 신앙의 연조가 깊으면 훈련 안 해요. 연습을 하지 않는 거죠. 기본적으로.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니까. 네 그거는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술도 그렇고 기독교 신앙도 그렇고 사실 끝이 없는 거거든요. 그거는 자기가 들어가는 것만큼 더 작은 세계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거죠.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대충해놓고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면 내가 좀 하는가 부다 생각하는데 이런 것처럼 어처구니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상당한 경우 이렇게 되는데요. 일걸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비주의자. 어떤 토마스 마튼이라든지 마이스트 엘카르트라든지 C.S. 루이스 같은 사람들을 포함해서요. 신학자들, 정말 살아있는 신학자들 죽을 때까지 공부하거든요. 일반 평신도들도 이러한 영적인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긴장감, 그건 자극이죠. 일종의. Spiritual motivation 영적인 동기화를 시키는 사람이 바로 목사여야 합니다. 지도자들이거든요. 이렇게 되려면 목사들이 그렇게 되려면 일단 자기가 영의 미묘한 세계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고도의 바이올린 연주자가 그 소리와 음악의 세계에 들어가서 남이 이해하든 못하든 깊이 속에서 자유하고 거기서 자유 하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구도자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처럼 지도자들은 그래야 합니다. 그게 이제 살아있다고 하는 거거든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아시겠죠. 여러분들은 경험하실 겁니다. 이게 없게 되면 그게 일종의 매너리즘이 되는거죠. 신앙의 매너리즘, 이게 정말 죽는 길입니다. 이게 한국 교회에 어느 정도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지 아실 거예요. 옆으로 흘렀는데요.

다시 가서요. 이런 훈련이 필요한다는 것을 주욱 말씀드렸는데 이러한 살아있는 영성, 생명의 에너지, 그리고 사유, 그리고 설레임, 그리고 어떤 놀라운 경험들, 어떤 충격, 내가 존재하고 내가 무로 사라지는 그러한 경계선,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는 경험들, 그런데서 모든 우리앞에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는 그러한 경험들, 이런게 이제 자연주의적인 영성이기도 하지만 기독교 신앙안에서 보면 바로 영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게 살아 있어야 늘 흔하게 이야기하듯이 기쁨이나 자유 이럴 때만 사실 평화가 가능합니다. 샬롬이라고 합니다. 에이레네. 샬롬. 이거는 내가 생산해 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서 영적인 미묘한 예민한 단계에 들어가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 잘 몰라도 그냥 즐겁다. 재미있다. 생각하실 분이 있어요. 그러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게 정말 생명의 주관자인 성령이 우리의 영과의 소통을 통해서 제공해 주시는 내면의 기쁨인지 아니면 어떤데 취해갖고 어떤데 마취 되서 그냥 흥분하고 있는 건지. 아 그렇군요. 기쁨과 흥분은 다른 거거든요. 흥분하면 기쁜 것 같이 느껴지는데요. 기쁜 것하고 흥분하는 것은 다르죠.

웃기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목사님 이름이 뭐죠? 장경동 목사님. 자꾸만 저는 사람 이름을 잊어 버린단 말이죠.  개인적으로 성품이 괜찮으신 분 같은데요. 그런데. 이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성품과 인격이 좀 괜찮은 것하고 기독교 신앙을 바로 아느냐 모르느냐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이 괜찮아도 근본을 모르면 그건 인제 왜곡의 길을 갈 수 밖에 없거든요. 요즘 제가 보기에는 점점 더 노련해지는데. 청중들을 재미있게 만드는데 노련해지는 데 기독교 복음을 너무 희화화 하구요. 그냥 강압적이라기보다도 조금 틀려진 상태에서 선동적이구요. 신자들을 흥분시키는거예요.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것이 밋밋하니까 신앙생활도 그렇고 이러한 흥분된 메시지에 혹하게 됩니다. 그런 거로는 우리들에게 전혀 참된 기쁨이 가능하지 않는데 참된 기쁨이 없으면 사이비 기쁨인 흥분에 우리가 빠지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문제예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화끈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희열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정도를 가야 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는 안 되어 있습니다.

이 지금요. 너무 굉장히 산만하게 교회가 운영되어 있어서요. 로마 가톨릭하고는 반대로요. 어디서 부터 손되어야 될지 고쳐나가야 될지 감을 잡기 힘든데요. 일단은 하나 하나는 제가 말씀드릴 수 없구요. 일단 모든 기독교 신앙 생활을 좀 조용히 하자. 조용히 만들 필요가 있어요. 조용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설치는 것 같애. 너무 의욕이 많아요. 세계 선교부터 교회당 짓는 것, 태신자 전도 프로그램, 등등 이외 여러가지 많은 것, 너무 많은 것 우리가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이 거의 한국 교회안에 구조화되고 있어요. 아시죠? 그러니까 일반 신자들은 이게 옳은지도 그른지도 참 모릅니다. 이게 참 비극인데요. 모르고 그냥 구조가 그렇게 흘러가니 그러러냐 하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도 본인들이 집어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거 좀, 모든 일을 좀 줄이는 것, 예수님께서 복음서에도 말씀하셨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거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종교적인 겁니다. 종교적인 짐이예요. 이게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을 힘들게 한 거거든요. 구체적으로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안식일에 무엇을 해야되고 하지 말아야 되고. 수많은 율법들을 지켜야 되는데 사실은 민중들을 지킬 수 없죠. 그러니까 더 힘든거예요. 지킬 수 없는 것들을 지키라 하니까 민중들을 불안한거죠. 불안하더라도 그게 절대적인 이념이니까 거부할 수 없고 그러한 상태로 유대교가 계속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은 바로 그러한 업적, 자기 의 그러한 것들을 내려놓아라.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는 그러한 수고와 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가지 메타노이아 회심이거든요. 이게 무슨뜻인지는 또 이야기하지 않겟습니다. 메타노이아 회심 이게 왜 어렵냐 하는 것도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쉬운데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어렵냐하는 것도 다른 데 한번 찾아 보십시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기 때문에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 한국 교회 교인들이 너무 수고합니다. 이걸 다 신앙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신앙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될까요? 자기 성취, 자기업적의, 자기성취, 종교적 만족감 그런 것들이 너무 많죠.

일단 일들이 너무 많아요. 좀 내려놓아야 하는데 거의 일주일 내내 교회가서 살아야 되고 또 주일날은 거의 아침부터 밤까지 있어야 되고 이게 어떻게 신앙생활이겠습니까? 그날은 말 그대로 쉼이 되어야 되는데 신앙생활을 정말 쉼이라고 생각해 보신적이 있어요? 정말 쉼. 안식일, Sabbath 이거든요.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최소한도 일주일에 하루만은 외국인들과 노예들 그리고 짐승들까지 하루는 쉬게 해야 된다는 일종의 노동 해방 선언이거든요. 이게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은 많은 신자들, 목사들에게 하나의 짐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때요? 한번 솔직하게 여러분들에게 질문해 보시죠. 내 신앙생활이 정말 자유, 쉼, 안식 정말 평화, 오고 있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렬한 설렘의 희망들 그런 것들로 가득하신가요? 많은 경우에 교회일이 짐이 되었을 겁니다. 이건 어딘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겁니다. 그런데 이게 왜 문제인지도 사람들은 잘 모르죠. 왜냐하면 게속해서 그렇게라도 해야 된다고 계속해서 봉사하고 충성해야 된다고 세뇌 받듯이 들었거든요. 그런 점에서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불쌍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목사님들도 또 불쌍하죠. 목사님 스스로 들도 다 그렇게 사시니까. 구조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되어서 살수 없는거예요. 중국 속담에 있듯이 호랑이 등에 타서 다 달려가고 있습니다. 내려오고 싶은데 내려올 수 없죠. 이러한 한국 교회 같은 목회 구조속에서 어느 목사가 속도를 늦추어서 목회를 할 수 있겠어요. 어떤 특별한 경우 빼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서로 경쟁과 이러한 악순환속에서 목사도 힘들고 인격은 괜찮아도 이 구조속에서는 목사 혼자서는 움츠리고 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신자들도 여전히 힘들어도 또 하구요. 그렇습니다.

여름 성경학교 형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거야 각 교회마다 형편이 다 있을테니가 그렇게 하는데요. 뭐, 과하지 않게 방학 동안에 학생들에게 집중적인 신앙경험, 좋은 뜻으로요. 생명 경험, 인간다음 친구들끼리 연대성을 그런 것들을 교육시키는 계기로 삼는다며 괜찮은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그냥 행사위주로 가게되고 이거는 뭐 교회의 교육문제 전반하고 연관되는데 여름에 하는 몇 가지 행사에 교육비의 대다수가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은 좀 고려해 봐야 되겠지요.

그래서 생명이 성령이구요. 이건 여러분 성령이 누구냐 여러분 볼 수 없어요. 기도 많이 하면 뜨거워진다. 그런 것을 자꾸만 성령체험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일련정종, 남묘호랑교 그런 사람들도 다 뜨거운 경험하거든요. 대나무 하나만 붙들고 계속 흔들어 보십시오. 사람은 거기에 집중되어갖고 몰아적인 엑스타시 할 수 있어요. 그러한 무의식, 심리적 감정, 감정의 열광적인 상태와 성령과 너무 일치시키지 마십시오. 성령은 생명의 문제이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령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제발 그것을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우리는 생명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먹고 사는 문제로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와 연관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보기 때문에 이러한 성령이 활동하는 생명의 깊이라고 하는 것이 말자체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적하고 연관되는 것이거든요. 이런것들을다 통전적으로 포괄적으로 묶어서 생각하는 능력은 신학적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 단편적으로 생각하기 대무네 결국 외골수로 나가게 되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생명과의 밀착이라고 하는 말을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중이거든요. 우리의 삶이 정말 그래야 되는데요. 생명과의 밀착이 되어야 되는건데요.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관점이라고 하는 거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 생명의 깊이에서 활동하는 영과의 교제다. 또 우리가 성령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거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어떤가요? 관념적으로 들리시나요?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실제적으로 느껴지시나요? 네 그렇구요.

두 번째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이해하는 거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런 쪽으로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 것을 넓혀가야 되구요. 이건 뭐 기독교에서 많이 이야기하니까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창조자이신 아버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죠.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생명의 깊이를 우리가 배우고 느끼고 그리고 거기서 하나되는, 그러한 삶들이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있어야 되는 거죠.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루를 살았다 하더라도 허송세월 하는 겁니다. 요 제가 오늘 강의를 해야 될 거 할 것 안하고 계속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요게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몇년 더 살지 그건 두번째로 치고 매 순간마다 생명과 밀착되어 살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 말입니다. 네 잠깐만요. 날씨가 더워서 윗옷을 벗겠습니다.

자. 오늘 제가 두 가지. 강의는 오늘 못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야기 할 것이 있어갖구요. 두가지. 두가지 하기 전에. 어떻습니까? 제가 좀 편해 보이지 않아요. 제가 오래 묵은 숙제를 다 했습니다. 설교집을 오늘 발송 (준비를) 했거든요. 잘 안보이죠? 그 날이 오면. 뭐 그렇게 세련되지는 않았는데 그런 대로 무게 있어 보이는 설교집입니다. 두께가 좀 많이 나가요. 전체로 해서 477쪽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미리 신청하신 분들 박스로 꾸릴 것 꾸리고 봉투에 넣을 건 넣어서 다 준비를 했습니다. 내일 택배회사에서 오면 가져가면 됩니다. 상당히 늦어져서 상당히 불편했었는데 다 끝내고 나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네. 오늘 제가 두 가지 좀 쇼크를 받았다고 할 까요.  약간 충격적인 그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 먼저 말씀드릴까요? 설교집 이야기했으니 요걸 먼저 말씀드려야 겠네요. 오늘 저녁에 어떤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제 새로 나온 설교집과 설교 비평 3집 한권을 전화로 신청을 하시더군요. 평소에 다비아 들어와서 글 많이 읽는데 아이디 그런 것도 없고 즐겨 읽지만 신청은 못하고 전화만 하신다 그러더군요. 몇년전에도 한번 통화한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아주 좋은 뜻으로 말씀하시면서 매 주일마다 저의 설교를 들으신다고 그러시네요. 하시는 말씀이 설교를 들어도 자기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 그 순간 약간 띵했습니다. 좋아서 설교도 읽고 글도 읽으신다고 하는데 아 목사님이 설교를 읽거나 듣고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다 하시는 것은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 약간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로 생각이 되더라구요. 하나는, 제가 글을 쓴다거나 설교의 논지 그거는 분명하니까요. 다만 전달하는 방식이 목사님에게 늘 하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낯설어서 내용조차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여튼 내 전달방식이 좀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구요. 또 하나는 그 목사님이 기독교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기독교를 다 아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목사. 굉장히 솔직하신 분 같애요. 그런데 저의 설교와 글이 나쁘다고 말씀하신 뜻은 아니거든요. 계속 관심을 갖고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시는데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차원이 높다는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러시는 거예요. 목사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의 근본을 잘 모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일반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나 생각을 했어요. 고 하나구요.

또 하나의 충격은 오늘 교회 몇 몇 방문하신 분들이 있었어요. 몇몇분들 이렇게 들었는데요. 그 교회 형편들. 좋은 분들.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잖습니까? 통해서 들은 교회형편이라고 하는 게 정말 이렇게 말씀드려서 어떻게 되나요? 교회가 조폭같더라구요. 폭력을 휘둘른다는 것이 아니라 아 조폭이라기보다 목사가 교주와 같더라. 마음대로 하더군요. 강단에서 누가 헌금을 몇 천만 원 드렸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 교회에 뭐라고 그래요. 뭘 그 기록을 세웠다. 이번주 헌금의 7천이면 7천 1억이면 1억 기록을 세웠다 이런 방식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교회강단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질 수 있는 그러한 분위기라고 하는 걸, 제가,  아주 큰 교회거든요 상당히 큰 위기로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렴풋이 교회마다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직접적으로 당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좀 충격이었습니다. 이거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말씀드렸군요.

오늘 저는 한국 교회 문제, 지난 목요일날 공부한 것에 한 대목을 말씀드린다고 했어요. 한국교회의 특징이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 도대체 이게 뭐냐. 아까 제가 앞시간에 주욱 이야기한 많은 문제들, 지금 있는 이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다 근본주의라고 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좀 설명을 해드릴께요. 근본주의특징은, 이 이아기는 제임스 바이 이야깁니다. 성경 무오설에 빠져 있는 거죠. 성경은 문자적으로 하나의 오류도 없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그러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신앙적인 논의를 할 때 성서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예로 드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에 있다 이런 식으로만 하는겁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구요. 이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그것을 그냥 진리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제가 고 이야기를 아. 다시요~. 고렇게 문자적으로만 성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에 생기는  문제가 뭔가 제가 두 가지로 설명을 했는데 제가 낙서를 해서 잘안보였군요.

하나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성서를 토대로 둔 사이비나 이단이 많다는 겁니다. 성서가 해석되지 않고 문자적으로 인용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현령 비현령 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사이비들이 많이 출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설교자의 카리스마가 허물어집니다. 성서가 성서에 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거니까 다만 그것을 말하는 기술이라든지 예화를 감동적인 것을 든다거나 조금 치장을 했을뿐이지 성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전하니까 평신도들이 설교자의 카리스마, 이 카리스마를 은사라고 하는 거니까요? 강압적이고 권위적이고 그런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카리스마의 원리가 배타적인것, 그러니가 서로 월권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까 설교자는 고유한 카리스마가 필요한데요. 이런 것을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 웬만큼 교회 생활 오래한 사람들은 목사가 본문과 제목만 알면 그 목사가 어떤 설교를 할지 감을 잡고 있을 수 있을 정도가 된것이죠. 이런 것들은 다 성서 무오설에 근거한 문자주의가 만들어내는 교회안에서의 문제들이다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요. 이러한 성서 무오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현대신학과 성서비판의 역사비평이죠. 이런 것들을 불온시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 그렇죠. 현대 신학이라고 할것도 없이 그냥 신학 무용론에 빠져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기독교 신앙이 어떤 영적이라기 보다도 그게 아니라 기술적인 것, 신앙이 기술이 되어 버린거죠. 목회도 일종의 테크놀로지가 되어 있는 것 처럼요. 많은 사람들이 일반 평신도들도 늘 그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신앙을 고 언저리에서만 생각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많이 읽기는 읽는데 교회에서 노회 여선교회장, 장로도 하고는 하는데 신앙에 대한 노하우에 대한 것은 많은 것을 알고 있기는 하는데 그 사람들이 별로 영적이지 못합니다. 영적이라고 하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뭐죠? 영적이라는 말을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겠죠? 대답해보세요. 그냥 인문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생명, 생명지향적, 이걸 늘 같이 연결해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생명지향이지 못하잖아요. 교회 오래 생활한 사람에게서 생명이 풍부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굉장히 자기 중심적이거든요. 교회 오래 다닐수록 더요. 신앙이 우리 생명을 파괴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종교 양면성이 있는 것 같아요. 종교가 사람을 살리는 길로도 가구요. 사람을 죽이는 길로 가기도 하구요. 이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일종의 근본주의, 신앙 근본주의, 근본주의를 다른말로 하면 뭘까요? 근본주의를 다른말로 하면 어떨까요? 비슷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문자 주셨구요. 고맙습니다. 원리주의, 원리는 곧 기술이거든요. 제가 신학은 공부한 다음에 다 잊어 버려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한적이 있을겁니다. 신학은 원리는 아니기 때문에, 신학이라고 하는 그 통로를 통해서 우리의 신학적 틀을 넘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성령의 통치에 민감하게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영적인 태도, 영적인 감수성,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건 다른 음악 공부도 마찬가지 잖아요. 모차르트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적으로는 그거를 통해서 음악에 대한 태도를 배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최소한도로 그렇게 우리 자신들을 틀 속에 가두어서 근본과 원리에 머무르지 않고 정말 자유로운 영에게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걸 여러분, 지금 한말도 중요한데요. 저 나름대로 그렇습니다. 나를 맡긴다고 하는것, 나를 맡김이라고 하는거요. 이거머, 설교조 비슷하긴한데. 나를 생명의 영인 성령에게 온전히 맡깁니다. 창조와 종말의 영에게 온전히 맡긴다. 그렇게 하려면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의 통치가 무엇인지 그거를 이해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억지로 하면 자꾸만 힘이 들어가요. 교회생활도 자꾸 열심히 열심히 해보세요. 그 열심이라고 한 게 자기 확신에 떨어지게 되는 거죠. 이건 여러 가지 현상에서 나타나는데 그건  길게 말씀, 아까 이런저런 것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예민하게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자기를 온전하게 수영을 하기 위해서 물에게 자기를 맡겨야 되듯이요.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잘 못하구요.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기를 의지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 나라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나 중심으로 생각하거든요. 우리가 하루빨리 자기중심으로부터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자기 한번 쓰겠습니다. 힘이 들어간다고 하죠. 자기집중. 이걸 조금 심리학적 용어로 말한다면 자기연민인거죠. 성서적 용어로 발한다면 자기 의죠. 자기의, 자기집중, 자기연민, 자기집중 우리는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게요. 이상한 것이 아니예요. 고상한 사람들 있죠. 뚫고 들어가면 이게 상당히 강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다 완전히 내려놓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깃털처럼 자기 존재 자체가 아주 가벼워 질 수 있을텐데 그게 아마 완전하게는 안될겁니다. 그거는 포기하는게 낫겠구요. 그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기가 너무 무거우면 삶 자체가 생명과 멀어지는 거거든요.

자기집중이 왜 문제냐 하면, 그리고 이런 것들을 왜 죄라고 하느냐 하면 왜 그럴까요? 말씀해보세요. 한학기가 다 끝날 때니까 질문해 좀 해보겠습니다. 왜 자기집중, 연민 이게 죄거던요. 하마르티아. 성서에서 말하는 죄거든요. 왜 성서는 이걸 죄라고 애기하나요? 어느 학생이 제가 A플러스 줘야 되겠는데. 대답 나오면. 대답은 다른 거도 있을텐데. 하여튼 제가 생각하고 있는 대답. 왜 그럴까요? 성서가 그렇게 죄라고 애기하잖습니까? 이런 것들이요. 이유가 있을거 아네요? 왜 그럴까요? 김현혁. 네. 김현혁. 대답들이 아 전부다 훌륭한 학생들이네요.  이런 것들이 생명을 질식시키고 파괴하고 질식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너무 설교조죠. 그런데 보세요. 우리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잘 더, 성서는 더 심층으로 들어가서 보는거예요. 이 방식으로는 결코 인간은 생명을 완성할 수 없다. 이럴수록 생명에서 멀어진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집중을 하고 있는 한, 자기 연민속에 빠져 있는 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들에게 들어올 수 있겠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생명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뭐 이 관계를 제가 사실 많이 설명해야 될 부분인데 고만하겠습니다. 아마 대충 아실테니까요.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죄 죄 자꾸만 애기 하잖아요. 그런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런 관계를 잘 이해해야만 성서가 해석되는거지. 그렇지 않고 뭐 잘못했어 뭐 잘못했어 맨날 뭐 잘못했어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건 큰 오해입니다. 그건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닌거예요.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하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은 책임을 져야 하는거예요. 무책임하게 사는 것은 합리화될 수 있나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생명의 틀안에서 이해를 해야 되는데 거기다 한마디 더 보충하면 하나님을 우리가 아직 완전하게 모르듯이 그 중간에 있듯이 종말이 되야 하나님이 확연하게 실체를 드러내듯이 생명도 아직 우리가 다 모르거든요. 종말에 가서 생명이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생명이 잠정적이고 유한하고요.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관점만 아니라 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구요. 그건 부분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 생명이 우리들에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들어와 있는데 거기에 의존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을 뿐이죠. 그러한 완성된 생명이 우리들에게 올때를 기다리고 삽니다. 그 전체 역사를 통해서 생명을 완성한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죠.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생명을 완성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게 잘 안되는거죠. 집중으로부터 벗어나고 자기연민과 자기의로 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게 죄인거죠. 어거스티의 표현을 빌면 그게 원죄인거죠. 숙명적으로 우리가 거기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죄가 실질적으로 극복되지 않아요. 그냥 죄가 없다 그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거죠. 그게 칭의론인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기독교 신앙이 굉장히 세밀하죠.  심층적이죠. 그렇게 못 느끼세요. 칭의론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요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연관되는 문제이거든요. 왜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영성적인 신학의 위인들이 칭의론을 이야기했는가 하면 많은 사연들이 신학적 사유들이 함축되어 있는거예요. 그거를 우리가 충분하게 속속들이 이해하고 따라가야만 이런 걸 중심으로 해서 다른 문제들까지 설명할 수 있는거죠. 참 기독교 신학이, 이게 그렇게 만만한게 아닌,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요.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현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고 아주 현실적이고, 심층적이고, 궁극적이고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현실적이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네. 그러니까 우리 근본주의 신앙에 딱 묶여 있어서 신학적 훈련을 전혀 못하고 성서를 역사적으로 전혀 비판할 줄 모르고 성서에 신화가 있다고 하는 말 한마디하니까 신학자들도 나서서 정목사가 성서를 신화로 생각한다 이렇게 트집 잡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요 조금 당혹스러운 거죠.

마지막으로 이 근본주의자들이 비록 그런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현실적이고 탈사회적인 현상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소박하게 개인적인 신앙안에 들어있다고 한다면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경우에 근본주의자들은 배타적이예요. 굉장히 독선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게 한국 교회 교파들이 백 수십 개로 갈라지게된 근본적인 이유죠. 자기들은 옳다고 생각하는거예요. 그러니까 갈라질 수 밖에 없는거예요. 이걸 갖다가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요? 장로교가 백 몇개로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특별히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쪽에서 더 많이 갈라지거든요. 다 근본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그런 쪽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네.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제가 완전히 매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안에 있는 신자들 다들 건전하고 괜찮습니다. 조금만 가르치면 이 세계를 눈뜨고 성서의 놀라운 세계도 알아가고요. 정말 생명지향적으로 가면서 우리들에게 오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 종말론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데요. 고 토대는 되어 있는데 한꺼풀  못해, 뭔가 가려져 있어요. 심지어 대한 성서공회 말고 성경공회가 또 생겼잖아요. 이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교단들이 모여서 성서공의회, 이건 자유주의적이다. 그러니까 성서를 성경. 이게 그러게 중요한건지 말도 성경이라고 바꾸고 자기들 성경을 또 번역을 또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해야 나가야 하는데요. 자꾸만 이렇게 찢어 발기구요. 성서마저도 그렇게 나누어, 공회마저도 나눠가고 있다고 하는 것. 이 현실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21세기에 개신교회가 비전이 있을까요? 이미 20세기말부터 한국교회가 위축되고 있는데 이게 가속도가 붙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조폭적이고 목사가 교주처럼 행세하는 되는 말 안되는 말 막 지꺼릴 수도 있는 풍토가 된다고 하면 어떻게 제대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교회에 붙어 있을 수 있겠어요. 안타까움이 있어서 제가 드리는 말씀인데요.

예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겠구요. 다음 목요일, 26일날 뵙겠습니다. 다시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말씀드린 고 애기를 해야되겠군요. 생명지향적이란 이 말을 곧 생명과 밀착하자.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래야지만 우리의 70년 80년 삶이 의미가 있고요. 종말론적으로 우리들에게 오게 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준비하게 될 사람들의 마땅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삶이 있음에 기쁘고 즐겁고 평화가 우리 안에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여러분 그렇게 사십시오.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