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24강(080626) - 21세기 한국교회의 전망과 희망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창문을 내가 좀 열어 놓았는데 멀리서 찻소리가 들리네요. 개구리 소리도 들리고 여러분에게 강의가 방해가 되지 않을는지 모르겠군요. 괜찮으리라고 보구요. 날씨 시원하고 좋습니다. 여름인데 아직 본격적인 더위는 전혀 오지 않았는데요. 문을 닫으면 더울 것 같기도 하고. 열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제가 캠코더를 정말 안 틀었네요. 잠간 기다려주세요. 네. 아 혼자서 이거 북치고 장고치고 하려니까 자꾸만 놓치네요. 조금 맞춰 놓고요. 조금 아까까지 내가 준비를 해놓았는데 단추 누르는 것 깜박 했습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지나가지 않았어요.

어제군요. 수요일 날 성경공부겸 기도회겸 교우들 또 시간 있는 사람들 얼굴 보구요. 그런 모임을 갖는데요. 수요일마다 시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들어가기 전에 어거스틴 기도문을 같이 읽고 나눕니다. 일전에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 한국교회는 너무 자유기도가 많은데 그게 좋은 점도 많이 있지만 성문기도, 특별히 영성의 대가들이, 신학의 대가들이 먼저 고백한 정형화된 기도문들을 읽고 그것으로 기도드리는 것도 참 좋다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성서가 다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고 자유롭게 자기가 성령과 소통하며 기도드리는 단계, 그런 점도 좋고 그러나 저희 입장에서는 누구나 다 그러한 단계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전에 강의 앞부분에서서 어떤 분이 관상기도 이런 것들도 질문한 적이 있잖아요. 한국 교회에 그러한 기도운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한국교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닌데 전 세계 기독교 운동중의 하나인데 한국 교회는 그것이 보편화 되고 있어요. 기도원이라고 하는 이러한 한국 교회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되지는 않았거든요. 그쪽으로 자꾸만 이야기 나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성문기도가 참 중요하다. 우리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기도를 많이 일고 외워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좋은 기도를 읽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뜻으로 수요일에는 기도를 자유기도 하지 않고 어거스티의 기도문을 채 보여드렸죠. 어저께 본 대목 중에서 너무 좋아서 여러분에게 꼭 읽어 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이 이렇습니다. 내 영혼에게(나는 내 구원이라 이르소서) 다섯 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것은 다 줄이고 마지막 연, 다섯째 연만 읽겠습니다.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육신이 죽게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육신이 죽게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전달이 되었나요?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하고 이어서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보면 죽거든요. 볼 수는 없어요. 왜 볼 수 없는지는 제가 또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죠? 강의 중간에 딱 고 부분이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이야기는 많이 했을겁니다.

지난 6개월동안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쏟아놓았습니다. 주로 기독교를 말한다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만 이거 커다란 줄기는 이것을 따라갔지만 그러나 내용에 들어가서는 그러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을거라고 보는데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결정된 준비된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순간에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많이 전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들이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를 말한다 책속에 나온 것보다 실질적이고 내용도 많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 강의를 사티아님이 녹취를 해 주었기 때문에 거의 50회 가까이 되거든요. 50시간을 한거죠. 일주일에 두번을 했으니까요. 6개월입니다. 한 시간 할때마다 평균 200자 원고지 90에서 100매가 되더라구요. 평균 잡아서 95매 그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다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만요. 그렇게 되면 제가 보기에는 4천매가 될 것 같은데 그걸 불원간에 책으로 묶어 낼까 합니다. 보통 책사이즈로 하게 되면 너무 두께가 두꺼워지니까 A4 크기로 해볼까 합니다. 동영상 강의 들으신 분은 원가 그대로 하고 안 들으신 분들은 만원 정도 받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몇 백권 출판하지 않고 이번에는 한정 출판으로요. 한국에서도 소량 인쇄를 해줍니다. 열권이상만 되면 파일만 있으면 얼마든지 출판이 가능해요. 그러니까 4,50권 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요것을 종교 개혁 주일 기념으로 할까요? A4로 400쪽 정도 되는 이러한 우리 동영상 강의로 묶어 낼까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짜임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을 한 것을 녹취한 것은 문어체로는 조금 부족하거든요. 구어체가 많이 있어서 제가 그것을 조금 손을 좀 보기는 해야 되겠구요. 완벽한 문장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볼때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기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이 자꾸만 옆으로가죠? 미안합니다. 왜 하나님을 보면 우리가 죽냐 하고 생각을 했을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냥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또 하지 않겠습니다. 한 이야기 또 자꾸만 하면 아는 사람은 지루하니까. 그런 것을 혼자 생각할 수 있어야 신앙안으로 들어가는거예요. 이런 것들이 꼭 신학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가장 기초적인 건데요. 그러니까 성서와 기초적인 교리가 나온 것이 허투로 나온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거는 이 세계, 역사, 시간, 인간의 삶, 죽음, 전반적인 거를 직관하고 뚫고 나간 사람들의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나온 진술들이지 아무 바탕도 없이 그냥 기도하니까 툭툭 튀어나왔다 그냥 영감 받아서 썼다 절대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그러한 진술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예요. 다 그럴 만한 토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6개월동안 강의를 들었는데 그걸 혼자서 풀지 못한다면 강의 헛들은 겁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그렇게 기도합니다.

얼굴을 좀 제발 돌리지 마시라. 내가 당신을 보고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한다. 앞에서 죽는 거하고 뒤에서는 산다고 하였어요. 육신으로 죽는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육신이라고 꼭 영육 이원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고요. 우리가 죽으면 해체되어야 할 우리의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런 것을 이야기하겠죠. 그건 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의 생명안에 들어있는 이것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생명의 부분들을 이걸 육이라고 육신이라고 할 수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그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보면 죽는데요. 살기위해서 주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저는 어거스틴이니까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는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앞의 네 연이 주욱 발전되면서 마지막 결론적으로 이런 기도를 드린 거예요. 아주 신학이면서 영성적인 기도 참 좋습니다. 다시 한번 요 연만 읽어 보겠습니다.

나에게서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서 육신이 죽게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아멘

여기서 제가 한번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은요. 어거스틴이 여기서 주기도를 드리고 있는 주님은 바로 어떤 분인가 하는거죠. 우리가 보면 죽는 분인데 그러나 결국 우리가 죽어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그 분, 그 분이 누군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죠. 그거는 그만큼 불확실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거죠. 궁극적인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분 이라서요. 그분은 우리가 더 여전히 그분에게 귀를 기울여야 되구요. 계속 어떤 것을 말씀하시니까요.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생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도록 영적인 훈련이 필요한 거죠.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러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어거스틴의 기도문이라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지막 강의입니다 정식으로는요. 6워 26일 약속한 6개월이 다 지났습니다. 이렇게 빨리 세월이 흐르는 거군요. 다음 주일 저녁은 보충강의니까요. 정식강의로는 오늘 끝나는데요. 21세기의 한국교회의 전망과 희망, 전망으로 볼 때는 별로 밝지는 않는데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도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하니까 희망을 좀 노래하자는 겁니다. 시편기도들도 늘 절망하고,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절망하고 무죄한 자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은 죽었다고 잠잔다고 하는 그러한 냉소가 가득한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 이런 것들을 내다보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 그러한 희망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오는 거거든요. 우리는 막연한 현실을 정확히 직관할 수 있어야죠. 그럼과 동시에 그들을 뚫고 넘어서 우리가 보는 암담한 혹은 칙칙한 그런 것을 넘어서 우리들에게 오는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말아야 되겠죠.

한국 교회의 희망은 있는가 소제목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글쎄요. 다할 필요는 없기는 한데 일단 6.25이후 남북전쟁 이후 50년동안 한국 교회특징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10년 단위로 간략하게 정의하겠습니다.

50년대 제가 태어난 연대군요. 제가 53년 출생이니까? 여기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 5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 있죠. 같은 동지들입니다. 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많이 후배고. 50년대 그때 신생아로 태어나서 53년도 휴전될 때니까 그때 태어나서 살아있다는 게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죠. 50년대에는 한국 교회가 아주 어려운 상태였구요. 그래서 아주 열광주의적이고 묵시적인 성격을 띄었습니다. 상당히 내세지향적인 그러한 신앙 성격이었습니다. 그건 식민지 시대부터 계속 나온 그러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흘러서 박태선장로의 전도관이나 문선명의 통일교 운동이 이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상당히 크게 열매를 맺기 시작했는데 이런 것들이 다 한국 교회에 뿌리가 놓여 있는거죠. 이단들의 발흥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 큼 그 종교가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라는 증거이거든요.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가톨릭보다 개신교에 사이비이단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적이 별로 건강하지 못한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까 이단과 정통하고 사이가 경계가 분명하지 않는거죠. 서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게 어느정도인지 오늘 제가 말씀드리지 않겠어요. 정통교회안에 사이비성이 한두가지 입니까? 하나의 현상으로만 놓고 본다면 똑 같습니다. 다만 그 안에 교리적인 차원에서 정통의 교리를 어느정도 잡고 있느냐? 아니면 점점 더 청중들이 원하는 쪽으로 갔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냐 그 차이가 있을 뿐이죠. 50년대는 내세지향적이고 초월적이고 그러한 성격이었구요

60년대는 분열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1959년에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었던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기장과 예장은 그 앞서서 분열되어 있는 거거구요. 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냐 근본주의냐 그런 쪽으로 갈라졌구요. 59년에는  WCC 문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61년에는 제가 속해있는 성결교회가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파분열이 이때부터 시작해서 계속되었습니다. 이건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할거예요. 한 4, 50년여간에 백 몇십 개로 교단이 갈가리 찢어졌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아주 짧은 시간내에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했다고 하는 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열의 단추가 WCC였습니다. 1949년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2차 총회와, 이게 7년마다 한번씩 열리거든요. 우리나라에서도 한번 열려야 되는데 못했습니다. 아직까지요. 그게 참 불가사의예요. 세계에서 상당히 기독교 세력이 강한 한국인데 못했다고 하는게 아마 뭔가 이유가 있기는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제3세계에서도 많이 열렸는데요. 1961년에는 뉴델리, 방콕에서도 열렸었 거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실천 신학자들이 좀 분석을 해봐야 될 것 문제 같아요. 54년과 61년에 각각 열린 WCC에서 하나님의 선교가 주제였거든요. 이건 신학문제는 접어두고요. 여기에 제가 무슈데이라는 말을 각주로 달았는데 노동운동, 식민지 독립운동, 각종 인권운동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선교다 그러한 신학적 근거에서 WCC가 기독교 운동이 아니다고 하더라도  제3세계 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인권운동에 많이 지원을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정확한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반정부 운동, 게릴라 운동, 무력투쟁하는 사람들에게도 WCC 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빌미가 되어서 결국 인제 한국 교회안에서 WCC안에서 빠져야 한다. 안다 남아야 된다. 그러한 다툼이 일어나게 된거죠. 특히 한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이래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신앙적으로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 50년대와 60년도에 있었던 미슈데이 운동으로 인해서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70년대 들어오면 제가 신학교 다닐때인데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년도예요. 1974년도. 제가 3년도 입학인데 1년 재수해서 늦게 들어갔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가 열렸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대형집회인것 같애요. 그 뒤로 계속 여러번 열렸죠. 그걸 따라서 로마가톨릭에서 주최하기도 하고 불교 에서도 한번 거기서 한번 연것 같아요. 대형집회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기독교를 대사회적으로 힘을 보여주자 아마 그러한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70년대는 이러한 방식으로 한국교회가 아주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에는 소위 큐티 성경공부, 이런 것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물론 70년대에 WCC나 대학생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순모임, 성경모임, 또 제자훈련모임, 옥한흠 목사님이 본격적으로 제자훈련을 했지만 이전에 다 있었던 것들이죠. 점조직으로 해갖고 맨투맨으로 하고 점조직으로 하고요 일종의 의식화 운동이죠. 그러한 방식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애요. 큐티를 전문적으로 하는 정기 간행물의 숫자가 적지 않거든요. 참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 교회들의 열심은 참 대단합니다. 어쨌든 7,80년대의 한국 교회 발전의 황금기라 봅니다.
90년대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양적인 성장은 주춤했습니다. 클 만큼 컸죠. 한 20%까지 올라갔죠. 전체 주민들에요. 종교 사회학자, 일반 사회학자들의 의견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여러 종교가 경합하고 있을때 20%이상 올라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죠. 불교, 우리 기독교, 우리 가톨릭하고 합하면 26-7% 정도되겠죠. 지금은 개신교 하고 가톨릭하고 프로테지가 많이 달라졌는데 90년대 20%라고 했는데 거의 15년 이상 지났는데 20%밑으로 떨어진 것 같아요. 현재는요. 로마가톨릭교회는 5%, 6%하다가 지금 7-%로 쑤욱 올라갔구요. 개신교하고 가톨릭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2, 3백만명 될것 같구요. 현재와 같은 속도로 나간다면 10년후에는 개신교하고 로마 가톨릭하고 덩치가 비슷해 지지 않을까 봅니다. 어쨌든 불교, 기독교,  그리고 뭐 어떤 종교가 있어요. 유교?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보다는 그래도 그러한 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기독교가 20%이상 넘어가기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20%올라온 것 만하더라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주춤했구요. 교회가 부흥한다고 한다면 거의 수평이동이라고 할 수 있구요.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큰 교회는 더 커지는 이러한 이동에 불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들로 치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거는 굉장히 사회학적인 영향이 큽니다. 사회학적인 그 자체가 큰 틀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죠. 그거는 제가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종교학자들이 다 이야기한 건데요.

예를 들자면 한 가지만 말한다면 급격한 이농현상, 이농과 도시화, 한국의 모습이었잖아요. 전라도, 경상도 살던 처녀들이 먹고 살기 힘드니까 다 서울로 대도시로 와서 구로공단에 와서 일하구요. 급격한 그러니까 압축성장, 그리고 정치 군사 독재, 이런 것들이 오히려 선교에 도움이 되었어요. 이게 불행한 일이긴 합니다만.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돌진 근대주의라고 하던데. 돌진 근대주의 근대주의는 굉장히 합리성을 토대로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뭐라고 할까요. 왜곡되어서, 왜곡되었다가 보다 약간 성격을 달리해서 돌진... 한 백년에 이루어져야될 자본 민주화 이런 것들이 압축되었고...하여튼 이러한 여기서 가장 큰 요인은 이농과 도시화 인것 같아요. 결국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교회로 몰려들고요. 그리고 군사 독재이기 때문에 민주 정치 참여의 길이 막혀서 결국 교회안에 들어와서 그런 것 펴게 되겠고요. 여기서 하나 더 말할 수 있겠군요. 우리가 분단, 분단은 좀 먼데 있는거구. 직접적이라기보다도. 직접적이기는 한데 그보다 더 그 결과로서 나온 현상으로 월남, 많은 사람들이, 이산가족, 월남으로해서 이산가족이 된 사람들이 처음 기독 교회의 주축을 이루었거든요. 영락교회 대표적입니다. 그런 사람들, 고향을 잃은 사람들, 북에... 그런 사람들, 마음이 허전하죠. 급격한 이농과 도시화로 이동한 사람들이 여전히 그렇죠. 정치적으로 정착할 데가 없죠.

그리고 졸부 근성이라고 할까. 하여튼 떼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정말 60, 70년대 대단했죠. 제가 옆에서 실제로 많이 보았습니다. 현풍에 있을때 신자들도 그런 일을 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그 이전에 천호동에 살때 신학대학 다닐때 님댁에 있을 때인가 형님댁에 있을 때인가 복부인들이요. 복덕방에 가서 아침에 계약하고 저녁에 50%로 붙여서 팔곤 했습니다. 그리고 복덕방 주인들은 2-3% 커미션 먹구요. 그런 것들이요. 그게 하여튼 지금은 강남쪽에서 약간 세련된 방식으로 나오고 있기는 한데 불로 소득이 눈에 보이니까요. 우리가 정말 정상적으로 세상을 살수 없는거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상당히 불행한 것들인데 이러한 것들이 한국교회가 고속 성장하게된 사회학적인 근거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한국 교회가 이렇게 부흥할 수가 없었던 거죠.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는데요.

90년대의 특징은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해외선교예요. 아까 10년마다 말했죠. 50년대는 굉장히 내세 지향적이고 열광주의적이고 대표적인 이단이 발호했다. 60년대는 교회가 정식으로 분열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이 나왔다. 결국 그때부터 계속 갈라졌다. 70년대에는 대중 집회가 많았고 대학생 동아리 모임들, 선교단체들이 중심이 되어서 성경공부 큐티 그런 것들이 80년대까지 계속 이어져서 한국교회 성장의 황금기라고 불릴 수 있다. 90년대에는 국내에서 교회활동을 견인해 낼만한 힘들이 없으니까 이제는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죠. 물론 해외 선교라고 하는 것이 물론 그때는 동구라파가 열리고요.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 되었다고 하는 세계 정치 변혁기이기도 합니다만 그거는 외부적인 요소고. 내부적으로는 더 이상 새벽기도라든지 부흥회라든지 큐티나 이런 것들도 늘 제자훈련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뭔가 딱 떨어지는 게 있어야 되거든요. 이걸 뭐라고 할까요. 이걸 좀 정치적인 문제죠. 선교정치적인 교회 정치적인 문제이잖아요. 일반 교회들도 뭔가 이슈를 내잖아요. 이슈가 없이 지탱이 안되죠. 신자들로 하여금 뭔가 하나에 집중하게 만드는거에요. 금년에는 5년 계획으로 교회를 우리는 새로 짓는다거나 아니면 배가 한다거나 아니면 복지관을 짓는다거나 묘지를 산다거나 그런 것들을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해외선교 어느곳에 교회당을 몇개 짓는다거나 어느 것을 하거나 이런 것들을 하잖아요. 정치적인 문제인데 하여튼 90년대에는 해외 선교가 하여튼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로 세계에서 미국다음으로 우리나라가 해외 선교사를 제일 많이 파송한다고 합니다. 이게 잘하는것이 아닌지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 교회의 이러한 부흥이 한국의 경제성장과 닮은꼴이라고 하는 것, 교회성장과 경제성장이. 고거는 제가 잠간 내용을 좀 읽어 볼까요. 경제, 관주도형이고요, 수출 드라이브, 저임금 정책, 이런 것들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압축성장을 했잖아요. 경제가요. 이런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인데요. 이게 먹고 살기 힘든데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해서 비록 유신을 하고 정말 이상한 정치를 많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경제를 살린 사람이기 때문에 괜찮다. 이러한 생각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박정희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구요. 그때에 한국 경제가 압축적으로 성장했는데 이게 잘된 것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제3세계,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나라로서 우리나라처럼 민주화가 빨리되고 경제화가 된 나라가 없다고 애기를 하는데 빨리 이렇게 되는 게 좀 좋은 것이었을까요? 좀 천천히 경제가 성장했으면 어땠을까요? 더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요? 지금 압축적으로 경제 성장함으로서 벌어지게 되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잖아요. 도저히 겉잡을수가 없어요. 이런데서 한국교회도 일조를 했구요. 일조한 것만이 아니라 그 덕택으로 성장을 한거죠. 경제가 군사독재와 경제유착을 통해서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었거든요. 그게 어떤 것인지 여러분들이 잘 아실 거예요. 교회는 군사독재에 침묵함으로서 일종의 도피처 구실을 한거죠. 어쨌든 양측이 경제나 교회가 사회변혁에 역사적 경험이 없이 부지불식간에 덩치만 커진 까닭에 졸부근성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경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제가 깡그리 싸잡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전반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거나 교회나 그러한 특성이 있다. 그 자체안에 거품을 물고 있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근본이 아주 허약한 것 같습니다.

네 제가 6.25전쟁이후로 한 50년 동안 10년 단위의 한국교회의 특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조금 비관적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일부로 그것을 나쁘게 냉소적으로 볼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다른 교수의 말을 인용하겟습니다. 한일대학교 철학과 김영민선생인데요. 제가 가끔인용했던 말이죠. 지금은 학회에서 잘렸죠. 왜 짤렸냐?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온건데요. 그 이야기하면 또 길어지니까 그만두겠습니다. 그분이 한겨레 21에서 쓴 이야기.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주에 수천만 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백 명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곳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 붓고도 득의한 듯 히히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어때요? 철학자의 고언이. 정확하죠? 그는 글 말미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시라.”(한겨레21, 1999년 4월 15일자).
제가 10년쯤 되는군요. 99년도니까요.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런 사람이 어찌 한둘이겠어요.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교회에 다 발을 내딛었지만 이제는 정말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기의 운명을 맡길 수 없는 사태에 이른 사람이 어디 한 둘입니까? 요즘 촛불시위를 하고 있구요. 쇠고기 파동, 이런 정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런 흐름들을 앞에서 가로막고 있지 않습니까? 허튼소리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본전이라도 하는데요. 이명박대통령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사명감속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교회가 빨리 손을 끊어야 그나마 실추되었던 교회의 권위를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고 그나마 건질수 있는거죠.

이명박 대통령, 제가 다비아에 그런 정치적인 이야기를 많이 쓰지 않고 많이 절제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신뢰가 가지 않는 분이예요. 모르겠습니다. 듣고 있는 분중에서 생각이 다른 분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혼자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이해하십시오. 진정성이 전혀보이지 않구요. 이미 그런 분이라는 이라는 것을 알고 우리가 뽑은것이죠. 어떤 대안이 없기도 하고요 그렇게 실제 살아온 삶이 악의가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아까 말씀드린 경제 압축 근대주의에 졸부근성에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기업만 키우면 된다고 하는 이러한 결과 만능주의,  완전히 이거는 군사독재가 행한 똑 같은 방식이었거든요. 이런 패러다임에 묶여있는 분이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되면 달라지려니 그리고 자기가 위장 전입했다거나 자녀들 위장취업해서 세금 탈세하고 그런 것 다 갚고 하여튼 그렇게 하리라 기대를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기대를 거두어 들이는 게 낫겠습니다.

네 그러니까 한국교회가 이명박 대통령을 방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되면 더 추락해요. 제가보기엔 그렇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진도 나가야지. 시간이 벌써 40분이 넘었는데 정작 해야할 이야기를 놓치고 한국교회 미련이 있는가 이 이야기만 하다 말았네요. 사실 강의가 한 장이 말이죠. 일반대학에서 한 강의, 교양과목으로 한 건데 3시간짜리입니다. 줄여서 하다 보니 강의 내용이 많지 않더라도 그 뒤에 가면서 많이 설명해야 되는 거거든요. 한 시간에 하기는 좀 빠듯한데. 한시간에 하지 않았죠. 보통 두번에 나눠서 했는데 그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제가 드리는 말씀이예요.

네 이렇게 물어야 되겠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 미래가 있는가? 미래가 있다 그런 질문은 제가 그만 두어야 되겠다. 그만두고 그냥 교회는 있죠. 존재하게 되겠죠. 그러나 구원론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 공동체가 되겠는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대한민국 이제는 분단체제를 넘어서야 되잖아요. 이거 정말 강의에 나올 문제입니다만 남북의 관계, 분단체제, 여기에 한국 교회가 바벨론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그 너머를 봐야 되는데요. 분단이후까지 내다보고 선교정책을 벌여야 되는데 이 분단체제를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Red complex, 그냥 일반 보수 우익단체들이 쏟아놓을 만한 말들, 툭하면 좌파다 빨갱이다 이런 식의 용어들이 한국 교회 강단에서 그대로 표출되고 있잖습니까? 얼마나 부끄러운 이야기예요. 일전에 대구에 있는 어떤 분이 자기교회 하소연을 해서 거기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새해인사가 있더라구요. 기도문으로 나와 있어요. 한 대목이 기억납니다. 고대로 축자적으로는 인용하기는 힘들구요. 이런 뜻입니다.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이제 이명박 대통령을 통해서 회복해 나갈수 있도록 우리가 합시다. 이런 방식의 기도문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걸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장 보수 우익단체가 정치적인, 정략적인 계산에서 나올만한 용어들을 아주 쉽게 교회에서 이용하고 있다고 하는, 아니 이용한다기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용당하는. 그러니까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한 이 분단체제를 넘어서 한국교회가 구원론적 의미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되겠느냐 아니냐는 거죠. 그냥 있는거는 있는거죠. 대형교회는 약장사하듯이 말이죠. 청중 중심주의, 대중 추수주의로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과연 구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느냐 그런 차원에서 보면 이건 긍정적이긴 보다 좀 부정적이긴 한데요.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그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애기를 하려고 그럽니다. 어떤 것이 과연 구원론적 현실이냐 하는 거죠. 한국교회, 한국교회 공동체가 구원론적 soteriology 이거는 정말 중요한데요. 이미 제가 soteriology 구원론하면 여러분들이 6개월동안 제 말을 들었으니까요. 아주 좁은 의미에서의 예수믿고 구원받고 천국가서 내가 잘먹고 잘 살아야지 그런 차원, 단계가 넘어선다는 것을 제가 전제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한 종말론적인 현실을 교회가 담지하고 있는가 하는 그런 질문인거죠. 예. 또 오해하지 말기 위해서 한마디 보충하고 지나간다면 제가 여기 구원론적 현실을 담지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꼭 역사참여를 해야한다는 그런 뜻으로 드리는 의미는 아닙니다. 역사와 (오늘 마지막 결론에 나오게 되겠는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비는 그건 같이 변증법적인 관계속에서 이해하는 건데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다 담아내면서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이 사회를 향해서, 이 사회는 분단체제를 뛰어넘는 미래를 포함한 그러한 사회를 향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죠.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 것을 말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게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그거는 오늘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강의안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세상안인가 밖인가 이런 문제였어요. 고걸 정리를 했는데 강의안의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이겁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초월해 있다. 세상안에서 초월해 있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정반대야... 정말 필요한 세상 안에 들어가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 초월적이 되고 정말 초월해야 할 문제에 대해선 아주 집착해서 자기 기득권을 찾아내려고 하는 정말 엉뚱한 일이 참 많거든요. 예를 들자면 어느 교회가 교회당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잖아요. 반대하면 짓지 말아야죠.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서 강압적으로 거기에 조폭들을 거의 동원하다시피 하면서 그걸 성취해내고 그걸 어떤 자랑 삼아 간증하는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으로 우리는 굉장히 영악한 거예요. 미안합니다. 그렇게 표현해서. 그래도 우리가 교회가 영적인 어머니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얼마나 세상적으로 영악한가 아시죠? 이런 데서는 사실 어수룩해야 되는데 교회는. 어수룩해야 될 부분에서는 영악해요. 그리고 정말 마이너리티,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는데에 대해서는 우리가 외면하는 그러한 모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문화 현상, 세계죠. 이것이 구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방식이 아니면 복음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21세기 한국 교회는 세상 문화를, 세상 자체요. 세상 정치를 포함한 모든 문화죠. 이것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표현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나 연대라고 하는 거를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작업을 열렬히 펼쳐 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과 문화는, 교회와 세상은 변증법적 관계다. 복음은 문화적으로 드러나야 하면 문화는 복음의 정신에 근거해야 한다. 이에 근거해서 21세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가 한국이라고 하는, 조선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군요. 북한을 포함해야 하니까요. 또는 한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군요.

컨텍스트 속에서 구원론적 상수로 붙잡아야 할 주제를 몇대목만 간추려 보려고 합니다. 세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타종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유럽이 아니기 때문에 타종교와 좋듯 싫든 같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오히려 한국이라고 하는 정황에서는 소수파라고 할 수 있죠. 기껏해야 20%, 가톨릭과 합해서 25프로 되겠군요. 나머지는 다른 세계니까 유럽하고는 완전히 다르죠. 역사도 200년 채 될까 말까할 정도이니까요. 우리는 종교 다원사회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좋든 싫은 같이 가야 하는거죠. 이 타종교 문제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가 하는 것 여태까지 그렇게 행한 잘못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하는 것에서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심심치 않게 훼불 사건이 일어났잖아요. 절에 들어가서 불상 목을 자른다거나 하여튼 그런 일들, 심지어 불을 지른다거나 약간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했겠습니다만 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신앙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하나의 열매이거든요. 그게 지금도 툭하면 설교시간에 타 종교를 비난하고 냉소하고 조롱거리로 만드는 일이 많잖아요. 승려가 회개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런 것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진짜 승려가 아닐꺼에요. 내가 보기에는 가짜 스님입니다. 그런 사람이 기회에 따라서 적당히 옷을 바꾸어 입은건데 그런 사람을 내세워서 교회 부흥회하구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보는데요. 그렇다면 기독교를 전혀 전도하지 말라는 이야기냐?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이거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구요.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가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지난 주에 말씀드린 근본주의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 가장 결정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고 부분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혹은 타종교에도,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 통치 앞에서 놀라는 사람은 이런 질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요. 그것에 마음을 여는 것만 하더라도 우리가 벅찬데 어떻게 타종교의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러쿵 저러쿵 할 수 있겠어요?) 물론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이며 또한 진리이기도 하지만, 타종교의 구원문제는 이런 명제와 지평을 달리한다. 기독교인이 주력해야 할 부분은 성령의 열매를, 구원받은 사람의 삶의 영역을 사랑, 희락, 화평의 세계를 가열차게 넓혀가는 것 뿐이고, 타종교의 구원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말이다. 예 그러니까 만인 구원론, 여기서 또 많이 이야기할 수 없는데요. 저는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손해 받은 것 같아요? 그러면 예수 믿은 게 손해 아니냐? 만약에 그렇게 생각이 난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를 모르는 분들입니다. 신앙이 뭔지를 모르는 거죠. 접구요. 또한 우리가 믿고 희망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이미 결정되어버린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열려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이것을 교회 조직이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 정작 우리가 투쟁해야 할 대상은 구원의 현실들을 열어가고 있는 고등한 타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하고 자연을 소비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오늘의 시대정신, 사이트 가이스트, 세속적 시대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서가 대적하고 있는 오늘의 적그리스도다.
예. 이 타종교의 문제가 구원의 현실들을 종말론적으로 담지하고 확보해야 될 21세기의 한국교회가 고민해야 될 주제입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입니다. 남북통일은 구원이다는 나는 이렇게 소제를 달았습니다. 이거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구원전체를 담는 것은 아니지만 분단체제라고 하는 이 범주 안에서는 구원인거예요. 이 범주가 있죠. 우주론적인 범주로 나가게 되면 통일 되지 않더라도 모든 민족들이 하나가 되고 전혀 다른 생명의 차원이 되기 때문에요. 더 넓은 거지만 범주를 줄여서 현재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 한반도 땅에서의 구원은 남북통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 접어들어서 그 이전까지 한국교회가 전투적인 자세를 보였던 북한을 향한 적개심들이 많이 약화되기는 했는데요. 여전하죠. 부끄러워서 참 같은 목사라고 말하기 힘들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괜찮아지는 것 같애요. 그래도 온전한 보수주의, 보통 복음주의라고 하는 분들은 많이 열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성들은 보이긴 해요. 그런 문제들을 자세하게 제가 이야기하지 않겠구요. 남북 통일문제에 있어서 두가지 관점에서 우리의 자세와 연관해서 짚겠습니다.
첫 번째는 북한을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아, 우리는 이렇게 잘 살고 쟤네는 못 사니까 이런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자.

두 번째는 이 북한 남북한문제를 선교전략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지금 각 교단마다 통일이 되면 신의주에 가서 교회를 세우겠다. 평양에 가서 몇개 세우겠다. 이런 선교 전략을 세우거든요.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통일이후에도 북한에 우리 남한과 같은 교파가 생긴다고 하는 애기 아니예요? 그걸 막아야죠. 최소한 북한만이라도 하나의 교회가 되도록 하고 그것을 기초로 남북한 하나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장로교 감리교 다 때려치고 한국 연합교회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는 너무하니까 한국 연합장로교회 연합 감리교회 그런 정도의 교파만 유지하고 이런 저런 우리가 들어도 알 수 없는 수 백개로 나뉘어진 것이 하나가 되어야 되는데 그러한, 그러한 기미가 잘 안보입니다. 지금 각 신학교마다 신학생들이 과잉생산되고 있는데 이것도 근본적으로 문제인데요. 어떤 사람들은 남북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교회를 세워야지 신학생들이 많이 나와야지 이렇게 말을 할 정도인데요. 이게 어떤 순진한 신자들에게는 먹혀요. 북한 남북한의 문제를 선교전략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지 말자. 통일되면 가서 열매를 따먹겠다. 제발 그런 것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통일 지향적인 그러한 노력을 실제적으로 벌여야지요. 불이익을 받더라도 그런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런 일들이 뭔지는 아시겠지요. 제가 일일이 다 가르쳐 드려야 되나요?

예.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그건 여러 가지가 구체적인 실천 문제도 있고 신학적문제도 있고 예를 들자면 그런겁니다. 어디 북한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때 정부가 무조건적으로 정치적으로 몰아부치면 한국교회, 한기총이라든 NCC 이런데서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해를 깔고 나가야 한다 이렇게 정부를 말려야 하거든요. 정치가들은 늘 정략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북 문제도 그렇게 이용을 합니다. 지난 4,50년간 계속 되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교회를 내다보고 있는 다른 차원에서 그 문제를 접근해야잖아요. 그런데 한 수 더 뜬다니까요 교회가. 네 그렇습니다. 여기 제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교회는 통일을 교회확장의 기회로 이용하지 말고 통일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역사로 이해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통일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구원이다.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서 남북통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남북통일을 위해 교회의 모든 노력을 쏟아야 된다.

언뜻 생각난 것 해야 되겠네요. 그러니까 가장 구체적인 실천방안 하나 말씀드릴까요? 한국 모든 교회가 일 년 예산의 10분의 1을 남북 통일기금으로 내는 거예요. 제 의견이 어떻습니까? 낭만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한국 사회에서 한국 교회 이미지가 정말 달라지는 거죠.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건 정말 남에 있는 민중이나 북에 있는 뮌중이나 모든 백성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로 인해서, 남북분단으로 인해서 벌어지는 사회비용이 얼마나 커요?

네. 흠. 네 마지막으로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건 그만 두겠습니다. 요 부분도. 잘 아시는 부분이기 때문에 본훼퍼의 아포리즘만 전하겠습니다. 아포리즘, 경구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지구의 손님이다.” 이거는 뭐 신학적으로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잠시 빌려서 쓰고 가는, 이 땅이 얼마나 거룩한 지, 생명인지,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봤다고 하는데 이 땅을 어떻게 거룩하게 여겨야 하는지 그 문제를 한국 교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요? 네. 그런 데에 대해서도 할 이야기는 많은데요. 강의록을 보시고요.

마지막 결론을 이야기해야 되겠는데요. 교회의 교회론적 지평을 세가지 이야기했는데요.
첫째는 영성의 회복이예요. 한국교회에서 영성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어떻게 기계화되어 있는지 주술화 되어 있는지 도구화 되어 있는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거예요.

두 번째는 프락시스, 봉사.

세 번째는 정치성이예요. 교회가 정치 헤게모니를 잡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과 사랑과 구제 봉사 실천 이런 것들이 오늘 사회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행위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나... 지금은 그렇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 신자유주의가 더 급격화 되고 사교육이 더 극단화되고 말이잖아요. 교육문제가 정치적이잖아요. 한국 교회가 똑바로 소리를 내야 하는데 공교육을 강화하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데 거꾸로 가고 있단 말이예요. 참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답답해서 고만 두겠습니다. 인간의 노동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정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고요. 점점 더 기독교는 구원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게 자연문제 이런 것도 다 정치적인 문제이잖아요. 대운하 하겠다는 것, 이거를 못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연대가 필요한 것이거든요.
정말 마쳐야 되겠습니다. 글쓰기를 마쳐야 되겠다. 이게 마지막 패러그래프입니다. 네 읽고 마치겠습니다.

이제는 이 글쓰기를 마쳐야겠다. 마무리로 삼아야할 화두는 ‘역사’와 ‘신비’다. 교회는 세계역사와 단단히 연대해야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신비에 대한 환상을 붙들어야 된다. 역사는 현실이며 신비는 꿈이다. 역사는 아래로부터, 신비는 위로부터 온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신비는 미래를 통해 현재를 말한다. 기독교적으로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며 신비는 예수의 부활이다. (신비는 막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둘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로서 구원의 세계를 열어간다. 현실 없는 꿈은 몽상이며, 꿈 없는 현실은 허무다. 교회는 역사에 두 발을 딛고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그 환상에 근거해서 2천 년 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아멘.
네 강의 여기까지 마치겠습니다. 6개월 동안 수고 많이 하셨고요. 이번 돌아오는 주일저녁에는 마지막 순서인데 사실 오늘 쫑파티해야 되는데요. 책걸이라고 하잖아요. 오는 주일 좀해야하는데 어떻게 하죠? 사이버에서는 곤란한데 이렇게 하죠. 여러분들이 컴퓨터앞에서 먹거리 갖다 놓고 각자 먹으면서 책걸이 하겠습니다. 네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다음 주일 저녁에 뵙구요. 6개월 동안 저의 두서없는 강의를 경청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러한 만남을 갖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