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629) 마지막 수업 받아쓰기, 길 진리 생명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지난 목요일 뒤로 며칠만이군요. 우리가 6개월동안의 대장정이었습니다. 참 대단들 하죠. 저도 기특하고. 중간에 몇번 어쩔 수 없이 빠진 몇번 있기는 하지만 한 번도 소홀하지 않고 주욱 왔습니다. 이게 쉬운것이 아닌었었는데요. 어쨌든 잘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출석체크는 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현재 오늘 들어온 분들이 주로 꾸준히 오셨구요. 상당한 분들은 초창기에 많이 들어왔다가 조금 떨어져 나갔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두가지겠죠. 하나는 강의가 재미가 없었다. 들어보나 마나다 였구요. 두 번째는 이게 동영상으로 다비아에서 다시 제공해주니까 굳이 어려운 시간 라이브로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라고 하는거죠. 어쨌든 그래도 많은 분들이 이렇게 실시간 많이 지켜주셔갖고 저도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이거든요. 대개 대학 강의도 마지막 수업은 짧게 끝나더라구요. 대충 정리하고 질문할 것 있으면 정리하고 특별한 것 없으면 빨리 끝나는데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르죠. 여러분들이 원래 주일 저녁에는 질문 응답중심으로 진행하려고 하려고 했었는데 예상외로 질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초중반까지 조금 뜸하게 나오다가 그 뒤로는 분위기가 질문하는 방식으로 나가지 않아서 뚝 끊겼어요. 그래서 주일저녁도 여전히 목요일의 하던 방식의 그 패턴 그대로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많이 한것 같습니다. 이게 다 장단점이 다 있어요. 수업이라고 하는게 말이죠. 세미나도 있고 일반적인 강의도 있고 질문응답 여러가지 방식이 있는데 질문하고 대답하고 이게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더라구요. 정확한 질문을 하면 좋은데 그러지 못할 때도 있구요. 그리고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청중들, 학생들의 눈높이에 따라서 들쑥날쑥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거죠. 그러나 그 질문이 좋으면 수업의 진행 완성도가 높아지니까 좋은 점도 있습니다. 어쨋든 질문이 많이 없어서 제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했구요. 오늘도 중간에 질문이 있으면 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시간인데 기독교가 뭐꼬? 라고 하는 제목으로 여태까지 6개월동안 강의를 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요약해서 제가 몇 마디를 해야 되겠습니다. 기독교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 이야기의 요약, 요약은 아니에요. 요약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압축하는건데 압축이었다기 보다 또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하는 거죠. 강의와 직접적인 관계는 그렇게 많지 않더라도 그래도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질문은 똑같으니까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6개월 동안 여러분들은 강의를 듣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많이 넓어지셨나요. 아니면 질문할 것만 많아 지셨나요? 각각에 따라 다 다르겠죠. 이제 강의에 귀를 잘 기울이셨다고 한다면 어떤 쪽으로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해 감은 잡았을 겁니다. 제가 기독교의 내용을 나름대로 전달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내용 정보라고도 할 수 있구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많이 알려 드린다기보다는 그렇게 질문하는 방식을 말씀드렸다고 보면 좋습니다. 제가 몇 번 지적을 했다고 보는데 이미 완성된, 혹은 완료된 대답을 찾지 말자. 오히려 그 대답을 향해서 가는 길을 찾아야 된다 그 이야기였습니다. 어제 서울 오프에도 고 강의를 한마디 한 것 같은데요. 기독교 교리는 일종의 교리죠 이걸 배우면 잊어버려라고 했습니다. 그건 인제 그 말은 양면성이 있는거예요.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잊어버려야 되겠습니까? 알기는 알아야 하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참 인간이라고 하는 그 교리가 담아내려고 하는 그러한 내용들을 놓치면 되겠어요. 성서의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반적인 흐름들을 우리가 또 몰라서 되겠습니까? 성만찬이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몰라서는 안되겠죠. 기독교 교리를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묶이지 말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은 이 교리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요. 영어로 그러게 쓰나요? catechism. 독일어로 카테키스무스. 교리문답, 교리죠. 이것은 일종의 문이예요. 이렇게 문이 있는데 들어 가는거죠. 삼위일체라고 하는 문, 칭의론이라고 하는 문 등등. 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는 뭐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만난다. 애기할 수 있겠죠.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고 하는 점에서 만난다는 표현은 한겁니다. 어떤 말이라든지 기독교 용어, 언어라고 하는 게 말이죠. 절대적인 진리를 그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런 말이 죽죽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경우은 이게 혼란스럽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거가 자꾸 머리에 남기 때문에 말하기기 쉽지 않거든요. 이거는 사실이거든요. 어떤 범주안에서 통용될 수 있고 범주를 넘어가면 또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관계라고 하는 광의가 아니라 협의에서는 말은 되는 거거든요. 그거는 성서에서도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은 경험이 많이 있구요.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만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성서를 읽을 때 그거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잖아요.

성서, 이거는 사실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시나 문학적인 언어라 그래서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그러나 다른 영적인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안의 지도자들도 그렇고 일반신자들도 그러고 혼선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훈련들을 우리가 꾸준하게 해 나가야되는데요. 그게 없이 성서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실적인 언어와 똑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문제가 됩니다.

(캠코더를 장착해두고 켜지 않았군요. 마지막 시간까지 제 정신이 아니군요. 여태까지 강의한 것 다 날라가 버렸네. 소리는 남았겠죠. 누가 곰플레이어로 녹음하겠군요. 녹화는 이제 한 12분 지나버렸군요.)

그게 사실언어와 종교적 상징언어라고 상징이라고 해서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 구분해야 하는데 안하게 되면 성서가 참 이상한 책으로 우리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6개월동안 말씀드리면서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정답에 가는 길을 찾아야 되는 거고 제가 오늘 강의의 내용이 되겠는데요. 하여튼 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거예요. 길이라고 하는 메타포를 느끼시겠어요. 이거는 어떤 것을 개념적으로 딱 끊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정일 수도 있고 힘일 수도 있구요. 어떤 변화일수도 있구요. 그 어떤 것으로도 확정시켜서 말할 수 없는 어떤 그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게 바로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잖아요.

이거 뭐 어제 한 이야기 연관되는 군요. 갈라디아서 3강을 공부하면서 2000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했습니다. 2천년전에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의 한 토막을 읽으면서 일단 2천이라고 하는 시간을 밀착해봐라. 그게 우리들에게 숫자만으로 우리들에게 있어 별로 실질적으로 와닿지 않거든요. 2천년이 흘렀고 지금의 내가 있는 겁니다. 지금의 나, 독자가 읽고 있죠.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것 아니겠어요. 2천년이 또 흘러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40세기죠. 이 40세기가 오는 것 분명하죠. 2천년전에 바울의 편지를 받아 보았던 그 사람들도 아마 자기들보다 2천년 뒤를 흘러서 후손들이 살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세계가 어떻게 변화되리라고 하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겠죠. 앞으로 2천년후 4천년대에 이러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역사의 준엄성을 놓치지 말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역사의 준엄성이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역사의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많이 이야기되었고 또 선생들이나 신비주의자들쪽에서도 그러한 이해들을 하고요. 참 신비한겁니다. 다시 돌아가고..

그래서 또 우리가 정답을 찾는 것보다 거기 가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학기동안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조금 더 혼란스러워졌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목사님들이 계실지 없을지 모릅니다만  그런 준비가 된 목사님들은 훨씬 더 영적으로 자유롭게 풍요롭게 성서를 해석해내고 신자들과 같이 더불어서 그러한 영적인 삶을 누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되지 않으면 그냥 종교 전문가가 된다면, 제가 자주 쓰는 용어로 말한다면 기술자가 되는 거죠. 전문가가 되는거죠. 전문가는 필요한데. 종교 기술자가 되어버리는 거거든요. 목사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성은 마치게 되는거죠. 종교 기술자가 아니라 종교 과학자가 되어야 되겠지요. 제가 구별해서 쓰는 용어입니다. Technician 이 아니라 Scientist 가 되는 거라고 말이죠. 새로 길을 가는거죠. 영적인 길을 가지 않으면 과학을 할 수 없을 겁니다.

네.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는 이러한 공부를 함으로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렇게 결정적인 공부가 아니었을거구요. 아 내가 앞으로 질문해야되고 생각할 거리가 더 많아 졌구나 생각하면 그건 좋은 공부였습니다. 예. 어쨌든 여러분들은 어떤 쪽에 있던지 오늘 마지막 강의인데요.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되는가 무엇을 이야기했는가 또 앞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되는가 그런 질문이 우리가 필요한 거죠. 핵심이 뭘까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할 때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기독교라고 하는 체계를 믿는 것이 아니죠. 체계가 아니라 시스템은 시스템인데 체계라기보다도 그러한 체계가 담고 있는 영적인 세계에 내 삶을 온전히 던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어떻게 말하던 우리 기독교 신아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건 우리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대로 예수는 우리의 구원이다. 이런 말로 될겁니다. 예수믿고 구원받으세요. 그런 말이 가장 기초적인 우리 신앙에 대한 진술, 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구원. 예수스 이스트 운더러 하일! 하일! 구원. 예수는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인데 이걸 저는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4: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자가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 혹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주석하는 것으로 이 명제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제가 이 구절을 예수님의 말씀, 혹은 초기기독교의 신앙고백이라고 이렇게 조금 딱 끊어서 하지 않고  양쪽의 가능성을 열어두었잖아요.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14장 언저리에 있는 몇장에 걸쳐서는 독특한 문학 양식이 나오거든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나는 뭐뭐다라고 하는 겁니다. I am 문장이라고 하거든요. 나는 포도나무요. 주욱 나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걸까요. 아니면 제가 지적한대로 초기 기독교의 고백일까요. 네. 고 문제는 덮어두죠. 기독교 초기 기독교의 고백, 역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그게 더 가까운거구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진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를 하더라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 맥락에서 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건 말이 안된다. 예수님의 말씀이면 말씀이고 아니면 아닌데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게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죠. 구원사건이라고 하는 거 예수 사건이라고 하는 거 말이죠. 어떤 실증적이 사건이 벌어지긴 했어요. 그때 예수님의 공생애에 어떤 사건들이 fact로 있었겠죠. 그런데 fact를 사실 다는 모릅니다.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니구요. 기록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fact가 될까요? 제가 이렇게 강의하는 이런 것들이 별도로 강의안에 남아 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것이 fact가 될까요. 물론 내가 강의했다고 하는 단순한 것은 fact로 남아 있지만 그 내용들이 정말 더 fact이겠는가 내가 내 생각을 정말 정확하게 전달했을까 등등. 그렇게 보면 정말 fact가 아니거든요. 어쨌든 실증적인 fact가 있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진행되면서 해석됩니다. 동영상 다시 이야기하면 그걸 놓고 누가 다시 정용섭목사가 마지막 수업시간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하게 된 것은 이런 저런 여러가지 여건때문에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처한 삶의 자리를 충분히 이해할 사람만이 해석할 수 있는거죠. 만약에 오늘 제가 이 강의를 하기 전에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면 강의가 더 혼란 스러웠거고 만일 제가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었다면 잘난 척하고 강의를 하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나온 것을, 사실들을 해석해서 사건들을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게 역사죠. 초기 기독교가 3, 4백년, 성서가 기록된게 경전된게 4세기 후반이니까 그때까지 계속해서 이러한 해석들이 진행되고 물론 해석이야 계속된 건 아니죠. 신학으로서 해석은 계속 되었지만 성서가 경전되기 전에 이미 완성된, 편집되고 완성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 결정된 다음에는 다른 것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만 그때까지는 상당히 많은 것들이 거기에 들어가게 되죠. 수십 년 동안에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뒤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영향을 미침으로서 사건의 온전한 실제적 의미이기도 하구 혹은 현실성이 확보 될 수 있는 거예요. 사실 동영상 말씀드리면 나중에 누가 저를 잘 아는 사람이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내가 하지 않는 이야기까지 넣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아서 정말 해야할 이야기도 살아나는거죠. 그게 해석이고 사건이고 하는겁니다. 전태일평전을 누가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때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전태일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하는 변호사가 썼다고 하는데 직접 전태일 옆에 있던 사람보다 더 잘썼다고 하네요. 조영래, 네..

그러니까 요한복음 14:6절이 초기교회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에 의해서 나온 진술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대변해 주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우리가 읽어도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것을 무조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해서 무조건 그렇다 자꾸만 그렇게 교리문답식으로만 성서를 읽게 되면 거기에 포함된 많은 역사적 해석들이 다 실종되는 것이죠. 없어지는 것입니다. 형해화 되는겁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렇지 않습니까? 성서 해석이 교회 설교 들어보시면 아시죠. 뼈만 남아있죠. 들을 거 없죠. 저도 비슷합니다만. 그러니까 그거 자체로는 굉장히 지루하고 상투적이고 하니까 대신 사람들을 자극하는, 청중들을 자극하는 populism 이죠. 여러가지 방식으로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청중들의 정서, 심리, 의지, 욕망, 그런 것만 자극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이 도구화 되고 있습니다. 이 요한복음 14장6절에 이르게 된 그 과정을 우리가 충실히 따라갈 수 있다면, 이것이 정말 살아있는 사건으로 우리들에게 와 닿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 14:6절 자체가, 성서자체가 그렇습니다. 성서가 기본적으로 해석이예요.

어저께 서울오프에서 제가 앞에서 강의하고 두번째 이길용박사가 신화의 의미라는 강의를 했습니다. 재미 있었습니다. 신화가 뭐냐는 말이죠. 그거는 고대인들의 아주 명백한 세계관이다. 이길용박사가 세계관이라는 말을 직접 썼는지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게 전달받았어요. 19세기 20세기 자연과학이 이 시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인 것처럼 고대인들의 일종의 자연과학인거죠. 그게 바로 신화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해석이거든요. 왜 인간이 죽어야 되는지 씨를 뿌리고 거둬들이는지 성서적 표상을 빌리면 형제가 왜 살해를 하는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서 악을 극복하지 못하는지? 이런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석이 아주 고대인들에게는 수만년전서 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길용박사 말로는 3만년 전부터 근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바벨론으로 넘어오게 되면 3천년되나요? 꾸준하게 내려온 거죠. 세계관입니다. 세계를 해석 한거죠. 성서도 그런게 많이 들어있거든요. 성서의 고유한 세계관입니다.

제가 설교 비평하면서 가끔 어떤 분들의 설교에서 성서의 신화적 언어들을 사실적 언어들로 오해하고 있다. 이렇게 지적할때가 있었거든요. 그러한 저의 지적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성서의 권위를 허물어 뜨린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기독교 사상 7월호에 총신대학교 설교 교수인 유응렬교수가 저의 설교 비평집 3권, 설교의 절망과 희망, 이것에 대한 서평이라면 서평 그런 걸 썼습니다. 이분이 지난 12월에도 한국 설교학회에서 한 발제한 논제를 실었는데 그것도 저의 설교 비평에 대한 일종의 critic 이었습니다. 유응렬 교수는 저의 설교비평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좋게 평가를 했어요. 제가 고맙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다른 이야기를 자꾸 길게 끄네요. 좀 줄이겠습니다. 이분이 하는 이야기도 다 좋은데 어느 선에서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그거는 성경관이다. 성경 신학에 대해서. 총신이니까 어떤 말을 하는 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제가 바로 신화라고 하는 이런 성경 신학을 갖고 있으면 한국 기독교 신앙을 허물어뜨릴 위험성이 있다. 위험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런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 그 신화가 그런 것처럼 예 성서안에서도 그런 신화적인 요소가 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 하나도 겁먹을 필요가 없는거예요. 지금보면 여러분들이 신화를 보면 미숙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제가 성서에 있는 기적, 신화 기적, 이런 것들이 그 당시에는 일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 어린아이들에게는 세계가 주술적거잖아요. 그렇게 전달됩니다. 신화의 세계, 고대인들에게는 그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리인거예요. 오늘 19, 20세기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세계관이잖아요. 이거는 고대인들에게 비해서 엄청나게 진리에 가깝다고 애기하면 그건 착각인거예요. 뭐가 착각이냐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과학은 정말 엄밀하고 정확한 학문이고 신화는 조금 불확실한 그러한 상상의 꾸며진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 차이가 얼마나 크냐 말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야기 뭐 계속 끌고 갈 필요가 없는데요. 지금 자연과학도 언젠가 역사가 흐르게 되면 우리가 지금 신화를 보듯이 그렇게 바라보게 될 겁니다. 그거 동의하지 않으시면 할 수 없구요.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경험하고 있는 세계, 여러분들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을 너무 철석같이 믿지 마세요. 이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최선으로 그렇게 해야죠. 자연과학이 애기하는 진화론이 맞으면 마는 거고 우리로서는 지금 그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최선이기는 하되 절대적이거나 궁극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게 조금 기독교적인 용어로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면 이 종말론적 eschatology 종말론이 얼마나 중요한 가 하면 강의할 때 누차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세계관입니다. 역사관이죠.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는 표현, 새 예루살렘 그러한 종교적인 용어, 요한 계시록의 묵시문학적 그러한 세계, 그러한 것들을 여러분 유치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일종의 신화적인 세계관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내다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 희망들은 정말 그거는 살아 있는 거요. 새 하늘과 새 땅, 하늘이 종이장처럼 말리게 되고 용이 어디서 나오고 SF영화처럼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지금 자기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상대적이냐 이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본거예요. 얼마나 영적으로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죠. 새하늘과 새땅이 어떤 건지. 2천전전의 사람들이 지금 우리처럼 2천년 후에는 비행기를 타고 컴퓨터하고 미국과 영국과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동시에 이렇게 대화할 수 있으리라고 하는 것을 꿈에서도 상상했을까요? 그것은 마술과 같았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과학적인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점들이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된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방식은 앞으로 만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 우리처럼 생겼을지 아니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없이 그냥 어떤 종으로 변화될지 그럴 가능성도 높습니다. 더이상 남자와 여자와 결혼해서 애기 낳은 방식이 아닌 것으로 우리 후손들이 번식할 수 있다고 한다면 굳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날카롭게 대비될 필요는 없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점점 줄어들겠죠. 다. 좀 이상한 말씀 같아요? 어쨌든 그 먼 후손들이 오늘 우리들을 본다면, 우리가 지금 5천년전에 사람들을 생각하듯이 그렇게 판단하겠죠.

이 요한복음 14:6절, 재미있습니까? 요한복음 14:6절만 놓고도 몇시간 동안 강의가 가능하겠죠. 이것을 해석하기위한 전 준비, 제가 한두 마디만 잠간 하고 말았습니다만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직접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할 말도 많이 있겠죠. 여기 신학생들이 있다면 꼭 명심하세요. 해석의 능력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해석, 텍스트에 대한 해석, 텍스트는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건이고 거기에는 층층이 아주 끝없이 담고 있어서 들어간 것만큼 보이는 것이죠. 한 층더 들어가면 더 보이고. 네. 이러한 능력을 갖게 되면 설교를 할 수 있게 되는거예요. 우리는 그런 것을 전혀 준비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 겉으로 드러나 이것들을 신자들에게 억지로 먹이는 거죠. 소화가 안되는 데도 억지로 먹이는 거죠. 해석을 하지 않으니까 소화가 안 되는 이야기예요. 신자들이 않아 있으면서 머리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들어요. 아. 내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거보다 자책을 하는거죠. 이런 방식의 신앙이 반복되면 그런 영성이 풍요로워 질 수가 없어요. 살아날 수가 없어요. 죽죠.

요한복음 14:6절에서 말하고 있는 세 가지, 첫 번째 나는 생명의 길이다. 나는 길이요. 호도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호도스. 길. 제가 못 쓰는 헬라어를 써볼까요? 마틴 루터의 성경에는 Weg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알레티아라고 하는데요. 독일어로 wahr 진실한 참된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를 붙여서 heit, wahrheit 세번째는 조에, 독일어로 leben(레벤). 네 세가지 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한거죠. 예수는 길이다. 진리고 생명이다.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우리는 각각 한 시간씩 하더라도 모자랄 겁니다. 이건 자기가 할 능력만 있다면 끝없이 할 수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완료된 대답이 아니라 대답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했는데요. 고 맥락으로 여러분들이 빨리 들어 가셔야 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참고적으로 한마디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거는 설명을 충실하게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면 안되는 말을 억지로 강요받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직까지 종착역 완료된 대답이 아니라 그쪽으로 중간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안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아직 종착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상에 존재하거든요. 하나님과도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야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데요. 모세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직접보지 못하고요. 하나님이 내가 지나갈테니까 너는 나를 직접보면 안된다. 가려주고요. 지나간 다음 내 등만 본다고 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등만 봤다. 그것도 메타포죠. 우리는 불안할 수 밖에 없어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나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광신이니까 광신에 떨어져 있으면 믿음좋다 이야기하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네 기독교 신앙은 불안하지만 그걸 안고 어떤 것을 안고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거는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하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길이라고 하는 것, 어떤 이야기를 더 해야 할까요? 작은 제목만 드려도 여러분들이 아실텐데요. 예수님이 그러니까 어디로 향하는 길일까요 하나님에ㅔ게로 이르는 길이겠죠.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 이건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도표식으로 그리는 게 좀 그렇습니다. 나. 내가 있고 그리고 여기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 자체가 예수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간다. 도표로 그리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도표는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길 자체가 하나님인거예요. 예수가 곧 삼위일체 차원에서 예수가 하나님이거든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이른다고 한다는 것은 그냥 그러한 어떤 그.. 아직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 궁극적인 진리가 하나님이니까... 온전한 실체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의 우리를 전제하고 그 과장에서 필요한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걸 위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길 자체가... 길은 예수님 하나님이구요. 그 자체가 하나이구요. 우리가 지금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 것, 그 천로역정에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서 우여곡절끝에 천성문에 이르잖아요. 여러분 이것을 이야기가 그렇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며 곤란합니다. 이 길 자체가 가 하나님이거든요.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한게 아닌데 제가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하여튼 그런 정도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과정 자체가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일종의 길로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과한 다음에 어디 가서 영원무궁토록 잘 먹고 잘 사는 그러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거죠. 지금 우리가 가는 과정 자체가 길 자체가 하나님인거죠. 아 그럼 죽은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게 이런 것? 아니냐? 기독교 신앙에 그런 내세에 대한 게 없냐? 네. 미안 합니다. 그런 것은 제가 잘 몰라요. 제가 말씀드리기 힘듭니다. 우리는 자꾸만 시간을 그렇게 나누어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거 전체가 다 하나님의 사건이 되어 있는거죠. 창조부터 종말까지 새로운 생명까지 여기에 우리는 종말이라고 하는데 종말의 단절이기는 합니다만 연속적이기도 한 거거든요. 이 비밀을 우리가 사실은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여러분 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살거 같애요? 그거는 아니겠죠. 지금 여기서는 좀 아름다운 사람 약간 못생긴 사람, 건강한 사람 못한 사람, 세련된 사람, 무식한 사람 구별이 되지만 어떤 궁극적인 세계, 하나님의 나라라는 그곳은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지금 우리가 조금 오래 살고 행복하고 그러한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과정이 이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 세계에 어떻게 포함되는지는 사실은 잘 몰라요. 그러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라고 할때, 정확한 표현은 아닌것 같은데 제가 말을 하다보니까 여러 가지가 섞여 져서 그렇습니다. 전달이 되겠죠. 댓글을 다셨네요.

메타포는 그것이 가리키는 '다른 무엇' 아닌가요? 일종의 은유니까요.' 예수가 빛'이라고 할때 빛 자체가 예수는 아니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서 길이라고 할 때 길 자체가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그러나 메타포로서의 길은 분명한 거죠. 빛이라고 하는 메타포로서는 분명한 거죠. 그거는 어떤 궁극적인 것을 실질적으로 우리가 유비적으로 아날로기아고 보는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유비로는 힘드니까 풍유 은유 이런 방식으로 하는 거죠. 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은요. 우리가 어떤 곳을 딱 들어간다는 생각을 좀 줄이시고 과정 자체 전체가 다 하나님 통치고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면 옳습니다. 그렇다면 너무 좀 허무하다.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서 예수님 만나고 죽었던 가족들도 만나고 다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때를 기다리면서 이 어려운 시련를 견뎌 내는 것인데 무슨 말이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으셔도 됩니다. 그게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그러한 어디에서 끝나서 어디로 소옥 들어가는 것, 그런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고 보는 게 옳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다 끝난 것 아닙니다. 사실은 누가 딱 끊어서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알려 주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 뿐인거죠.

두 번째는 진리예요. 다 연결되기도 합니다. 과정속에서 우리가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건데요. 하이데거가 이 문제를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요. 진리는 탈은폐라고 하더라고요. 진리의 속성은 탈은폐다. 은폐된 게 드러나는 거예요. 이 말은 곧 여전히 은폐가 여전히 남는 거죠. 완전하게 모든 은폐가 드러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종말에나 가능합니다. 이건 예수님의 말씀과 직접 연관되는게 아닌데 내가 왜 하이데거 이야기를 했을까요? 보통 우리는 예수님이 진리라고 할때 좀 막연하기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이런 애기을 드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진리라고 할때 그게 어떤 의미냐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것이 거든요.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는 것도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육신하셨고 그런 이런 우리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적 용어로 딱딱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에게서의 그것이 탈은폐되는 그런 것이 드러나는 그러한 일들이 있을 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거죠. 그게 탈은폐되지 않으면 이건 도그마화 되는거죠. 도그마. 이거는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딱 고착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건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도구마화 되는 거죠.

세 번째는 생명입니다. 조에. 레이번이라고 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길과 진리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생각해 봐야 하겠죠. 결국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아까 제가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 혹은 구원, 이 명제가 핵심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곧 예수는 곧 우리들에게 생명, 이렇게 말하는 것 하고 똑 같습니다. 구원은 생명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예. 생명만 일단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이, 우리가 지금 생명을 살고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된 생명이 아닌지는 우리가 잘 모르죠. 지금 우리가 죽어요. 이게 무상(無常)한 겁니다. 늘상. 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거든요. 그리고 잠정적인 것이고 말이죠.

저도 어느 사이에 이렇게 나이가 들었네요. 아마 멀지 않아서 우리 이 다비아 홈페이지가 그대로 있다면 제가 한 80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먹고 있을때 아마 옛날에 이런 강의를 했지. 그때는 젊었지 오십대 중반이지만 그때는  젊었지 재미있었지 그럴 걸 회상할 날이 올겁니다. 그게 너무 빠르거든요. 아주 순식간에 오게 되거든요. 그렇게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걸 참된 생명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그러나 아까 제가 길이라고 할 때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요. 그렇게 보면 이렇게 무상하지만 이것이 무상하지 않는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지금 과정중에 있으니까요. 길을 가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짧은 순간에 이러한 생명들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거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거는 우리가 지금 딱 끊어서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가봐야 알게 되겠습니다. 훗날. 그러나 사실은 나중이라고 하는 말도 그렇게 정확한 용어는 아니죠. 하나님 나라에 가면 옛날이 있고 지금이 있고 나중이 있고 그런 시간은 아니잖아요. 그런 시간은 여기서의 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우리는 시간을 나누고 그렇게 시간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그러잖아요. 영생, 영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영원이라고 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거죠.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면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았던 삶, 이렇게 지지고 볶고 했던 삶들이, 과거 내가 옛날 지구에서 살았을 때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았다고 하는 것을 과거의 경험으로 이렇게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 아니죠. 거기에 가게 되면, 간다는 표현도 좀 그런데요. 하여튼 그 세계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 그러한 시간 개념이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걱정하진 마십시요. 지금 우리는 이 지구에서, 중력이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는 이런 모양으로 생명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절대적인 생명이 아니니까 나중에 영원, 영원한 생명에서 과거가 똑바로 기억나지 않을까 그러면 얼마나 허무할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들이 바깥으로 나왔을때 전혀 다른 세상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와 같습니다.

아까 제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이야기를 했죠.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냥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근본적인 틀 자체가 바뀌게 되는 거거든요. 그걸 요한이라든지 묵시문학자들이 새로운 애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라고 하는 거요. 이런 것들이 그렇게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건 아주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꿰뚫어 보는데서 나온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었고 세계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점에서 성서의 세계관을 여러분들이 전혀 오늘의 이 자연과학의 세계에 비해서 조금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 불안하게 느낄게 없어요.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대한으로 정확한 세계 이해였었고 종말론적 관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잘 몰라요. 현재 이렇게 무상하게 지나가는 생명만 그림자처럼 한자락을 붙들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의 이 삶이, 오늘의 지구에서의 이 삶이 판단된다. 심판된다고 하죠. 판단받는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궁극적 생명에 맞지 않는 것들은 다 제거된다는 것이라는 거죠. 가라지는 불살라 버려야 되니까 알곡만 들어가게 되는거잖아요. 지금 오늘 우리들의 삶에서 가라지와 같은 것들을 가능한대로 적게 생산하고 알곡들을 많이 생산하고 살아야 되죠. 생명지향성입니다. 생명지향적으로 살면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심판의 순간에 우리들의 많은 생명들이 거기에 인제 속하게 되겠지요. 그러한 생명지향적인 삶이 아주 소수고 가라지와 같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 받겠죠. 지금 여기서 이 땅에서 생명지향적으로 삶을 살아야 되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지향적인 삶을 사는 것이냐 무엇이 생명이냐 하는데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생명이예요. 어떻게 사는 것이 오늘 이 시간에 여기서 here and now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풍부하게 또 다층적으로 이해하고 공부하고 또 그러한 삶의 현묘한 그러한 생명의 운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그러한 태도, 그러한 삶의 능력을 가르켜서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영은 바로 생명의 영이니까요.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자꾸 돌고 돌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사실은 기독교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조금 다르게 끌어내서 설명하고 있는 것 뿐이죠. 뭘까요? 생명지향적으로 산다고 하는게.

지난 목요일날 시간이 벌써 지났군요. 마지막 수업시간은 조금 빨리 마치는 건데 시간을 많이 끌었군요. 지난 목요일 정식으로 하는 마지막 시간에 정식으로 하는 마지막 수업시간에 구원의 세가지 지평을 말씀드렸고 또 한국이라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속에서 추구해야될 몇가지 문제들도 말씀드렸는데 생태학도 필요하고 구체적인 정의 평화 운동도 필요한데요. 그런데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겁니다. 예수에게 일어났던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들어가는 거죠. 이거를 우리는 생명의 근거다. 생명의 알짬이다. 생명의 엑기스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고요. 하여튼 이번 2008년 1월부터 6월까지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 모르는데 각각 다 다르게 살다가 이렇게 6개월 동안 같이 공부했습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받아들이고 인연이면 인연이구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계속 다비아 운동에 많이 참여하시구요. 또 개인적으로도 질문하시거나 나중에라도 말씀해 주시기 바라구요. Okboddy 강의를 여는 것은 7월까지 가능합니다. 그래도 개인면담은 동화상으로 가능합니다 사용료 없이 열려져 있는 겁니다. 상담이나 그러한 것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약속이 되어 있으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여러분 요즘 정국이 조금 어수선하죠. 여러분 중심 꽉 잡고 이 나라의 정의와 평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근사한 그러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각자 주어진 여건안에서 참여하시길 바라고요.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접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잘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