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23강(080619) 기독교와 한국교회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기독교가 뭐꼬라고 하는 그러한 제목으로 주욱 진행했는데 10장까지 했군요. 마지막 11장, 12장 두 장 남았습니다. 우리가 진도가 별로 나가지 않는 거 같구요. 제가 뭐 쓸데없는 이야기만 많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세월이 가닌까 진도가 나가네요. 1장부터 10장까지 했어요. 초기 기독교의 토양, 유대교 그런 것들의  몇몇 항목들을 말씀드렸고요. 주욱 역사적 예수, 십자가와 부활, 세계교회역사, 구약성서, 신약성서,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 예배와 교회조직들, 신론 인간론, 지난번 두 번에 걸쳐서 윤리에 대한 것까지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독교와 한국 혹은 한국교회, 그리고 21세기 한국교회 미래 이런식으로 강의를 마치게 되겠습니다. 이게 주로 일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강의인데요. 아주 개론적인 이야기지만 개론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고 사실은 그 안에 기독교의 근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시시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깜박하고 제가 캠코더를 누르지 않았군요. 잠깐 기다려 주세요. 네 이제 캠코더를 다시 올렸습니다. 제가 자꾸 캠코더를 누르는 것을 잊어버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때는 아예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설치해두고도 누르는 것을 잊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지나가네요. 정신을 빼놓고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강의에 집중하느라고 보니 저런 카메라에 신경을 쓰지 않는수도 있구요.)

아주 개론적인 겁니다만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시시한 이야기만은 아닐겁니다. 우리가,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인데 중요한 건 이제 그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어떤 경지라고 할까요?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지 어떤 형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개론적인 공부지만 이런 것을 바탕에 놓고요 고급 신학대학원, PHm이라고 하던지 박사과정 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있는 세미나 같은 것도 가능합니다. 사실은 제가 개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도 다 고급 신학세미나의 밑바탕이 되는 이야기예요. 제가 6개월까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을 잘 받아들이기만 했다면 여러분들은 신학대학원 일반 신대원 말고도 Thm 그런데 가서도 얼마든지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데서의 차이라고 하는 것을 부분적인 것을 다루는 거예요. 전반적인 것을 다 바탕에 놓고 더 깊이 들어가는 거죠. 바르트하고 부루너 사이에 어떤 자유 신학논쟁이 어떻게 진행 되었는가? 하는 그런 문제라든지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 성만찬 논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하는 거라든지 그런 것들을 좀 깊이 들어가는 거 뿐이거든요. 또 뭐 예를 들자면 1930 몇 년인가요? 바르멘 신학선언, 그런 것들을 읽고 바르트와 그쪽에 포함되었던 고백교회죠 말하자면 독일교회가 아니라 나찌하에서 독일교회가 두개로 구분되었습니다. 하나가 독일기독교회 도이취 크리스튀켄, 또 하나는 에켄렌데 키리세, 에켄렌데 게마인데인가 고백교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종교와 정치 이런 문제들을 다룰 때 이게 놓치지 않는, 꼭 들어가게 되는 하나의 도큐멘트입니다. 문서예요. 고백교회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어떻게 했느냐는 그런 것을 놓고 좀 더 깊이 들어가는건데요. 그게 별거 아니라니까요. 중요한 것은 이제 기초가 있느냐 없느냐 그겁니다. 제가 우리 강의가 개론적이었지만 수준낮은 것은 아니었다는 건을 변명하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초적인 거를 1장부터 10장까지 윤리학까지 왔어요. 흐름을 이해하시겠지요.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요. 기독교 출발을 했습니다. 출발은 토대가 뭐냐 하는 거죠. 토대는 유대교였다고 하는거구요. 초대 기독교가 시작한 역사, 초대교회 기독교의 문서들 신구약 성서들, 교회 형식들 주욱 이야기하고 결국은 기독교 윤리, 결국은 우리의 삶의 문제니까 이거는 실천의 문제요. 프락시스라고 하죠. 실천윤리 삶의 문제니까 이렇게 제가 구도를 잡는 것은 잘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유 우리의 고백 이러한 존재론적인 차원이 있지만 결국은 우리가 행동, 결국은 행동을 해야 되니까요. 꼭 그게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느냐 하는 것은 딱 끊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아도 사실은 되기는 하는데요. 그러한 영성은 우리는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행동하지 않고 사막에서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어떤 깊은 세계로 들어갔잖아요. 그걸 우리가 전제해야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광야로 나가서 유유자적하게 고독하게 사신 것이 아니라 저자거리로 들어와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고 하는 것을 기초로 놓고 볼때 윤리 삶 이런 문제들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주욱연결해서 볼때 사실은 다 끝났습니다. 기독교가 뭐꼬에서 할 말은 다 끝난 거예요.

우리는 기독교가 뭐냐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상황을 놓고 이야기하려는 거예요. 두번 강의는 그렇습니다. 한국인 기독교요. 기독교인 한국 기독교인이 먼저인가요? 한국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먼저 인가요? 우리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조선 땅 특별히 분단된 체제속에서 남한쪽에 태어난 사람이고 거기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의 틀안에서 어떻게 받아내고 열어가야 되느냐 하는 문제들을 다뤄가야 하지요. 그런 것을 우리가 포기할 수 없잖아요. 지금 특별히 오늘은 아니고 다음 주 목요일 날 이야기하게 되겠는데요. 21세기 분단체제라고 하는 이 문제는 신학적으로 다 중요한 문제이고 21세기 한국교회의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나가야할 방향이라고 할 까요. 그런 면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붙들어야 될 해석학적 토대 혹은 준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뭐 촛불시위도 있고 미국과의 관계들, 뉴라이트 또 거기서 계속 이야기하는 좌파 이런 이야기들이 조금 사납잖아요. 그러한 말들이 인제 먹히는 이유는 분단체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어쩌면 저는 이런 점에서는 노무현대통령이 한 말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가 진정성을 담고 한 이야기인지 그냥 쉽게 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그가 처음에 대통령 시작할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그래요. 남북문제만 잘 끌어가면 다른 것은 깽판 쳐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어요. 그건 어쩌면 남한만의 구조, 전반적인 어떤 것을 뚫어본 정치가의 정확한 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단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건 정말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어요. 그게 뭔지는 이 시간에 일일이 다 밝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다 잘 알기도 하고 강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게 아니기 때문예요. 하여튼 모든 게 총체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문제만 보더라도 오늘 뒷부분에 나올 문제와 연관되어 있네요.

한국교회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져 있잖아요. 한기총하고요. NCC. 네 이거 뭐 거기 연결되어 있는 사연들이 긴데... 다 이야기할 것 없어요. 어쨌든 한기총과 NCC가 나눠져 있습니다. 지금 덩치는 이게 커져 버렸죠. NCC는 이제 힘이 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게 역사가 오래되죠. 60년 이상이 되어  1948년도에 시작했으니까. 하여튼 바로 시작했을겁니다. 한 60년대. 그런데 지금은 약해요. 이 한기총은 주로 우익, 미안합니다. 이런 표현 붙었어요.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구요. NCC는 좀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북한에 대한 것, 다 그런것은 아닌데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좀 많구요. 여기는 북한을 조금 그래도 전향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친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약간에 북한에 대해서 우호적입니다. 오래전부터 북한에 있는 기독교 대표자들과 회의도 많이하고 연계도 많이 하고 그랬죠. 한기총은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많이 열려져 있더군요. 어쨌든 분단의 문제가 우리 기독교에도 영향을 미치고 21세기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될 중요한 방향점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윤리 문제까지 왔지만 마지막으로 한국이라고 하는 상황속에서 사는 우리들이 도대체 이 기독교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전개하고 나가야 되느냐 그러한 질문이예요.

먼저 한국 교회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두 사람, 이승훈과 김대건 여러분들이 여기 파워포인트에서 보는 사람들 이름입니다. 벌써 느낌이 오시죠. 가톨릭 대표자들이예요. 이승훈은 최초로 세례 받은 사람이구요. 로마 가톨릭이 우리보다 훨씬 더 백 몇십년전에 조선에 전도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쪽에 세례자도 먼저 있구요. 이승훈은 가톨릭과 개신교 통틀어서 한국 조선 사람으로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구요. 김대건은 누구일까요? 김대건은 한국최초로 사제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한국 교회사에서 이 두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죠. 이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았어요. 그때 받은 영세명이, 세례명이었죠. 베드로였구요. 1784년 2월이었다고 합니다. 230년 전이군요.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그해 3월에, 2월에 세례받고 3월에 가톨릭의 몇몇 성물을 챙겨서 조선으로 돌아와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5년만에 신자수가 4천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참 놀랍죠. 이게 얼마나 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교회사 책을 참고로 해서 여기 인용한 건데요. 어떻게 한 사람이 들어와서 5년만에 4천을 했을까? 여기에 여러가지 속사정이 있겠죠. 이 이승훈은 사제가 아닌데도 미사, 미사라고는 할 수 없죠. 정확하게는 공소의전이예요.  로마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없이는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제없이 평신도들끼리만 드리는 예배를 공소라고 하지요. 이 이승훈은 이러게 미사를 공소방식으로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뒤에 나옵니까? 세례를 주었어요. 나사제가 아닌데요. 그게 얼마나 합법적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어려움을 많이 당했어요. 1785년 김범우의 집에 치안당국이 급습해서 거기 모였던 가톨릭 신자들, 양반들은 훈방조치하고 김범우만을 유배를 보냈는데 그 사람은 유배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범우의 집터에 지금 명동성당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언덕에 모여서 정부가 허락하지 않는 종교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유배 떠났다가 죽은 이 김범우의 집터에 그 유명한 명동대성당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21년전 한국이 민주항쟁이 있었을 때 로마 가톨릭 명동성당이 아주 상징적인 역할을 했거든요. 지금은 시청앞으로 옮겼어요. 그만큼 명동성당 점점 보수화되었다고 할까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습니다. 시민들이 그쪽으로 안가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 현재는 21년전의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민주항쟁, 그것이 오늘 다시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장소가 다르다는 것에 어떤 메시지가 거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그 뒤로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로마 가톨릭 한국교회에서 당한 순교는 끔찍했습니다. 그게 조선정부의 폐쇄정책이라든지 쇄국정책이라든지 국내 정치적인 문제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로마가톨릭 교회 자체의 조금 지혜롭지 못한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거든요. 주문모 중국신부에게, 주문모는 중국사람이예요. 그 분이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를 했는데 그에게 세례를 받은 황사영은 이제 북경 주재 주교에게, 그 당시에는 한국도 중국 북경 주교 산하에 있었으니까요? 조선의 박해 상황을 잘 보고하고 밀사를 통해서 그 문서를 보내는 데 그게 발각되는 거예요. 황사영 백서라고 합니다. 내용은 북경주재 프랑스주교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의 내용은 네가지에요.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천주교 말살 실상 하나고. 두번째 천주교가 박해 당하는 이유를 그 당시에 있었던 당쟁과의 관계에서 설명을 했구요. 조선의 경제적 빈곤을 구제해달라고 했습니다. 세번째는 중국으로 하여금 조선에 압력을 넣어서 천주교를 좀 용인하도록 좀 해라, 좀 그렇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었구요. 마지막으로 조금 이기적인 문제였죠. 심각한 문제였죠. 서구의 여러나라를 움직여서 군함 수백척에 군사 5,6만 그리고 대포등 무기를 싣고 힘으로라도 조선을 굴복시켜서 선교 승인을 받아내야 한다고 하는 자기 의견을 거기다 썼습니다. 이러한 밀서가 발각되었으니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사화가 인제 시작되는데요. 황사영은 1801년 27살때 반역죄로 몰려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승훈도 그렇고 김대건 신부도 뒤에 나옵니다만 빨리 죽었고 황사영도 27살이면 지금 나이로 따지자면 상당히 어리잖아요. 결혼도 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당시로 봐서. 국가적인 차원에 엄청난 일을 도모하기는 했구요. 그사람의 행위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떠나서  엄청난 일을 27살 나이에 했네요. 옛날에는 좀 조숙한 것이었나요. 반역죄로 몰려서 참수당하고요. 가산은 다 몰수당하고 모친은 거제도로, 처는 제주도로, 자녀들은 추자도로 유배를 당했습니다. 그때 300여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계속해서 순교가 일어났어요. 1840년 지해교난, 1866년에는 병인교난, 1871년 신미교난입니다.

대원군이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해서 전국 주요 도읍에 척화비를 세우고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여러분들이 한국 교회사를 읽으면 다 나오는데 제가 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겠죠.

김대건이라고 하는 사람만 한번 짚겠습니다. 1821년에 태어난 사람인데 16세때 청나라 마카오 신학교에 입학했구요. 1845년 8월 17일 24살에 김대건은 조선인으로 최초 신부 서품을 받았습니다. 한 달 후에 페라오 주교와 같이 국내에서 반년쯤 활동하다가 체포당했죠. 국내 정치가 굉장히 복잡했기 때문에 결국 그 와중 가운데 1845년 9월 15일 25살이군요 새남터에서 칼을 8번 맞고 죽었다고 하는데요. 지금 김대건 신부 거기에 가보면 성지로 되어 있습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고 장소인거 샅아요. 제가 가보았는지 안가보았는지 기억이 없네요. 가보았을 것 같은데 아주 옛날에요. 이렇게 천주교가 조선 땅에 발을 딛는데 참으로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세계 교회 역사가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9세기 초 70여년간 조선인들 만큼 수난을 겪었는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려울 것같다. 로마황제에 의해서 순교를 당했던 초기 기독교인들보다 어쩌면 한국의 조선 사람들의 순교가 더 끔찍했을지 모른다는 그러한 진술인데 과장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한국 정치적인 문제, 폐쇄적이고 파당정치 가운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그러한 이유도 있겠습니다만 천주교 신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잘 헤쳐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부추긴 그러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습니다. 아까 예를 든 황사영백서 같은 것들은 너무나 드러나는 노골적인 반, 조금 조금 뭐라고 할까요? 기독교 신앙보다도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천주교가 여기에 승인 받는 것이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한 내용도 담아서 쓴 겁니다. 그건 아무리 기독교 신앙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거잖아요. 그리고 그 당시 그게 좀 어렵기는 합니다만 물로 가톨릭을 박해했다고 하는 점은 있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좀 지혜롭지 못하게 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사건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한국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올때 취했던 어떤 신앙적 자세 이게 또 문제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순교나 박해를 당했을 때 그게 다 신앙을 지키기 위한 아주 숭고한 행위의 결과로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가 신앙의 모범으로 삼기는 해야 됩니다마는 그러나 모든 것을 무조건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모든 걸 다 이렇게 설명하기 힘든 거예요. 그 내용을 조금 더 파악을 잘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 제사와 신주를 불사르는 일을 좀 하지 않았으면 그러면 상황은 좀 달라졌을까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는가 하면요. 우리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하고도 연관되는 거거든요. 우리는 기왕 말이 나왔기 때문에 짚고 넘어 가겠습니다. 지금도 개신교 신자들이 순교자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게 어떤 점에서 보면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 시댁에서 제사를 지낸다. 나는 내 신앙을 위해 제사를 안지낸다. 이렇게 나오게 되면 좀 우스운 것이잖습니까? 물론 그 시어른들이 인격적이어서 며느리의 신앙을 존중해주고 뭐 그렇게 한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말이죠.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이 있죠. 겉으로는 알았다 니 맘대로 해라. 그러나 속으로 전통적으로 제사를 드리던 사람들이 며느리가 들어와서 안한다고 하면 기분이 좋을 거 없거든요. 그런데  예수 믿는 며느리들이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하고 그리고 제사지내면서도 형식적으로만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억지로 와서 전도 부치고 하지만 표정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자기 하기 싫은 것 억지로 한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한 상담들도 다비아에 올라왔습니다만 최근에는 좀 없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전화를 주신 분도 있구요. 시댁하고 그런 문제로 갈등을 느끼면서 이게 바로 어떤 기독교 신앙을 잘 지키는 자세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저는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제사 문제는 그렇게 신앙의 본질이 아니니까요. 신주는 조금 다르겠죠. 돌아가신 분의 위패를 모아놓고 3년동안 절하고 밥도 놓고 하는 것 있잖아요. 글쎄요. 지금 지금은 이렇게 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 현재의 문제는 아니고요. 제사는 여전히 문제가 되는것 같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추석 설 즈음해서 제사를 지내지 마라 이런 방식으로 신자를 가르치는 일들이 있는데 저는 그게 별로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사 지내는 것이 큰 문제겠어요? 그건 하나의 문화이거든요. 제가 각주를 여러분이 강의안에 실었습니다만 이 제사라고 하는 거는 굉장히 우리나라에서 좋은 하나의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전날 밤이나 추석 설날에 드리는 동양의 고유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공동체를 하나로 만드는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먹거리도 별로 없을때 였구요. 제삿날만 기다리는 자식들도 많이 있었구요. 그때 되어야 쇠고기 국도먹고 쌀밥에다 그럴 수 있구요. 동네 사람들에게 조금 나누어주기도 하구요. 그러한 것을 통해서 공동체성을 확보하기도 하고 또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제사일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어떤 경험을 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선 지금 뭐 기독교에서 제사가 아니라 추모예배로 전부 통하죠. 추모예배한다거나 추모예배나 제사나 마찬가지요. 사실 어떤 한국의 전통을 살린다면 제사를 살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굳이 그게 꺼림칙하면 추모예배로 바꾸시던지요. 어쨌든 제사의 여러가지 순서가 있죠. 일종의 예배인데요. 미사지요. 이걸 통해서 죽음을 더 가깝게 느낀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런 것을 간접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좋은 거다.

그런데 천주교가 처음에 시작하자마자 거절해 버렸으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보면 지혜롭지 못한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려서 조금 미안합니다만 그 당시에 박해를 받은 순교의 잔혹한 일들은 자업자득이라고 표현하면 좀 불손하고 자기책임도 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이 아마 천주교 신자들도 그렇고 우리 개신교 신자들도 마찬가지 인데 북미의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거든요. 그들의 삶이거든요. 그들의 문화이거든요. 그들의 서양의 문화와 기독교, 이거의 관계예요. 이거를 이 선교사들이 하나인 것처럼 가르쳤거든요.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오래 동안 반복되어갖고 로마가톨릭보다 우리 개신교가 더 심한데요. 미국이라면 무조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국가고 말이구요. 백악관에서 대통령 취임할때 성경위에 손 얹고 기도한다는 것 대단한 것처럼 말하구요. 좋은 전통이기는 하겠습니다만 그렇게 손 얹고 기도하면서 자기 말 듣지 않는 작은 나라들 무지막지하게 공격하고요. 이라크 전쟁이라고 하는 그러한 일들이 계속 반복되잖아요. 2차 대전 이후에 그런 일들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그렇게 크게 일어난 전쟁말고도 아니라 미국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정부가 제3세계 어디에 들어갔다. 게릴라 쪽으로 무기를 지원해서 정부를 전복해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FBI인가요. 그런 쪽에서요. 성경위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는 그런 것들을 목사들이 예를 들면서 미국을 대단한 기독교 국가인것 처럼 말하는 것, 그런 것들이 자꾸만 신자들에게 반복되어서 미국의 모든 문화를 기독교 자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지금은 조금 한발 물러섰습니다만 영어 몰입교육한다 이런 것들도 다 마찬가지고요. 프랑스같은 경우엔 일부러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영어로 물어보면 길거리에 가서도요. 프랑스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해요. 이상하죠. 초등학교때 분명히 개네들은 말들이 비긋하니까 영어는 어느정도 배우는데요. 커서는 잘 영어를 쓰지 않는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가 영어 실용 영어여야 된다. 실용영어 어떻게 영어를 둘로 나누는것 같아요. 실용영어, 교양영어, 말을 해야 된다. 저는 실용 영어보다 교양영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접어두고요. 그러한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나 사대주의 이런 것들이 한국 개신교회 신자들의 의식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웬만한 대중적인 설교자들은 예화를 들때 늘 미국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기독교 신자들이 늘 그 이야기들 듣고 싶어 합니다. 워싱턴 지하철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록펠러가 그렇게 거부가 되었지만 십일조를 어렸을때 부터 했다든지. 록펠러 입니까? 누구입니까? 예화들때 말이죠. 모르겠어요. 사탕 먹을만큼 가져가라. 집어 주세요. 어른 손이 크니까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 등등해갖구요.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방식과 문화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잘못이 천주교의 시작이 되었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문화와 기독교 이 사이를 잘 생각하십시오. 폴 틸리히라고 하는 사람, 이 사람 독일 사람인데 나치 피해서 미국에서 유명한 신학자로 활동한 사람이죠. 이 사람의 특징은 문화의 신학이거든요. 신학, 문화, Theology of culture, 유명한 책입니다. 문화는, 그 사람의 말을 빌자면 옷이예요. 그리고 신앙, 기독교 신앙은 옷이에요. 몸이 옷을 입는거죠. 문화, 중요한 것은 몸이죠. 옷을 벌거벗고 있으면 챙피하긴 하지만 옷이 문화의 핵심은 아니죠. 문화로 나타나긴 합니다. 그러나 본질인 이게 중요한 거죠. 이게 똑같은 것은 아니죠. 구분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천주교 이야기하고 있는 거니까 조금 더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문화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바람에 한국의 문화인 제사를 파괴시킨 거예요.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고건 제가 보기에는 그 당시 선교사들이 생각을 잘못한 것 같습니다. 술 담배도 마찬가지구요. 요건 조금, 요거는 다른 거네요. 문화라기보다는 기호니까 그거는 그대로 접어두고. 그러니까 한국의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가면 되는데, 그러니까 신앙이 기독교 신앙이요. 있잖아요. 옷을 입어야 되잖아요. 옷을 한국 조선의 옷을 입어야죠. 한국 사람의 옷을 입어야 되잖아요. 먹을 거리도 그렇고 소리도 음악도 그렇고요. 그렇게 해야되잖아요. 우리가 서양 사람의 옷을 입고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행태가 말이죠. 물론 이런 문제를 토착화 비슷하게 이야기하는데 얼마만큼 해야 하느냐? 예수님도 삿갓 쓴 분으로 만들어야 하느냐?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갈 필요는 없겠죠. 역사적 예수를 우리가 그대로 살리면서 그러나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은 우리의 문화를 좀 담아내자 하는 거죠. 그걸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는 논의 되어야만 되는 겁니다. 예배드릴때 파이프 오르간이나 서양음악을 일소해버리고 장구나 북 징 이런 것만으로 해야만 하느냐? 그러한 예배, 실험적으로 드린 예배가 있기는 있습니다만 등등, 목사가 입는 가운도 한국의 두루마리와 같은 그런 옷을 입어야 되느냐? 찬송가 문제만 하더라도 말이죠. 우리나라 찬송가가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유럽과 미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그와같은 기독교 찬송가를 사용하는 데가 없다고 그래요. 여기서 더 길게 나가지 않고 되었습니다. 그러한 제사 문제때문에 받은 천주교의 극심한 박해가 물론 한국의 정치적인 이런 저럼 많은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지만 자체적인 문화와 기독교 문제를 혼동해기 때문에 온 이유도 있지 않느냐 그런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이야기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거요.

개신교 역사입니다. 개신교 교회사, 한국 교회사입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1885년 4월 5일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가 있는데 이 날은 한국 개신교 역사 시작이라고 하는거죠. 그 이전에 이미 1884년에 북미장로회 선교회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근무하다가 이때 84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오기 1년전에 한국에 들어온, 알렌은 가을에 들어왔고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다음해 봄에 들어왔으니 6-7개월 정도 됩니다. 알렌이 먼저 와서 기초를 닦았죠. 그런 다음에 이런 저런 외교가들 중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독교가, 개신교가 한국에 중심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네. 자세한 이야기는 뭐 할 필요가 없구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말고 다른 교파들, 성공회는 1891년 9월 30일에 시작했구요. 침례교회는 1889년, 그리고 안식교회는 1904년 입니다. 안식교회는 이단인데 뭐 하러 이야기하냐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이단도 크게 많이 다른 게 있고 약간 덜한데가 있는데요. 제칠일 안식교회는 그렇게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몇가지가 있는데요. 그래도 안식교회는 우리하고 많이 비슷하다고 보면 좋구요. 여호와의 증인은 조금 더 나가죠. 제가 속해있는 성결교회는 1907년에, 구세군은 1908년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상당히 시련을 많이 당했지만 개신교회는 그렇게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천주교가 받은 무슨 무슨 사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제가 볼때는 아.. 개신교가 들어오던 19세기말, 이때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862년부터 1904년에 이르는 동안 농민전쟁과 외세가 들어와서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열강들이 들어와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텐데요. 그때는 조선정부의 권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정부자체가 힘이 없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해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제가 마지막 구절을 썼습니다만 ‘국력쇠퇴가 개신교의 선교에 대해서는 절호의 기회가 피를 흘리지 않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을 해야 되는데 이거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은 이해하시겠죠. 천주교회는 우리보다 100여년 앞에 들어왔는데 상당히 시련을 많이 겪었고 우리는 100여년 후에 들어와서 우리 조선 정부가 아주 힘들어 할때 들어와서 별 어려움 없이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한 영향때문인지 개신교회는 일취월장하게 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확장되는 게 속도가 많이 늦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입장이 만이 달라지고 있죠. 로마 가톨릭교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데 개신교회는 정체해지는 쇠퇴기가 보여지고 있습니다. 노쇠, 조로한 느낌이 들어요. 영성이 살아있지 못하죠.

예,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특징을 말할때는 문화와 그 문제, 기독교와의 관계 특징, 제사를 금했다고 하는 점을 말씀드렸고 개신교는 그러한 어려움이 없이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직접선교는 예수믿고 구원 받아라하는 선교구요. 간접선교는 의료 병원을 세운다거나 학교를 세운다거나 이러한 방식으로 하는 선교를 이야기합니다. 직접선교는 교회를 세우고 직접 전도하는 거라고요. 이 두가지를 초기 개신교가 잘했어요. 생각보다 잘했어요.  지혜롭게 한 것 같애요. 나름대로요. 물론 일제 시대에 한국 교회가 상당히 은둔적이고 탈역사적이고 묵시적인 그런쪽으로 나가는 경향이 없잖아 있기는 있었는데 그거는 일제 제국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일제 식민지 잘 보세요. 그게, 사실은 이게 기독교 선교와 주변 상황과 연관되는 건데요. 일제 식민지는 로마 식민지와 똑 같은 거죠. 처음 기독교가 2천년전에 시작할때의 상황도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개신교회가 한국에서 시작할 때도 조금 지난 다음에요. 일제시대 식민지였다고 하는 사실에서 두 가지 신앙이 공통점이 좀 보입니다. 가능한대로 정치 종교 분리쪽으로 나간거죠. 정교 분리, 가능하면 정치적인 충돌을 피한 겁니다. 바울도 로마서 14장에서 말하고 있죠. 위의 권세에게 복종하라. 그리고 많은 문서들에 보면 노예들도 자기 일을 잘 지키고 그래라.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해라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초기 기독교 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공동체가 예수님 하고는 조금 다른 성격입니다만 제가 여기 설명하기 쉽지 않군요. 예수의 복음과 다음에 초기 기독교의 신앙, 이게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어쩌면 똑 같다고 볼 수도 있고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고 제가 지금 도저히 이 시간에 설명할 만한 여유가 없군요. 지금 제가 말씀드린 거는 이 바울중심으로한 초기 기독교 신앙인데요. 그들이 로마제국하고 충돌을 피한다고 하는 것이 그 제국을 인정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건 기본적으로 적그리스도로 작용할 때가 많이 있는 거죠. 이 황제에 대해서 퀴리오스라고 주라고 불렀는데 기독교는 황제에게 퀴리오스라고 붙이지 않고 예수에게만 퀴리오ㅡ 주님이라고 붙인다고 하는 측면에서 순교도 많이 당하고는 했지요. 큰 악을 전제하는거죠. 그러나 매사에 충돌하지는 않는거죠. 이렇게 봐야 되겠네요. 로마라고 하는 중앙정부, 중앙정부 있죠. 중앙하고는 안티를 한거죠. 항거를 한거고 지방정부하고는 같이 갈 수 있다 그러한 입장을 좀 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로마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로마정부 중앙정부는 이데올로기죠. 팍스로마나가 이데올로기였어요. 로마의 평화가 이데올로기였어요. 제가 다른 글에도 썼습니다만 팍스로마나. 팍스로마나가 이데올로기였어요. 팍스로마나가 유지되면 그대로 오케이. 그것이 무너지면 박살을 내는 것이죠. 로마 지방정부는 이데올로기보다도 치안을 유지하는데 중심을 두었거든요. 치안. 그래서 초기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이 치안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어요. 이 치안이 유지되지 않으면 기독교 선교가 불가능합니다. 이거는 유대교와 다른 종파로부터의 테러, 말하자면 정신적인 것도 그렇고 실제적인 것도 그렇고 바울이 테러를 많이 당했잖아요. 그러한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지방정부는 최소한도는 이러한 것은 막아주었거든요. 사도행전에 보면 다 모든게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방향은 맞습니다. 로마 지방정부에서 바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편지를 쓸 때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쓴 거죠. 그러니까 그거는 로마의 이데올로기를 수긍해라. 종교일치 그게 아니라 치안을 유지하는 지방 정부원들과 쓸데없이 충돌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었죠.

우리 개신교가 시작할 때도 일제 식민지였었기 때문에.. 이 선교사들이.. 처음에는... 처음이 아니라 삼일운동때 기독교인의 대표자가 32명중에서 16명이나 들어갔다고 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객관적인 사실인지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딱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 힘들구요. 여기16명이 정말 독실한 기독교인이냐 하는 것은 더 연구를 해봐야 되겠고 이중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변절을 했거든요.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16명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자랑스럽게 말할 거는 없습니다. 어쨌든 상당히 많은 사람이 여기에 참여했는데.. 그 역사와 독립이나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관여했지만 그 뒤로요. 기독교의 성질이 바뀌었습니다. 굉장히 소극적으로 바뀐거에요. 그렇게 된 것은 선교사들이 식민지와 쓸데없이 충돌하게 되면 복음 자체가 억압을 받는다고 하는, 그러니까 최소한도 복음선포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적인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걸로 그렇게 나가게 된거죠. 종교 분리정책을 쓸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제가 무조건 옳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가 풍지박산되는 한이 있다라도 그래도 싸울 건 싸워야지 하면 할 말이 없는데요. 그렇지만 그래도 생존이 중요하니까.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나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본질의 상위다. 이야기했거든요. 본질은, 신앙으로 연결해 보세요. 신앙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깨끗하냐? 얼마나 의로우냐? 얼마나 순수하냐? 그러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이거는 존재의 문제죠. 얼마나 살아내는것, 개인 사람들 보다 저 사람 괜찮다 도덕적이다 말할때  본질을 이야기하는 거죠. 살아있어야 본질이고 말고가 있지 않겠어요. 꼭 이렇게 도식적으로만 해결되는 것, 꼭 무조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은 아닌 거예요. 그러나 큰 흐름, 틀에서는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의 생존, 혹은 실존을 위해서 일본 식민, 악한 질서와 심하게 다투지 않는 그 길로 나갔다는 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느냐 생각합니다. 직접 간접 선교를 많이 했는데요. 간접선교에서는 정치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학교 많이 세웠습니다. 강의안에 많이 올려 두었는데 보십시오. 아펜젤러가 배재학당 세웠고요. 메리 스크랜튼 여사도 1886년에 이화학당 세웠고 많이 세웠습니다. 북한에 남한에 많이 세웠습니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구요.

네 개신교의 특징이 뭐냐 그거를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한 가지가 아니라 네. 한 가지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저런 것 딱 끊어서 근본주의라고 하는데 오늘은 이거를 안하겠습니다. 시간이 59분이군요. 시간이 많이 되었어요. 이거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주일 저녁에 하면 못오시는 분들이 있기는 한데요. 일단 강의안으로 참고하시고 주일 저녁에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저에게 1-2분만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고거만 간단하게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제임스 바라고 하는 사람, 유명한 사람이예요. 이름 알아두십시오. 영국학자인데. 제임스바 이 사람하고 엘릭스터 맥그래스가 조금 대별됩니다. 두 사람 다 건전한 신학자들인데 맥그래스는 더 복음주의적인 사람인데 이 사람은 굉장히 진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학문적인 사람인데요. 제임스바가 ‘근본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책을 썼을거예요. 제가 책이름을 정확히 말씀드리기 힘든데 나중에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 복음주의를 심하게 까요. 복음주의는 말만 복음주의지 아주 근본주의다. 보수주의고 근본주의다. 심하게 깝니다. 이걸 보고 맥스래스는 제임스가 뭘 잘못보았다. 우리의 진정성을 모르고 있다. 두사람의 책을 같이 섞어서 보면 재미있는데 다음에 책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저는 맥그래스는 인간적으로는 호감이 가요. 그런데 이게 바로 영국 복음주의의 장점이기도 하고 한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냥 좋은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그런 것이 많이 있는거 같아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는데요.

제임스바의 책에 보면 근본주의를 가르켜서 복음주의를 포함한 것입니다. 여기는. 성서무오성, 두번째는 현대 신학에 대한 반대, 역사 비평을 반대한다. 세 번째는 자기와 종교적견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 맞죠. 그런 것 같죠. 우리나라에 있는 신앙형태와 연관되죠. 성서무오성, 축자영감설에 많이 빠져 있고 역사비평을 부정하죠. 그래서 성서에 신화가 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완전히 넘어갑니다. 그리고 어떤 타종교나 혹은 타교파에 대한 배타성도 강하죠. 특히 합동측 중에서도 조금 보수적인 사람, 합동은 같은 장로교이지만 통합측 목사를 강단에 안 세웁니다. 법적으로 그렇게 되어있어요. 아주 코메디같죠. 같은 칼빈일텐데. 통합 합동 같은 예장인데도 기장도 아닌데도 같은 예장인데도 통합측을 안세워요. 이정도로 배타적인데요. 이런것들을 신아의 이름으로 수호하고 있으니까요. 우리 기독교 신앙이 합동골수보수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 Fundamentalism 정말 중요한건데 이거를 잘못 수호하고 있는 그러한 태도가 우리 한국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 무제를 다음에 세 가지를 다음에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있는 분들은 주일저녁에 시간이 없는 분들은 다음 주 목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