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5월11일, 저녁 8시, 시편 131편

영적 만족과 겸손한 삶

어제 5월10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불교의 중심은 수행이다. 하안거와 동안거를 하는 승려들도 많다. 이들은 화두를 붙들고 ‘나는 누구인가?’에 몰두한다. 거기서 큰 깨우침으로 얻으려고 한다. 완전한 깨우침은 열반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극도의 평화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믿음만 강조될 뿐이지 수행이 부족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아니다. 그리스도교도 기본에도 수행이 있다. 신앙의 화두는 불교의 ‘나’와 달리 ‘하나님’이다. 하나님 안에서 궁극의 평화를 얻게 된다. 그것을 시편 131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절- 겸손

시편기자는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라고 고백한다. 교만과 오만은 자기를 높이는 태도이다. 높이는 태도는 다른 이들과의 비교의식에서 나온다. 경쟁심이라 할 수 있다. 경쟁에서 이기면 오만하고 지면 낙심한다. 사람들은 여기서만 삶의 동기를 부여받으려고 한다. 이런 마음은 일종의 소여성(Gegebenheit)으로 작용한다. 동생 아벨을 살해한 카인의 마음이 그것이다. 이것이 강한 사람의 영혼은 흐리며, 혼란스럽다. 주변의 사람들까지 혼탁하게 만든다. 시편기자의 마음이 겸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에 들어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하게 포장하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의 삶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려고 기를 쓴다. 그래봤자 조족지혈이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2절- 젖 뗀 아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참된 겸손이 가능하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생명 충만한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무기력한 삶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는 태도로 이 세상의 삶에 역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겸손은 더 근원적인 차원인 영적인 삶을 가리킨다. 그는 그것을 22절에서 젖 뗀 아이라는 비유로 설명한다. 이 아이는 더 이상 젖을 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이미 충분하게 젖을 먹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 안에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 영적인 겸손은 바로 이런 영혼의 평화를 가리킨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욕망의 대상으로 이용한다. 오스틴의 <긍정의 힘>은 바로 그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구약이 철저하게 경계하고 있는 바알 신앙과 다를 게 없다. 사람들을 총체적으로 경쟁에 몰두하게 만드는 오늘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영혼이 굶주려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을 통한 참된 만족이 없다는 증거다. 참된 겸손은 참된 만족으로부터 나온다.

3절- 여호와를 바람

시편기자는 자신의 영적인 겸손과 만족을 제의 공동체와 연결시킨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예배 공동체는 영적 만족과 겸손을 제의적으로 전승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