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0월12일, 저녁 8시, 시편 143편

참회와 탄원

 

시편 143편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일곱 편의 참회 시(詩)로 분류한 것 중의 마지막 시편이다. 내용적으로 보면 탄원의 의미가 강하지만 참회를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이런 분류는 틀린 게 아니다. 참회와 탄원은 상호 보완적이다. 참회하는 영혼으로 탄원할 수 있으며, 탄원의 깊이로 들어가면 참회가 나올 수밖에 없다.

1) 상한 심령(1-4)

시편기자는 1절에서 간단한 기원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여호와께 바라는 것이 세 가지이다. 들으심, 귀를 기울이심, 응답하심이 그것이다. 특히 세 번째 ‘진실과 의’로 응답해달라는 문장이 중요하다. 그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자리한다. 이런 기도의 깊이로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자신이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한다.

2절은 이해하기가 약간 까다롭다.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심판을 면할 이유가 되나? 불의를 심판하신다면 결국 심판을 면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인가? 어쨌든지 시인은 불의의 보편성을 알고 있다. 이런 탄원 기도를 드리더라도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3,4절에 시편기자의 마음이 정확하게 나타난다. 그는 원수에게서 온갖 핍박을 받았다. 그게 하나님의 심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의 심령이 상하고 마음이 참담해진다.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책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2) 주를 기억함(5,6절)

심령이 상한 시인이 살 길은 주를 기억하는 것이다. 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다. 주와 그의 행위는 똑같은 것이다. 주의 일을 기억하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으로 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주’를 생명, 또는 생명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라. 신앙은 기억에 토대한다. 예컨대 성찬식도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종교의식이다.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영혼이 기억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 시인은 ‘마른 땅’(6절) 같이 주를 사모한다고 노래한다. 갈급하다는 뜻이다. 세상의 다른 일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주를 사모할 수 없다.

3) 기원(7-12)

참회와 영혼의 갈급함을 토로한 시인은 이제 구체적으로 기원을 드린다. 이를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은 7-9절이다. 7절에 기자의 마음이 드러난다. 영이 피곤하여 여호와의 응답을 원하고, 무덤에 내려가는 두려움에 빠져 주의 얼굴을 대면하려고 한다. 8절에서 그는 자기 영혼을 주께 드리겠다고 한다. 이런 사람만이 주께 기원을 드릴 수 있다. 우리는 차마 거기까지 나가지 못한다. 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기원한다.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께 피하는 것이다.

둘째 단락은 10-12절이다. 그의 기원은 일방적으로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주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다. ‘주의 영’이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11절에서 그는 다시 ‘주의 이름’을 거론한다. 그의 기원은 결국 주의 뜻, 주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이런 기원이 자칫 아전인수로 떨어질 수도 있다. 자기의 욕망과 주의 뜻을 일치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어떤 성서학자는 12절의 원수박멸은 영적 인식의 한계라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