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EBOdANr5U0I
중세신학 융성기의 추진력은 어거스틴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사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생겨 난다고 할수있군요. 어거스틴적인 교회의 전통에서 자라온 인간이 세속적인 사상이나 가치의 체계를 담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발견으로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절충 시킬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네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보나벤투라는 신은 혼안에 현존하며 신인식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인식에 이른다고 하며, 우리 내부에 있는 신적인 빛이 궁극적 실재의 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감각적 세계의 진리를 인식할수가 있다고 했군요.
프란치스코회 사람들은 모든 인식행위가 신적인 빛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빛은 피조물이 아니며 여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그 무엇이다고 말했네요. 이것은 신비주의자나 중세의 종파적인 종교운동이나
종교개혁에서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철학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고 하는군요.
여기에 대극을 이루고 있는 토마스적 종교철학은 우리의 인식이 유한한 세계의 인식을 거쳐서
비로소 신에게 도달 한다는 것이네요. 인간은 존재자체에서 분리되어 있고 우리의 인식행위에서
신을 발견할수 있다고 하는군요. 신인식의 두 가지 길의 갈라짐은 13세기에 생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네요. 신율적인 인식론이냐 교회권위에 보완되는 자율적인 인식론이냐 하는
두가지 방법 사이의 갈라진 틈은 13세기에서나 근대 가톨리시즘에서 까지도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는군요.그러나 그 틈은 나타나, 토마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어떤 결과일까요? 매미 울음소리가 맹렬하네요. 생존을 위한 본능의 몸짓 일것을 상상하니 제 할일 묵묵히 하고 떠나갈 매미에게 배울것이 있구나 싶습니다.
에스더 님은 강독을 한번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요약까지 하는 열정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앎은 자유의 토대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이번에 13세기의 특성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중세신학 융성기의 추진력은
어거스틴전통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사이,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생겨 난다고 할수있군요.
어거스틴적인 교회의 전통에서 자라온 인간이
세속적인 사상이나 가치의 체계를 담은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발견으로 어떻게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절충 시킬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네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 보나벤투라는 신은 혼안에 현존하며
신인식에서 출발하여 세계의 인식에 이른다고 하며,
우리 내부에 있는 신적인 빛이 궁극적 실재의 원리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감각적 세계의 진리를 인식할수가 있다고 했군요.
프란치스코회 사람들은 모든 인식행위가 신적인 빛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빛은 피조물이 아니며 여기에 우리가 참여하는 그 무엇이다고 말했네요.
이것은 신비주의자나 중세의 종파적인 종교운동이나
종교개혁에서만 아니라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철학의 밑바탕에도
깔려 있다고 하는군요.
여기에 대극을 이루고 있는 토마스적 종교철학은
우리의 인식이 유한한 세계의 인식을 거쳐서
비로소 신에게 도달 한다는 것이네요.
인간은 존재자체에서 분리되어 있고 우리의 인식행위에서
신을 발견할수 있다고 하는군요.
신인식의 두 가지 길의 갈라짐은 13세기에 생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하네요.
신율적인 인식론이냐 교회권위에 보완되는 자율적인 인식론이냐 하는
두가지 방법 사이의 갈라진 틈은
13세기에서나 근대 가톨리시즘에서 까지도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는군요.그러나 그 틈은 나타나,
토마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어떤 결과일까요?
매미 울음소리가 맹렬하네요.
생존을 위한 본능의 몸짓 일것을 상상하니
제 할일 묵묵히 하고 떠나갈 매미에게 배울것이 있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