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12세기의 철학자 신학자의 연구를
공부하면 조금이나마 배울수 있을것 같습니다.
왜 그것이 궁금한가 하는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미루어 두곤 했었는데, 갈수록 이 질문을 찾아가는길이
본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까지 읽은 글들은 오늘 읽는 이글들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마치 틸리히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듣는듯 하네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것은
인간의 의식이란 그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무조건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것이며,
인간의 의식이 바깥의 현실을 향하기 전에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의 경험을 찾아낸다는 통찰을 가진다는군요.
실존은 개념에서 이끌어 낼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은 정당하지만,
신의 확실성을 세계의 경험에 의존시키려고 하지않고
인간의 의식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안셀무스의 정당성을 논박할수없다고 하네요.
이전에는 인간일반성 보편성을 말하는것이 너무 동떨어진
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실재가 아닌가 하는것과 낱낱의 사물과 낱낱의 인간이 실재다고
하는 상반된 개념이 모두 진리인것 같습니다.
두가지 형태의 종교철학에서 한 형태는
문화나 자연이나 역사를 무조건적인 것에 관한 의식이라는 관점과
또하나의 관점은
자연, 역사, 자아 여기에서 부터 출발해서
전진적인 분석에 의해 마침내 신에게 도달하게 될것이라는
것인데 이 형태는 종교를 무너뜨릴것이라는군요.
왜냐하면 신은 어느 존재자에 앞선 '맨처음' 이라고 보지않는다면
결코 신에게 이를수가 없기 때문이네요.
안셀무스가 그리스도교의 바탕인 전통에 의존한것은
중세적 사유에서 객관적인 극을 대표한 사람이라면
주관적인 극의 대표자는 아벨라르라고 할수있군요.
주관적이란 내면적인 인격적 경험을 향한 사고이지
성서나 전통, 권위가 지닌 실체에 의해서 주어진 실재를
향한 사고가 아니라고 하네요.
아벨라르는 신비를 이성이 이해할수 있는것이 되기바랬고
그럴경우 신비가 공허하게 될 위험이 따른다고 하는군요.
사고란 삶의 직접성을 무너뜨리지만,
사고의 위험에 몸을 맡기지 않는 사람의 그 신앙은
결코 실재적인 힘이 될수없다고 하네요.
이렇게 뜨거운 날씨가 다시 시작되었네요.
이 뜨거움이 '아~ 힘들다' 하는것에서 벗어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싶으면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세계를 알려면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면
오늘도 12세기의 철학자 신학자의 연구를
공부하면 조금이나마 배울수 있을것 같습니다.
왜 그것이 궁금한가 하는것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미루어 두곤 했었는데, 갈수록 이 질문을 찾아가는길이
본질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지금까지 읽은 글들은 오늘 읽는 이글들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마치 틸리히 선생님의
강의를 직접 듣는듯 하네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것은
인간의 의식이란 그유한성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무조건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것이며,
인간의 의식이 바깥의 현실을 향하기 전에
안에서 무조건적인 것의 경험을 찾아낸다는 통찰을 가진다는군요.
실존은 개념에서 이끌어 낼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은 정당하지만,
신의 확실성을 세계의 경험에 의존시키려고 하지않고
인간의 의식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안셀무스의 정당성을 논박할수없다고 하네요.
이전에는 인간일반성 보편성을 말하는것이 너무 동떨어진
이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것이 실재가 아닌가 하는것과 낱낱의 사물과 낱낱의 인간이 실재다고
하는 상반된 개념이 모두 진리인것 같습니다.
두가지 형태의 종교철학에서 한 형태는
문화나 자연이나 역사를 무조건적인 것에 관한 의식이라는 관점과
또하나의 관점은
자연, 역사, 자아 여기에서 부터 출발해서
전진적인 분석에 의해 마침내 신에게 도달하게 될것이라는
것인데 이 형태는 종교를 무너뜨릴것이라는군요.
왜냐하면 신은 어느 존재자에 앞선 '맨처음' 이라고 보지않는다면
결코 신에게 이를수가 없기 때문이네요.
안셀무스가 그리스도교의 바탕인 전통에 의존한것은
중세적 사유에서 객관적인 극을 대표한 사람이라면
주관적인 극의 대표자는 아벨라르라고 할수있군요.
주관적이란 내면적인 인격적 경험을 향한 사고이지
성서나 전통, 권위가 지닌 실체에 의해서 주어진 실재를
향한 사고가 아니라고 하네요.
아벨라르는 신비를 이성이 이해할수 있는것이 되기바랬고
그럴경우 신비가 공허하게 될 위험이 따른다고 하는군요.
사고란 삶의 직접성을 무너뜨리지만,
사고의 위험에 몸을 맡기지 않는 사람의 그 신앙은
결코 실재적인 힘이 될수없다고 하네요.
이렇게 뜨거운 날씨가 다시 시작되었네요.
이 뜨거움이 '아~ 힘들다' 하는것에서 벗어나
감사함에서 즐거움으로 느껴지는 그런 정신세계가 가능할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