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413 질답시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이 4월 13일이군요. 세월이 빨리 지나가네요. 정원주님이 인사를 주셨군요. 반갑습니다. 두 번 빠지신 것에 대한 벌칙인가? 댓글을 주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오늘은 크게는 두 가지를 하게 되겠네요. 여러분들이 동영상 메뉴에 보셨듯이 slowandeasy님이 주신 질문, 첫 번째가 성서의 기적문제예요.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네 그분이 우리 다비아에 들어오셔서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리고 이해되는 부분도 많이 있는데 결국 성서관에서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 성서에 나와 있는 초자연적 기적과 우리 신앙의 문제,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것을 우리가 꼭 이성적으로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 하구요.

그리고 또 하나는 쪽지를 주신분이 있는데 특별히 기도문제인데요. 주로 기도, 중보기도에 대한 것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관상기도에 대해서 조금 제가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금 더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하게 될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어떤 주제를 하더라도 딱 결정되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얼만큼 펼치고 얼마 만큼 깊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그 이야기되는 내용들이 좀 많은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어요. 예. 그래서 기적이야기 요거 하나만, 기적과 기독교 신앙과 성서의 문제, 이것만 이야기하더라도 한 시간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관한 책도 많이 있어요. 그 책을 오늘 눈으로 한번 서재를 보았는데 들어오지 않더라구요. 이사한 다음에 책장을 다 정리를 못했습니다. 요즘 점점 귀찮아졌어요. 벌써 이사한지가 작년 5월에 하양에서 이쪽 진량으로 교회를 옮겼으니까요. 그때 제 연구실도 같이 옮긴 거예요. 하양에서 있을 때는 그래도 이렇게 분류를 해놓았습니다. 나름대로 성서신학, 영성에 관한 것, 조직신학 바르트 몰트만 등,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어서 내가 필요한 책을 손쉽게 골라낼 수 있었는데요. 이쪽으로 오면서 이삿짐 센터에 맡겨서 나름대로 그분들이 원래 있던 것들을 그대로 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많이 헤쳐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잠간 그 책을 찾으려고 하다가 결국 못 찾고 왔거든요. 나중에 제가 발견하게 되면 말씀 드리겠고요. 어쩌면 다비아 거기 어느 메뉴에 들어가면 있을 텐데요. 검색창으로 추천도서하면 각 분류해서 괜찮은 책들을 추천해 두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일부인데요. 제가 읽고 확인하고 괜찮은 것들만 해 두었습니다. 제가 직접 읽고 확인된 것만 올라가 있으니 올라가 있는 책은 안심하고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없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적, 초자연적 기적, slowandeasy님이 다른 것은 다 그런대로 따라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 이러한 것들이 그 당시 화산폭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 제 설명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좀 곤란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 분이 두 가지를 내세웠어요. 하나는 동정녀 탄생이었군요. 이거는 언젠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두 번째는 부활입니다. 네. 동정녀 탄생, 제 글도 있으니까 찾아보십시오. 어디 있더라? 특강란에 있던가요. 거기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에 보면 이 단락이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이 이야기 직접 들어가기 전에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요. 성서에 있는 초자연적 기적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교회가 이야기하던 것 하고는 좀 달리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는 일반적 교회의 주장과는 달리 그것을 자연적 현상에 대한 성서기자들, 그 당시의 과학관이라고 할까요? 말이 지금 뒤엉켜 버렸습니다. 취소하고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초자연적 기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서의 진술, 그런 것들을 제가 일반교회에서 역사적 사실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초자연적 사건인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설명하고 있는, 그렇게 진술되고 있는 성서텍스트가 사실은 아주 자연적 사건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 것이 고게 하나의 관점이구요. 예를 들어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들, 이런 것들은 그 당시 철새들이 온 것이고 또 메추라기는 그렇구요. 만나의 이야기는 미디안 광야에서 있었던, 지금도 발견할 수 있는 꽃 씨앗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적 현상을 그 당시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이해를 한거예요. 거기에는 그 성서기자들이 잘못했느냐? 그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그 본문으로도 설교도 하고 서울오프에서도 이야기도 한건데요.

자연적 현상, 일반적 먹을 것으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그냥 흘려 지나갔지만 유대인들, 히브리 민족들은 광야생활하면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거의가 다 놓치고 살고 있습니다. 달팽이님이 그 요즘 소피의 세계를 보신다고 하는데요. 거기에 한 문장을 인용해주셨더라구요. 우리가 일상에 빠져서 생명의, 삶의 경이로움을 놓친다. 소피의 세계에 있는 것 같죠. 네. 그건 뭐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 생명의 경이로움, 그 신비,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시인들이고 예술가, 영성가 신비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는 다 인제 우리는 놓쳐버리고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일상적이었던 만나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는거죠. 그런 점에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으로 묘사하고 있는 상당한 분량의 성서의 진술들은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렇게 본거구요. 그게 하나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구요.

또 하나는 일반적 현상은 아닌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홍해가 갈라진 사건 같은 것, 그건 일반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아니죠. 물론 지금 남해에서, 서해안입니까? 만월이 될때 갈라진다는 이야기도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아니라 그거는 갈대바다, 늪지대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은데요. 그런걸 하나님의 섭리로 갈랐다고 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식으로 성서기자들이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 문제를 다 정리를 해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앞뒤로 왔다 갔다할 것 같은데요 좀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것 말고 성서에 나와 있는 성서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여러 유형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약 성서에도 물이 포도주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오병이어 사건도 있고 말이죠. 심지어 구약에서는 태양과 달이 멈춘다고 하는 우주에 그런것까지 멈춰 버린 것 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유형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도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개인적인 것이 있을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말이죠. 이런 것들은 어떨까요. 천사들이 등장한다거나 사탄이 나와서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한다고 하는 거나 그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기적적인 요소에 포함된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하여튼 그런 것들을 제가 나름대로 모든 것을 뭉뚱거려서 하나의 객관적인 팩트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게 이제 slowandeasy님이 볼때 정통적인 해석과는 다르기 때문에 불편한 구석이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물론 이런 것들은 다 받아들여졌고 동정녀와 부활만 가장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앞에 있는 것과 사실 연결되기 때문제 제가 그분의 생각을 정확한지 모르지만 연결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제가 인제 그런 한국 기독교의 정통주의, 보통 복음주의라고 애기할 수 있을까요? 복음주의자들의 성서해석, 결국을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이거든요. 기본적으로는 성서고, 또 하나는 세계라고 할 수 있겠죠. 세계관이 뭐냐? 세계와 성서, 저는 요. 성서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말씀 드린 것은 전혀 아니고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서가 정말 초자연적 기적 그 자체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오늘날 자연과학적인 근거에서 볼 때 말이 안된다고 할때 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문제는 성서가 과연 그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냐 거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죠. 성서가 정말 동정녀 탄생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냐? 이건 이미 여러분이 답을 아시겠죠? 과연 성서가 부활을 이야기하려고 했었던 거냐? 이 대답도 여러분이 아시겠죠. 이건 다른 문제예요. 동정녀 탄생하고 부활은요. 이건 앞으로 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슬로운앤이지님이 구체적인 거론을 했기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이.. 다른 것을 좀 말한 다음에 그리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래도 생각이 나서 이걸 좀, 아까 방향만 말씀드릴려고 집은겁니다. 동정녀탄생과 부활은 성서가 다른 관점이다라고 말한겁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집어내지 않거던요. 못하기도 하구 말이죠. 예. 하여튼 그렇습니다. 이게  왜 다를까? 똑같이 두개다 기적적인 사건인것 같은데
왜 동정녀 탄생과 부활에 대한 성서의 진술이 다르다고 보느냐는 것은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제 한국에서 교육 받은, 신앙교육이죠. 이게요. 사실 교육이라기보다 교육이죠. 학습이죠. 일반적으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학생들로 진리의 세계로 스스로 가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 쪽에서 보면 한국 교회의 교육은 교육이라고 볼 수 없죠. 일방적인 세뇌에 가깝다고 해야 되겠죠. 어떤 교리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성서를 이야기할 때도요. 그것을 진리의 차원에서 서로 대화가 가능한 교회 공부, 교회 학습은 별로 많지 않을걸요. 어쨌든 교회 안에서 주입되었던, 학습되었던 그런 모든 내용들이 다비아하고 조금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요.

제가 이 복음주의, 한국교회가 거의 복음주의자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이 복음주의 정체가 뭐냐? 이걸 좀 말해야 되겠어요. 이 복음주의라고 하는 말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거든요. 도대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복음주의자들인데 복음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독단적으로 사용하느냐가 이게 조금 마음에 안드는 겁니다. 예수믿는 것 자체가 바로 유앙겔리온인데요. 복음이잖아요. 우리 의가 아니라 예수의 의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실은 은총이고 선물인데 보통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걸 전제하지 않습니까?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예수가 그리스도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면 물론 거기에 문제가 있죠.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이 복음안에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라고 하는 말을 어떤 사람들과 선을 가르기 위한 그 준거로 사용한다는 것은 기분이 언짢은거죠.

한국에서는 복음주의를 Ecumenical과 대립적으로 쓰입니다. 한국교회사에 대해 제가 말할 틈은 없는데요. 이 복음주의, 이 복음주의는 자기네들은, 그런데 에큐메니칼, 에큐메니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에큐메니칼은 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들은 자유주의자도 아닌 또 근본주의자도 아닌, 근본주의도 아니고 자유주의도 아닌 복음주의다. 말 좋죠. 그런 면에서 저도 복음주의자입니다. 아마 한국의 복음주의,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저의 신학에 대해서 마뜩치 않게 생각을 하실 것 같아요. 정확한 것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의가 다 복음주의자입니다. 옥한음목사님이라든지, 그 교회 후임자이신 그 목사님 사람 이름 까먹는데 소질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분들, 제가 설교 비평했던 분들은 복음주의자들일겁니다. 몇몇 분을 빼고요. 지금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나서는 사람들은 없을걸요.

이 복음주의자들이 뭔가에 대해서 조금 사전 정보를 알려고 책을 하나 잠간 봤습니다. 이 책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거예요.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한국 장로교 출판사예요. 출판한데가. 한국장로교 출판사면 통합측인가요? 기장측인가요? 네. 한국 장로교 출판사. 이거를 번역된 건데요. 이것을 쓴 분이 앨리스터 맥그리스(Alister McGrath)입니다, 아주 학문적이기도 하고 복음적인 열정도 많고 그런 분입니다. 보여드릴까요? 영국에 있는 분이죠. 이 분은 아주 믿을 만한 분입니다. 앨리스터 멕그리스, 믿을 만한 분입니다. 나이는 50대 중반, 저하고 비슷한 것 같네요. 일찍부터 출중한 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분입니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를 썼어요. 이런 정도 분이라고 한다면 정말 열려진 복음주의자로 대화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여섯 가지 말씀드릴게요.

복음주의 특징 첫 번째,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권의,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네, 뭐 사실은 이런 말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기독교 치고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극단적인 자유주의자 빼고는 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제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한 것이겠죠. 복음주의는 인간의 문화보다는 성경의 권위, 이런 점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점에서는 신정통주의하고 흡사합니다. 신정통주의, 이거는 칼 바르트와 부룬너 등등 그 당시 변증법적 신학을 했었던 독일의 신학운동인데요. 신정통주의예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강조하던 문화와 종교성으로부터 성서의 권위로 돌아간 신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종교개혁자들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신정통주의는 17세기에 벌어졌던 종교개혁신학의 이론,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이론화한, 정통주의가 아니라 그 이전인 종교 개혁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복음주의가 이렇게 보면 종교개혁, 신정통주의  이러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많이 썼어요.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화하는 그 모든 것들은 그건 인제 거부하는 거죠. 여기서도 이게 크리스토센트리시즘(Christocentricism)이거든요. 여기에도 바르트신학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그리스도 중심, 기독론인거죠. 저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도 차이가 없어요. 저도 설교는 그리스도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그런데 이게 말이죠. 말이 나왔으니 또 드려야되겠네요. 이게 복음주의 특성입니다. 크리스토센트리시즘으로 돌아가야되는데요. 복음주의자라고 자청하는 사람들의 상당경우에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 떨어지는 것이죠. 이거는 기독론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도덕적으로 살자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 그게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칭의론적인 면에서 볼때 윤리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의로워 지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구요.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업적, 선 이런 것들이 중심이 안되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점에서는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복음주의자들 말이죠. 그것도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있어요. 나중에 책을 한번 보십시오. 재미있어요. 하여튼 중요한 제목만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주권, 네 저도 성령론적 설교가 핵심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여기는 은사주의 나오는데 넘어가겠습니다. 여기까지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서는 차이가 나요. 뭐냐?

네 번째,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개인의 회심, 탕자의 비유에서 많이 나오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는 것, 저도 개인적 회심이 필요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닌데 그게 자기 개인의 어떤 심리적 불안감, 혹은 죄책감 그런 것에 머무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제가 정확하지는 않군요. 대충 그렇게 저의 뜻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음. 저는 여기서 그러니까 회심이라고하는 사건을, 개인적인 어떤 그런 것으로 두기 보다는 탕자에서 나오는 그러한 관점보다는 세계관의 전환이라고 보거든요. 생각이 다른 점이 있을수도 있는데 그냥 내가 정용섭 목사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계관의 전환이 회심이다. 우리의 관심을 이 땅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리는 거죠. 그냥 거칠게 표현해서 말이죠. 이 세상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사건이라고 보는거죠. 예수님이 종말에 재림하시고 세계를 판단하시고 진리와 그렇지 않는 것들을 구분하고 온전히 생명이 드러나는 세계를 이루신다고 믿는거죠. 세계관이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의 전환이라고하는 것이 회심에 더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든지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개인적 회심을 예수님께서 제가 보기에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세리들을 향해서 너 그것 잘못했으니까 때려치우고 해야 해. 똑바로 살아 말씀하시고 회개하라 메타노이야 돌아서라. 하나님의 통치가 문 앞에 와 있다. 거기로 관심을 돌리는거죠. 영적인 관심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죠. 회심이 그런 방식이라면 제가 동의합니다.

그런게 아니라 탕자의 비유의 방식으로 그러한 어떤 도덕적 회심, 개인의 어떤 그 예수님과의, 이거, 아 그렇겠군요. 그분이 강조하는 것은 인격을 중요시 하는군요. 제가 복음주의자. 저도 복음주의자에 속한 교단에 속해 있구요. 거기서 공부했구요. 복음주의자 이야기 하는 것이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을 말하는 것이구요. 그안에 있는 한계들을 말하는 거구요. 한계만이 아니라 그들의 단점들도 같이 안고 가려고 하는 거고 제가 그들 그들 이야기하지만 남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 회심으로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 회심이라고 엘리스트 맥그리스가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다른식으로 말할 수 있을거예요. 이러한 것들은 말하는 사람이 어떤 관점에서 말했느냐 하는 것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고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어느 부분에서 부족한 것을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회심이라고 그래서 이게 딱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에 제가 말을 하다보니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는 개인적인 회심이라고 하는 것을 잘못했다 이렇게 보통 눈물 흘리고 그렇게 해서 자기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자기 감정에 빠지고 심리적인 것에 빠지고 그러면서 세계에 대해서 변화는 없고 여전히 부동산 투기하고 약삭빠르게 살면서 자기가 챙길것 다 챙기고 맨날 교회에 나가서 울기만 하고 또 열린 예배다 그래서 자기 만족감에 빠지고 말이죠. 그런 방식으로 개인적 회심으로 말하다면 아닐 수 있는데 그런 쪽으로 강하게 들어와 있기 때문에요.

그런게 아니라 저는 세계관의 전환, paradigm shift 라고 하는거죠. 이거는 창조론 적인 점에서도 그런 거구요. 결국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한 인간의 결단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주의자들은 개인의 결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저는 이 개인의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결단이 중요하냐? 과격하게 말씀드린 것이예요. 우리의 개인 개인의 결단보다 엄청나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그러한 사건에 우리가 직면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거는 하나님의 통치이거더든요. 하나님의 창조, 종말론적 완성이거든요. 하나님은 그렇게 이 세상의 역사를 끌고 가시는 건데요. 그 앞에 우리가 놀라고 충격받고 두려워하고 그래서 Doxology, 하나님께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을 하구요. 그리고 자기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무화의 경험, 신비주의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무화의 경험들, 끊임없이 작아지는 그러한 경험, 그러한 경험, 이건 순전히 우리의 개인의 경험주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거는 다 우리의 인식과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에요. 그런 우리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거죠.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느냐는 그거는 부차적인 문제다.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굉장히 강조하더라구요. 아마 여기서 하나님과의 혹은 예수님과의, 성령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라고 할때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거든요. 이것도 기본적으로는 제가 동의합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인격이라고 하는지 난 그것에 대해서는 좀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최우상님이 댓글을 주셨네요.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칼빈주의 '5대교리' 중 '제한 속죄'만 반대한다고 그러더군요.”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난다. 이것 한번 터놓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과연 무엇일까? 제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요. 그런 경험이 많으신 분들이 볼 때 저 친구가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지 실질적으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소위 말해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해서 그런다. 오해가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문제는 그러니까 제가 여기서 더 자신 있게 말씀 드리기가 힘들겠군요. 예. 그건 좀 접어두고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거는 빼놓을 수 없어요. 여기서 말한 것이 인격적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정의를 해야 되는지가 이게 좀 모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은 인격이 아닙니다. 인간과 같은 성품을 가진 신분은 아니죠. 하나님은 신격입니다. 하나님 고유의 본성으로 우리가 따라 잡을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본성으로 이 세계를 통치하시고 우리를 만나시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 경험은 하나가 결코 아닙니다. 한가지 색깔로 결코 말할 수 없어요. 햇볕이 그냥 보면 하나지만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가지로 나눠진다고 하죠. 그러나 사실 햇빛이 일곱 가지가 아니죠. 하나하나 따지면 색이라고 하는 것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광학 전공한 사람도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볼 때 나누게 되면 무한에 가까울 텐데요 하나님의 경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정형화 되었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요. 어떤 그런 것이 있습니다. 마음의 뜨거움, 결단, 자기 잘못한 것에 대한 것을 다 드러내고 평안을 누리고 어떤 사명감을 갖게 되고 그러한 경험들, 예수님 영접함으로 일어나게 되는 신앙적 결과,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험하는 것 그런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거죠. 사과를 하나 같이 먹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은 이걸 먹고 어떤 사람은 너무 기뻐서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내가 정말 사과 맛, 인격적으로 영접했기 때문에 내가 사과장사하겠다 여기에 목숨을 걸겠다 그런 사람들도 가능하겠구요. 어떤 사람은 그러지 않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는 거거든요.

미들타운님이 또 댓글을 주셨군요.
회심을 change of mind 라고 설교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는 '어느 봄날의 눈뜸' 으로 표현하던데  어떻습니까?

그건 아주 문학적 수사군요. 그렇게 해서는 그것을 맞았다 틀렸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통일교 신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구요. 그런 경험들의 표현이야 가지각색이니까 그 자체로는 우리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우리의 인격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가 아주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천지교회에 간 사람들은 인격적인 만남이라고 하겠지요. 안 그렇겠습니까? 그걸 통해서 많은 경험을 하니까 개인적으로. 삶도 변화되고 우울했던 사람이 우울증도 벗어나고 말이죠. 저는 그러한 것들이 기독교 안에서 필요하다고 일단 전제하면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거다. 여기에 초점을 놓아야 되지. 하나님의 통치세계. 개인적인 회심을 신앙의 중심으로 놓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머리만 굴리고 말만 잘하고 그렇지 결단도 하나 없고 교회에 대한 봉사도 없고 냉냉한 상태에 있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시겠지요.

다섯번째, 이것의 연결인 것 같습니다 복음전도의 우선권, 전도의 우선권, CCC라든지 이런 사람들이죠. 사영리 들고 전도하고 긴급한거예요. 거기에 이니셔티브를 두고 신앙생활하는겁니다. 엘리스터 맥그리스 이 친구가 복음주의 선봉자로 빌리 그래함으로 놓더라구요. 그러한 쪽 입니다. 복음전도의 우선권을 두고 있는 그러한 거죠. 그건 뭐 그렇게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책들 읽다가 재미있는 것이 있어서 잠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지금 이거 이야기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 다 놓치게 되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요 이야기 조금 더 전개를 할까요? 요정도로 할까요? 끝낼까요?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사실 공부가 이런 책을 갖고 차근차근히 같이 읽고 내용들을 해석하고 주변 여러 가지 세계 신학 교회운동 선교 운동 이런 것들하고 같이 주욱 연결해서 공부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부도 필요할 것 같은데 하여튼 저는 재미있습니다.

빌리그래함이 1954년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지라고 할 수 유니온신학교 강사로 초청받아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굉장히 반응이 좋았다 그래요. 그런데 유니온 신학교 윤리학 교수로 있었던 라인홀드 니버, 유명한 윤리, 형제 리차드 니버, 라인홀드 니버 기독교 현실주의죠. 이 사람은 냉소적으로 빌리 그래함의 신학적 무지와 순진함에 대해서 이렇게 신랄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표현이 좀 재미있어서 그래요. 이게 라인홀드 니버가 말한 겁니다.

빌리그래함은 사교성이 있고 겸손하며 매력 있는 젊은이로서 다소 불합리한 유형의 기독교 신앙과 상당히 정열적이고 선동적인 재능을 잘 조화시키고 있다.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의 폭넓은 사회문제에 전혀 관련성이 없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가치가 없어보인다. 그의 메시지가 어떤 가치가 있다면 30여년전 전국을 매혹시킨 빌리 선데이의 메시지가 지니고 있었던 지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일 것이다. (빌리 선데이가 뭔가요?) 우리는 이 정도의 진보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된다.

고 당시 시사적인 상황을 잘 알아야 재미있겠는데 그때 빌리 그래함이 좀 젊었었는가 보죠. 이렇게 좀 냉소적으로 비판한 것 같습니다. 빌리 선데이. 선데이지? 도색잡지인가요? 그건 아닌데요. 모르겠습니다. 이 비판을 보고 맥그래스는 이것은 니버의 문제다. 라인홀드에 대한 비판을 또 여기에 실었습니다.  그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섯 가지를 했구요. 가만 있어봐라. 정리를 해야 하겠는데요. 복음전도의 우선권. 그것도 제가 다 설명을 안했군요. 복음전도의 우선권. 4, 5 예. 이건 뭐 좋다고 보구요. 빌리 그래함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데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부시 백악관 들어가서 이라크 침략 공격할 때 이 분이 가서 기도해 주고 그러지 않았나요? 이라크를 그렇게 무력으로라도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이게 어떤 발상에서 나오는지? 그거는 좀 약간 좀 복음주의자들의 순수성이라고 그럴까요. 그런 것에서는 조금 실망이 됩니다. 예. 그건 그렇고.

여섯 번째는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그러니까 이 복음주의자가 그냥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거야말로 초교파적이고 에큐메니칼하다 주욱 썼네요. 말을 하려고 쓴 것이라고 보고요. 제가 여기서 한 가지 짚으려고 했던 것이 있습니다.  이 분이 복음주의의 매력이라고 하는 파트에서 복음주의가 정통기독교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를 대단히 좋은 복음주의 교회 대표격으로 예를 들고 있더라구요.

이 교회 예배당은 전통적인 교회장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강당도 없고 오르고 전통적인 성직자의 예복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은 효과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영국의 기독교 간행물인 가이드포스트는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를 영원한 진리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소개하는 1989년 그 해의 교회로 선정하였다.

제가 일전에, 작년 말쯤인가요. 윌로우크리크교회 목사님이 자기가 행했던 목회와 예배와 이 방식에 대해서 크게 반성하는 그런 글을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그러니까 이 앨리스터 맥그리스 이분이 어떻게 보면 복음주의를 좋게만 이야기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러한 조금 충분하게 검토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요 저는 앨리스터 맥그리스는 훌륭한 신학자이고 복음주의자이고 영성집필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좋은 뜻으로 생각을 하고 소개한 겁니다.

여기서 맥그리스가 제기한 세가지 문제는 이건 복음주의자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 모두에게 중요한 요소입니다. 약간 진보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하더라도 이 건 다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 뒤에 가서 색깔이 달라지는 거죠. 개인적회심, 복음전도, 공동체, 이거는 조금 다른 차원인데 이건 제가 설명을 안했으니까요. 여기서 핵심으로는 개인적 회심과 복음전도 요부분에서는, 저는요. 복음 전도 무의미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CCC 류의 이러한 전도가 과연 필요한가?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한 그러한 것 말이죠. 대중집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오는 방식의 전도가 과연 필요한가? 오히려 간접선교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시오 데이(Missio Dei, mission of God)의 개념이기도 하구요. 선교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이 말은 곧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선교에 도구로 쓰여질 그러한 역할일 뿐이지. 우리가 앞장서서 어떤 전도를 하겠냐? 조금 소극적인건가요? 네. 이건 뭐 누가 옳다 그르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주의자 신학자가 말한 특징을, 그 차이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지적한 것뿐입니다.

제가 오늘 복음주의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갔는데요. 결국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는가 하면 아, 기적의 문제, 성서가 말하는 이 기적 말입니다. 결국은 기적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이게 무엇을 가리키려고 하는 거거든요. 손가락처럼 말이죠. 그건 바로 하나님이죠. 하나님 통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인제 그러니까 복음주의자들은 한국에 있는 분들은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여기에 핵심을 놓고 한다면 저는 그걸 통해서 결국 우리가 봐야 될 것은 하나님 통치다라고 하는 거죠.

아까 제가 복음전도와 개인회심이야기를 하다가 놓친 부분이 있습니다. 이건 꼭 해야되는건데요. 앨레스터 맥그리스가 그리스도 중심, 말씀중심, 성령 이 세 가지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성서, 예수 그리스도 머리속에 넣으시면 좋겠네요. 그리고 성령 맞죠? 이거는 제가 정확하게 썼죠? (파락 파락-책장 넘기는 소리) 네. 썼습니다. 네 성서, 문화가 아니라 성서다. 그리스도, 예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성령의 실질적인 통치 사역, 이런 것들을 말하는 건데요. 이런 점에서는 칼 바르트 하고는 같은 선에 있는데 인제 이 맥그리스가 칼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개인적 회심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 그러냐 이런데서 갈라지더라구요. 제가 왜 이것을 중간에 끌어들이는 거냐 하면요. 제가 아무래도 신정통주의자 같아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복음주의, 맥 그리스가 말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까 상당한 부분에서 그렇다 그렇다 하다가 어느 부분에서 또 갈라지더라구요. 아까 라인홀드 니버를 맥그리스가 비판했잖아요. 라인홀드 니버가 신정통주이자더근요. 맥그리스가 자유주의, 자유주의 신학자라기보다 최우상님이 말했는데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60년대에 있었던 학생운동, 막시즘, 좌파운동에 좀 들어갔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신정통주의의 핵심은 그거예요. 이걸 아주 기본적인 것을 바탕에 놓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축소시키는 거예요.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확대했어요. 결국은 신앙에서, 인간과 하나님에서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가능성들을 많이 보았어요. 이거를 비판하는 점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신정통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복음주의가 인간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여러분 조금 미묘합니다. 아 그렇군요. 개인적 회심, 인격적 결단, 영접, 결국은 인간론이거든요. 신정통주의는 그것마저 넘어서려고 하는 겁니다. 결국 그게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 자유주의 신학은 가장 극단적으로 배척을 하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닿아요. 어떤 부분이냐?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거예요. 탕자 자꾸만 회심시키려고 하잖아요. 결국 그건 인간의 문제죠.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가능성에서 인간을 부각시키려고 했었다면 이 복음주의 자들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관점, 인간의 불가능성,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제 변증법적 신학의 특징인데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말은 틀린 것은 아니니까요.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배척되는 점에서 접근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옥한음 목사님이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화된 모습,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 사랑의 교회가 계속해서 도덕적 주도권을 회복하자는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실 자유주의적인 발상입니다. 도덕적 주도권, 이게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한가요? 그리고 그것은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것은 바울에 의하면 배설물과 같은 것들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강조점을 둔다고 하는 것은 복음주의라고 하는 무늬를 가졌지만 그러나 그 내용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그런 것이 강합니다. 극과 극이 통하는 것 같아요. 한국에 있는 많은 보수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분들의 그러한 목회형태는 다 싸그리 깡그리 제가 잡아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그 경향에서 볼 때 인간적입니다. 제자훈련이나 셀 조직, 그게 완전히 공산당 뭐 묶어서 하는 것처럼 아주 조직적, 인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죠. 그렇게 보냐? 성령이 하시는 거지 않느냐? 네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신정통주의는요.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의 가능성으로부터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완전히 돌아와서 인간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주도권, 하나님의 종말, 심판, 하나님의 구원 이런 쪽으로 몰입하는 것이죠. 사실은요. 이런 점에서 이제는 제가 강의하다보니 조금 감이 오는 군요.

자유주의 신학이 19세기에 있었습니다. 이거에 반발로 20세기 초에 신정통주의가 있었습니다. 또 왜 그 다음에 자유주의 신학이전에 경건주의, 각성운동 많이 있었어요. 이 복음주의는 근본주의, 1920년대에 일어났었던 메이첸, 메켄타이어,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한,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한 사람들 말이죠. 근본주의자들이 그 와중에서, 인제 근본주의자들이 너무 세계 문화를 부정한다고 하는 그 이원론적인 것을 비판하면서 세계 변화 이런 것도 책임감을 갖는, 사회복음이죠. 그동안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떠맡겨 졌던 사회복음을, 사회변화를 끌어 안는  복음주의 보수주의, 이것이 복음주의거든요. 이런점에서 볼때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론적 착상이 복음주의자들에게도 묻어있다. 그렇게 구도를 세우면 될까요?

예. 기적 이야기하다가 이건 다음에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이나 보충하겠습니다. 왜 기적이야기를 하다가 중간에 이런 이야기들이 떨어졌냐 하면요. 결국 이것은 성서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말씀 드리냐 하면 아까 드린 말씀의 반복이지만, 성서에 기술되어 있는 기적은 손가락이다. 무엇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고대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적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이것을 바로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해 한거죠. 우리는 그들의, 고대인들이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뚫고 나가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계시를 읽으려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동정녀와 부활 이거는 다음에 다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