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608) 기독교 윤리의 근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잠간 기다려 주십시오. 캠코더를 켜겠습니다. 우리 다비아 동영상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3주 남았군요. 세월이 빨리 갑니다. 오늘 강의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전에요. 오늘 강의는 기독교 윤리의 근거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공부한 것을 보충하는 거죠.

들어가기 전에 한겨레신문에서 읽은 작은 글을 소개할까 합니다. 안도현 시인의 글, 시와 연애하는 법, 이러한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어요. 여기에 공지영과 안도현과 누가 또 한 사람이 교대로 하면서 쓰더군요. 요번에 안도현 시인이 쓴 글이 너무나 재미 있어서, 재미 있기도 하고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설교와 기독교 영성 이거하고 상당히 깊이 연관이 되어서 여러분에게 잠간 소개할가 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도 그렇고 강의도 그렇고 시를 예로 많이 들었잖아요. 시 자체를 많이 이야기한다기 보다도 시 경험과 성서경험이 비슷하다고 하는겁니다. 그게 어떤 언어 경험이니까요. 언어로 형상화 하지만 언어가 담고 있는 어떤 세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와 성서, 설교 이런 것의 공통점은요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다고 하는 거에요. 요 부분을 여러분이 저에게 여러번 들었겠습니다만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언어, 성서도 언어고 시도 언어잖아요. 언어가 사건이라고 하는겁니다. 사건, 독일어로 써서 미안합니다. 게쉐엔, (누가 들어올때는 이렇게 깜박깜박합니다.) 게가 붙으면 독일어의 과거 준사, 어쨌든 내가 독일어 문법은 정확이 모르고요. 사건이라고 합니다 언어가 우리가 보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그게 살아 있는 거예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열림이라고 하는거죠. 이 세계를 향해서 열려져 있구요. 시가 하나가 있다면 그게 상품처럼, 핸드폰처럼 고정되어 잇는게 아니라 전혀 고정상태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이렇게 딱 고정할 수 없는 어떤 사건, 세계예요.

그걸 지난 목요일에 말씀 드렸던가요. 드렸군요. 그게 지평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세계가요. 제가 약간 전문적인 용어를 쓰는 것을 양해하시구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전문적인 용어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최선의 길입니다. 지평이 굳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구요. 지평 곧 세계라 했습니다. 시라고 하는 언어가, 지금 이것은 다 연결되는 문제예요. 사건이고 세계를 향하여 열려져 있고 기독교로 말하면 종말론적으로 열려져 있구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고정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지평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Horizent 지평 움직이는 지평, 세계라고 하는 거예요. 요 감각속으로 우리가 빨리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늘 뭔가 실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실증이 무의미하다고 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실증으로 다 담아 낼 수 없다는 것이거든요. 수학공식으로 풀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적인 논리 실증주의요. 그것으로 다 해명해 낼 수가 없지요. 자꾸만 옆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애서 다시 돌아옵니다.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이 사건이요. 성서도 사건이고 시도 사건인데 이 두개가 비슷하다고 하는 차원에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요번에 한겨레신문에 안도현 시인의 이 글, 제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과의 결별”,  시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제목을 듣고 아 이게 바로 신학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거구요. 영성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네번째 글이군요. 한겨레 신문에 인터넷에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번에 네번째인데요. 제목이, 익숙한, 요건 제가 써야 되겠어요. 우리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제목은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의 결별, 이런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시 경험인거죠. 첫 단락만 읽어볼께요.

만약에 당신이 ‘가을’을 소재로 한 편의 시를 쓴다고 치자. 당신의 머릿속에 당장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가을의 목록은 십중팔구 ‘낙엽·코스모스·귀뚜라미·단풍잎·하늘·황금들녘·허수아비·추석’과 같은 말들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만나기 위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낙엽은 ‘떨어진다’는 말로 연결되고, 코스모스는 ‘한들한들’이라는 의태어를 만나고, 귀뚜라미는 ‘귀뚤귀뚤’이라는 의성어와 결합하며, 단풍잎은 ‘빨갛게’ 물이 들 것이며, 하늘은 ‘푸른 물감을 뿌리다’는 문장과 조우하며, 황금들녘은 풍요의 이미지를 데리고 올 것이며, 허수아비는 반드시 ‘참새’를 불러들이고, 추석은 ‘보름달’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한심한 조합으로 시의 틀을 짜려고 한다면 그 순간, 그때부터 당신의 시는 망했다고 보면 된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시인의 지적이요.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거든요. 가을의 푸른하늘이 높다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이것은 한심하다고 하는거예요. 이때부터 시는 망한 길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중간에 다른 이야기도 많이 있는데요. 이 사람이 연탄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렸죠. 연탄재하고 가을하고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글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세계 동시를 가르치는 세계에 이런 글들이 안온다고 합니다. 문장 써놓고 괄호 묶음해놓고 괄호에 알맞는 말을 찾으라고 하는 답니다. ‘토끼는 ( )뛰어간다.’ 여기 답을 쓰라고 합니다. 학생들은 뭐라고 쓰겠어요? 깡총깡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답으로 아이들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동시를 쓸 때마다 토끼가 깡총깡총 뛴다 이런 동시를 쓴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죽이는 거죠. 요즘 아이들이 토끼들이 산에서 깡총깡총 뛰는 것을 보지도 못했거든요. 관념으로만 알게 되는 동시 공부가 어린이들 책에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냇물은 졸졸졸졸 새싹은 파릇파릇 이런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인 동시와 시 이런 것들은 망하는 길이다.

지금 뭐를 말하고자 하는가 아시죠. 설교가 그 따위로 진행되고 있죠. 시냇물은 졸졸졸졸 이런 식이예요. 성서와 성서를 근거로 해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영적인 세계는 의성어와 의태어 이런 방식으로 아니면 우리가 진부하게 알고 있었던 그러한 이야기들로 불가능하다고 하는입니다. 저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새롭게 읽어보세요. 사건으로 하게 말이죠. 열리게 말이죠. 지평과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제가 윤리문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도 연관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늘 윤리하면 우리들에게 결정되어 있잖아요. 기독교 윤리라고 하는 것이 몇가지 이렇게 규범윤리 규범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정말 속상한 문제인데요. 다 결정되어 있어요. 이혼하지 말라. 뭐 어떻게 하지말라. 이런 이야기 말이죠.  사랑의교회 목사님도 처음에 한국에 들어와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라이즈업 코리아 청소들에게 너희 책상에 있는 포르노 다 때려치워. 예를 들자면 그런 방식으로 말을 했거든요. 이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그런 것을 보지않는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이 아이들이 세뇌당하게되면 기독교 윤리는 죽게되고 하나의 규범만 남게 되죠. 이런 생각으로 세상에 나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게 기독교 윤리도 결국은 하나의 사건이 되어야 되고 열려져 있어야 되고 종말론적으로 나가는 흐름을 타야한하고 하는 것입니다. 네 오늘요 신문 스크랩 좀 해둔 거거든요. 재미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에게 머물지 않고 결별하고 낯선 진실을 경험할 것인가? 작은 제목으로 그렇게 나왔어요. 낯선 진실? 경험하시나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게 낯설게 다가오시나요? 이 세계가 그렇게 다가오시나요? 그래야 우리의 영성, 편하게 말해서 영성 그런 것들이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또 가능한 것예요. 우리의 영적인 작용이 늘 예민하게 작동하기만 하면 그런 세계가 열리게 될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런 맥락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이게 그게 일단 있다고 하는 자체도 경험하기 힘들구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좀 불편해요. 내가 지금까지 알았고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던 것들이 그거르 부정해야 되니까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거죠.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이 낯선 진실로 다가오는 방식이 아니면 우리의 신앙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런 것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만 신앙이 악순환속에 빠질 수가 있을것 같습니다. 네 안도현 시인이 글이 좋아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렸구요. 오늘 우리는 기독교 윤리의 근거는 이러한 제목으로 지난 목요일 한 것 보충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창문여시고)

개굴 개굴 개굴 갤갤갤갤 네 되었습니다. 여러분 개구리소리가 들립니까? 네 그렇군요. 아파트, 아하하하 저 밑으로 지금, 오늘 여기 비가 경상도 말로 억수로 왔습니다. 번개 천둥 비가 와서 개구리가 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리가 참 좋습니다. 우리가 본문으로 들어가죠.

그래도 들어가기 전에 한마디 더해야 하겠습니다. 낯선 진실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 네 클라라님 질문하신 것과 연관되기도 하기 때문에요. 클라라님이 그런 질문을 했어요. “우리가 인제 하나님 나라에 갔을때 죽음이후에 삶에서 오늘 이 땅의 삶을 기억하냐? 체험을 기억하냐? 아니냐”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모릅니다. 그건 아마 아무도 모를거예요. 이게 성서가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서요. 비슷한 이야기는 나올 법한데 지금 제 머리속에 딱 떠오르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지금 어머니 뱃속에 있었던 그때를 기억할까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의 숨소리 피가 내 몸속으로 배꼽을 통해서 내속으로 들어오는 그러한 기억들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없지요. 그러나 분명히 그 시간들은 있었습니다. 분명히 있었는데 우리들의 기억에는 남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우리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는 할 겁니다. 어머니배속에 있을 때 어머니의 영양 상태에 따라서 내 발육상태도 달라지고요. 이런 저런 어머니의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서 내 정서도 안정이 될 수도 있구 불안정이 될 수도 있기는 있는데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이후의 그러한 다른 생명의 세계를 어머니 뱃속에서 나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 방식하고는 전혀 다르거든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게 낯설다고 하는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만 따라가서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금면류관 써야 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충성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아야 되고 거기사서도 안수집사 장로 좋은 자리에 가야되고 이땅에서 시원찮게 봉사한 사람은 상급도 시원찮게 받고 하는 그러한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우리들에게 낯익은 거거든요. 전혀 거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다른 방식의 그런 생명이기 때문에 오늘 이땅에서의 모든 체험들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흡사 어머니뱃속에 있었던 경험이 우리들에게 기억되지 않는 것처럼 없지 않을까.
일단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신학적인 문제도 아니고요 성서적 근거를 갖고 말씀을 드린 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그런 근거 없이 말씀드렸다고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저에게 영향을 받아서 이런 말을 하는게 어니겠습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요. 결국은 제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을 근거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신학적인 성서적인 근거를 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나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삶이 경험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이 있고요.

또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음.. 예수님이 그런 비슷한 말씀을 하셨나요? 혹은 다른 성서, 편지들에 그런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 나라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뵈고, 하나님 직접 뵈고 여기 이땅에서 살던 사람들과 만나뵈리라고 한다는 그러한 구절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을 우리가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 이 땅에서의 삶도 다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하는 것은요. 어려운 문제인데요. 대개 하는 문제는 가치판단이 들어가구요. 호불호 그런 것들이 들어가게 되거든요. 아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딱갈라지는 것이라고 우리가 보지 않습니까? 진리와 진리 아닌것, 알곡과 가라지 이런것들이 완전히 갈라지는데 알곡, 진리 속에 들어간 사람은 나쁜 기억은 할수가 없잖아요. 나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면 완전한 세계가 아닌거란 말입니다. 네 그런 문제들, 그런 것들을 두루 두루 생각을 해야 되는데요. 아직까지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우리가 약속으로 그것을 받고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또 클라라님이 또 질문한 것이 생태적 생명사상, 자연과 우주의 생태적인 생명하고 제가 가끔 애기한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사상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관되냐 하는 건데 그건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하구요. 그런 것을 또 이 시간에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제가 또 잘 알지도 못하구요. 말을 해봐야 아주 부분적인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생태적인 기독교 사상의 같은 점과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건데요. 같은거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 자연 자연생명, 생태는 자연이니까요? 일반 생태학자들은 자연을 정말 자연스러운 것으로 알고 거기 있는 거기서 작동하는 생명의 원리들을 추구해 간다고 본다면 우리는 이 세계가 자연스럽게, 자연스런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절로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전제한다는 점에서 조금 차이가 있기는 있지만 결국은 자연의 생명을 말한다고 하는 점에서 통할 수 있습니다. 네. 그런 쪽으로 책을 쓴 사람도 많이 있구요.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우리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사상은 단순히 자연의 생명 메커니즘에 머무르지 않구요. 무슨 대답이 나갈지 눈치채셨죠. 기독론 접근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알고 계시는 것이 좋아요. 기독론에 있는거예요.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사건요. 핵심적으로 그에게서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거죠. 조금 더 나가서는 마지막 재림과 심판까지요. 결국 이런 것들이 다 예수님의 사건인데, 자연에 있는 생태적 생명이 어떻게 예수의 사건하고 연관되는가. 이것을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하는 점에서 일반 생명사상과 기독교의 유기적 생명사상에 차이가 있는거죠. 하여튼 이런 것들을 전제하면서 클라라님이 질문한 것과 연관해서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생명의 문제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생명에 있어서도 익숙하고 편한 것들과 결별하는 그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지금 가족 관계를 누리잖아요. 남편 아내 있어야 되고 자식들 있어야 하고 단란한 보금자리, 홈 스위트 홈, 그러한 방식의 그것도 일종의 생명의 방식인데요. 귀한 거기는 합니다. 때론 우리가 결별을 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기독교 신앙은 가족의 소중함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교회가 늘 일반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따뜻한 가정을 중심으로한 그러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인 것은 못됩니다. 그래서 제가 5월중에 많은 목사님들이 가정에 대한 설교, 부부간에 어떻게 하라고 하는 설교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 것들은 하라 말라 하지 않더라도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이해하기 때문에 저절로 하는거거든요. 그거로부터 결별을 해야죠.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네요. 가족이 원수다. 가장 생명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이잖아요. 거기에 묶여 있는한 그런것만이 우리들에게 익숙하고 편하게 받아들여지는 한 우리는 낯선 생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족 이기주의를 빨리 벗어나야 되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가족 무관심하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미 여러분 전제하고 들으시는 거죠. 여러분 그거는 하라 말라 말하지 않아도 아주 당연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한 것로부터 결별하는 그런 영성이 필요한 거죠. 왜냐하면 종말에 지금다 오늘 다 연관되는 겁니다.

결국 이걸 제가 말씀드리려고 한 것 입니다. 종말론적 생명, 제가 자꾸 어려운 말만 쓰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화두로 생각하세요. 화두예요. 기독교 신앙은 다른게 아닙니다. 자꾸만 정답 요구하지 마세요. 저보고 생태적 생명과 기독교 유기적 생명의 관계 정답을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쪽으로 나가는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 음 교회에서 자꾸만 정답을 찾을려고 하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목사님들이 대답을 줘봐야 부분적인거고 그리고 오히려 왜곡될때가 많이 있습니다. 화두를 붙잡아야 되요. 뭐라고 하던가요? 접어두고요. 종말론적인 생명, 꼭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생명의 방식 가족이 있고 이런 저런 것들, 먹고 배설하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 모두가 다 잠정적인 것이예요. 잠정적이라는 말을 제가 몇번 썼죠. 기독교 윤리는 오늘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윤리는 기본적으로 잠정적입니다. 잠정성, 이런 것은 외워 두셔야 되겠네요. 저는 기독교 공부를 외우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지만 필요한 단어는 외워 두셔야 하죠. 기독교 잠정성은, 왜냐하면 대답하시겠죠. 왜냐하면 종말론적인 생명이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신학적 표현이지만 잘못하면 뜬 구름 잡는 것 처럼 생각되어요.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못알아 들어요. 그리고 자꾸만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게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이거는 대학공부를 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지성적인 어떤 부분에 박사학위를 갖고 있어도 어떤 부분에서 안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말들이 종말론적인 생명이 우리에게 온다고 하는 이러한 일종의 인문학적 사유죠. 이런 것들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이 다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을겁니다. 그냥 믿습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낙심말고 하십시오. 삼일교회 젊은 교회 목사들은 계속 모드로 나가십시오. 성서를 보면 성공한 사람들은 다 contine mode 이런 말장난으로 기독교 신앙을 끌어나갑니다. 한번 시작했으면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라. 그러면 성공한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반복적으로 접해서 들었기 때문에 아주 실증적인 거죠. 그래서 성공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확 다가오니까요.

그게 아니라 그게 다 단정적이다. 종말론적인 것이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이 사실속으로 들어가라 이렇게 말하면 무는 말인지 못 알아 듣는거죠. 네 여러분 이방식이 아니면 안됩니다. 제가 표현능력이 없어서 조금 더 일상적인 신앙의 용어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아마 나우웬이라드지 C S 루이스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신학적 개념들을 훨씬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다 통하는 이야기거든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최선으로 우리의 삶을 완성시킨다고 하더라도 잠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정말 그걸 확실하게 딱 붙들어야 됩니다. 공한이라고 그러나요? 불교 용어로, 화두를 붙들고 싸우는 그것, 그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이 땅에서 삶을 성취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리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 우리가 인격적이고 세련적이고 도덕적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경지까지 우리 삶의 방향이 나가야 된다고 하는 당위가 있기는 있어요. 그건 당연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답게 살아야 되지 않아야 되겠습니까? 그 요청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또 그런 것들은 제가 교재에서 써 놓았는데 율법이 계속 추구했던 것들이고 이것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필요한 것들이예요.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바탕에 깔고 시작합니다. 윤리도 우리가 완성할 수 없구요. 제가 이런 것을 더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 인정하시죠? 우리가 윤리적으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 인정하시지 않습니까? 파렴치한 동을 해갖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나 그럴듯하게 넥타이 매고 설교하고 있는 저나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구를 보고 라가라한 자는 살인한자 똑같다고 말씀 하셨구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친절한 말을 한다거나 내 재산을 남에게 나눠 준다고 하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그거는 거의 차이가 없어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라는 말씀도 사실 다 연관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해봤자 알려져 봤자 별로 큰 차이가 없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성실하고 윤리적인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기는 해야 되는데 그러나 그냥 노력하는 거는 아닙니다. 안되는데 해야지 해야지 노력해야지 그런것이 어떤 면에서 필요할 수 있어요. 조금더 역설적으로는 위선이라도 선을 행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반대로 위선은  아예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지 몰라요. 그거는 자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게 미묘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실하게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하나 말아야 되냐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는거예요. 이런 점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될 사람은 하는 거고 아무리 하라고 해도 하지 못할 사람은 안합니다. 우리가 강요해서 위선적 어떻게 하는 것은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처럼 터놓고 죄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저희 교회에 잠간 다니러 왔어요. 모모교회 다니시는 분이시구요. 닉네임을 말씀드리면 다 아실 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창립 5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지난 6월 첫주 일이 5주년인데 지난 주에 저는 깜박하고 지나갔습니다. 깜박한게 아니라 예배가 끝날 즈음에 알았어요. 미리 준비를 안했습니다. 교회 생일인데 두번째 주일로 했어요. 기별로 한 번씩 하는 남자교우들이 밥을 준비했고요. 추어탕 끓여서 먹었습니다. 떡 과일 그런 먹거리도 좀 했구요. 우리 집사람이 특별 축하연주를 했습니다. 제목은 베토벤의 곡인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주제에 의한 일곱개 변주곡 딴 딴 딴 딴 딴딴딴따안딴 이 주제 있잖습니까? 일곱개의 바이브레이션 재미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보냈습니다.

손님이 한 분 왔어요. 그 분이야기가 아 대구지역에도 자기 교회도 그렇다고 하면서 의사들이 단기 선교를 간다고 합니다. 자기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일주일정도 가서 쉽게 약나눠주고 치료하고 하는데 비행기값이다. 뭐다 계산해 보니까 그게 가지 말고 그 기금을 다 모아서 현지에 병원을 세워준다거나 그런 방식이 훨씬 나은데 단기선교다 해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느냐 지혜롭지 못한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해요. 대구지역에 의사들이 다니는 단기선교, 단기선교가 잘할때도 있기는 있습니만 유행처럼 되고 있잖아요. 대학생들도 단기선교를 많이 떠납니다. 저도 그런 단기선교에 대해서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요즘과 같은 한국 교회 해외 선교 구조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건 여러가지 면에서 그런데 그 이야기하려면 좀 길어지겠네요. 그만 두겠습니다. 올 처음 와서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러한 대구지역에 있는 의사들이 일년동안 갔다오는 그런 것을 모아보면 수억여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거를 낙후된 아프리카나 그런 지역에 병원을 세워주는 것이 효과적인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조금 했습니다. 이 선교라고 하는 것도 내가 한다, 나를 나타내기 위한 방식으로 선은 선인데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려면 위선이 되거든요. 좀 엄격하게 이야기해서요.

그렇게 까칠까칠하게 그런 것 같고 시비거냐? 좋은 뜻으로 갔다 오는데.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다 좋은게 좋습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신학적으로 다른 길을 찾는 자기 성찰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왜곡된 길로 가기 때문에 그런 자기 검증을 하는거죠. 예 그래서 율법적인 것, 윤리적인 것을 우리가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건 당위인데, 그러나 툭 풀어놓고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할 수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할 수 없다고 하는, 능력이 없다고 하는 우리의 실존이 그렇데 어떻게 하느냐? 칼 바르트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설교자의 실존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된다는 당위와 독일어로는 졸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는 불가능성, 운베크리 카이트의 긴장 가운데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말을 오늘 주제인 윤리와 연관시켜서 본다면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된다는 윤리적 당위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의 긴장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오늘 저는 판넨베르크가 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방향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요거는 지우고 다음판)

우리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 판네베르크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요. 쓰겠습니다. 제가 이 사람의 신학을 전공했거든요. 판넨베르크의 책, “신학과 하나님 나라” 판넨베르크가 젊었을 때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에 가서 몇 번에 걸친 특강을 했는데 그것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네 아티클이 실려 있어요. 첫번째는 신학과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의 근거, 미래의 도래로서 현실성, 제가 오늘 잠간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세번째 아티클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윤리학의 근거, 결국 여기서 이 사람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학의 근거는 하나님의 나라다는 거죠. 이렇게 제가 말을 붙이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이 기독교에서는 정말 중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생각하나요? 이게 표상이라고 하는거거든요. 우리가 뭘 생각한다고 하는 것, 표상, 독일어로는 포쉘롱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신학적 표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생각이 납니까? 종말, 에스카톨로지라고 하는 이 주제만 갖고도 책이 많죠. 그리고 신학성서 주석같은 것을 보면 많은 부분이 종말론을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인 하나님의 나라도 종말론적인 것이거든요. 종말론, 하나님 나라의 윤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판넨베르크가 설명하려고 하는 기독교 윤리의 근거가 됩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하고 그렇게 생각, 당연히 해야되겠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윤리. 일단 요 아티클의 두 파라그래프만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는 시작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마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동영상강의에서 읽는 것만으로는 전달되기 힘들겠습니다만 그래도 여러분들이 오개월동안 신학적 훈련이 어느 정도 된 것으로 보고 읽어보겠습니다. 참 귀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신학적 생각을 깊이하게 하는 우리를 자극시키는, 설레게 하는 그런 글들입니다. 신학생들은 이러한 글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어야 되는데요. 평신도 들도 이런 책들 정도는 크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들어보십시오.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 급진주의를 포함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는 삶의 모든 국면을 세계의 임박한 종말의 빛안에서 보았다. 임박한 가까이 도래한, 아 우리가 놀랍죠. 네 가까이 오긴 가까이와. 전혀 하나님 나라 올 기색이 없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가까이 와 있다고 리얼하게 경험하는 것이 그게 바로 기독교 영성이예요. 제가 지난 두시간에 걸쳐서 하나님 체험을 어떻게 하느냐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 체험이 하나님 나라 체험입니다. 읽어 보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이 깊이 들어가자면 단어 하나 하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고 그 단어가 연결된 문장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잔소리가 많죠. 읽기만 하지 왜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읽다가 보면 정말 중요하게 느껴지고 듣는 분들이 요 부분을 놓치겠거니 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거는 굉장히 중요한 공부예요. 그러니까 이런 좋은 신학 책들, 명성가들의 글들을 한 패래그래프만 놓고 계속 그렇게 주석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것이 성서 택스트 한 패러그래프를 놓고 주석, 해석 적용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 공부자체는 이러한 방식입니다. 그래서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처음 다시부터 읽겠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 급진주의를 포함해서, 이걸 또 윤리적 급진주의가 뭔가 이거를 설명해야 진도를 나가잖아요. 우리가 서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글 읽기에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걸 다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까? 필요한 것만 짚어야 되겠지요. 다시 읽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윤리적 급진주의를 포함해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의 메시지에 의존되어 있었다. 그는 삶의 모든 국면을 세계의 임박한 종말의 빛안에서 보았다. 임박한 종말의 빛 놀랍죠?  예수 이전에 모든 견해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행동과 일치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유효한 것이 되든지 아니면 거부되든지 하였다. 오고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예수의 실존안에 고동치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리어크리카이트, 리얼리티였다. 이것만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외에 다른 것들은 상실되어도 된다. 놓쳐도 된다는 거죠. 예수님은 바로 여기에 집중해서 사셨고 여기서 자기의 온 실존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간 자로서 선포하고 그렇게 행위하고 사신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서 모든 다른 것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만 실현되어야 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손을 놓아도 되요. 상실해도 되어요. 가족도 때에 따라서는 상실해야 될, 부도 그렇고 심지어 건강도 그렇고요. 그러나 또 역으로 다른 것들, 가족, 건강, 나의 삶들,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서 그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경지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상대화되지만 그 상대화 된 것들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 현실로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좀 신학적 표현인데 그래도 와 닿죠. 설교는 이러한 신학공부를 아주 철저하게 한 사람이 성서 텍스트를 설명할때만 다르게 선포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종교 약장사가 됩니다 틀림없는 사실이예요. 눈치 못 채십니까? 그리고 사이비 일수록 장사를 더하죠. 미안합니다. 제가 다 싸잡아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요즘 그 쇠고기 촛불 집회에 모모 대형목사님들이 좌파가 어떻다. 배후가 어떻다 이런 이야기를 강단에서 흘리고 있으신 것 같은데 참, 답답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해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온건한 기독교 신자들은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느냐
그렇게 이야기하는데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문선명을 통해서도 역사하고 다 됩니다. 모든 것들이요. 우리가 트집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진리 논쟁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러한 치열한 투쟁을 쉬지 않았고요. 초기 기독교도 거의 이단논쟁과 비슷한 투쟁을 펼쳤습니다. 그거 없으면 금방 진리론으로서부터 도태되고 맙니다. 마틴 루터가 좋은게 좋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했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영적인 요구앞에서 피할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정말 입만 다물고 있어도 괜찮은데 거침없이 역사를 뒤도 돌리거나 하나님 나라 지평에서 쓰레기와 같은 그러한 것들을 복음인 것처럼 막 흘려내는 그러한 목사님들을 볼때 안타깝죠. 거기에 청중들이 선동당하고 있으면서도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조금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 대형교회가 주는 메리트, 종교적 메리트에 빠져서 전혀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목회자도 그렇고 청중들도 그렇고 암담한 오늘 우리들의 상황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대형교회 몇몇 목회자만이라도 필요할 때 정확한 발언을 해 주셔야 균형이 맞잖아요. 그런 발언들을 하는 분들이 거의 없으니까 하는 분들은 힘이 없는 사람들, 저도 발언을 많이는 하지 않습니다만 하더라도 이렇게 시골에서 해봤자 파급력도 없구요.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판넨베르크가 이러한 것들을 충분하게 신학교 다닐때 신학교 졸업해서라도 목회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될 사람들이 잘 파악해야 되구요. 그래서 자기 영성을 심화시킨 다음에 성서텍스트를 바르게 전해야 되는데 그게 참 그렇습니다. 다시 이어서요. 요게 하도 중요한 진술이라서 저도 모르게 흥분했습니다. 다시 한번 끝 부분에 이렇습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예수님의 실존 안에 고동치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이것만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면 다른 모든 것은 상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있어서 다른 모든 다른 것들도 상대화된 그런 것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바쉴레이야. 안도현 아까 시인의 말을 빌리면 낯선 세계,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낯선 거거든요. 늘 새롭거든요. 충격을 받게 되거든요. 놀라움이거든요. 바르트가 말한 표현대로 놀라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놀라움, 루돌프 오토의 거룩함이라고 하는 책, 누미노제의 경험, 모세의 호렙산에서 불붙는 가시떨기 앞에서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는 그런 근원적인 새로움에 대한 충격 말이죠. 그게 기독교 영성이고 신앙입니다. 그게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쪽으로 자꾸만 교회가 새로운 영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이 세계가 변화되도록 끌어가야지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윤리를 이야기하는데 윤리적 상상력이 필요한 거예요. 보세요. 임박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오늘 우리들의 잠정적인 윤리, 삶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해석을 하기도 하고 어떻게 그것을 개혁해내고 어떻게 그렇게 상응하게 만드는가 하는거죠. 이게 정말 우리들에게 숙제아니예요? 우리가 다 풀지 못한 정말 그러한 숙제가 아니겠습니까? 다음 목요일 날 강의하게 될 윤리의 몇몇 항목들을 말할때 첫번째 성을 이야기 할텐데 동성애자들, 성윤리가 우리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우리 것을 조명을 해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우리는 이성애가 이미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다라고 하는 낯익은 익숙해져버린 그것에 머물러 버렸어요. 그런 것 동생애가 옳다 그러다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이 빛이 필요하다는 거죠. 종말론적인 윤리라고 하는거죠. 그러게 되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 하나 규정해 나가는 것이 아무런 필요가 없느냐? 다 해체되고 다원주의가 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애기하는 그런 상태로 가고 마느냐? 규범은 아무것도 아니냐?

그 다음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군요.

예수 윤리의 종말론적 다이내믹은 그 이후에도 진행을 계속하는 세계의 윤리문제들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심히 제한하는 두드러진 약점으로 흔히 다루어졌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은 장차 올 시대에 대한 일련의 행동규칙으로 간단히 처리되거나 아니면 최후 승리직전의 짧은 기간동안의 행동을 위한 지침정도로 처리된다. 어떤 경우로나 예수의 윤리적 교훈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것이다. 그렇게 유보적으로 잘못 해석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기독교 역사에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가 하나님 나라 도래시기를 잘못 짚었다고 하는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의 유효성이 더욱 문제시 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적 교훈의 강한 종말론적 성격은 그 보편적 의를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종말론적이라는 예수님의 윤리의 다이내믹, 이런 것들이 현실적인 삶에 들어와서 힘을 잃어 버리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 그게 산상수훈에 있는것들은 종말로 가야만 하는 유보되는 예수님이 종말이 언제냐 하는 시간 계산 잘못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나오는 윤리적 지침도 뒤로 물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윤리를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네. 이 아티클의 마지막 패러그래프를 읽겠습니다. 이거예요. 앞에 있는 것을 잠깐 설명을 해야되겠군요. 예수님의 메시지, 종말론적 윤리인데요.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만 가능한 것들인데요. 그러니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이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선 윤리 이런 것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근거해서 해석해야 된다고 아주 복잡하게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론 적으로 판넨베르크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마지막 패러그래프만 읽겠습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궁극적 성취가 인간적 노력의 한계를 초월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 활동을 하지 말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준비하도록 고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사랑에 의해서 수행되는 신앙의 활동 역사, work 역사이다. 종말론적인 희망을 가진 사람은 그가 달성한 일이 잠정적 성격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고 그에 에너지를 요구하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좀더 희망이 있는 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개방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자신을 어떻게 해요? 이쪽을 향해서 개방, 아까 제가 열림이라고 이야기 했죠. 개방. 이게 결론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어떤 선한 행위들, 업적들 이런 것들도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볼 때는 잠정적이예요. 우리가 이것을 압니다. 잠정적이라는 것,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는 사람은 그걸 아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것을 절대화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두 손을 탁 놓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해봤자 아무것도 아니다는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좀더 나은 희망, 하나님 나라의 희망, 오늘 우리의 삶이 이것을 맞을 준비를 하는가? 좀 더 나은 희망을 향해서 이것을 끌고 가는거예요. 오늘 우리의 삶의 문제들 끌고 그 희망을 갖고 가는거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혁명보다 오히려 전복이다. 누가 이야기했던가? 언뜻 기억이 나서 그래요. 역사 혁명을 우리가 가장 진보적이라고 하는데 기독교는 아예 전복, 더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말이죠.

여러분, 이러한 우리의 기독교 적인 역사 이해, 그리고 윤리이해, 이것도 참 역동적이고 그렇다고 하는게 변증법적이기도 하구요. 그런 것을 느끼시겠죠? 네.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가지 중요한 신학적 용어들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 이것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한다. 온다. 도대체 이게 이게 들어올까요? 잘 안 들어오겠죠.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 우리가 리얼하게 느끼게 되고 우리가 윤리의 잠정성을 명백하게 인식을 해야 되요. 하십시오. 나도 6월 10일 날 나가야 될 텐데요. 우리 목협단체에서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세요. 촛불 시위해야 되는데요. 그러나 그걸 하면 다 끝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잠정적이예요. 하더라도 똑 계속 문제들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행위가 잠정적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또 무시하지 않고 오늘의 문제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종말론적인 빛에서 그 쪽을 향한 희망안에서 끌고 가느냐 그러한 우리의 기독교의 자세, 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 종말론적, 임박한 하나님 나라가 기독교 윤리의 근거다. 이게 오늘 결론이 되겠습니다.

공지사항들입니다. 다음 목요일은 제가 그대로 강의를 하고 하고요. 특강이 있습니다. 14일 브리드 이병권박사가 특강이 있습니다. 제가 공지에 올려놓기는 했습니다만 기억하시고 아마 제가 하는 강의보다 훨씬 재미있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미국 교포들 신앙생활과 혹은 미국인들의 신앙생활을 좀 비교하면서 특징들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파워포인트도 준비하고 재미있게 할 것 같습니다. 그 날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