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12일, 전북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에 있는 배넘실교회에서

농어촌 목회학교가 열렸습니다.

세 강의 중에 저도 한 강의를 맡아서 다녀왔습니다.

강의 초는 아래와 같습니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본 성서와 설교

-설교는 성서텍스트의 탈은폐 사건에 이르는 구도적 행위다-

 

 

1. 성서는 텍스트다.

 

성서의 오리지널이 원래는 소리였겠지만 문자가 나온 뒤로 문자로 자리를 잡았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문자, 또는 언어는 궁극적인 것을 세우지 못한다. 성서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 말씀 자체는 아니다. 칼 바르트 표현으로 성서는 보물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다. 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따라서 성서를 설교의 본문으로 삼는 설교자는 언어의 본질과 성격을 알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요한복음 기자는 태초에 로고스가 존재했다.’고 증언한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존재와 역사와 궁극과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다. 김춘수는 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인식했다. 텍스트는 해석을 요구한다. 서정주 시인의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를 해석할 수 있어야 성서 해석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세돌과 알파고의 5연전에 나온 기보도 해석을 요청한다.

 

2. 진리(알레테이아)는 탈()은폐다.

 

진리를 가리키는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탈()은폐(망각-레테)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계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힘이다. 불교의 선승 전통은 화두 붙드는 걸 핵심 공부로 여긴다. ‘이게 뭐냐?’는 질문은, 즉 바람이 뭐냐, 차 한 잔이 뭐냐 하는 질문은 세계가 은폐되어 있다는 걸 전제한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생각해보라. 그 안에 구원의 신비가 은폐되어 있다. 윙엘의 세계 비밀로서의 하나님(Gott als Geheimnis der Welt)이 말하는 그 비밀도 은폐성을 가리킨다.

성서텍스트는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십자가, 부활, 재림 심판 등의 기독교 교리도 역시 은폐의 성격이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재림 교리를 보라.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대답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전 13:12절에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논쟁적이다.

 

3. 설교행위는 구도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는 단순히 지식과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앎의 구도적 과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테니스나 바둑, 그리고 음악이나 시도 아는 것만큼 그 세계가 보인다. 보통 목사는 30살에 설교자의 길에 들어서서 70살에 마친다. 40년 동안 구도적으로 그 일을 수행해왔다면 그는 길을 가는 선비라 할 도사(道士)가 된다. 길을 가는 사람은 뒤를 성찰하지만 거기에 연연해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지만 망상에 빠지지 않으면서, 지금 여기서 자신이 대면하는 세상을 관조하고 투쟁하는 방식으로 뚫고 나간다. 설교자에게 이런 내공이 깊어진다면 설교하는 그 순간(Augenblick)에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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