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623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36,37: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

 

욥기에서 엘리후의 위치는 애매하기도하고 특별하기도 하다. 1) 형식에서- 욥과 세 친구들처럼 서로 주고받는 논쟁을 벌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펼친다. 2) 내용에서- 엘리후는 재난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으로 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엘리후의 말은 욥과 친구들의 논쟁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로 볼 수 있다. 38-4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36:24-37:24에 나오는 엘리후의 주장과 맥이 닿아 있다.

 

36:24-33 하나님은 높으시다

이 대목에서 엘리후는 고대인들, 즉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고대인들의 영혼을 사로잡을만한 이야기를 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엘리후는 24절에서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라, 높이라, 잊지 말라, 찬송하라.’는 멋진 말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높으시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분(26)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주장이 불가지론(agnosticism)인데, 이 주장은 영지주의(gnosticism)과 대립된다. 엘리후의 입장은 불가지론은 아니고, 영지주의도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성서적 고백이다.

하나님이 높으시다는 사실을 당시의 자연현상으로 설명한다. 물방울, 빗방울, 안개, 구름, 우렛소리, 번갯불 등등의 용어는 고대인들에게 하나님 경험과 닿아 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신비다. 철학 개념으로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 물자체는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의 본질적 차원을 가리킨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근원적인 차이를 아직도 우리는 모른다.

 

37:1-24 오묘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14)을 경외하라(24)

엘리후의 말은 진정성이 높아 보인다. 1절에서 자기 마음이 떨리고 흔들렸다고 한다. 10절의 표현이 문학적으로도 수준이 높다.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이런 표현들이 37장에 반복된다. 16,17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21절은 이렇다.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씀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앤드류 놀의 <생명, 최초의 30억년>은 지구와 생명과 인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구의 긴 세월에서 아주 짧은 시간을 지구의 주인처럼 살아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해서 그는 말한다. 인간도 수많은 생물 중의 하나인데, 자연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리까지 왔다. 1억년, 또는 10억년 후에 지구와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몰트만은 인간 이후의 지구까지 염두에 두고 신학을 해야 한다고 말해다.

 

36:10 재난은 연단이다

엘리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라 볼 수 있을 정도로 내용적으로 충실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욥에게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생각은 옳지만 욥을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지 재난이 연단이니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회개하라고 주장하라는 엘리후의 충고처럼 욥은 나중에 회개한다(4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