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61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10장 빌닷을 향한 욥의 대답(2)

 

욥은 빌닷의 비판에 대한 답변을 9장에서 한 다음, 10장에서 방향을 하나님께로 바꾼다. 몇 구절은 앞에 나오는 표현의 반복이다. 예컨대 1절은 7:11, 21절은 7:9-10과 비슷하다. 10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하소연, 불평, 자포자기 등이 혼합되어 있다. 우리가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린 욥과는 다른 형편에서 살기 때문에 욥의 하소연에 공감할 수 없을지 모른다. 두 가지 점에서 그의 진술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1) 그의 진술에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 자신이 처한 형편과 별개로 욥의 진술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질문에 맞서게 한다. 몇 구절만 간추려서 보자.

 

3: 욥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모순을 짚는다. 창조는 당연히 선하고 정의롭다. 창세기의 창조 전승에서도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4,5: 육신의 눈과 사람의 날과 해는 하나님의 섭리가 인간의 판단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 바로 인간의 판단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큰 재난을 당했지만 그것이 곧 자신이 죄를 행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나의 허물’(6) 운운은 친구들의 공격을 가리킨다. 7절에 따르면 자신이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다. 친구들이 아무리 자기를 공격해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즉 친구들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15: 욥은 8절 이하에서 당시 지혜 전통이 말하는 인간 생성, 즉 난자와 정자의 결합 등으로 일어나는 생명 현상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 생명에 개입된 것이라는 사실도 인정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오묘한 인간 생명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변에서는 그의 죄 문제를 거론하지만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일어나는 자신의 운명에 동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다.

 

19: 차라리 어머니 태에서 무덤으로 갔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한탄한다. 이 당시에 그에게는 죽음이 구원이다. ‘가 누군지를 보라. 백 년 전에 나는 이 땅에 없었다. 앞으로 백 년 후에도 없을 것이다. 이 땅에 사는 80-100년 동안 우리는 즐거움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온갖 고통과 시련도 당한다. 그것도 지나놓고 보면 그림자와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구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

 

22: 욥기가 묘사하고 있는 죽음이 절절하다. 흑암 같은 어둠, 죽음의 그늘, 구별 없음, 광명도 흑암 같다. 블랙홀이다. 고대 유대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다. 그것은 후기 유대교에서 싹이 텄으며, 기독교에서 구체화되었다. 부활 생명이 충만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