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세번 강의가 너무 벅차다 클라라님이 말씀하셨는데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원래 스케줄이 있는데 세시간을 뺀다는 것이 세시간만 아니고 마치고 하면 아무래도 한시간 반정도 여기에 시간을 할애해야 하겠죠. 걱정하지 마시고 중간에 좀 빠져도 됩니다. 월요일 저녁에는 다른 강의니까 목요일하고 주일만 강의와 연관된 것이니까요 바쁘실때는 월요일 빠지셔도 되요. 그러면 되었나요. 그런 정도 말씀을 드리면 해결책을 드린 건가요?

오늘 우리가 이야기해야 될 거는요 칭의 문제와 구원의 문제. 칭의와 구원. 칭의 문제. 관계가 어떠냐 하는 것. 누군가 질문을 하셨어요. 칭의. 핵심인데.

(목소리 톤 문제와 로지텍)
런겁니다. 눈높이를 심화시키거나 승화시킨다고 해도 좋구요 관점을 을 다르게 갖는 깊이 있게 관점을 갖는 훈련,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거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바꾼다면 안목이죠. 어떤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거든요. 그러한 관점들이 점점 깊어지고 폭넓어지게 되면 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해도 사실은 다 통하는 거죠. 그 관점이 있기 때문이죠. 정용섭이라고 하는 사람의 어떤 관점이 있잖습니까? 그건 아주 고유한 것이거든요. 저와 비슷하게 인생경험이 있거나 신학 공부가 있거나 삶의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유사하게 가지만 그러나 정용섭이라고 하는 사람, 여러분 각자 각자 고유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들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무엇이라고 하던지 저의 관점으로 하게 되거든요. 여러분들에게 다른 제목으로 강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같은 관점의 어떤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바라보는 관점이 100% 옳다고 그것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옳거나 아니거나 깊이가 있거나 없거나 정용섭이라고 하는 Personality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수업,  기독교가 뭐꼬? 진도가 나가거나 오늘 처럼 다른 것을 하거나 주일저녁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거나 저로부터 배우는 것은 저의 관점이거든요. 스승, Mentor들에게서 관계가 설정이 된다면 선생에게서 배워야 될 지식의 양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 선생자체가 아는 것에 한계가 있고요.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아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거를 다 완벽하게 아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떤것을 많이 알고 어떤 것은 조금 알아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선생이 되려면 어떤 관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확보한 학자들은 정말 학자가 되고 과학자가되고 예술가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관점 찾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여러분들도 경험하셨겠지만 설교 들을때도 설교자가 관점이 없는 것 많이 보았죠. 이때는 이런 말하고 저때는 저런 말을 하는 거예요. 맨날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물론 부분적인 맞지만 넓게 보면 흔들리고 그렇습니다. 제가 하는 강의내용들, 그런 것들에 너무 집착하지는 마십시오. 그게 많지도 않구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 그거는 나타나는 것이고 배울게 있다면 그것을 배우는 것이고 여러분 나름대로의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고유한 시각이죠.

칭의란 문제들. 이게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핵심이기도 하고 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하게 된 소위 말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핵심이기도 하고요 바르트가 자유주의신학으로부터 벗어나는되는 핵심이기도 하고 그러한 주제가 2천년동안 초기 기독교로부터 디딤돌처럼 쭉쭉 나왔습니다.  중간 중간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 부분들이 다시 강조되고 해석되고 그런 거죠. 중요한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의 관계 soteriology 구원이 뭐냐 하는 것이 많습니다. 한마디만 힌트를 주고 강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늘 주로 말할 것이 칭의와 구원의 관계인데요. 칭의를 애기를 많이 하게 되겠군요. soteriology를 신학생들에게, 저급학년 학생들에게 이야기할때 이렇게도 간접적으로 표현하거든요. “기독교는 사회 모든 행위들과 구원론적인 면에서 경쟁하고 있다.” 경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크게 보면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의 행위 자체가 구원론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하잖아요. 병든다. 의학행위들. 그래서 사람들 병을 낳게 한다거나 수명을 오래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기본적으로 구원론입니다. 죽음과 그런 것과 싸우기도 하고 질병으로부터 해방, 그런 것뿐만 아니라 건축이라 것도 동굴에서 살다가 쾌적한 삶을 살게 되는 불편한데서 자유로움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들이 단체적으로 응원하는 카타르시스 일종의 구원행위죠. 강의시간에  질문을 받았는데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알콜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 이들도 결국은 그 순간에는 구원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들이다. 알콜에 완전히 취해 있을때, 중독이 아니라도 술에 취한 경험은 구원 경험에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성령에 취하는 것과 술에 취한다는 것은 증상이 비슷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술에 취해보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너무 멀리만 생각하는거예요. 강의를 들었던 분들이 정용섭 목사가 그렇게 말하더라. 술취하는 것이 구원에 가까이 가는 것드라 말씀하시는 분이 없겠죠. 그런.. 그러니까 술에 취하면 자아가 없어지는 거예요 문제는 자기 자신이거든요. 나에 대한 집착이 너무 많는겁니다. 교통사고 나지 않을까 내 자식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내 생명 이런 것까지 일상 살아가면서 좌절, 자기에 대한 집념이거든요. 자기에 대한 집중, 판넨베르크 말을 빌자면 죄 자기집중, 어거스틴은 그것을 교만이라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 자기애 자기사랑이라고 이야기했죠. 표현은 다르지만 교만은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죠. 교회는 구원공동체죠. 자기는 아주 작아지는 경험, 하나님의 통치가 온통 자기를 빛처럼 감싸는 경험 이게 필요한거든요. 그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리얼리티는 우리가 다 모르지만 그것은 죽음이후에 죽음과 삶 전체를 아우르는 그 모든 아직까지 숨어있는 모든 생명의 세계가 완전히 드러나야만 구원의 궁극적 현실과 맞닿는 것인데 그것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구원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예수님마저도 하나님의 나라를 실증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유입니다. 어떤 청년이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답했는데 예수님 마저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종말, 하나님 나라 구원은 우리가 그런 것들은 죽어야만 알 수 있는 절대적인 세계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철저하게 작아지는 그런 이야기들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도를 많이 하지요. 그게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고 실제적으로 실제 삶에, 신앙에 성육신되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실질적인 것, 실체 그런 맛보지 못할 지 몰라요. 변죽을 울리고 자기 암시, 자기 최면이라고 하나요. 자기 세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면 믿어지는 거같거든요. 그러나 믿음의 능력은 없어. 믿음의 말은 있지만 교회안에서 믿는다고 하지만 복음에 대한 말들은 인플레이션처럼 차고 넘치지만 능력은 떨어지는 것. 바울 어느부분에서 그런말을 했는데요. 그런 능력을 많이 놓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실질적인 능력안으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이 세상과 경쟁 두가지 이야기했는데요. 첫째는 세상의 인간의 일반적인 모든 인간의 행위 자체가 구원지향적이다. 상당한 경우 사이비 구원론에 가까운 거죠. 임시적으로 우리의 아쉬운 점을 보충해준느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산다거나 지루하니까 재미있는 프로그램 본다거나 자식들이들 좋은 대학 보낸다거나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그때만 땜질식으로 지나가는 것이죠. 강의가 자구 여기서 머물러 네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렇습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의 문제가 세상과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은 세상은 다른 종교까지 포함했습니다. 우리 인간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구원론 적이기에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우리가 경쟁이다. 두번째는 이 구원이 미완료, 완료되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이미 시작했지만 완료 완료되지 않는것, 완료되지 안았다 이미 시작한 그것마저도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는 것. 여러분들이 아마 제가 쓰는 이 신학 용어들을 자주들어보지 못하셨거나 들어보셨더라도 깊이 생각하지 않은 낯설것입니다. 6월이 지나면 한학기를 다 지나면 이러한 용어들이 익숙해질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지만 완료되지 않는 것, 그 말은 곧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 닫혀 지지 않았다. 그것은 곧 종말에 가서야 그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말까지 이 세상과 혹은 다른 종교와 구원론적인 경쟁을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구원의 리얼리티들을 잘 담지하고 있고 안고 있고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열어내고 있는가 아주 심각한 한국 기독교 정체성에 대한 질문인데요 별로 이런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 많이 있어요. 등등.. 대개 그런 것들이 행동주의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재정을 투명하게 쓰지 않았다. 투명하게 해라. 이런 것으로 교회가 개혁되지 않습니다. 또 세습을 한다. 잘못되었다. 세습하지 말아라 그런말하지 말아라 그런 뜻은 아니라.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위가 왜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거 너 잘못이야 이야기해봐야 자기 방어기재만 작동되는 됩니다. 저놈들이 나를 비판하는데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목사들도 신자들도 다 그쪽으로 머리를 돌려요. 그런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신학논쟁이었습니다. 신학이예요. 모든 혁명,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운동과 의식, 의식과 운동 서로 연결되어야 하겠지만 운동이라고 하기보다 행동주의에 떨어져 버리거든요. 많이 있습니다. 의를 위해서 실천하자 좋죠. 실행적인 것 좋은데. 다른 혁명도 막스와 같은 그러한 혁명도 사실은 그게 행동주의가 아니라 학문이었습니다. 경제학자 잖습니까? 경제적인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죠. 역사가 어떻게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망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어떻게 된다는 것 그것을 제시하고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의식의 변화시켜서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혁명은 책상에서 시작합니다. 지금 제가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한 부분을 말씀 드린 것이고 다 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개혁 이슈 화이팅 슬로건 내걸고 그것도 해야 하지만 그것보다 의식의 변화가 앞서야 하지 않는가 대구 성서아카데미가 그런데 일조를 했으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기대 의식의 변화를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운동으로 나갑니다. 운동은 나가지 않고 맨날 머리만 쓸 수 있습니다. 죽은 것인데 어떻게 연결되는 가 중요한데. 머리만 거하고 실제적인 실천은 하나도 없다면 모양이 우스운데 대구성서아카데미 다비아 운동이 어디가지 가느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실천보다도 일단 의식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어 나왔구요. 그런 사람들이 다비아에 들락 날락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칫하면 지적 유희로 머물수도 있거든요. 그것만 아니라도 의식을 깬다고 하는점에서 그런 역할만 하더라도 괜찮기는 합니다만 가능하다면 운동으로 나아갔으면 합ㄴ니다. 의식과 운동과의 관계를 아시겠죠? 과연 어떻게 그러게 가능하냐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겠는가 연관되구요. 안되는데 억지로 하면 모두가 힘듭니다. 앞서가는 사람도 끌려 가는 사람 모두가 힘이듭니다. 그 지점, 역사적인 시점 카이로스라고 하는데요. 그 정확한 지점에서 어떻게 그게 발화될 수 있느냐 하는거죠. 마틴 루터는 그것을 정확하게 한 사람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마틴루터는 결코 내가 종교를 개혁 하겠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게 신학적 논제들을 끄집어 내고 학자니까 이런 문제를 갖고 신학적 토론을 하자 단순한 목표에서 자기가 예상하지 못했던 개혁의 물꼬를 트고 물꼬를 틀었을 뿐만 아니라 광야의 마른 숲에 불을 지른 것 같은 역할을 한것이죠. 이것이 한 사람의 정확한 통찰력과 신학적 깊이들 있어야 하고 또 그 시대가 그것을 운동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계기가 꼭 필요 하더라구요. 대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없이 희생만 됩니다. 혁명가들이 대개가 희생당했죠.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 안됩니다. 대개가 종교 개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많이되었습니다.

칭의와 구원의 관계. 그러니까 보세요. 신학 공부를 해야 될게 많은 거 같죠. 고상한 아주 전문적인 신학이라기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로서 바탕이 부둥켜 안고 있는 기독교 진리가 뭔가 하는가 최소한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쓰는 많은 용어들이 그렇게 그냥 지나가 버릴 것이 아니잖습니까? 신자들이 예수 믿습니까? 앵무새처럼 되뇌이지 말고 신자들로 구원의 현실안으로 직접 좀 영적인 발, 물속으로 들어가야 수영을 할 수 있으니까요-을 내 딛을 수 있도록 수영을 하니 할 수 있도록 목사들이 그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신자 하나하나가 영성의 물 수영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안에 들어가 어느 정도 수영하는지 책임지지려고 하지 말고 성령에게 맡기도록 하자. 우리 목사들은 신자들 영혼들에 애착심이 너무 많아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려는지 그걸 이해못하겠어요. 어떻게 그 책임을 지려는지... 자기도 알지도 못하는 말 많이 쏟아내잖아요.

어제밤 CTS 방송에 ㅇㅇ교회 ㅇㅇㅇ 아들인가요. 부목사인가요. 카메라에 비치는 걸 보니  파이프 오르간 대단하더라구요. 회중석도 연주회 홀같더라구요. 담임목사 맞습니까? 그 교회가 세습한 겁니까? 그래요. 저는 시골에 있다 보니 관심도 없어서 몰랐습니다. 어쨋든 사십대 초 정도 보이든데요. 자기도 뭘 모르면서 설교하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설교비평을 오래 하다보니 말을 함부로 쏟아 내는 것 같은데 뭐 지금 같은 식구들이니까 이해하고 들으십시오.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하는데 책임 없다기보다도 소화되지 않는 말들 그게 나옵니다. 그거 아시겠죠. 일반 신자들은 그걸 구분 못합니다. 말하는 사람이 알고 쓰는지 앵무새처럼 되뇌이는지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그분은 소화하지 못하는 하늘 천국 믿고 구원받고 이런 이야기들을 단어 하나하나가 우주처럼 무거운 것들인데 마구 쏟아놓는 약장사하듯이 그걸 구분하는 것이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약장사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진리 깊이 들어가서 그것을 열정 가운데서 쏟아 내는 것인지. 논 가락은 보이던데. 고만 이야기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분도 있고 저런분도 있어야 하니까 인격적으로만 목회하더라도 괜찮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요. 평신도들도 신앙이 뭔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공부 좀 하자. 딱 한번 사는 것이잖아요. 짧은 인생이기에 소중하잖아요. 그리고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거란 말이예요. 현재만 아니라 우리 죽음까지 다거는 것인데 그렇다면 모두가 신학자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근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노력을 필요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구원에 대한 문제만 하더라도 할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구원과 창조, 구원과 종말의 문제 이런 것들 그렇찮아요? 다 관계된 것이죠. 창조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데 과연 그 사이에 어떤 힘들이 개입하고 있는지. 아직 창조가 종말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완성되지 않았다기 보다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 신앙안에 있는한 양보하지 못할 것이지만 다만 그 내용이 뭐냐 하는 것에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구원과 창조, 구원과 종말, 구원과 교회 다 연관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구원과 칭의의 문제 입니다. 의롭다고 인정 받는 다는것, 칭의라는 낱말 설명드리면요, 의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실체론적 의미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예요. 우리가 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아무리 변화되도 우리가 의롭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의는 우리는 이룰 수 없습니다. 왜 이룰 수 없는가? 실질적으로 그렇구요 의로운 사람도 없구요. 바울도 죄수중의 괴수라고 이야기 했구요. 의라고 하는 문제를 몇가지 교양을 지키고 거짓말 안하고 감옥안가면 된다고 한다면 이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것도 가짜 의겠지만, 그러나 더 근원적인 깊이에 들어가서 보면 지평이라고 할 수 있죠. 더 심층적인 지평에 들어가면 아무도 의로와 질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갈라디아서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노력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면 그러면 괜찮은 겁니다. 바울의 율법적인 삶, 율법을 통해서, 율법은 바로 의를 이루려는 삶, 율법을 백프로 실행할 수 있다면 의로운 사람이겠죠. 갈라디아서 로마서가 반복하고 있죠. 바울에 의하면 율법으로는 도저히 우리가 의로와 질 수 없고 오히려 죄인이라는 사실만 확인한다. 자기 삶, 신앙생활에서 유대교에 충실했던 그 사람에게서 나온 고백, 아주 진솔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조금 바꾼다면 이렇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않을 수 있습니다. 의인은 도덕적인 문제로 연관되니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 처럼요.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누가 자유로울수 있을까요.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문제가 더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 도덕적으로 잘 포장이 된 행위들이 율법적으로 가능한 거예요.

제가 옥한흠목사님의 제자훈련에 대해서 비판한 부분들이 바로 그 거였거든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에 대해서 잘 한다고 박수는 못칠망정 왜 흠집내냐 그런 말 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으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개 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으로 한 두개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집는 것뿐입니다.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율법하고 비슷한 노력들입니다. 하면 할 수록 좋은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자 훈련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믿는 사람답게 제자답게 살자고 하는 것이죠.

박영선 목사님도 창피하게 말이 속된 표현으로..  창피하다고 어떻게 표현하시더라. 의로워진 것은 이제 끝났으니 성화를 우리 의지와 노력으로 해야 한다. 두 분 다 훌륭하신 목사님들이거든요. 그런데 칭의론으로든지 신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이 아닌 걸 같고 자꾸만 힘을 주게 되면 그러면 거기에서 문제가 벌어지게 되지요.  두분 다 하소연 하시잖아요 그렇게 평생 외쳐봐야 아무런 변화가 없더라.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불안하게 생각하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인정을 하는 것 뿐이예요.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냐. 결코 그것이 아니죠.

이 맥락, 작은 차이 긴장. 사람들이 자꾸만 사람들이 놓칩니다. 우리는 늘 존재론적으로 들어가야 되요. 의식의 문제라고 했죠. 의식과 존재는 다른 말입니다만 아까같은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행위 이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문제입니다. 여기서 또 막힙니다. 당신이 이야기하는 존재가 무엇이냐 설명하려면 또 길잖아요.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러한 단어들도, 다른 단어들도 그런데요 한두번 들어서 생각에 정리되지 않습니다. 반복되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서도 그 단어를 줏어 듣고 저런경우에서도 듣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그 의미가 확 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거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국어사전 단어 하나하나가 안다고 해서 존재론적 힘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전혀 다른. 그게 그렇게 우리의 지성, 이성, 오감 이런 것을 통해 활동하는 그 힘이 무엇일까요? 참 신기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있겠죠. 성령은 생명의 영이고, 진리의 영이고, 창조의 영이고, 부활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죠. 성령이면 성령이지 뭐뭐의 영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성령도 아직 완료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매일묵상에서 썼듯이 은폐된 세계와 연관속에서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존재라고 하는 단어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제가 기독교 신앙은 존재에 놓이는 거다 이 말 한마디만 해도 전달이 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막히면, 오해되고 있으면 아니면 피상적으로 알고 있으면 저사람 하는 이야기가 들락날락 한다고 들리게 됩니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그런면에 서 중요합니다.

어쨌든 다시 본론, 흐름으로 돌아가서요. 우리 신앙이 기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되는 것이지 무엇을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대전제를 갖고 이 문제에 우리가 몰입해야 하는 것이죠. 영어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실에 몰입하고 천착해야 되는겁니다. 그런 기본적인 존재론적인 그런 신앙의 토대속으로 사실 그것을 하는 거를... 사람들이.. 이게 중요합니다. 잘 들으세요. 그것은 됐다.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것을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과의 존재론적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거를.. 믿는다는 것 그게 아닙니다. 그 사실속으로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건 아마 죽을때가지도 되지 않을 겁니다.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겁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도.. 잘들으세요. 은총이라 하는 것도 다 개념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일반 평신도들이, 목사님들도 마찬 가지인데 이런 신앙적인 용어들을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실용적 용어로 이해하고 있거든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일차적 신학공부의 핵심입니다.  그게 잘 안되는거에요. 자꾸만 따로 놀아요. 왠 만큼 신학 공부를 하더라도 신학책을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신학생들이 목사님들이 신학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읽어봐야 재미없으니까. 왜 재미없을까요. 모르니까요.  바르트의 신학책을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바르트가 헛소리를 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 것을 알려면 아주 기초적인 언어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철학, 역사, 문학 다 연관되어 있는 것이거든요. 한국의 신학교 가는 사람들이 그 공부가 기초가 너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만 그냥 뜨거움만 갖고 갑니다. 심지어는 다른 욕망으로 가고 또는 믿음 좋으니 신학교 가라는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해 갖고는 한국교회 미래가 어떨까요? 그런 방식으로도 하나님께서 쓰신다고 하면 쓰는 것이죠. 그건 그 분만의 배타적이고 독점인 행위니까 우리가 설교를 잘해서 한국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한국교회가 깨지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만 또 그건 그분에게 맡겨는 거지만 최대한도로 우리가 해야될 일,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인 진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우리가 해야할 될일을 해야하지요. 말이 조금더 옆으로 나갔는데요. 좋은 신학재원들을 잘 뽑아야 합니다. 신학교 아무나 보내지 말고. 그거 참 분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젊은이들이 신학적인 인재냐 이런거 말이죠. 하여튼 그러한 신학책을 읽지 못하는 신학생들과 목사님들. 그게 재미없으니까 다른 쪽으로 한눈을 팔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한국 교회 문제들은 몇가지 고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기초적인 거기서 부터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하는데요.

고 맥락이 중요하다고 그랬죠. 그런 것들은 누가 딱 설명해서 딱 입에다 넣어줄 수는 없는 겁니다. 자기가 깨달아야 되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 존재 문제가 우리 신앙의 태도다. 존재문제가 핵심이다. 우리 스스로는 존재론적으로 의로워 질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뿐입니다. 맥락을 내가 이야기를 하고 이쪽으로 넘어 가야 되겠네요. 맥락이 주요하다고 한거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핵심이죠. 믿음으로 의로워 지는 것 아니냐 그것은 됐느니까 이제는 어떻게 사냐. 도덕적 주도권을 확보하자. 이런 게 기독교의 캐치프레이즈로 나오거든요. 이게 굉장히 고상한 것 같지만 이건 답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 이건 존재론적 관계인데 이거 들어가는 것은 된 게 아니에요. 죽을 때까지 믿어야. 사실 믿지도 못하면서 믿는다고 말만 하는데요. 복음과 믿음이 말로만 남아있지 능력으로는 안되어 있잖아요. 능력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세례 받았다고 됩니까? 장로가 되었다고 됩니까? 교회 봉사한다고 됩니까? 아니면 선교사가 간다고 됩니까? 선교사 목사 된다고 능력안에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이 다 자기 밥벌이가 될 수 있고요. 또 그것만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하는 신앙 자체가 업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죠? 율법인거죠. 내가 이만큼 해서 어떻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선의의 욕망 때문에 목사도 되고 목장도 되고 선교사도 되고 다 할 수 있습니다. 순교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그 방식으로.

그래서 바울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그렇게 희생한다. 혹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음이라고 그랬죠. 사랑은 우리의 낭만적인 도와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것이죠.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활동할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그냥 좋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기는 있습니다만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나을거에요. 너무 교회안에서는 자매님 형제님 사랑합니다. 이 용어들을 너무 많이 쓰는 것같애요. 안쓰는 것보다 쓰는 것이 나을지 모르지만 능력도 없이. 그거는 사랑 스스로가 자기 길을 가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그 사랑의 능력, 하나님의 존재론, 하나님 나라의 존재론, 하나님의 통치인데 그분이 우리를  관통하면 우리는 따라서 하는 것뿐이죠. 그런것 없이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줄수도 있구요.  산을 옮길만한 그러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저 내가 세례받는 몇가지 형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을때까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미 칭의를 끝났으니까 성화를 하자 이게 무슨 말입니까?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것과 똑같은 것이거든요. 고 맥락 이해하시겠죠. 그렇다면 윤리는 바로 율법인데 그건 종교적, 세속적인 것이든 다 우리의 해야될 바른 규범들, norm입니다. 규범들입니다. 역사가 오래 진행되면서 쌓아온 하나의 경험의 축적으로 나온 공텅분모들이입니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좋은 것들인데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이거죠. 그러니까.. 아.. 하나님과의 존재론적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자연적으로 나오게 될 하나의 귀결인 거예요. consequence 라고 할 수 있겠죠. 두개를 같이 무게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의 칭의론적인 관계, 존재론적 관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행위의 문제, 이런 윤리적인 문제인데 같이 무게를 두면 안되죠. 늘 이게 상수고, 이거는 종속된 것이죠. 여기서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요. 아. 제가 오늘 이야기를 사실은 다른 것을 더 많이 하려고 마음먹고 들어왔는데요 다른 것들을 하다보니 그 부분을 많이 놓쳤습니다. 칭의문제를 더 했어야 했는데요. 초기 교회안에서 있었던 그 문제들요. 특별히 사도바울이 처했던 아주 원시 기독교 그 당시의 상황들,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포항에서 하고 있는데 읽으면서 저도 많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됐기 때문에 그냥 짤막하게 한마디 하면요. 지난 월요일 공부한 내용인데요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어요. 우리가 머리속에 있는 거로는 베드로는 큰 위대한 제자인데요. 바울이 책망을 했다. 내용은 길기 때문에 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유대 기독교인들이 들어오자 베드로가 그들을 두려워해서 자리를 피했다. 바울이 너 그럴 수 있냐. 니가. 그러면서 한바탕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안디옥교회에서 신앙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기독교 입장에 섰고 바울은 철저하게 반대한 입장에 섰습니다. 초기 기독교 제자들이 신앙이 비슷한 것 같았지만 굉장히 달랐습니다. 거기에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울이거든요. 일반적으로 초기기독교의 주류들이 유대기독교였어요. 유대기독교와 좀 상반되는 쪽은 이방 기독교죠. 유대기독교안에서도 온건파가 있고 과격파, 비둘기파, 매파가 있었는데 베드로, 야고보는 온건파였습니다. 주류였죠. 그리고 유대교의 거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름들은 별로 잘 안나옵니다. 바울도 이쪽에 포함되어 있었죠. 물론 처음에야..여기에는 유대교가 있다고 그래야 되겠군요. 유대교 안에 유대 기독교가 있고 거기로부터 뛰쳐 나온 것이 이방 기독교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거에요. 유대기독교는 유대교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였죠. 나사렛예수를 따르지만 유대교라고 할 수 있죠. 여기에 바울이 여기 있다가 자기가 처음에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서 돌아섰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유대교인으로서 유대기독교인을 비판한거예요. 그런데 그때 유대기독교란 것은 이러한 지금 역사 안에서 내려온 이방 기독교가 아니라 그냥 유대교입니다. 파가 다른 거죠. 그안에서. 우리는 바울이 회심할때 이쪽에서 있다가 확 바뀐 것이 아니라 크게 다른 것이 아니에요. 다만 파가 달라서 공격했을 뿐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방 기독교에 핵심이 되었는데요. 갈라디아서는 이 유대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던 신학 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이런 사람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처음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어요. 사도행전 15장에 나와 있듯이 네가지만 금하고 율법으로는 자유롭다 타협을 보았는데 갈라디아서 뒤쪽에 보면 역사적으로 보면 안디옥교회 논쟁을 통해서 베드로와 이런 사람들이 유대기독교쪽 보수적으로 선회합니다. 바울의 이방인 기독교인는 이들이 베드로를 책망한데서 보았듯 보수적으로 변하니까 이방인 기독교는 점점 더 멀리 나오는 거죠. 유대 기독교와 이방기독교가 더 이상 접촉점을 찾지 못하고 벌어 지게 되었습니다. 유대기독교는 역사안에서 소멸되고 역사안에는 이방인 기독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상하죠. 예수님의 동생이라든지 베드로라든지 지도자로서 실질적인 힘들을 갖고 있었지 않느냐. 성서에서도 나오고 말이죠. 그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지금 제가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냥 거기에는 왜 그들이 여전히 초기 기독교 지도자..복음서에 나와 있는 그런 내용들은 초기 기독교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복잡한 사연이 그안에 들어 있었을 겁니다.

이야기를 정리해야 하겠네요. 요런 맥락에서 핵심적 역할 바울인데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이 이거죠. 율법으로는 우리가 결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하는 이 사실을, 이 두가지 사실을 같이 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신앙 by justification, faith 예수를 통한 예수에 의한. 유대 기독교는 율법 토라 할례 같이 가는 쪽으로. 바울은 단절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저주아래 놓이게 한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헬라지역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로 설립했고 계속 그쪽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한 핵심적인 가르침이 칭의죠. 이것이 어떻게 구원과 연관되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 구원문제는 아까 초창기에 이야기했는데 그것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시죠. 오늘만 날이 아니죠. 앞으로 이런 이야기가 계속 나올텐데 그때 좀 보충하기로 하고 제가 그것을 지금 완전하게 설명하기도 힘들구요. 다만 구원의 문제와 칭의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우리가  실질적인 변화가아니라 그렇게 인정을 받는다 하는 것, 그건 말이 안된다.좀 실제적으로 의로워 지지 않았으면서 의로워졌다고 인정받는 것.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 imputation 그거 말장난이지 그게 뭐가되냐? 이게 지금 아.. 그게 말장난일까요. 실제일까요. 그게 말장난처럼 느껴지니까 아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답게 사는 윤리적으로 살아아한다는 것이 옳을까요. 나는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칭의론에 모든 기독교 신앙의 무게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왜 실질적이냐? 그걸 어떻게 더 설명을 해야 할까요. 이런겁니다. 시간을 법정 스님이 암자에 들어가 구도정진을 하잖아요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죠. 그럴바에야 걸식자들을 위해서 밥이라도 한끼주지.  노숙자들과 같이 있기라도 하지 암자에 들어가 돈오돈수 돈오점수가 그러한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의 신비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좀 비교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칭의,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로와진것은 아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 이게 자칫하면 말장난이 될 수 있는데 여기에 우리 전체, 기독교 전체에 무게를 담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승부수를 거는거에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신 것이죠. 그 증거를 대라 그 증거를 대는 것이 신학이기도 하고 역사이기도 하고 하여튼 그런 과정속에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게시판 질문: 예수님 오시기전 율법시대의 구원과 신약이후의 구원 의미가 다른가요?

저건 또 다른 질문이래서요. 구원이 어떻게 다른 것이 있습니까? 구원은 하나죠. 구원이라고 그 자체가 하나인데 나타난 현상이 여러가지 있겠죠. 출애굽도 하나님의 구원 경험이었고 개인이 병을 낫는 거라는지, 절망한 가운데서 희망을 얻는 것이라든지 현상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구원 자체는 하나님의 행위로서 하나입니다.  예수님 전이나 후나 똑 같죠. 그 안에서 예수그리스의미가 뭐냐 다른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다 말씀드리기도 힘들고 그렇습ㄴㅣㄷ다. 설날 밤인데도 진지하게 시간을 보냈네요. 담소하면서 지내야 하는데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