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1월23일, 저녁 8시, 시편 149편

구원과 심판

 

 

149편은 가끔 전쟁을 옹호하는 말씀으로 오해받는다. 특히 1618-1648년에 전개되었던 ‘30년 전쟁’에서 호전적인 구호로 사용되었고, 그에 앞서 농민전쟁(1524년)에 관해 루터와 대립하던 뮌처에 의해서 농민의 무력봉기를 신앙적으로 합리화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에 해당되는 구절은 6-9절이다. 그러나 원래 149편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공동체의 제의 찬송이다. 그 왕권은 구원과 심판으로 요약된다.

1-3절: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편은 꾸준하게 찬양하라고 외친다. 현실은 그걸 부정하지만 신앙은 그걸 요구한다. 억지로 찬양할 수는 없다. 찬양할만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와 일치되는 게 영성이다. 이유를 2절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창조 사건이 신앙의 가장 궁극적인 토대이다. 이걸 실제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보통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무엇을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다. 왕은 세상을 통치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을 승리주의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오히려 승리주의와는 반대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4-6절: 구원의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의 통치가 승리주의와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구원’을 주신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찬양할 근본적인 이유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자라는 뜻이다. 도대체 구원은 무엇인가? 어떤 대답을 하는가에 따라서 신앙이 차원이 달라진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과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말한다. 아름답게 하신다는 것은 문학적인 표현이다. 구원은 우리가 실증적으로 묘사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권이기 때문이다. 천당을 구원이라고 한다면 그곳을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생명 사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했다. 지난주에도 중요한 주제로 나온 개념이다. 겸손과 대비되는 단어는 교만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기신뢰이다. 겸손은 단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냐 하는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자기 신뢰에 빠지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7-9절: 심판의 하나님

서론에서 말했듯이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심판한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9절은 ‘이런 영광’이 모든 성도에게 있다고 한다. 심판은 단순히 원수 갚기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단순한 승리주의가 아니다. 고대인들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성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인들만을 향한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더 엄격한 심판이 임한다. 생명완성,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