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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5(창 2:4~25),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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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5(창 2:4~25),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3월1일
창세기 읽기,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창세기 2장 4절부터입니다. 앞에서 창세기 1장과 2장 3절까지는 한 저자가 기록한 창조 이야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특징은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엘로힘이 하나님으로 번역됐어요. 그런데 4절부터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4절부터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J문서라고 합니다. 야훼라고 할 때 영어로 J잖아요. 이건 가장 기초적인 거예요.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으로 분석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느냐 딱 받아들이면 되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읽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다 사람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전통에 있는 사람이 어떤 글쓰기 목표로 썼는지를 알면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성경을 분석해서 그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창조 이야기도 1장과 2장 3절로 다 끝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식하셨고, 모든 것이 완료됐잖습니까. 그럼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데 여기 4절부터 또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앞부분에는 창조 이야기가 똑같은 게 두 번 나오는 거예요. 어색하죠. 저자가 다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로 다른 저자가 쓴 창조 이야기가 창세기 전체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들어온 겁니다. 보십시오. 뒤에는 계속 여호와, 여호와 그렇게 이름이 붙습니다. 이걸 J문서라고 합니다. 참고적으로 또 P문서라고 있는데 프리스터(Priester)라고 해서 제사장 계급에 있는 사람이 쓴 글이라는 거에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다 알 수 있습니다. 정용섭 목사가 쓴 글과 아무개 목사가 쓴 글, 어느 신학생이 쓴 글 다 다르잖아요. 시대적으로도 다르죠. 일제시대 때 활동하던 신학자나 목사가 쓴 글과 지금 활동하는 사람이 쓴 글은 다르죠. 거기 사용되는 단어들도 다르고요. 글을 보면 저 사람이 성서신학을 전공했구나, 저 사람은 조직신학을 전공했고, 저 사람은 교회사를 전공했네, 그걸 알 수 있는 겁니다. 제사장 계급에 있는 사람만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단어들과 개념들이 그 글에 나오는 걸 보고 그 부분은 P문서로 분류하는 겁니다. 이것도 성경의 권위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거예요.
2장 4절,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뒤에 나올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라고 하는 겁니다. 앞에서 다 얘기했는데 또 얘기하잖아요.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J문서는 창조 이야기가 조금 더 예술적으로 나옵니다. 사람 창조도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썼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5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여기는 첫째 날 무엇을 만들고 그런 것은 다 생략됐습니다. 아마 앞 단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와 이 단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창세기 안에 같이 편집할 때, 조금 조정하면서 앞에 있는 이야기는 생략한 후 글을 써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승이 다 있는데 각각의 전승을 그대로 편집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에요. 모든 글쓰기가 다 그렇잖아요. 신약 성경도 마찬가집니다. 6절,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아직 세계의 생명체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 그려져요. 샘물 솟아나는 것을 저렇게 표현했다고 성서주석 학자가 얘길 하긴 하는데요, 농사지을 준비가 되긴 된 겁니다. 아직 풍성하진 않아요.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흙이라는 히브리어가 먼지, 티끌이라는 뜻도 된다고 해요.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되니라” 앞에 나온 창조 이야기에서는 그냥 우리의 모양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순서도 있어요. 일단 흙으로 남자를 만들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예술가적으로 표현합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는 겁니다. 8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덴동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담이겠죠. 아직 여기서는 남자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우리가 보통 선악과라고 이야기하는 그 나무입니다. 가끔 성경에 시비를 걸듯이 이런 주장을 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을 것을 모르시고 만드셨나?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닌가? 만들지 않았으면 인간이 죄도 짓지 않고 에덴동산에서 잘 살지 않았겠는가.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어떤 논리를 정확하게 앞뒤가 맞도록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이미 결과로 나타난 인간과 그 역사에서 그것이 왜 있었느냐를 묻지 않고,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되느냐, 그런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설명이 됐나요? 선악과를 왜 만들었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관심이 없어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타락하게 됐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화 같은 이야기죠.
10절,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쭉 읽겠습니다. 여긴 그렇게 중요하진 않습니다. 11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절,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절,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신화적인 이름들이에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14절,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아담입니다. 아직 여자는 없어요.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처음부터 인간은 노동하게 돼 있었습니다. 16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지 말라고 하면 더 먹고 싶은 거죠. 판도라 상자 이야기 아시죠? 열어보지 말라고 제우스한테 명령을 했던가, 그랬는데 못 참고 열었어요. 여자가 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자에 대한 선입관이 좀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도록 먼저 유혹받은 사람이 여자고요, 여자가 남편에게 줘서 먹게 했다고 얘기하는데 판도라 상자도 여자가 연 겁니다. 열지 말라고 했는데 열었더니 온갖 재앙들이 다 뛰쳐나왔다고 하네요. 깜짝 놀라서 상자를 닫았는데, 그 안에 하나가 남았고, 그게 희망이라고 하네요. 희망이 여러 불행들, 죽음이나 고독이나 질병 등등 그런 것들 중의 하나인지 인간 사회에 온갖 불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희망 하나만은 남겨둬야 되겠다 싶어서 마지막 남겨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니까 아예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면 먹지 않았을텐데요. 이것은 설화입니다. 실제로 있었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됐느냐를 신화적으로 설명하는 거에요. 먹지 말라고 하니까 호기심이 나서 참기 힘들죠.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결국은 먹잖아요. 호기심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뒤에 보면 아담이 이브의 유혹을 받을 때 눈이 밝아진다는 말을 들었어요. 신처럼 알게 되려는 그 욕망은 죽음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7절을 근거로 해서 인간 문명의 속성을 설명하려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 그러니까 무엇을 알려고 하는 욕망, 신처럼 눈이 밝아지려고 하는 욕망은 그 결과가 죽게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에게 그 길을 가게 합니다. 어쩌면 이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요즘 인공지능에 한창 들떠 있지 않습니까. 쳇GPT라고 정보를 단순히 어느 쪽과 링크해서 알려주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명령어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작년 연말에 그것을 공개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접속해 있는 것 같습니다. 호기심으로라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들어가서 무엇이든 치면 창작을 해서(창작인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대답을 준다는 거예요.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쳇GPT가 시도 쓰고 노래도 만들고 그림도 그린다면서요? 논문도 쓰고요. 더 나아가서는 우리 몸을 진단 같은 것도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무슨 병이지? 무슨 약을 먹어야 하지?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겠지요.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검토를 해봐야 하겠지만, 아무튼 상당한 수준의 대답을 해준다는 겁니다. 설교자들도 유혹을 받을 것 같아요. 창세기 2장 4절부터 17절까지를 본문으로 해서 청년들 대상으로 하는 설교를 한 편 써줘, 이렇게 하면 써주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굉장히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리가 죽는 길일지도 모르죠. 제가 과학과 문명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게 아닙니다. 엣날 황우석씨 나왔을 때 반짝 하다가 지금은 사그러들었죠. 배아 복제인가, 요즘은 뜸하네요. 공룡을 새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곤 했습니다. 생물학이나 물리학이나 인공지능 등등 두루두루 인간은 끝까지 가고 싶은 거예요. 인간의 멸망이 올지 모른다는 위협이 있어도 할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간단한 문장인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자, 사람을 만든 것까지 쭉 가보죠.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두 번째 창조 전승에는 창조 이야기가 예술적인 감각으로 설명된다는 게 느껴지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은 호명하는 거예요. 20절,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두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사람이 먼저 창조되고 다음에 짐승들이 나오네요. 첫 번째 창조에서는 다른 짐승들이 창조되고 맨 마지막에 인간이 창조돼요. 순서가 다르죠. 서로 다른 전승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근거로 하면 사람이 먼저 창조됐냐 가축이 먼저 창조됐냐 어떤 게 옳으냐 이런 논란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성서 기자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죠.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자가 남자의 부속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라는 뜻이에요. 이건 다 메타포예요. 23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동일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하브리어로 남자를 이쉬라고 한답니다. “여자라 부르리라” 여자는 잇사, 남자는 이쉬 비슷하죠. 이 부분을 예로 들어 여자를 낮춰서 보면 좀 곤란합니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그러니까 뭘 인식하기 전에는 부끄러움이라는 자체가 없었죠.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인식은 문제긴 문제예요. 필요하긴 한데 그게 인간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3장은 타락 이야기가 나오죠.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