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302)


주일 잘 지내셨습니까? 네 저는 요즘 다른 개인적인 일로 조금 시간을 빠듯하게 보냈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러다보니 일들이 이렇게 밀리기도 하구요. 내일 또 포항에 가서 강의해야할 그런 거를 준비를 해야 되고 이게 조금 어렵습니다. 제가 좀 잘 붙잡고 나가기 힘들어요. 일도 어떻게 보면 욕심일 수도 있구요. 그러한 방식으로 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로운 게 아니다 생각이 듭니다. 그런대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 일이 진행이 된다면 괜찮은데요 중간에 다른 개인적으로 피치 못할 일들 말이죠. 그런 것들이 들어와서 며칠 정도 시간을 끌고 잡아먹게 되면 프로그램들이 엉켜 버리거리거든요. 그러면 하나하나들이 다 부담스러워지는거죠. 제가 포항에 가는 것은 3월 4번째 주일까지만 하도록 했습니다. 포항 와이엠시에이에서는 계속 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하다보니 부담이 되요.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요. 어떻게 보면 설교를 준비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들어가거든요. 거리가 있어서 왔다갔다 해야하거든요. 그런 일들로 해서 저는 바쁘게 지냈구요.

제가 오늘 여러분과 질문 응답시간으로 만났습니다. 시간을 시작하면서 질문이 없으니까 질문응답 주일 저녁에 하는 시간을 빼버렸으면 좋겠다고 한것, 우스개 소리로 한 것입니다. 질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에요. 가르치는 사람들은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더라도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예상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학생들의 마음을 뚫어봐야 선생이니까요.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비슷한 수준에서 생각하다보면 뭐가 궁금한가 하는 것은 다 나오더군요. 동영상 메뉴에 구체적으로 질문을 올려 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때문에 주일 저녁 시간을 끌고 나가는 것이 힘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질문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목요일 밤에 하는 한 시간으로서는 기독교가 뭐꼬? 촘촘하게 채워나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주일저녁에 못다한 부분을 보충해나갈 수 있으니까요? 질문이 없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안됩니다. 목요일 밤에 하는 그게 3학점짜리로 한 학기 교양과목으로 했던 거거든요. 저학년 교양과목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가볍다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던 표현은 좀 달라지겠지만 그 내용은 사실은 똑같은 무게를 담습니다. 신학이나 삶에 대한, 역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지, 듣는 학생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제가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독교가 뭐냐? 성서가 뭐냐? 가르치더라도 현재 제가 갖고 있는 신학적 착상을 다 빼버리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듣는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표현을 다르게 하는 것이죠. 조금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겠죠. 그래서 목요일 밤에 한 시간 하는 수업으로 사실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주일밤에도 질답 시간으로 하겠다는 이유는 실지로 질문을 받기를 원하는 점도 있지만 목요일 밤에 충분하게 하지 못했던 것을 보충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지 않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쨌든 질문이 나왔습니다.

질문: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배웠는데 그걸 보면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추가하면 포도원에 아들을 보내서 죽임을 당하는 비유도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한 게 아닐까요? mmkim78

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크게 틀린 이야기도 아니고요.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던 안했던 그거는 일단 두번째로 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거든요.  신구약 성서를 통틀어서 말이죠.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복음서에 한정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거기에 실질적으로 벌어졌던 시간들과 인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도하고 있는 성서기자들, 성서기자들이 속해 있었던 공동체, 그들의 시간과 장소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그 시간보다도 30-33년까지요. 그때보다도 복음서가 기록되던 그 시간이 중요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건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서를 기록해서 서신을 포함한 모든 신학성서들에 언급되는 예수님은 객관적인 사실, 역사적 사실로서 그분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신앙고백되고 해석된 그 분입니다. 실제로 역사안에 있었던 바로 그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서 이해되고 해석된 예수가 일치하느냐 아니냐는 것은 많이 연구를 해야 되지만, 그러나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서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었던 그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중요하지 그것을 전달한 사도와 속사도 초기 윈시 기독교가 중요하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은요.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 예수님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원천적으로 중요하죠. 성서론이나 계시록관점으로 말씀드린다면 하나님 구원 사건이 중요합니다. 계시니까요.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은 일치되기도 하고 조금 작은 차이를 보입니다만 작은 차이를 여기서 그것까지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말을 할 때 거기 안에 있는 용어의 개념들을 대단히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해야 하거든요. 학문적인 글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저도 설교를 하면서 계속 느끼는 바입니다만 설교 한 편으로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듣는사람과 말하는 사람과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전달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넘어서기 힘들어요. 그런 것들을 일치시키려면, 의사소통을 정확히 하려면 일일이 그 개념을 다 설명하면서 넘어가야 되는데 설교시간이나 강의시간에 그런 것들이 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특별히 그렇구요. 그런부분들이 일치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쩔 수가 없는거예요.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같이 연결되는 부분들이냐 그런 것들이 신학적인 개념인데요. 그런 것을 다 강의하면서 짚고 넘어가기 힘들잖아요. 그렇더라도 전체적인 흐름만 여러분들이 따라오게 되면 그런 차이들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건 당연히 중요하죠. 문제는 성서와 연관시킬때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만나는 가 하는거예요.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 자체는 아니잖아요. 예를 들면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출애굽 사건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것은 언어나 문자가 아니잖아요. 그것은 사건입니다. 엑소더스. 예수님 공생애에서도 사건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과 예수님의 공생애 연결해서 생각해 보세요.  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우리는 구원사건을 직접 만나지 못하고 문자로 만납니다. 문자가 어떻게 사건 자체를 담아내겠어요. 이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이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은 문자로 다 담아 낼 수 없구요. 그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초적인 구원사건, 예수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우리는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역사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그것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2천년전의 우리 사이에 역사적인 틈을 메워주는 것은 글자, 문자입니다. 성서거든요.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수업시간에 나옵니다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한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서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담고 있는 그런 성서가, 뭐 이거는 일단 애기한 거거든요.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사건을 보고 적은 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전해내려 온것이라는 사실, 신문기자가 현장에서 보고 쓴다고 하더라도 엄밀하고 객관적인것을 다 잡아낼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그것도 한계가 있는거예요. 신문기자가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자기 머리를 통과하거든요. 통과할때, 여러분들이 신문 뉴스를 볼 때 같은 기사라 하더라도 신문 기자에 따라 다르게 보도될 수 있죠. 물론 몇 월 몇 시에 뭐가 무엇을 했다. 객관적이고 초보적인 사실은 누가 쓰더라도 차이가 없지만 사건에 대한 해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성서는 신문보도가 아니라 이건 분명 역사 문서 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석 되는거죠. 잠간 이야기가 옆으로 나갔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룬 성서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이 실지로 무엇을 했느냐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게 아주 힘든  것입니다. 그걸 전제하고 여러분들이 성서를 읽으셔야지요.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다. 통해서 왔다는 것, 거기에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짓는다고 한 것을 십자가 부활과 연계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의 죽음을 미리 내다보고 부활을 예측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건 적절한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본문 자체를 조금 더 연구해봐야 알겠어요. 지금 제가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충분한 주석적인 근거를 갖고 나오지 않았습니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후대의 해석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그렇게 해석된것이지 처음부터 결정되고 예정된 어떤 사건의 실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런 근거가 없느냐? 이런 질문을 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그 차이, 다르기는 합니다만 그 안에 아주 중요한 요소들이 들어와 있어요. 그런 것들을 다 사실은 말로 하기는 참으로 힘들기도 하구요. 뭐가 있을까요? 그건 여러분들이 잘 찾아 보십시오. 예수님에게 어떤 사건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요. 그런 사건들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에 의해서 해석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부활하면서 말씀드렸을텐데요. 예수님의 부활인데요. 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그 부활이 인식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5백명의 사람들에게도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다고 바울이 이야기하구요. 분명한 사실로 경험되는데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인가요? 예수믿는 사람들 있는데만 나타나신 건가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또 죽음을 이기시고 종말론 적인 생명을 선취하신 선취된 그러한 부활의 몸을 입으셨다면 떳떳하게 사람들에게 그대로 나타나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빌라도앞에도, 제사장앞에도, 유대 민중들 앞에도 내가 바로 부활한 예수라고 했으면 예수의 메시야성이 명명백백하게 나타났을텐데 그게 아니잖아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도 믿을 사람이 아닌한 예수님의 부활은 전혀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부활현현이 없었어요. 이게 뭘까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게 이러한 일종의 딜레마일수도 있고 기독교 신앙의 역동성일수도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안에서 형성된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실증적, 객관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하나 둘 딱딱 맞아 떨어지고 믿음의 증거를 달라고 하듯이 그런쪽으로 나가고 있는데요.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희미하게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요. 확실합니다. 그러나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죠?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확실성을 경험했느냐? 부활하신 예수, 그들이 어쩔 수 없는 현상 앞에 직면해 버린거죠. 그들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엄청난 것을 경험한 겁니다. 그들이 어떤말로도 설명할 수 없어요.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구약성서 어느 부분에서 말한 죽은자, 삼일만에 무슨일이 이루어지리라 등등 여러가지를 통해서 예수의 부활이 구약성서에 근거한 예언의 성취다 그렇게 해석된 것입니다. 예. 그렇게 된다면, 아 다시 아까 그 질문으로 돌아가서 별로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기독교 공동체가  경험하고 이해한 독특한 방식의 확실성에 이르는 길이 있었어요. 그거를 우리는 잡아야 합니다. 그 길이 그러니까 다른 것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처럼 실험실에서 반복해서 똑같은 답이 나오는 그런 확실성이 아니라 다른거죠. 계시적인 확실성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야만 겨우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확실성 그런거죠. 이런 것이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것은 아닌데 동일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고유의 진리에 이르는 인식론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로의 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진리 인식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독특한 거죠. 그러니까 일반 실증적인 세계가 말하는 그러한 방식의 확실성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성에 근거한 확실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 그런 말은 말장난이다. 도대체가 이 세상의 실증적인 확실성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확실성이 다르다고 하면 말이 되냐? 예. 우리가 여태까지 일상적인 경험하는 방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이 안되지만 그러나 신앙 영성, 신학적 사유에서는 그것을 뛰어 넘습니다. 바깥으로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까 질문하신 분에게 대답을 드린다면 성전을 허물라 사흘안에 짓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한 거다 혹은 그렇게 물론 성서 기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고 맥락에서 한번 더 할께요. 성서기자가 그 생각을 쓴 거하고 예수님이 직접 그렇게 생각한 것 하고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러나 성서기자들의 공동체에 의한, 전승에 의한 가능성이 많은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그러한 표현들이 복음서 안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아 그렇다면 복음서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믿지 못하겠다. 이 부분은 신학자들이 연구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거의 끝이 없어요. 신학의 길이. 지금까지 계속 그런 문제들을 연구했는데도 아직까지 답이 다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같은데 보면 나는 무엇 무엇이다. 그러한 하나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에고 에이미. 헬라어로 그렇게 시작합니다. I am 이렇게 쭉 나갑니다. 공동 부분에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말씀하실 가능성은 좀 떨어집니다. 요한복음에 나와있는 에고 에이미, 나는 뭐뭐다. 정형화된 예수님의 자기표현 자기 진술은 요한복음의 신학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냐?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이 뱅글 뱅글 도는 것 같죠. 서로 모순에 빠진 것 같죠. 순환의 모순라고 할까요. 물고 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꾸만 너무 관념적인 이야기를 한 것 같애서 여기까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질문이 이어지는군요.

질문: 부활이 구약의 예언에 근거한 초대교회의 해석이란 말씀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란 뜻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질문도 더 정확하게 풀려면 도대체 drloved란 분이 말씀하신 역사적 사건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 미리 이야기를 해야 하거든요. 역사적이라는 것이 실증적 역사를 말하는 것인지 해석된 것을 말하는 것인지 History를 말하는 것인지 전혀 다른 뜻이거든요. 그러나 무슨 뜻인지 제가 알겠습니다. 굳이 학문적으로 문장을 해석하려면 그러한, 더 팍팍하지만 더 세세한 개념정리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해석이란 말씀은 제가 예수님에게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벌어진 특별한 부활현현 사건인거예요. 그건 실증적인 사건은 아닌 겁니다. 그 사건이 뭔지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부분을 잘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영적인 눈에만 나타난 하나의 사건, 부활현현 입니다.

오늘 샘터 교회 설교에서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예수님이 고향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맞아 랍비라는 칭호를 받고 계셨으니까 이사야서를 찾아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들은 말이 지금 여기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말씀하죠. 설교가... 그러니까 눈먼 자가 보게 되고 이런 등등 이사야의 예언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회당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의해, 복음의 해, 희년의 해, 정말 복음의 선포, 이런 것들과 일치된 다는 것을 말하거든요. 거기도 신학적으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다른 분이 다른 질문에서도 나온 것 같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이 선포하셨는데 결국은 초기 기독교회가 예수님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 자체, 선포자를 선포된 것과 일치시켰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거죠. 여기에는 어떤 더 궁극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초기 기독교의 새로운 인식론이 작용한 겁니다. 인식론 어떤 것을 깨닫고 이해한다고 하는 겁니다. 고 맥락안으로 들어가는 게 신학적 사유이고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현현이, 설교 이야기하다 말았군요. 그러니까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이 인용한 이사야의 그 예언은 바로 예수님와 일치되었다.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눈 먼 자가 당장고쳐진 것은 아니예요. 그자리에서요. 신학적인 고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순을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눈먼 자가 보지 않고 앉은뱅이가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하는 그 믿음, 그 인식, 그 통찰, 그 해석이 초기 기독교의 고유한 예수님 이해고, 하나님 이해고 , 역사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거예요. 이러한, 여기에 혹시 설교하실 분들이 들어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설교자 목사들에게 필요한 것인데요. 그 맥락 안으로 일단 목사가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 말씀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던지 아니면 실용적으로 써먹을 도구가 되고 맙니다.

이건 성서는 영적인 문서인데요. 영적인 세계안으로 들어가는 건데요 영적인 세계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허황하다 비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심층적인 생명의 세계를 우리는 영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굉장히 탄탄한 거예요. 탄탄한 인식, 사유방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신학적 사유를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실제적으로 눈먼 자가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예수와 하나된 사람들에게는 그 일이 일어난 것과 똑같다. 다를바없다. 그런데 도달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요, 예수님에게 이미 구원이 실현되었다,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보통 우리가 설명할 때 이미 왔지만 아직은 아닌,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이미라고 하는 변증법적인 관계라 하지 않습니까?  고 맥락인 것이죠. 그게 인제 이 안식일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예수 일화와 연관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죠. 그것이 가능할 까요? 아직은 눈먼 자가 눈뜨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일어난 것과 똑같은 예수안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어떤 세계를 보았어요.

아직은 최종적인 세계, 최후라고 하죠. 종말이라고 하죠. 우주론적인 종말의 그때, 정말 마지막이라고 하는 그때, 그러나 마지막은 또한 새로운 시작인데요. 그때 가서 우리들에게 실질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우리가 참여하게 될 그 영원한 생명이 소급해서 혹은 선취적으로 예수에게서 발생했다 그것이 곧 부활이다 그게 인제 기독교가 역사안에 초석을 깔 수 있는 영적인, 신학적인, 심층적인, 신앙적인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것이죠. 그거는 사실은 아무리 설명해도 들을 귀가 없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종말과 지금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그것을 같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 눈을 갖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도 알아야 하죠. 하나님은 드러나서 존재하는 분만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 철학적 사유를 빌려서 표현한다면 우리의 생각하는 탈을 승화시키고 넓히고 그렇게 해 나가야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도 설교하면서 그게 자꾸만 부분적으로 말을 더듬거리는 것은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런것들을 다 전제하고 신자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면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신자들은 잘 모르지 않습니까? 성도들은 그 깊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요. 제가 머뭇거리면서 이렇다면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이 제가 설교적으로 베테랑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거죠. 그러한 전달이 안되더라도 진도를 팍팍 나가야 되는데 어쨌든 그게 있는거요. 어떻게 우리가 아직은 아닌데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말이죠. 우리가 인식하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세계속으로 들어가서 살아내느냐 하는 거죠.

이걸 조금 설교조로 말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주일 저녁이니까 설교조로 말해도 되겠네요.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금방 죽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 있는 것하고 일치시켜서 사는 것이에요. 어떻게 우리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주 사소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 근본적인 생명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게 될 겁니다. 이거는 설교조예요. 들어가려고 해도 잘 안되서 문제인데 실제적으로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신비주의자, 영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그러나 온 것과 다름없는 그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 그게 신학공부를 많이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성서 말씀을 잘 읽고 영성이 열리고 하면 그런 관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거예요. 바울도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하는 다 그런 이야깁니다. 어떻게 그렇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가능합니까? 서로 다른 personality인데. 그냥 감정적으로 일치시키는 것, 그것 아니거든요. 실증적으로 느끼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사는 것. 그런 정도도 아닙니다. 신비의 문제예요. 존재론적 신비입니다.

네. 어떻습니까? 오늘 제가 드린 말씀들이. 왔다 갔다 한 경향이 보이긴 했지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말씀드렸어요. 재미있죠?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주욱 한번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질문하신 분의 이야기가, 성전을 허물라 짓는다고 한 구절을 갖고 한 이야기들이 있죠. 제가 비약하고 생략하고 지나가면서 흐름이 난삽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에 같이 얹혀서 가는거예요. 그러한 힘들을 우리가 키우게 되면 성서를 읽을때 헛발질 안하고 잘 갈 수 있습니다.

질문: 눈먼자가 눈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게 실제 하셨던 일들을 두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라고 생각해왔다고 합니다. 어떤가요?

어떻습니까? 초자연적 기적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일단 참 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더라도 많은 것들이 또 필요합니다. 성서가 뭐냐 기적이 뭐냐? 이런 것들이요. 이런 것들 다 접어두고 질문하신 분의 생각에 따라 필요한 대답들을 조금씩 열어간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 일들은 일단 가능합니다. 눈먼 자 눈뜨고 앉은뱅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났네요. 누구예요. 심청의 아버지가 이름이 뭐죠? 어느 지역에 사는 누군가요? 창을 한번 들어보니 심청전 마지막 대목입니다. 심학규씨가 왕비가 와서 아버지하니 이게 왠일이냐. 내딸보자 하니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을 절절하게 창을 하시더라구요. 눈 떴습니다. 그런건 가능할 거예요. 저는 그게 창이지만 실제적으로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런것 말고도 초자연적 기적, 사실은 자연현상과 초자연적 현상은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범주에 따라 다르니까요. 범주안에서는 초자연적이지만 큰  범주에서는 자연적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정용섭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시간 2008년 3월2일밤에 강의를 하고 있다. 이게 5백년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건 불가능한 것인데요. 이제 이건 가능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기적이죠. 초자연적이죠. 범주를 넓히면 모든 것들은 다 그렇게 자연적인 것으로 해명가능한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적당한 예화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예수님앞에서 눈을 뜨거나 하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있었고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런건 이제 전제하고 이야기해야 겠죠. 그러나 여기서 짚어야 될거는 그건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것은 아니니까 특별한 것이 아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아마 그런 일들이 벌어질텐데 그러한 일들이 있을 수 있다. 고대 사회이니까 얼마나 더 했겠습니까? 더 많았겠죠. 그런 일들이요. 예수님도 많으시거든요.

아무개 목사님의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것은 이런 것하구 예수님의 공생애에 나오는 일과 비교하지 마세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셨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 이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건자체도 다른거구요. 이거는 그 목사님에게는 직업사기문제예요. 기계적으로 그런 일들이 가능할 것처럼 하구요. 그럼 사기인가요. 저한테 어떤 대답을 바라세요. 솔직한 대답을 바라세요. 의도적인 사기는 아니지만 뭐라고 그래요? 범죄행위 있지요. 법적으로. 노골적인, 의도적인 사기는 아닌데. 자기도 모르는 무식하다고 할까요. 표현이 미안합니다. 원로목사님에게요. 미필적 고의. 외워 두어야 하겠네요. 그런 가능성이 높은거죠. 제가 보기에는 그 목사님, 설교 비평시간에 한번 했죠. 많이 순화시켰습니다만 문제가 많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많습니다. 기독교를 크게 병들게 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야 교회만 키우면 왕땡이니까. 이게 정말 심각합니다. 지금 신천지가 야단이지만 크면 힘줄 수 있을걸요. 저는 신천지 신학을 잘 모르니 말할 수 없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그  목사님은 이단과 정통 사이일 수가 있습니다. (처음엔 이단이었다가 세력이 크니까 봐줬죠) 내가 왜 이럴까요. 제가 오늘 막나가네요.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그냥 여러분들의 이해를 바라구요.

그러한 장인들, 불치병 환자들을 안수기도 하는 것 가능하다고 보아요. 그건 해야 되겠죠. 그러나 믿음으로 하면 낳습니다. 치료됩니다. 믿습니까? 그 아무개 목사는 자기가 강단에 올라가서 자기가 머리속으로 그리기만 하더라도 화상으로 그 사람을 머리속에 떠올리기만 하더라도 낫는다고 이렇게 하는데 아까 사기란 말이 나왔는데 그렇게 하면 사기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들, 거기서요 성서기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핵심을 잡아야 합니다. 치료된 것, 장인 일어나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늘 예수님이 기계적으로 행하신 것도 아니고요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었는데 고대인들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책을 한번 보세요. 추천도서에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어보세요. 추천도서 어디있냐구요. drlove님이 여태까지 그것을 모르셨군요. 추천도서는 알림판에 있는데요. ‘검색’창을 통해서 제목 클릭하고 ‘추천도서’하면 나옵니다.

아까 질문한 것 완전하게 대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눈먼 자 눈뜨게 한 것 사실이냐 아니냐? 그런 일에 관심 갖지 마세요. 그것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 이신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흔한거예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아닙니다. 호기심이죠. 그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가르침, 심판, 재림 이런 것들에 귀를 기울이세요. 대답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차츰 차츰 이야기 하도록 하죠.

easylife님의 질문 답을 준비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사라진 사건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는데 다음에 준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질문이 없으니까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말하다보니 여러분들의 질문이 사이 사이에 들어왔고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두 주간에 걸쳐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 그것을 조금더 이야기 해볼까 했어요. 기독교적으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죽음이후의 영원한 생명, 부활을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죽음과 부활은 연관되는 거구요. 죽는다고 할때 육체만 죽느냐? 영혼은 불멸하는 거 아니냐?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낼 게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이 다되었구요. 이러한 문제들도 사실은 단답식으로 끊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영과 육에 대한 문제들 그런 것들이 앞서 제가 부활도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의 현현 경험인데 그것이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초기공동체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그렇게 말씀드렸듯이 이 영과 육의 문제도 딱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진행되면서 계속 새롭게 해석되었습니다. 그 중간 중간에 헬라철학, 자연과학들도 거기 도움이 되구요. 그러면서 기독교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인간의 문제, 구원의 문제, 생명의 문제들이 풍부하게 내용을 담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교리 가르침도 아직 완료된 것은 아닙니다.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거예요. 이 말은 제가 시작한 1월에 한 두번 이야기했던 거 같습니다. 기억을 잘하고 계실 것이라고 보구요. 그건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관점을 갖고 있기도 하구요. 신앙의 기본 토대이기도 하구요.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다. 그거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구 인식의 방향이기도 하구요. 진리의 어떤 속성이기도 합니다. 열려져 있다고 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역사적인 것이 단절된 거는 없어요. 종말까지 열려진 그러한 진리,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딱 끊어져서 툭 튀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시간 역사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루터는 그 역사 안에서 500년전에 그 시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건강해질 수 있었구요. 우리가 지금 어떠한 역사적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 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가 더 건강할 수 있고 또 타락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란 것이 중요한 거예요. 중요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적이지만 중요하지 않는것, 그런 속성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게 그러니까요.

오늘 중요한 것 하나 말씀드리고 끝내야 되겠네요. 우리가 이러한 공부를 하는 것은요. 어떤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정보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책 한권을 읽으면 끝나는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그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쪽으로 생각할 줄 아는 것 그게 어렵습니다. 생각한다는것, 신학대학 졸업하더라도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편하게 하는 강의, 이런 것들을 들어보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신학자분들도 저보다 뛰어난 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저는 뭐 사실은 신학자의 반열에 서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적 사유의 끄나풀이라고 할까 그거는 조금은 맛보았다고 생각이 되요. 그 안으로 여러분들을, 비록 평신도들이 주를 이루지만 자꾸 그 안으로 끌어들일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정보는 아주 극히 일부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 동안 축척된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다 이야기할 수 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신학적 사유의 세계안으로 들어가자.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라도 가능하다. 그런 거죠.

교회안에서 신자들이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오해하지 마세요. 신학은 고상한 사유에서 비롯된다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살기가 고달프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뭘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이유는 비겁하기 때문에 그렇죠. 비겁하다는 것은 사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는 거예요. 두려운 거예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없다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한다. 말 자체가 좀 그렇습니다만 없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하나님의 능력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무능력자, 십자가에 달린것은 절대 무능력자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무능력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겠어요? 그것은 두려움인거예요. 사람들은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스니다. 좋은 것 잘되는 것 성공하는 것 능력받는 것 늘 우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도 같은 방식의, 창피한 이야기입니다.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깊숙이 들어가게 되면 그 모티브가 똑같아요. 그렇잖습니까? 그런 것들 말입니다. 형식은 종교적인데 내면은 치고 들어가니까 다른 보험 직원들이나자동차 회사 운영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거죠.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부분이 기독교 신앙의 사유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유를 영성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잘 믿고 감성적으로 따뜻하게 위로 받고 센티멘털리즘, 사뿐히 가볍게 좋은 것 다하면서 살아가는거죠. 이런 방식으로 신앙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여기 까지요.

아 광고를 하나 해야 하겠네요. 샘터교회에서 3월서부터 수요일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몇 명모이든지 수요일 하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동영상으로 할까요? 짧게 합니다. 30분, 기도, 기도도 배워야 합니다. 시인이 좋은 시를 읽는 것처럼 좋은 기도를 읽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똑같고 제목 ‘성경공부’ 1234 수요일 8시입니다. 할까 말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