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10월26일, 저녁 8시, 시편 145편

왕이신 나의 하나님

 

시편 145편에는 익숙한 내용이 많다. 이는 곧 제의 공동체가 의식을 행할 때 불린 찬송시(詩)라는 의미이다. 1, 2, 21절의 주어가 일인칭이라는 점에서 이 시가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공동체의 것이다. 익숙한 표현들을 찾아보자.

1절- 왕이신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왕으로 묘사했다. 고대인들에게 왕은 절대권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 그에게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신약에서도 예수를 왕 중의 왕이라고 표현한다. 예수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또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상의 왕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왕은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시편기자는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한 이유는 주가 참된 왕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8절- 은혜와 긍휼

여호와의 속성이 4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는 은혜로우신 분이다.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다. 문제는 그 선물을 사람이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긍휼이 많으신 분이다. 긍휼은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다.(com-passion)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영성이 아니겠는가. 셋째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세상의 악을 볼 때 시편기자의 이런 말이 이해가 간다. 개인의 악도 마찬가지이다. 넷째는 인자하심이 크신 분이다. 인자하심은 너그러운 마음을 가리킨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아니라면 우리는 생존할 수가 없다.

13절- 영원한 주의 나라

주의 나라와 주의 통치는 똑같은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이시다. 하나님은 통치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영원한 주의 나라라는 표현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세상의 나라를 암시한다. 이 세상은 피조물이기에 유한할 수밖에 없다. 피조세계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제한적이지만 피조물은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자리이다.

16절- 만족의 근원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통치는 피조물을 지키는 능력이다. ‘모든 생명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모든 생명들이 늘 궁핍하다. 배고프다. 그래서 서로 싸운다. 일종의 생존경쟁이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보면 모든 생명체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것을 충분하게 준비해놓으셨다. 문제는 우리가 내일 일을 오늘 염려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데에 있다. 그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절- 의인과 악인

20절의 내용은 선악 이원론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왕이신, 그리고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연결되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는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영적인 시각을 얻는 길이 최선이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새로운 게 보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