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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1(창 1:1 이하),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2월1일
창세기 1장 잘 들었습니다.
목사님 설명을 듣다가 늘 조는 일이 많아서
이번에는 컴퓨터 자판으로 받아적으면서 들었습니다.
음... 두 번은 못하겠습니다.ㅋㅋ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창세기 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 공부라기보다 그냥 읽기입니다. 미리 강의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주석책을 읽고 따로 준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말씀을 띄워놓고 읽어보겠습니다. 읽는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을 조금씩 정리해 보겠습니다.
창세기는 1장부터 50장까지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에덴동산 이야기, 타락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아브라함이 소명 받는 이야기,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네 족장 이야기가 창세기의 역사적 배경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세 사람이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 요셉이 들어가는 게 맞습니다. 아브라함 전승, 이삭 전승, 야곱 전승, 야곱 전승, 야곱의 열 두 아들인 요셉 전승, 이게 고대의 역사 이전에 이스라엘 조상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장 1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라고 했습니다. 요즘 물리학 용어로 하자면 빅뱅이겠죠.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의 머릿속에 저 ‘태초’라는 단어를 통해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요? 시작점을 얘기한 거예요. 히브리 사람과는 달리 헬라 사람들은 저런 시작점을 생각하지 않고, 원래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게 돌고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 이 자연 모든 것들이 어느 때 시작한 것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사람들은 태초를 생각한 겁니다. 현대의 물리학이 빅뱅을 증명했잖아요. 빅뱅을 지금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점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의 점으로 아주 무한한 질량을 가진 점이 폭발함으로써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우주가 커졌고 지금도 확장되는 중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런 물리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입이 잘 다물어지지 않아요. 실감이 잘 나지 않죠. 하나의 점에서 순식간에 폭발해서 현재 지구의 상당한 부분들을 형성하게 되고,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하는데 실감이 잘 나진 않아요. 과학적으로 계산해서 증명하긴 하니 부정할 수는 없죠. 하나님 신앙의 시작은 그 출발점을 생각했다는 겁니다. 태초에, 언젠가는 모르지만 물리학이 말하는 건 138억년이라고 하는데 태초 그 이전은 과연 뭔가, 이것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다 빅뱅 이후 일어난 우주 안에서만 가능한 겁니다. 시간과 공간이 그때부터 시작한 거거든요. 이런 것들은 개념적으로 설명을 들으면 이해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시작하네요. 이게 구약 성경 첫 문장입니다. 저런 신앙부터 유대교의 모든 게 성립되는 거예요. 그리스도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계가 사도신경이잖아요.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데 창세기 1장 1절과 닿아있는 거죠. 창조 신앙, 창조 영성이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좀 부족한 편입니다. 그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구원받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도 부활하고 구원받는다는 게 가장 핵심으로 자리하고 있어요. 중요하긴 하나 이것도 창조 신앙 안에서 생각해야 해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 신앙은 경치 좋은 데 가서 참 아름다워라 이 놀라운 세계,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한 능력을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지는 못해요. 뒤에 나오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으니 타종교인들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죠. 창조 신앙을 안다면 타종교인들도 인정해야 해요. 우리는 이 부분이 약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부정적인 것으로 봐요. 타락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가 더 큰 겁니다. 우리가 어떠한 나쁜 상황에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창조 신앙, 창조 영성이 있다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과 제가 다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어긋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 능력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우리 각 개인에게 있는 거에요. 욥이 자기 운명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는데(자기 운명을 원망했는데) 여러 과정을 거쳐서 맨 나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만 듣다가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잖아요. 하나님이 욥에게 보여준 거는 이 세상을 봐라, 였어요. 그 핵심은 창조성입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이제는 귀로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개인의 어려운 일들은 옆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접근하기는 힘들어요. 아직까지 우리가 그 차원까지 못갔다 하더라도 계속 그쪽으로 가는 게 최선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런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경험하고 귀로만이 아니라 본다고 말하는 순간이 올 겁니다. 다음과 같은 예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위를 하다가 전투 경찰에 밀려서 얻어터지고 시궁창에 처박혔어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두드려 맞았죠.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됐다가 정신을 잠깐 차리는데 시궁창에 자기가 쓰러져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시궁창에서 자기 바로 눈앞에서 파란 새싹이 올라오는 게 보이는 겁니다. 거기서 충격을 받은 거죠. 시궁창에서도 생명의 신비를 맛봤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세상이 가르쳐 주는 것에 길들여져서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시궁창에 쓰러지는 삶이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런데 거기서도 생명을 아찔할 정도로 경험한다는 거 아닙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걸 전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되는 겁니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니라.” 2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기 보면 물이 두 번이나 나와요. 히브리어로는 어떻게 되는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다고 해요, 독특한 언어에요. 종교적 언어죠. 제가 히브리어를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가 신대원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배우기는 하지만 그걸 설교나 성경공부할 때 끌어다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건 전문가만 가능해요. 전문가도 신학대 교수나 성서 번역자 정도는 돼야지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젊었을 때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좀 했었지하면서 사전 찾아서 문장을 해석하는 정도로는 정확하게 성경 번역도 못해요. 거기에다 시간을 쏟느니 그런 것들은 성서 주석학자들에게 맡겨놓고 번역된 성경과 주석학자들의 설명을 들은 다음 그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했는데 공동번역에는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다고 그랬잖아요, 약간씩 달라요. 히브리어의 특성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공동번역은 의역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 창조되기도 전인데 물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혼돈, 공허, 흑암, 깊음 이런 것들은 없음(무)에 속하는데 세상이 있기 전이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거에요, 우리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까지 다 포괄하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서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그걸 생각한 거죠. 우주의 엄청난 힘을 느끼면서 그것이 언제 시작됐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초월한 존재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거에요. 물리학으로 성경의 창조론이 힘을 받게 됐습니다. 이 문장만 본다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물이 있었던 걸로 되잖아요. 2절은 여러분들 읽으시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물이 옛날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들의 근원입니다. 우주 전체가 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물의 본질은 물이라고 말한 사람은 탈레스라고 하죠. 헬라 그리스 사람들은 4가지 원소를 세계 근본이라고 했어요. 그중에 하나가 물인데 창세기에도 물이 근원적인 걸로 나오네요.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있었던 게 물이다, 이렇게 봐야 돼요. 이상하죠?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hilio)’ 무가 아니라 2절에 따르면 물이 있는 거에요. 창세기에 창조에 관한 서술은 과학적인 원리를 설명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시입니다. 앞뒤가 딱 떨어지게 과학적 현상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에요. 저런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현대과학과 공연히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6일동안 창조했다고 해서 6일 창조론 얘기는 식으로 성경 읽으면 말이 안되는 거에요. 시인의 시적 감각으로는 말이 되는 겁니다. 이 문제를 성서 주석학자들이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은 정말 신비한 물질입니다. 빛이 없어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데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지구에 물이 어떻게 생겼냐 하는 주장도 조금씩 달라요. 액체 상태로 지구에 이렇게 많은 물이 있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입니다. 외계에서 왔다 이런저런 얘기들이 있는데 아무도 증명하지 못합니다. 지구에 액체로서 물이 가득하다는 결과만 알고 있습니다. 저걸 기록한 사람은 당연히 바다를 봤을 거에요. 그리고 하늘에서 비가 오면 엄청나게 쏟아지지 않습니까, 하늘에도 물이 가득하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다 물이다 생각한 거죠. 2절에서 하나님의 영이(하나님의 기운이) 물 위에 감돌았다, 시적 표현이에요. 과학적 표현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물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창조 이야기꾼은 말하고 있다는 거죠.
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첫날 창조 이야기가 정리됐습니다. 첫 번째 창조는 빛이에요.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 킬로미터. 그 빛의 속도로 태양에서 지구까지는 대략 8분 30초 걸립니다. 태양에서 또 하나의 가까운 별이 2.5광년 걸린다고 해요. 빛이 절대적인 속도입니다. 빛보다 우리가 빨리 움직인다면 시간이 안 간다고 하죠. 물리의 세계는 전문가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신비롭다 그렇게만 알지 실감하기는 힘든 겁니다. 첫 번째 창조가 빛인데 좋았다고 하잖아요, 이게 반복됩니다. 성서 기자는 이 세상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빛이 좋다고 하잖습니까. 겨울철에는 빛이 더 사랑스럽죠. 만약에 이 겨울 햇살을 사랑스럽게 느낀다면 그건 영혼이 풍요로운 겁니다. 그게 창조 영성이에요. 그걸 여러분들이 조금 더 확실하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빛이 있으니까 어둠도 있잖아요. 빛과 어둠, 낮과 밤. 이러한 자연에서 벌어지는 근본들이 하나님의 창조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말은 그게 하나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이 있고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라가 그 통치에요, 그게 곧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면 하나님이 어디 다른 데 있고 창조한 물건이 여기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창조에 내재하시는 거죠. 이 부분은 생각을 잘 정리를 해야합니다. 범신론으로 떨어지면 안 되지만 자연에 하나님이 내재한다, 이거는 필요한 시각입니다. 이 두 개가 구분이 되나요? 빛을 신성화 하면 범신론이 되는 거고 빛에 하나님이 내재한다 그러면 범신론이 아니라 범재신론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구분하기가 좀 까다로워요. 전달됐을 걸로 압니다. 창조 영성이 중요한 게 바로 그런 거예요. 그리고 이게 약간의 위험 요소가 있기도 합니다. 자연을 숭배하자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범신론이 되는 거죠. 자연이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의 힘이 거기 개입됐고 거기 내재하신다 하는 관점은 꼭 필요한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와, 은빛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두번다시 못할 일이라는 말이긴 한데,
손해날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맞아요.
신학대학원 석사과정 수업 한 과목을 듣는다는 자세로 가다보면
틀림없이 어떤 빛을 느끼게 될 겁니다.
약속해도 좋습니다.
신학을 포함해서 인문학 공부는 '강독이 최곱니다.
사람들은 몇 단어가 익숙해지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단어라는 게 개념적이고 문맥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지니까
반복해서 듣고 생각하고 받아적어서 그 단어와 문장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필요해요. 성질 죽이고 묵묵히 가야 합니다.
창세기 읽기는 매주 수요일마다 하니까 앞으로 2년 정도 시간이 걸릴 겁니다.
알파와 오메가라....
아침에는 오메가(계시록)를 읽으시고, 이제 알파(창세기)를 읽기 시작하셨군요.
끝은 처음과 연결되어 있으니 당연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