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51125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25,26: 빌닷의 세 번째 주장과 욥의 대답

 

24-27장을 다시 배열해야 한다. 24:1-17, 21, 빌닷 25:1-6, 26:5-14, 26:1-4, 27:1-7, (소발) 27:8-23, 24:18-20, 22-25. 표면적으로만 보면 이런 구분이 어렵다. 많은 부분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신앙 형태도 이와 비슷하다.

 

빌닷의 세 번째 주장(25:1-6, 26:5-14)

우리가 앞에서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친구들의 주장은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빌닷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대비시킨다.

25:2,3-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통치 능력을 가리킨다. 통치 능력은 곧 위엄이다.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통치 능력은 헤아릴 수 없는 군대로 표현된다(3). ‘광명이 모두에게 미치듯이 주권과 능력이 크다.

25:4-6- 빌닷은 자기가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을 비웃듯이 말한다.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냐. 피조물이라는 뜻이다. 6절은 더 극단적으로 인생을 구더기와 벌레라고 표현한다. 이런 말 자체는 옳다. 바울도 모든 사람이, 자연세계까지 죄에 물들었다고 말했다.

26:5-14- 빌닷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반복해서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과 논쟁하고 싶어 하는 욥을 비판하는 것이다. 14절은 멋진 표현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편에 불과하다. 우렛소리 앞에서의 속삭임에 불과하다.

 

욥의 대답(26:1-4, 27:1-7)

욥은 친구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거꾸로 친구들이 욥을 설득시킬 수도 없다. 생각의 틀이 고정되면 그걸 바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남편과 아내도 죽을 때까지 자기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26:2-4- 친구들은 욥을 위해서 충고하지만 욥에게는 그것이 치명적인 고통이다. 욥의 당한 고통 앞에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원인을 따져야 할 때가 있긴 하지만 지금 재난을 당한 욥의 경우는 다르다. 9:1절 이하에는 선천적 시각장애인 앞에서 누구의 죄인가?’ 하고 질문하는 제자들이 나온다. 예수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하신다. 욥이 친구들의 말을 듣기 싫어한 이유는 다 아는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공자 왈 하기 때문이다(4).

27:1-7- 욥의 장엄한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다. ‘나의 정당함을 물리치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라고 했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자기를 부정한 그분을 의지한다는 말은 가능한가? 이런 신앙의 경지는 어디인가? 예수는 십자가 사건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경험을 했다. 십자가의 죽음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께 자신의 운명을 맡겼다. 우리도 죽는 순간에 이런 믿음이 필요하다.

욥은 숨이 붙어 있는 한 적당하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밝힌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태도를 교만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욥이 실제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친구들보다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