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공부, 2016127일 저녁 7:30, 대구샘터교회

35: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

 

욥기는 욥과 그 친구 세명이 치열하게 논쟁을 펼치는 이야기다. 엘리후는 나중에 끼어든다. 이들의 논점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고, 때로는 서로 중복되기도 한다. 전체 주제는 인간이 당하는 재난이다. 욥의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 소발)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고, 엘리후는 교육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시험으로 보고, 욥은 그 두 가지를 부정할 뿐이지 뚜렷한 입장이 있는 건 아니다. 욥의 태도는 인간의 삶에 심층적으로 불가해한 요소가 많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엘리후의 세 번째 연설은 욥을 향해서 자기의 의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라.’는 것이다. 1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자.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지 않으신다고 해서 엄청난 주장을 펴지만 이미 당신 사건은 그의 앞에 놓여 있다오. 그러니 기다리시오.’ 개역개정은 욥이 기다린다고 번역했지만, 루터번역을 비롯한 다른 번역은 명령문으로 번역한다. ‘기다리라.’ 이것이 엘리후의 기본 신앙이다. 욥이 자기에게 임한 재앙을 순순히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 거칠게 항의한다는 전체 맥락에서 볼 때도 개역개정은 오역에 가깝다.

12,13절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공동번역은 이렇다. ‘(12)악당들이 으스대는 것이 못마땅하시어 그들이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서는 대답도 않으시지만, (13)하느님께서 듣지 못하신다는 것은 허튼소리,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욥은 하나님이 자기의 하소연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과는 아무리 논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직접 판단을 받아보려 했으나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차라리 스올에 들어가는 게 좋겠다고 토로했다(14:13, 17:13). 엘리후는 욥의 이런 주장이 어리석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엘리후는 앞서 나오는 욥과 친구들의 발언을 배경으로 해서 자기 논리를 펼칠 때가 많다. 5-8절도 그렇다. 욥은 7:20, 9:22절에서 사람의 악이나 선이 하나님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논리를 폈다. 표면적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은 분명히 그렇다. 악한 사람이 무조건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이 상을 받는 게 아니다. 엘리바스는 22:2,3절에서 똑같은 논리를 펴면서 욥의 의를 깎아 내린다. 이런 논쟁을 배경으로 해서 엘리후는 8절에서 욥의 악을 강조하고(왜냐하면 죄가 아니면 욥의 재난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욥의 의를 일반화시킨다(왜냐하면 의로운 자의 재난은 하나님의 본질과 상충되기에).

엘리후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은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긴다는 사실이다. 2절에서 그대의 의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이냐?’ 하고 묻는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몰고 가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사회정의를 말하는 사람에게(선지자 전통)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냐, 하고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욥은 자기의 재난에 버금가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호소하고 있을 뿐이다.

기다리라.’는 엘리후의 주장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욥과 같은 처지에 떨어진 사람을 향한 비판, 충고, 계몽으로 작동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욥 스스로 깨달을 때만 의미가 있다. 욥은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했다고 회개한다(42:3,4). 엘리후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심판자 행동을 한 것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언제, 어떻게,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교회 지도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