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535
LINK1 | https://youtu.be/XhtDpMFPEb0 |
---|---|
LINK2 |
성경공부/ 창세기 읽기 002(창 1:6 이하),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정용섭 목사 강해, 2023년 2월8일
2023.02.11 14:31:37
1. 성경은 창조 이야기를 우주의 기원이나 생명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만물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즉 세계관이다. 때문에 창세기 1장을 기원에 대한 오늘의 과학적 발견과 일치시키려는 노력은 사실 헛다리를 짚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신학은 마땅히 과학과 대화해야 한다. 최소한 정상과학이 발견하고 인정한 사실을 품어야 하고, 과학적 사실에 터하여 성경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을 통해 성경의 계시성, 신학적 진리성을 확보하거나 변증하려 하는 것은 과학에 아부하는 것이며, 스스로 성경과 신학의 고유성을 팽개치는 것으로, 과학을 배척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2. 태양이나 광명체의 빛은 물질적인 빛이고 창세기 1장 2절의 빛은 생명의 빛이다(요 1:4).
3. 두 광명체가 있습니다.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과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발광체(빌 2:12).
성질을 죽이고 일단 또 받아적어 보았습니다. ㅋㅋ
창세기 읽기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1장 1절부터 5절까지 봤습니다. 첫 번 창조 이야기였습니다. 첫째 날이었어요.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빛을 창조했는데 2절에 보면, 물이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게 추정되는 표현이 나와요. 물이 고대인들에게는 만물의 근원으로 이해된 겁니다. 이미 물은 있었던 거예요. 물이 이미 있었다고 하면 창조론에서 문제가 생기긴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창조하셔야 하는데 물이 그렇게 있는 걸로 표현이 돼 있네요. 저 문제는 제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런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성서 읽기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적인 표현이라고 제가 거듭 말씀드립니다.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순서가 어떻게 되고, 며칠이 걸렸고 뭐 이런 것을 완벽하게 계산해 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처럼 읽으세요. 첫째 날은 빛이었습니다. 그 빛 창조도 보면 “빛이 있으라.” 해서 생겼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시죠? 성경에는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선지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고 등등 나오는데 하나님이 우리처럼 성대가 있어서 사람의 언어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도 메타포입니다. 은유에요. 시인들이 나무나 바람에게서 어떤 말을 듣듯이 문학적인 표현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전권을 이야기하죠. 근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처음 빛이 있는데, 뒤에 보면 해와 달이 창조돼요. 해가 창조되기 전에 빛을 먼저 창조했다는 말이 되잖아요. 지구는 태양의 빛으로만 빛을 얻습니다. 태양을 먼저 창조해야 빛이 나오는데, 그게 우리들의 머릿속에 있는 일반적인 논리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태양을 만들어야 빛이 비치게 되는데 태양을 만들기 전에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빛보다는 먼저 물이 있었고요. 재미있죠? 시적인 감각으로 저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빛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저기서 볼 수 있죠. 태양이 없어도 이미 빛은 있을 수 있어요. 꼼꼼하게 읽다 보니 재미있네요. 자, 첫째 날 빛을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로 갑니다. 여러분 화면에 성경이 나오죠. 개역개정입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렇게 돼 있죠? 히브리 사람들의 하루의 시작은 저녁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밝아서 저녁 될 때까지가 하루에요.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여기 또 물이 나오잖아요. 2절에 수면, 물이 나와있듯이 물은 창조하지 않으셨네요. 재미있지요? 빛도 창조하셨는데 왜 물은 창조하지 않으셨지요? 물은 이미 존재하는 거란 말이에요. 창세기를 개인이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단 영성으로 기록된 거죠. 이것은 유일무이한 창조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벨론 신화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서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창조 설화는 바벨론의 창조 설화에서 온 거라고 말합니다. 똑같은 건 아닌데 바벨론 신화에 창조 설화가 있답니다. 거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해요. 당연합니다. 고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의 영향도 받고, 미디안 광야 신 영향도 받고(모세의 장인이 미디안 광야 토착신 제사장이었거든요), 가나안 토착신 영향도 받고, 바벨론 영향은 크게 받았습니다. 바벨론은 포로로 잡혀가잖아요. 고대 문명의 영향을 받습니다. 창조 설화도 바벨론 창조 설화와 비슷한 게 많다고 합니다. 전문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들은 관련 서적을 읽으시면 돼요. 제가 사용하는 성서 주석책, 창세기를 쓴 사람이 폰 라트인데 그것만 보더라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물이 이미 있었다는 거 아니에요? 성경 퀴즈 대회 비슷하게 내볼 수 있겠네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고 본래부터 있었던 물질은 뭘까요? 그런 질문이 가능하죠. 물이에요. 저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물이 어떤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까요? 빛은 창조했는데 물은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궁금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어떤 성서 주석에 보면 자세하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제가 옛날에 읽었을 수도 있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런 문제들은 성서주석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물과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이건 창공입니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 이걸 나눠요. 그게 공간입니다. 창조 이야기를 쓴 사람의 머릿속 우주관이 저렇게 되는 거죠. 저 위에 공간, 하늘이라고 부르는 그 위에는 물이 있고 저 바다에 물이 있다, 그 사이에 있는 게 공간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 모든 사물들이 모여 있다, 이런 우주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어려운 단어네요. 궁창. 푸른 하늘입니다. 지금 저런 단어를 쓰지 않죠. 공동번역에는 창공으로 번역돼 있을 겁니다.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게 하시니” 6절과 7절은 동어 반복이에요.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공동 번역으로 한 번 보겠습니다. 6절에서 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물 한가운데에 창공이 생겨 물과 물이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다시 또 재미있어서 말씀드립니다. 물은 창조되지 않았어요. 왜 창조되지 않았을까? 창조 설화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 머릿속에는 물이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말할까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의 물과 창공 위의 물을 갈라놓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어쩌면 이러한 이야기는 바벨론의 마르둑 창조 신화 내용을 그대로 따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확실한 건 아니에요. 물이 왜 창조되지 않았지? 이런 궁금증이 들다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창조 이야기를 쓴 사람이 이런 것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자기가 바벨론 신화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따와서 그런가 싶은 거죠. 이런 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그 당시 알고 있었던 우주관에 근거하여 시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앞뒤가 맞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거는 자연과학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두 번째 날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별 중요하지 않은 거지만 그냥 질문하는 겁니다. 앞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잖아요, 뒤에서도 자주 나와요, 그런데 궁창을 만든 날은 그 표현이 안 나오네요. 9절, 공동번역으로는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자연스럽죠? 번역이. 공동번역이 세련되게 번역을 했네요. 10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로 부르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절과 12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다른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셋째 날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왔어요. 둘째 날에는 그 표현이 안 나와요.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자가 필기도구를 들고 있으면 성령이 막 움직여서 쓰게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는 겁니다. 영혼이 움직이고 자기가 들은 것도 있고 이런 모든 걸 종합해서 글을 쓰는 거예요. 글을 쓰는 사람의 생각이 중요한 거죠. 성경을 읽을 때는 그걸 꼭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을 둘째 날엔 붙이지 않는 게 왜 그런가 좀 궁금하긴 해요. 세 번째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그렇게 얘기를 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니라.
1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낮과 해를 이루게 하라.” 광명체를 히브리어로 발광체라고도 번역을 한다는데비슷한 얘기 아닌가요? 하늘에 더 올라가면 물이 있어요. 물의 세계 그 밑을 하늘 혹은 궁창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광명체들이 있는 거죠. 낮과 밤을 다스리게 만드시고, 이거는 해와 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요. 그것에 따라서 징조, 계절, 날과 해, 이런 게 이루어지죠. 낮이 길어지고 짧아지고 여름, 겨울 이런 것들이 있고. 풀이 잘 자라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자연 생태 그런 것들이 정해졌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15절,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절, “하나님이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앞에서 첫날 빛을 창조하셨다고 하는데 태양이 있어야 빛이 있는 걸로 느끼잖아요. 고대인들도 그거는 분명하게 알았을 겁니다. 태양이 떠야 낮이 오니까요. 창세기를 한 사람이 기록한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모인 거예요.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J문서가 있고 P문서가 있고 E문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문서가 있고, 야훼라고 부르는 문서가 있고, 제사장 계급에 속한 사람이 쓴 문서가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에도 그런 것들이 겹칩니다. 복잡한 거라서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건 분명한 거죠. 태양을 만들기 전에 이미 빛이 존재론적으로 있었다, 그 시각은 여기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태양이 있어야만 빛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창조 순서를 저렇게 하지는 않았겠죠. 빛보다도 물이 더 우선적이고 그걸 기록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자연 현상이나 사물들의 위계질서를 본다면 그런 겁니다. 물이 우선적인 거예요. 물은 이미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태양이기 전에 이미 빛이 있었어요. 존재론적으로 더 우선한 거죠. 빛이요. 대단하네요. 창세기 기자가 태양만이 아니라 저 너머 다른 또 하나의 태양에서도 빛이 있다 하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그래서 저렇게 얘기할까요? 태양 없이도 빛이 있다고 지금 얘기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말 그렇게 보았다면 대단한 건데 그렇게까지 생각했다 보기는 어렵죠. 그런데 왜 태양은 없이 빛이 있는 것처럼 얘기하냐는 거죠. 이건 제가 설명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구약성서신학 특별히 창세기 창조 설화, 창조 전승을 전공한 사람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절,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그것들을 비추게 하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주관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넷째 날까지 되었습니다. 자, 육일까지 창조 이야기가 계속되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