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dabia.net/bbs/view.php?id=comment&no=5기독교가 뭐꼬 15강(080417) 예배, 기도

왜 이렇게 또 나오나요? 꺼야지. 껐는데. 잠깐만요. 아이구. 죄송합니다. 껐는데 두개가 떠 있었군요. 예. 반갑습니다. 아. 이 사이먼 앤 가펑클 노래 들려 드리느라고 한 4분 가까이 수업시간을 잡아먹었군요. 4분 더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집에서 저녁때쯤인데 인제 차를 세우려구요. 아파트에 보면 차 세울 수 있도록 선 그어져 있잖습니까? 아주 완전히 어두워지지는 않았는데 어스름한 기운이, 분위기가 돌 때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차 사이에 두 대가 있고 그 사이에 자리가 비어있어서 천천히 몰고 들어갔어요. 딱 세워 놓고 이제 옆을 봤죠. 차 간격이 어떻게 되나? 이렇게 싸알짝 보니까 그 차가, 왼쪽에 있는 차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가더라고요. 아 어떤 기사가 빼는 구나. 내가 잘 맞추어야지 보는데 거기에 사람은 없는 거예요. 야 이거 이거 누가 잘못 세워 놓아서 사고난다. 내가 빨리 내려서 차를 조치를 해주어야겠다 하고 다시 눈을 앞으로 돌리니까 내 차가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는거였습니다 엉뚱한 경험도 하네요. 그거는 우리가 가끔 기차를 타거나 고속버스를 타거나 출발을 할 때 착시라고 하나요. 그런 걸 할 때가 가끔 있는데요.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것 저는 정말 깜박 속았습니다. 저는 정말 옆에 있는 차가 뒤로 빠꾸하는 줄 알았거든요.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바로 이렇게 차 세울 때 제가 착각했던 것처럼 그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이라고 하는 것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의미 없다거나 떠 무질서하다거나 별거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생명, 경이로움 그러한 크기에 비해서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하잘것없다고 하는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거는 이 세계와 생명의 문제만이 아니라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 같습니다.

요즘 제가 칼럼에 큐티에요. 다비아 큐티에 주는 그리스도시다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진도가 어느 정도 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가는 거만큼 가다가 그치겠죠. 내일이나 모레쯤 나가게 될 고기에 지금 그 칭의와 구원의 현실성을 우리가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라고 할때 고 문제를 제가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할때 어떤 관계로 그리스도냐 하는 것인데요. 제가 지금 짚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어떤 관계로 과연 그리스도냐 하는건데요. 제가 지금 집고 있는 부분은 죄문제예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허물어 졌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받고 의로와진다고 하는 초보적인 기독교 교리를 주는 그리스도라는 명제가운데서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습니다만요. 여러분들 각자도 그런 생각을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것들은요 아주 기독교 신학의 기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학생들도요. 신학공부를 하더라도 살아있는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그거를 신학의 세계에 들어가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지 못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다는 그러한 명제를 두고 죄, 칭의, 성화를 제가 지금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제가 완전한 대답을 드린다고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가르침, 도그마, 기독교의 교리안으로 들어가는 거다를  시범삼아서 보여드리는 거죠. 그런 것들도 사실 쉽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도 신학교 졸업할 때 즈음에서 들은 풍월은 있지만 그런 실제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전혀 모르고 졸업하고 그리고 설교하고 학생회 지도하고 그래도 교회는 잘 됩니다. 학생회 청년회 지도, 제가 잘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신학적 사유가 없이도 목회가 가능한 그러한 풍토, 그게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한계가 있고 그러한 신학 없이 목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늘 어느 쪽으로 가야되느냐? 그게 잘못될 수도 있고 본질로부터 늘 조명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다행인데요. 그렇게 하지도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기독교와 지도하는, 목회하는 ministry죠 말하자면 ministry의 knowhow, 그거를 결정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기독교 영성의 심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경제학용어로 말하듯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요. 그거 비슷한 겁니다. 내가 이쪽으로 자꾸만 들어가지 말아야 되겠네요. 강의해야 하는데 이런 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삼천포로 빠질 것 같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다라는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데 칭의는 구원, 어떻게 칭의가 구원이 연관되느냐 그거도 생각을 해야 될 문제인데요. 최근에 제가 며칠사이에 이야기하고 있고 며칠 동안 더 이야기해야 할 핵심은 칭의의 현실성에 대한 겁니다. 내가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것,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법적인 의미라고 말씀드렸구요. 그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인데요. 기독교의 고유한 구원이해가 거기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들어서는 그냥 풍월로는 알지만 그거의 실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가는 것, 이게 지금 문제인거예요. 그걸 저는 칭의론의 현실성이 부족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칭의론의 현실성, 리얼리티의 문제 reality of justification 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확실한 것을, 현실, 정말 리얼한 것, 무얼 리얼한 것으로 보느냐 그런 것도 많이 이야기를 해야 되겠습니다만 네. 그걸 찾아야 되는데... 그게 중요한데요. 그게 곧 우주론적, 하나님의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건 하나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현실, 칭의의 현실, 하나님의 현실, the reality of God, 이거를 정말 깊이 생각을 해보세요. 이거를 제가 이렇게 말로만 해갖고는 전달하기에는 좀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니까 말을 해야죠.

네. 하나님의 현실을 일종의 화두라 생각하시고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그냥 낱말 뜻으로만 알아요. 낱말 뜻하고요 그 개념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거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낱말인데요. 그것도 낱말로만 떨어져 있고 세계, 지평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의 현실, 하나님의 지평, 하나님의 현실 그런 것들요. 개념, 지평, 세계, 현실 그게 다 통하는 단어들이에요. 조금 관점을 달리해서 표현하는 단어들인데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 지평, 개념, 현실 이런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풍부해져야만 하나님이 와 닿는 거예요. 베토벤의 음악도요. 아무리 들어도 귀 열지 않으면 안들립니다. 그 무슨 소리냐. 베토벤 음악 들으면 다 똑같은 소리 듣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음악 경험하신 분들은 아실거예요. 그냥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존재론적 깊이가 있는 것이 그건 천지 차이로 들립니다. 제가 음악을 잘 알아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다 통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식으로 말해서 언어가 말을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러한 세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현실들 그런 것들이 우리 온 영혼에 가득 채워져야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칭의, 구원, 종말, 사랑, 하나님의 나라, 회심, 이러한 것들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고 그리고 아주 리얼하게 이렇게 와 닿게 되는 거거든요.

예. 거기에서 아까 말씀드린 것을 다시 연결시키면 하나님의 현실은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를 아는 것하고 맞닿아있다. 제가 그거를 며칠 후에 나가게 될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예. 제가 처음 강의 시작을 착각할 수 있다. 차가 뒤로 가는 것 같은데 내가 사실은 가고 있는 거란 말이예요. 이 세계가 그만큼 오묘하고 경이롭고 그거를 초등학생들에게는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안 될 겁니다. 그거는 자기들의 알고 있는 것, 자기가 경험한 것 밖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 때는 대개 어머니의 세계만큼만 알죠. 아니면 초등학교 선생님의 눈높이정도 밖에는 세계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제 사춘기 지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인간, 세계, 깊이  이런 것들을 알면서 점점 새로운 세계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건데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런 뜻으로 그거 하나 말씀드리려다 다른 군소리가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이요.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하게될 기독교의 형태와 본질 이런 것들과 연관되죠.기독교 형태와 본질, 아 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게 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지만, 우린 선택을 잘 받은 겁니다. 여러분 절대 후회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이... 여기서 인제 뭐 타종교는 백안시 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건 또 다른 차원에서 해야 될 문제고, 기독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이렇게 폐쇄적이고 퇴행적이고, 자폐적이고 한 자기 독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 문제입니다. 세계 우주론적 생명의 깊이와 하나님이 연관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겠어요? 우리, 2천년동안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길을 많이 걸었구요. 그런 흔적들이 기독교안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위대한 신학가들, 영성가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는 철부지가 아니라 철이 난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거죠. 그러한 공부의 일환으로 우리가 기독교가 뭐꼬?를 하고 있는데요. 작은 문만 여는 겁니다. 이거는 정말 기독교의 introduction 입니다. 아주 초보적인 introduction 입니다. 조금만 더 가게 되면 좀 신학적 어떤 깊이로 들어갈 수 있는데요. 그건 또 나중에 해야 될거구요. 이렇게 개요, 개론이지만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구요. 기독교 신학 전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습게보지는 마시고 여기 잘 공부에 마음을 기울이도록 합시다.

이 기독교 형태와 본질입니다. 서문이 될 텐데요. 이 전체의 서문. 일단 요거는 그냥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 예. 공동체라고도 하고 예, 교회라고도 하고, 보이지 않은 교회와 보이는 교회로 구분 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예수를 중심으로 한 영적인 교회의 본질을 말하며, 보이지 않는 교회는 승리한 교회예요. 바르트식으로 애기하나요. 승리의 교회, 이미 보이지 않는 교회는 승리한 교회, 승리의 교회, 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승리했고, 종말론 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미 기독교 신앙은 종말에 가있다 전제하고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 전체, 창조와 종말, 알파와 오메가니까요. 알파와 오메가란 이야기도 많이 들으셨죠.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그것도 그렇게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와 역사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니까 처음과 끝, 이것 전체를 놓고 기독교 신앙을 끌어가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까지 이미 전체의, 역사 전체가 하나님이니까요.

이미 마지막에는 승리가 되어 있잖아요. 지난주에 제 설교의 주제도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정의로운 심판이라고 그랬죠. 하나님의 심판, 이미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이거든요. 그걸 내다보고 이미 이루어졌다고 보고 그러나 아직 역사 안에 살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역사 안에서 잠정적으로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 승리가 아닌 패배와 같은 것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어떤 영적인 시각은 종말에서 승리까지 이미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그게 종말론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 그 교회는 보이지 않잖아요. 마지막까지 다 승리,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단순히 목사가 있고 누가 있고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전체 세계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죠. 승리의 교회예요. 그러한 영적인 교회 본질을 뜻하구요. 보이는 교회는 실지로 우리가 꾸려 나가고 있는 역사 안에 있는 공동체, 신자들의 종교 형태를 가리킵니다. 교회의 본질, 승리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본질은 불변하고 영구적이지만 교회의 형태는 가변적이고 한정적이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승리의 교회, 그러면 보이지 않는 교회가 승리한 교회라고 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무슨 교회일까요? 혹시 그걸 생각하실 수 있어요?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지금 신학적인 표현을 드리는 거예요. 현재 보이는 교회는 투쟁하는 교회, 아직 승리를 나꿔 채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정적이구요. 교회도 보이는 교회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늘 변해야 되지요.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에클레시아 셈퍼 레포만다 Ecclesia-교회 Semper-늘 Reformanda-개혁, 개혁하는 교회, 교회, 교회는 늘 개혁, 보이지 않는 승리의 궁극적 교회를 향해서 개혁되는 본질을 그러한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죠. 아무리 본질적이고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구체적인 보이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존재론적으로는 교회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면 불가시적 교회가, 인식론적으로는 가시론적 교회가, 교회의 토대이다. 교회의 기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교회는 존재문제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통치의 존재론적 차원을 이야기한다면 보이는 교회는 인식론적 차원이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구별되면서 상호 연관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규정이예요.

교회의 형태는-보이는 교회죠,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며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형태를 규정한다. 예 이거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것들이 보이는 것들의 규정해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본질, 보이지 않는 그러한 것들은 교회의 형태가 그거를 드러내야 된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고 그렇게 계획되어 나가야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본질 이런 것들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구요. 교회의 형태를 이야기해야 되니까 보이는 교회를 이야기 하게 되겠습니다. 다만 이 형태를 이야기하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연결해서 생각하게 될텐데 아마 충분하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더 신학적인 문제이니까요. 여기서는 주로 교회의 실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회의 형태는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종교행위, 의식의 문제, 예배드리고 하는 그런 것들이구요. 또 하나는 교회의 조직입니다 목사, 장로 이런 것들이요. 네. 행위로서는 여기에 나왔나요.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 요걸 제가 다루겠구요. 예. 지난 주일저녁에 어떤 분이 질문한 기도 관상기도, 요 항목을 다룰 때 짚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조직으로는 목사, 장로, 당회, 여성안수만 다루겠습니다.

오늘은 종교 행위부분입니다. 예배, 기도, 헌금, 성찬식입니다. 오늘은 상당히 상식적인 그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겠군요. 예배, 이거야 뭐 긴 말할 필요도 없죠. 하나님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경건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요. worth이라는 것과 추상명사화 시키는ship.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바친다. Worship. 독일어로 고테스트디엔스트 Gottesdienst 하나님께 봉사한다 그런 뜻입니다.

예.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기독교요. 두 가지 전통이 있는데요. 아 두 가지 전승에서 나왔는데요. 예배학 시간에 말하는 것들입니다. 다 이야기하지 않고 간단한 방향만 말씀드리죠. 유대교회 회당전승과 예수님과 제자들 중심으로 한 성만찬 전승이 하나로 집결된 종교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교의 회당전승에는 주로 성서, 성무일과 성서읽는것과 찬양하는 것 이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만찬 전승은 떡과 포도주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우리의 구원, 형제애의 회복 이런 것들이 같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본다면 기독교 핵심은 두 가지죠. 설교와 또 하나는 성만찬입니다. 개신교는 주로 설교에 초점이 있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만찬이 있는데요. 두개다 사실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겁니다. 이게 두개다 계시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죠. 계시, 하나님의 말씀, 여기 어디엔가 쓰기는 쓴 것 같은데. 파워포인트하고 제 책하고 일치시키기가 힘들어서 찾기 힘든데요.

설교는 보통 말해서 들리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들리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죠. 들리는 말씀. 그리고 성만찬은 뭘까요? 그러면? 보이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보이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니까요. 하나님의 자기노출입니다. 설교와 성만찬이 기독교 예배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에서도 사실은 성만찬을 매번 예배때 마다 행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저희 샘터교회에서는 지금 한 달에 한번 하고 있는데요. 아쉽기는 하지만 지금 과도기입니다. 언젠가 매주할 수 도 있구요. 아니면 격주로 해도 좋구요. 이 설교와 이 성만찬 이 두 가지가 교회예배 핵심이다. 들리는 말씀이고 보이는 말씀으로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 예배는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이거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거를 꼭 생각하셔야 됩니다. 이거는 다 아시죠. 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doxology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예. 삶의, 생명의 신비도 우리의 생명을 어떤 방식으로 완성하실까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 그런 거를 모두 묶어서 최고의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경건한 행위이거든요. 예배 중심은 삼위일체 하나님, 예배 주체... 예배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이 삼위일체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필요한 건데요. 교회에서 이런 낱말로만 나타나 있을 뿐이지 이게 어떻게 본질에서 하나이고 위격이 셋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이냐 하는 그러한 하나님 존재의 신비를 말하고 있는데요. 어쨌든 오늘 우리가 하나님론은 이야기할 건 아니고 다음에 나오게 될 겁니다. 신론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드러나는 과정이어야 됩니다.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이게 쉽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 드러내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어떠한 예배 형식을 갖추어야 되느냐 하는 2천년동안의 반성에 의한 결과가 예전이죠. 예전, sacrament라고 하는 예전입니다. 여러분들이 로마가톨릭의 미사라든지 루터란 교회, 성공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보면 예전이 살아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개신교회의 자유로운 예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교회 미사를 보면 너무 형식적이다. 권위적이다. 정적이다. 권위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텐데요. 그건 큰 오해입니다. 예. 거기에 양측, 개신교나 가톨릭 예배의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러나 우리 쪽에서 좀 반성하는 부분을 이야기, 말씀드린다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기보다도 이 사람이 중요한 거에요. 우리는. 예배자. 주체가 우리는 사람인거예요. 청중들인 거죠. 청중들. 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의 은혜를 추구합니다. 예배 참석하고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야기하죠. 그거 별로 좋은 이야기 아닙니다. 예배는 은혜 받기 위해서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니냐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강의할때 한번 제사와 예배 이걸 비교해서 말씀 드린 것이 기억나는 군요. 제가 오늘 요부분을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기가 감동을 받기위해서 참여하는 것 아닙니다. 죽은 조상들에게 예를 바치는 거에요. 그래서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제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이 예배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 거예요. 그 형식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려지는 종교적 메타포를, 메타포나 혹은 상징들을 거기에 담고 있는 겁니다. 문장이 조금 헝클어지는 것 같애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제 말씀의 의미는 전달 될 거라고 봅니다. 그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자칫하면 은혜, 예배 참여하는 사람들의 은혜에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명분일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예배 드릴때 온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혼이 집중되던가요. 그걸 하지 못합니다. 그거는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거예요.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에 열린 예배라고 하는 것이 나오고 있잖아요. 저는 이것이 예배를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예배 한번 가 보세요. 온누리 교회 예배에 인터넷에 참가하고 몇 번 들어가보고 참관기를 기독교 사상에 올렸습니다. 다비아 홈페이지 홈페이지 어디에도 올라 있을 겁니다. 열린예배요, 앞에서 까운도 입지 않고 성가대원들이 예배시작 전에 몇 십분동안 감미로운, 복음 찬송을 반복적으로 부르구요. 더 이상 제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열린 음악회와 같은 연출된 그러한 예배요. 예전하고 연출되었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연출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심리적인 것을 사로잡는 그러한 동기들이 다분히 많다고 하는 겁니다. 조금 형식적이라고 하더라도 예전적 예배로 돌아가는 게 결국 그게 은혜를 받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은혜가 뭐냐 하면 사람들이 그걸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요. 사람들이 은혜에 대한 착각이 대개 심리적 작용으로 생각합니다. 아주 상쾌한 노래 들으면 즐겁잖아요. 그걸 가져다가 은혜라고 생각하잖아요. 노래라고 생각하잖아요. 교회가서 실컷 개그맨같은 그러한 농담이나 그런 것 듣고 스트레스 풀고와서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큰 함정이 있는 겁니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나질 않죠. 또 교회지도자들이 그쪽으로 몰아가기도하고. 예 우리가 늘 세속사회에서 그런 방식의, 그러니까 찰나적이고, 육감적이고, 감각적이고, 감수성 자극적인, 감수성만 자극하는 그러한 문화에 깊숙이 물들어 있잖아요. 아침에 눈을 떠서 부터 드라마, TV드라마에 빠져 버리고요. 저녁에도 두세 탕씩 그러한 통속적이고 통속적, 통속적이란 말을 무조건 나쁜 뜻으로 쓴 것이 아니니까 이해하지 마십시오. 통속적이고 멜로 드라마적이라고 할 까요. 그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는데 하여튼 그 삼각관계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그러한 치정에 얽혀 있는 그러한 드라마에 빠져 살던 사람이 교회 와서 어떻게 예전적인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늘 딴 생각 하는 거죠. 결국 그러한 사람들을 묶어내기 위해서 나온 하나의 방식이 열린 예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하나도 다른데 팔지 않고 몰입될 수 있도록 그렇게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죠.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그렇게 묶어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기 때문에, 늘 감각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결국 오래 가지 못하죠. 지루하죠.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였던, 지금 은퇴하신 분이구요. 정진홍교수가 아마 그 온누리 교회 열린 예배에 참석하고 쓴 글인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 입니다. 작은 음악회 그런 것들 하고 그런 때였는데, 방송국에서 할 때인데 자기가 갔다와서 꼭 그거와 같았다.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세련되지 못나 열린 음악회 그런 정도, 그러나 흉내내려고 무던히 애를 쓴 그러한 것들, 교회 가서 그러한 연극 보고 나왔다 라든지 훌륭한 연주를 보고 왔다는 그럴 느낌 받을바에야 나는 교회 안간다. 그럴 바에야 전문적인 연극을 보던가 음악회를 가겠다 그러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배가 우리에게 이벤트화 됨으로써 벌어지는 그런 문제점이 많이 있는데요. 어쩜 이제 반성하고 원래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의 예전의 방식으로 돌아가자. 조금 지루한 것 같지만 결국 그것이 2천년 기독교 역사가 구성한, 역사, 2천년 역사가 제시한, 그러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할 가장 바람직한 예배 모습이거든요. 개인의 심리적 그 영성에 머물지 말고 2천년 기독교 역사성 영성으로 들어가자. 예배에서 저는 고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대해서 더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간단하게 제목으로만 짚어야 되겠네요. 한국 교회에 대해서 오해 두가지. 하나는 예배를 하나의 종교적 의무로 생각한다. 의무화, 어느 정도 의무로 생각하는지 제가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의무화 성수주일, 입에 달고 살죠. 예배는 의무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 가는 것은 의무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전은 예루살렘 한군데 있었기 때문에요. 이기도 하고. 하여튼 우리는 예배를 너무 의무화 시킨다고 하는것.

두번 째는 이 예배를 주술화 시키는 것이죠. 주술화. 예배에 참석하면 복을 받을 것 같은 그러한 생각을 많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교회 예배가 참 숫자가 많죠. 의무이기도 하고 참여하면 복을 받기도 하고 은혜받기도 하고 이런 차원에서 수 십 종류의 예배가 개발된 것 같습니다. 네. 저는 예배가 의미가 없다고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구요. 그 예배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남발하지 말아야 되고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성삼위 일체 하나님에게 진정한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그러한 자세로 들려야 되겠지요.

그 다음은 기도입니다. 오늘은 아마 기도까지 해야 되겠군요. 기도의 당위에 대해서는 제가 많은 말씀을 드릴 필요가 하나도 없죠. 기도의 당위, 이미 성서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사람 이었구요. 예수님도 기도를 한적한 곳에 가서 많이 하셨구요. 또 우리를 향해서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어쩌면 기도공동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2천년동안 계속해서 많은 영성가들,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를 했지요. 칼 바르트도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신학의 첫, 기본적인 행동은 기도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기도가 없이 어떻게 신학,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가 ‘복음주의 신학입문(Evangelical Theology: An Introduction)’이라고 책속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신학에 관한한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오라 엣 라보라 ora et labora’ 이러한 법칙은 어떤 경우에도 타당하다." 기도하라! 일하라! 제가 보기에는 수도원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노동 이 두가지 일을 다 했거든요. 제가보기에는. 수도사는 기도와 노동.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의 Lieben und Arbeiten-리벤 운데 아르바이텐 ‘사랑과 노동’도 우리에게 좋은 신앙의 insight를 줍니다.

한국 일반 평신도들도 신학책을 좀 읽어야 되요. 네? 그걸 어떻게 좀 해결할 수 없을까 모르겠습니다. 매엔 날 한국 기독교 출판사에서 나와서 베스트셀러 되는 건 말이죠. 그냥 ‘게으름’ 이런 책들, 정말 의미 없는 책들요. 규장에서 나오는 책들,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쉽게 읽어 치우고 말, 읽고 던져 버릴 수 밖에 없는, 그냥 말장난에 불과한 그런 것들입니다. 신학 책을 좀 읽어야 되요. 대구 성서아카데미, 다비아가 평신도, 일종의 평신도 신학운동인데 신학 책을 좀 읽어야 됩니다. 도로트 쥘레의 이러한 책들, 그런 것 같이 읽고 스터디하고 말이죠. 모르겠습니다. 다비아 오프모임, 서울에 한 달에 한번 모이고 하는데요. 지역에서도 같이 모여서 그러한 책도 읽고 논의도 좀하고 신학 책들을 같이 읽는 일들을 하면 참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나서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씀 드릴 수도 없고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발벗고 나서야 오프모임은 이루어지죠. 이게 바쁜 세상에서 발벗고 나설 사람도 없구요.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제가 했구요.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 수도원에서 하는 일들이 신학에서도 똑같다. 네. ‘복음주의 신학입문’ 정말 좋은 책입니다. 책 읽어보시죠. 근데 생각을 좀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지 않으면 졸리고 그럴거예요. 신학생들도 이런 책들 읽기 힘들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신학생들이 신학 책을 읽어내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이요.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이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싫어합니다. 이해를 못하니까. 음대 다니면서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듣는게 지루한, 숙제하기 위해서 억지로 들어서 레포트 내는 것에 불과한, 이러한 사실이 신학교에서도 사실은 많죠. 그게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전반적인 인문학의 난맥상이 신학에도 온건지. 아니면 신학만의 문제인지. 우리가 풀어야 될 문제입니다. 네. 바르트의 말을 좀 더 하면요. ‘신학이 하늘을 향해서 난 문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르트가 한 이야기한 건데요. 하늘이라고 하는 단어, 이게 메타포예요. 이 단어를 통해서 무어를 이야기하려고 한 건지, 또 그것과 상반된 개념이 무엇인지 하늘과 대립된 것은 땅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게 과연 이원론적인 것은 아닌데 하늘로 난 문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면 바르트의 책으로는 심심한 거예요. 설교하는 거예요.

기독교인의 삶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그 일상의 영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데서 구별됩니다.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고요. 기도는 자기를 한없이 낮아질때만 가능한 것. 아 그러다보니까 어제 수요일날 샘터교회 하는 그 모임에서 시편공부가 생각이 나네요. 수요일마다 어거스틴의 기도 한 편 읽고 제가 해석하고 15분 정도 하구요. 그 다음에 시편을 앞에서 부터 읽어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7편 했는데요. 처음부터 했으니까요. 고 한 30분하고. 다해서 45분정도 되고요. 찬송가 부르고요. 어저께 공부한 중에 그게 기억이 나네요. 하나님에게, 제가 그렇게 해석을 한 겁니다. 하나님에게 시편기자들이 기도 나온 거 있잖아요.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존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확인하고 설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절대화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그거거든요.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거죠. 이게 되지 않죠.

이게 여러 분, 이게 어려운 게요. 교회 다닌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 이상하게 교만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비유 있잖아요. 예수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거 아시죠. 다 현제 이렇다고 하는것, 우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빈자리 채워달라고 하구요. Again 1907! 아니. 예 예. 그런 기도라든지 또 등등. 우리가 이렇게 잘해서 감사하다고 하든지. 물론 마음속으로 우리가 겸손하게 기도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온 바리새인의 기도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 이상하게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 자체가 업적이 되어 버려요. 나는 열심히 무엇을 좀 했다. 비젼 가졌구요. 꿈을 가졌고 할 수 있고 내가 열심히 헌신해서 인도에 교회를 세웠구요. 우리 교회가 어떻게 다른 교회 도와주었고. 우리에게 쌓입니다. 업적의죠. 말하자면 그런 점에서 이거는 교양으로 해결할 수 없어요. 굉장히 겸손한 거같이 모양을 취하더라도 그 속에는 교만한 게 가득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말하는 거예요.

인간이 그런 점에서 죄인이라고, 특별히 원죄까지 말하잖아요. 기독교가요. 저는 그런 면에서 옳다고 말합니다. 죄의 문제, 죄의 경향성, 이거는 어떤 방식으로 떼어 낼 수가 없어요. 도를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교양강좌 많이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금욕하거나 자학하거나 해서도 결코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상하게 살 수는 있지만 그런데 그게 자기의 의가 되어버립니다. 의가, 여러분. 죄를, 죄가 뭔지 아시죠. 자기에 대한 집중력, 집중, 자기의, 그게 죄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그런데 세리는 나는 아무것도 간구할 게 없다. 입 딱 다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마디 했죠. 키레이 엘레이송! 이죠. 누구의 기도를 들었겠느냐? 예수의 질문이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수없이 읽고 듣고 설교하는데도 다시 바리새인의 기도로 돌아간다고 하니까요.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다니까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열심히 뭔가 하기는 했는데 우리의 영성은 제자리 이예요. 그런데 뭐가 그러냐. 열심히 잘하는 것 보기 좋다. 보기 좋습니다. 열심히 해야지요. 그게 우리 눈에 잘 정확히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고만 이야기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네. 이 기도는 우리의 실존이 완전히 흙처럼 되어-아주 낮은 자리, 흙처럼 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들에게 임해 달라고 하는 그러한 호소죠. 어디에도 기대할 것이 없는 그러한 상태에서만 참된 기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어떤 영적인 세계로 우리가 뛰어 들어가는 거예요. 그럴 때에 기도가 나와야 하죠. 그러면 엄청나네. 영적으로. 그렇게 아주 깊은 경지에 도달해서야만 기도할 수 있느냐? 그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지요 일상적인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일상자체가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거를 여실히 알아야 합니다. 밥을 한 그릇을 놓고 기도할 때도 이것이 내가 노력해서 얻는 마땅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전적인 그분의 배타적 은총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절감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거죠. 밥 한 사발을 놓고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이지만 이거는 우주론적 사건이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일상이 심화되는 것이고 아주 개체, 작은 우리들이지만 우주, 하나님은 우주의 문제이니까요. 전체문제이니까 그쪽까지 우리가 확장되면서 자기 자신의 이해타산에 떨어지지 않고 그걸 완전히 우리가 극복하기 힘들지만, 점점 벗어나면서 성령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의 영역이 확산될 수가 있습니다. 그게 인제 기독교인의 성숙이라고 할 수 있구요. 또 바울이 가르침 처럼 구원을 이루라! 하나의 과정으로서의 구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구요.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것이 아 그러면 아주 열심히 노력해서 무엇을 해야 되는구나. 네. 노력은 노력인데 그게 순전히 우리의 노력이라고 하는 뜻이 아닙니다. 아 거 정확한 표현이 어렵네요. 그것도 우리의 노력이라기보다도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를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거예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죠. 노력마저도. 내가 기를 쓰고 해서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노력 자체가 믿음의 문제니까요. 하나님과의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신앙적 노력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에 들어 가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신뢰문제죠. 그걸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고 우리의 일상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얼마나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신비주의자들, 영성가들, 신학자들, 올바른 그러한 차원에서 신학자들, 그렇게 성실하게 하는 목회자들, 성령과 늘 소통하는 사람들, 그렇게 살거든요. 기도가 인제 그런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네 시간이 인제 거의 되었는데요. 정작 그러나 기도에 대해 해야 될 말들을 많이 못했구요. 헌금과 성만찬 이런 것도 해야 되어야 하는데 시간이 좀 부족하죠. 사실은 한 시간이 아니라 두시간 정도 해야 하는데 인터넷으로 두 시간하기는 서로 피곤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한시간 하는 거고 주일날 저녁에 보충하니까 그걸로 어느 정도 반까이(ばんかい, 만회(挽回))라고 하나요. 보충이 되니까 그걸로 위로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기도의 남발이 많이 있는데 문제들도 있구요. 기도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엄격하게, 엄중한 사실을 알아야 되구요. 기도, 흔하게 잘못하는 기도 하나를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기도는 설교가 아닙니다. 설교하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이 기도를 해서 누구를 깨우치게 하겠다. 장로님들이 그렇게 많이 기도하거든요. 어떻게 하도록 기도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어떻게 하고 그러니까 완전히 설교입니다. 주일학교 학교 선생님들도 그런 것 많이 해요. 심지어는 주일학교 선생님들 주일학교 어린이들 앞에 놓고 기도할때, 여러분들 여기 부장선생들이나 주일학교 교사 있으면 참고 하십시요.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어린이들 앞에서 기도하기를 “우리의 사랑하는 어린 학생들을 예배드리면 떠들지 않게 해주시고” 이거는 기도가 아니죠. 이건 훈계죠. 이런 식의 기도가 일반 어른들 대상으로도 많이 나타나거든요. 고... 기도를 나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적인 기도를 드릴때는 가능한대로, 제가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성문기도, 글로 써서 해야 됩니다.  아 이게. 네 거기까지는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하여튼 너무 자유기도가 많아서 우리는 기도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자기 하소연에 떨어질 수도 있구요. 누굴 책망할 수 있구요. 은근히 기도로 평소에 싫어했던 사람을 치기도 하고 목사님들이 설교시간에 누구를 치듯이 말이죠. 설교 아니 기도를 배우자. 기도문, 좋은 기도문을 읽고 그리고 외우자.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잘 되지 않습니다. 좋은 시를 읽고 외우는 게 제일 좋은 공부예요. 영적으로 성숙했던 그러한 분들의 기도문을 읽고 외우는 작업, 이거 한국 교회에 시급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관상기도 지난번 질문한 분이 있었는데 네 그건 지금하기 힘드네요. 아무래도 다음 주일저녁으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도에서 참고로 신학단상,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2004년 9월 15일에 쓴 것이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기도문제만 하더라도 이것이 사실은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이거든요. 하나님, 관계,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군가 알아야 기도를 바르게 할 수 있구요.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하니까 성령의 문제이구요. 성령의 문제, 그리고 이제 가장 모범적인 기도는 주기도문 아니겠습니까.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뭐냐 하는 것을 알아야 바람직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 문제만 하더라도 요거만 따로 딱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 신학,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것하고 연관되어 있는 거죠. 총체적이 문제인거예요.

네. 한국교회 기도하면 무조건 통성기도 시키구요. 밤새 철야기도 시키고. 손들고 자기 하소연, 자기 세뇌, 자기체면이죠. 세계 보내 달라. 나를 불을 주셔서 세계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예. 그거는 참, 그게 기돌까요? 네. 자기 확신은 가능하겠죠. 때에 따라서는 뭐 그런 것도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아 기도문 말씀하셨군요. 다음 주일날 제가 준비를 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서없는 오늘 강의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경청했는지 안했는지는 제가 보지 못했으니 모르지만 그렇게 하셨을 줄로 믿고 감사드립니다. 좋은 잠자리 잘 드시길 바라구요.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