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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1 | https://youtu.be/QcG7yKvIiF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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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 외르크 칭크, 어떻게 기도를 드릴까요?(2권), Jörk Zink, Wie wir beten können by Jörk Zink, 88쪽 이하 “무덤은 끝이 아니다” 2022.12.14.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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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문, 외르크 칭크, 어떻게 기도를 드릴까요?(2권), Jörk Zink, Wie wir beten können by Jörk Zink, 88쪽 이하 “무덤은 끝이 아니다” 2022.12.14. 정용섭
안녕하세요. 요르크 칭크의 책 기도를 어떻게 드릴까요? 제 2 권 읽기
이어가겠습니다.
88 쪽입니다. 제목이 무덤은 끝이 아니다. 여러분 화면에 있죠. 저는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무덤은 끝이 아니다. 이렇게 돼 있네요. 저도 이 책 보지 말고 화면을 보고 하는 게 편하겠습니다. 제가 이 책에 있는 내용을 앞에서부터 끝까지 빠지지 않고 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쭉 읽다가 내게 좀 마음에 드는 거만 골라서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책이 있는 분들은 다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 무덤은 끝이 아니다. 이게 또 눈에 들어온 이유는 요즘 왜 이렇게 위르겐 몰트만의 책 그 강독을 또 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자 책이
제 손에 있나 손에 안 들어오네요. 내 책상이 지저분해서 여기저기 뭐 책도 널려있고
그래서
딱 손에 안 들어옵니다. 있을 텐데 안 들어오네요. 임 앤대데 안팡 마지막에 마지막에 그 시작이 있다. 제목에서 책 제목이 우리말로는 이렇게 기억이 안나죠. 이상하네 임 앤 네 독일어는 기억이 납니다. 임 앤 대 안팡 책을 강독하고 있어요. 3부에 들어갔는데 재미있습니다. 그거하고 또 요게 지금 읽을려고 하는 이 제목이 좀 맞닿고 있어요. 연결되요. 무덤은 끝이 아니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다. 마지막에 시작이 있다. 연결되는 거잖아요. 이런 게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도 늘 그런 그 좀 걱정일 수 있어요. 걱정 아닌 걱정이 좀 있는데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또 그거는 성령이 도와주셔서 되는 문젠데 근데 그게 절박하기 때문에 그게 또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종종 하는 겁니다. 이게 쉽지가 않은 거예요. 이상해 이게 어떤 소리도 음악도 그렇잖아요. 클래식 음악 저도 뭐 클래식 음악 잘 모르는데 같이 들어도 거기서 어떤 거를 듣는 사람이 있고 아이구 저건 뭐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렇게 하는 사람 있잖아요.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무덤은 끝이 아니다. 아아.. 죽어도 그게 끝이 아니구나 또 우리가 하나님이 뭐 천국에 가서 다시 살지 뭐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분들 있어요. 그건 들은 풍월입니다. 근데 저거를 이해하려면
죽는 게 죽는 게 뭔지도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되고요. 그리고 죽은 다음에 우리가 흠 뭐 천국 간다 뭐 영생을 얻는다 할 때 그게 우리의 삶이 이렇게 이어지는 게 연속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이미 죽음과 죽음 이후와 우리가 연결돼 있다는 것도 알아야 돼요. 아는 것만이 아니라 그걸 느껴야 됩니다. 이건 뭐 어떻게 느끼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은데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이제 그건 해결이 안 됩니다. 예 위르겐 몰트만의 강독 여러분들 관심 있으면 한번 들어보십시오. 무덤은 끝이 아니다. 이거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나사로 이야기에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마리아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 마을 베다니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거예요. 요한복음은 앞에 나오는 공관복음하고 차이가 많습니다. 이 지금 말 너무 자꾸만 중언부언 하지 않겠습니다. 말하다 보면, 그렇게 되거든요. 마 말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하는 걸 자꾸 머물러서 중언부언하게 돼요.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 살았다. 그렇게 요한복음 기자가 전하는데 에 죽었다 사는 게 아닙니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해요. 넌 나사로가 부활한 건 아니잖아요. 부활은 죽음이 없는 생명이니까.
완전히 변화된 생명이니까. 죽지 않습니다. 근데 나사로가 죽지 않았다는 건 아니잖아요.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분명히 그런 부활한 게 아니에요. 그건 저거를 예수님의 부활과 나사로가 거의 죽음에 가까이 갔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거를 똑같은 걸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거 완전히 다른 거예요. 예수의 부활도 또 오해를 많이 하는데 뭐 여기서 다시 또 거기 머물러서 읽지 않겠습니다. 이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죽은 나사로 이야기예요. 이 책에 본문이 이렇게 발췌하는 방식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걸 제가 다시 읽지는 않겠습니다. 그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배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쭉 해서 1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뭐
얘기 우리 잘 알죠 빨리 오지 않아서 예수님 빨리 왔으면 자기 오빠가 살았을 텐데 늦게왔다고 해서 조금 아쉬워하는 것 그 마리아 마르다 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이에요. 아주 요한복음은 가장 늦게 기록된 성경이기도 하고, 또 특별히 관념적으로 예수 사건이 해석된 복음입니다. 즉 역사성이 그러니까 공관복음 보다는 좀 떨어지죠 역사성이 떨어진다고 그래서 믿지 못할 거다가
아니라 그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의 신앙이 거기에 잘 녹아있다는 겁니다. 자 그 이야기예요. 그 본문이 앞에 나옵니다. 그다음 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오늘 제가 낮에
책을 좀 많이 읽었더니, 눈이 조금 피로해서 지금 이게 밤이거든요. 이거 하는 게 화요일 밤 녹화는데요 불빛들도 불빛에 눈도 부시고 눈이 피곤하네요.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고자 하는 자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언제나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요. 부활이다. 그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또는 맥이 빠지는 순간마다 이 말씀을 읊조려야 합니다. 이것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는 말씀입니다. 그중에는 살아내려는 의지를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지금보다 더 많이 잃고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응 더 살다가는 더 잃으니까. 아예 죽는 게 낫지 이런 거죠. 또는 지금의 절망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또는 지금 자신을 옥죄는 이 세상의 강요를 견뎌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마음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미래는 이미 죽었습니다. 미래가 없는 거죠. 그럼 죽고 싶은 거죠. 부활절 새벽 세 여인이 예수님 묻히신 곳으로 가면서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오 사람들은 죽음이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이라고 여겼습니다. 무덤과 그 앞에 가로막힌 큰 돌이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덤이 곧 끝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런 한마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살아났다 그 무덤은 갑자기 모든 것을 향해 개방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 그게 생명이죠. 부활의 생명입니다. 요 맨 끝 부분에 밑에서 둘째줄에 나온 표현 꼭 기억해 두십시오.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 현실성 입니다. 리얼리티예요. 독일어로는 당연히 브리클리카이트라고 돼 있겠죠. 브리클리카이트 영역을 하면 그건 리얼리티입니다.
그 리얼리티하고 브리클리카이트는 개념이 좀 달라요. 근데 뭐 다른 단어가 없으니까. 그냥 리얼리티로 번역을 합니다. 예 현실성 생각하시면 돼요.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성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프고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연봉을 적게 받으면 뭐 기가 죽고 뭐 그런 현실에서 살거든요. 근데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은 그런 것으로
지배받지 않는 영향받지 않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이라는 거 그거 기억하셔야 돼요. 그걸 부활과 생명을 기독교가 얘기하는 부활과 생명 그것은 저런 관점에서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천국도 뭐 동화처럼 묘사가 됐잖아요. 근데 묘사된 사실 자체에 묶여 있으면 안 됩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이라고 하는 거를 그렇게 동화처럼 신화처럼 묘사한 거예요. 저런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붙들 수 있어야 어떤 상황 앞에서도 아이고 내 인생은 끝이야 내 미래는 없어 난 죽는 게 나 이런 데 떨어지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과 부활을 새로운 현실을 알고 있으니까. 다른 것으로 인해서 부서진 오늘의 내 조건들 때문에 우리가 절망하지는 않은 거죠. 미래가 저렇게 새로운 겁니다. 자 인제 그다음에 기도문이 나와요. 영원하신 그리스도여 주님 손 안에서 이 세상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 죽어서 천국 가기 전에 이미 여기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우리 눈앞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연금술사라는 그 책이 생각나네요. 연금술이란 뭐 석탄으로 금을 만드는 비법이 아니라 모든 세상을 금으로 볼 수 있는 눈이다. 그런 메시지가 거기 담겨 있죠. 우리 눈앞에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전혀 다른 새로운 현실을 아는 사람들에겐 그게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구촌 미움의 경연장을 주님의 나라로 만드시고 주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과 가난에서조차도 마치 주님께서 변화산성에서 변화 산상에서 변모하셨듯이 우리는 주님의 피조물이 거룩하게 변하는 것을 봅니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던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서야 비로소 영원한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던 행복도 주님만에서야 비로소 영원한 충만함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끝장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자는 주님입니다. 다음 쪽
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바로 그곳에서도 주님만은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십니다. 예 저런 표현이 그냥 낱말 죽은 문장으로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능력으로 우리들에게 와야 됩니다.
응
전혀 다른 새로운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실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야 이것으로 우리 인생의 끝이야 하는 그런 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정말 가능할까 혹시 여러분 그래 생각하시나요? 주님으로부터 그리스도여 죽음이 지배하는 곳에서도 생명을 얻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난 그곳에서도 생명의 충만함을 일구어 냅니다. 예 우리가 사는 곳은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죽음이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우리를 엄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전혀 안 그렇죠. 뭐 집도 좋고. 옛날에 비해서 비교하는 옛날하고 비교할 수 없이 좋고 먹을 것도 많고 뭐 정말 지금은 거의 천국처럼 삽니다. 자기가 원하는 거 있으면 시장에 가지 않아도 택배로 다 이게 집안에 앉아서 손에 넣을 수고요. 또 뭐 음식도 배달이 얼마나 많습니까? 근데 배달 배달 택배를 비롯하여 음식 배달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에 유독히 이렇게 많은 거는 그만큼 우리가 잘 산다는 얘기겠죠. 여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 시켜서 먹지 않겠습니까? 근데 사는 모습만 본다면 부족할게 하나도 없는데 근데 우리의 영혼은 빈곤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게 죽음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을 저희들이 사는 거죠. 모든 것이 끝장난 그곳에서도 생명의 충만함을 일구어냅니다. 에 저도 목사로서 저런 설교를 뭐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설교를 하는 거 하고 자기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거 하곤 참 차이가 있어요. 실제로 저렇게 살도록 조금 더
가다듬어야죠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생명은 죽음과 투쟁합니다. 우리는 주님 것이기에 죽음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를 통해 생명이 지켜집니다. 하나님의 생명이죠. 그 다른 세상의 것들의 위로를 받지 않아도 늘 마음이 평화로운 삶이 가능한 그런 신앙의 세계입니다. 에 참 요런 거 외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에 우리를 통해 생명이 지켜줍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거예요. 우리 안에 생명이 있으니까. 우리는 주님 것이기에 죽음이 있는 곳에서도 우리는 우리를 통해 생명이 지켜집니다. 죽음의 문화를 한탄만 하지 말고 거기서 생명지향적인 예 그 힘들을 그러한 움직임들을
우리가 찾아내야지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세상은 우리의 무덤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무덤입니다. 자기 자아 속에
갇혀있죠.
우리더러 살라고 나오라고 주님 말씀해 주소서 마지막에 암브로시우스 교부 기도가 여기 나오는군요. 그리스도 안에서 땅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늘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세상이 다시 살았습니다.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이 남았고 성탄절이 남았습니다.
두 주일만 지나면
2022년이 끝나네요.
어떻게 잘
1년을 사셨습니까? 어떻게 살았든지 앞으로 남아있는 두 주간 만이라도 오늘 여기 기도에 나온 것처럼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살아봅시다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