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뭐꼬 13강(0980403)- 줄 잘 서는 법, 우리들 교회, 신약성서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다시 만났군요. 요즘 한국은 여기 다른 나라에 계신 분들이 있어서 한국은 했습니다. 한국은 전형적인 봄날입니다. 공기 알맹이들이 따뜻하게, 덥지는 않구요. 부드럽게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좋은 오늘 봄날 하루를 보내셨는지요. 반갑습니다. 우리는 오늘 신약성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는군요. 사실 오늘 강의를 이렇게 한번 준비를 하면서 이것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강의 내용이 너무 일반적인거라서요. 많은 분들이 다 어느 정도는 정리된 겁니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또 듣게 되면 지루하지요. 네. 그런게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또 누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배운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까 또 그것이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 인제 그런 생각을 하면 선생으로서는 자격이 떨어지는건데요. 뭘 가르쳐야 하겠다는 에너지가 강하게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저에게는 그게 많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지못해서 하는 것 같애요. 그러다가 그러한 내용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재미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줄 잘 서는 법, 교회 단일성 회복
오늘 우리가 해야 될 이야기가 어떤 분들에게는 너무 기초적인 것 일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 시작하면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냐 하면 바로 직전에 다비아에 보니까 영국에 있는 신완식 목사님 글을 하나 올렸더라구요. 읽으니까 기운이 좀 빠져요. 본인은 기운 빠져서 썼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교회 1년반 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이 교회 커요? 그런 소리를 하고요. 한 두번 왔다가 빠져나가고 그런 것 때문에 기운을 잃은 것 같은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여기 안에 있죠? 그거 이미 다 각오하셨을거구요. 다른 것 기대하지 않으셨을겁니다. 그거는 대답이 있는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없이 가는 거기 때문에 어떤 성과는 전혀 생각하지 말아야 될 거예요. 그게 현실적으로는 좀 어려울 겁니다. 이게 교회로서는 건강하지 못하는 문제이지요. 그래서 제가 한번 다른 글에서 비추었습니다만 교회 단일성을 확보해야 하거든요. 자기 혼자 능력껏 교회를 개척하고 능력껏 목회를 해서 그래서 버텨내는 사람은 버텨내고 그렇지 않는 삶도 도태되고 하는 교회풍토는 결국 멀리 가지 못하는 거예요. 교회 개척만이 아니라 기성교회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줄을 잘서야 하거든요. 줄서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 것 뻔하거든요. 제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강의 시간에 강의 안하고 쓸데없는 이야기하면 강의 평가할때 점수 나쁘게 나오는데..

줄 잘서는 방법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신학교 다닐때도 그렇고 아니면 신학교 졸업하고. 아니 신학교 다닐 때부터 큰 교회를 다녀야 합니다. 일단 보니까 그렇습디다. 안면을 많이 터야 합디다. 교권도 있고 목회 영향도 있는 그 목사님이 있는 교회에 가서 잘 보여야 하죠. 능력 있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죠. 신학교때도 그렇게 되고 그 다음에  전도사나 초년병 목사일때 가서 한 파트를 맡잖아요. 그 때 좋은 교회를 가야 합니다. 좋은 교회는, 말이 좀 어폐가 있지만 능력있는 교회, 서울에 잘 나가는 교회 학생회나 청년회를 맡게 되죠. 그걸 일단 부흥시켜야 하죠. 교회안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고 그렇게 좀 능력을 보이게 되면 그 근방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도 주목을 하게 되죠. 그렇게 되면 자기 담임목사도 데리고 있던 부목사를 키워줄려고 합니다. 그게 인제 좋은 뜻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자기의 정치력을 발휘하려면 자기를 따라주는 젊은 목사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야 되는거거든요. 그래서 자기 사람을 심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능력도 있고 젊은 목사가 학생회, 청년회 부흥시키는 거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전도자 부목사 있을 때 큰 교회 좀 있었거든요. 잘 했습니다. 학생들, 청년들 지도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교회 프로그램 끌어들이구요. 학생들에게는 진심으로 잘 해주고요. 그렇게 되면 아주 특별한 경우 아니면 교회는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청년들도 인제 자기가 쏟아 붓는 만큼 성과가 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렇게 성과를 보이면 능력이 인정되구요. 담임목사가 키워주려고 하구요. 서로 인간관계를 잘 맺고 하게 되면 그리고 어느 교회가 비게 되면 그쪽으로 가게 될 수 있구요. 어느 큰 교회에서 정치쪽으로 어느 좋은 교회를 개척한다 교회당도 짓고 파송할때 부목사를 보내게되면 땅짚고 헤엄치기거든요.

그런 목사들 많잖아요. 당신은 그렇게 하지 왜 못하고 대구 내려가서 빌빌대고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군요.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이 그게 그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요. 그런 것 제가 생각을 잘 안 하거거든요. 미안합니다. 제가 굉장히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이야기하는 것 같네요. 사실 목사가 어디 있든지 똑 같습니다. 존재론적으로는 목회는 크게 하나 작게 하나 마찬가지인데 하여튼 제가 현실적으로 말하니까 그렇습니다. 신완식 목사님이 힘든다고 하니까 다 연관되는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제가 내려오게 된거니 집사람이 터줏대감이니까 그렇구요. 접어두고요.

주변에서 보면 동기들도 그렇고 선배들도 그렇게 이렇게 선이 보여요 어떻게 해서 괜찮은 교회 갈 수 있고 또 목회도 그런대로 할 수 있느냐 그렇죠. 모두가 다 머리로 계산해서 되느냐 그런 것 아닙니다. 시골에 가 있어도 성실하게 함으로 인정을 받고 도시교회로 스카웃되고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게 드뭅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밑바탕은 되어야 되요. 처음 부터 시골에 가서 뼈를 묻는다는 심정으로해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냥 거기서 그렇게 살 생각을 해야 되는거죠.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가 움직이면 참 미래가 없는거죠. 교회 단일성을 회복해야 되는거거든요. 그게 한국교회 미래인데 제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어도 전혀 현실성은 없습니다. 뭐냐 하면 가톨릭교회처럼 최소한도 교구별로, 그 안에 있는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거죠. 보편성이기도 합니다. 그 전체가 하나의 교회이니까요. 그거를 큰 덩치, 교구, 노회, 지방회 이런 것들을 그냥 교회로 생각하고 그냥 한 뭉치로 가는거죠. 한 덩어리로요. 그렇게 되면 교회 개척을 어디해야 하고 안해야 되는 것도 개교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차원에서 다 할 수 있는거구요. 목사들의 먹고 사는 문제라든지 큰 교회 작은 교회 사례비 같은 문제에서 큰 틀에서 결정할 수 있거든요. 이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말 잘 되어 잇습니다. 그건 정말 본받아야 되요. 그 길로 개신교가 갈 수 있을까요? 또 똑 같이 못한다 하더라도 방향은 잡아야 하는데 너무 거리가 멉니다. 물론 장로교 통합측 이런데서 최저 생계비 이런 것를 좀 지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뭐냐 하는 거죠.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 하나 정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부라고 하는 것은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선생이 해야 하는 일이 뭐냐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쪽으로 가봐라 저쪽에 가면 생각할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이라든지 저쪽에 가봐라 하여튼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죠. 학생들이 그러니까 네 지금 말한 그대로 어떤 생각해야 될 방향, 기독교가 뭐꼬라고 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어떤 부분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죠. 일종의 화두를 제시하는것과 같습니다.

신약성서, 구원의 보편성, 이렇게 이야기 했는데. 여러분 이거는 읽어보면 이것 뭐 다 뻔한 이야기라서 제가 굳이 일일이 강의할 필요가 없어요. '신학교 1학년학생 이라고 한다면 고등 대학부라면 해야 하겠지만 사실 크게 아까운 시간을 여기에 투자하기란 그렇다'  강의 들어오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교회 본질이 뭐냐 기독교가 뭐냐 신약 성서가 뭐냐 하는 것이 다 연관되는 문제거든요. 한국교회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뭐냐 어떻게 그냥 알겠어요. 모르잖아요. 한국 교회 교인들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은 그 교회 한 교회에 독점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 평생 다니죠. 일반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그 교회 쫒아내도 나가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 비극이예요. 평생동안 그 교회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구요. 매번마다 기분에 따라 이교회 저 교회로 따라 옮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 교회는 자기 교회가 없거든요.

교회가 뭐냐 하는 신학적인 오리엔테이션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냥 종교적인 친목단체예요.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대학교를 나왔느냐 한국에서는 중요하지 유럽에서는 대학교 어디 나왔느냐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습니다만 영국은 달라요. 독일같은데는 입학식도 없고 졸업식도 없고. 박사학위 받아도 졸업식 거창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무실에 가서 모자도 없고 박사가운도 없고요. 증서 하나 주고 받고 그런 정도예요. 거기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지만 동창회 아마 없을겁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독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대단히 중요하거든요. 초등학교 반창회도 하구요. 국회의원 선거 하는데 그거 내걸거든요. 그리고 제가 하양에 있으니까 그런 모임들 자주 봅니다. 띠 동갑, 같은 띠 같은 가진 사람들 친목모임. 돼지띠 한 달에 한 번씩 모이구요. 교회도 그러한, 정서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상당히 강합니다. 우리는 하양 제일교회다. 이런 것 말입니다. 교회가 뭐냐 이해가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이죠. 마음이 허전하니까 그렇게라도 마음을 붙이고 산다 그건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교회 미래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드리는거예요.

‘우리들 교회’, 한국교회의 미래
기왕 말씀 나온 김에 진량에 있는 어느 교회 말씀드려야 되겠네요. 이거 다음 주일 저녁에 질문 응답시간하려고 했다가 그때는 안 들어 온 분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오늘 말이 나온김에 당겨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샘터교회겸 대구 아카데미로 사용하고 있는 이 단지를 봉황, 상주 아파트 지역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커요. 시골인데 이렇게 많은 아파트가 모여있는 곳이 드물어요. 하도 많이 모여 있으니까 초등학교가 건설 중에 있습니다. 거의 완공단계에 들어가고 있고 한 두세달 후면 학생들을 이쪽으로 떼어 올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제가 한번 그것을 사진으로 올리려고 합니다. 아주 예쁜 초등학교가 들어섰어요. 상주 봉황 단지에 들어오려면 언덕 초입에 몰랐었는데 교회당이 하나 지어 지더라고요. 그걸 한 몇 주 전에 발견했습니다. 그전에는 몰랐어요. 첨탑이 있고 아주 예쁘게 짓습니다. 아담하게 크지도 않고, 위치도 좋고, 숲은 아니지만 나무도 좀 있구요. 아파트는 언덕위에 있고 언덕 밑으로, 언덕이 이렇게 봉황아파트로 들어가고 계속 아파트가 있고요. 저희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언덕이고 큰 길이 있습니다. 하양에서 올 때는 차를 타고 이렇게 들어오구요. 고속버스 톨게이트타고 들어와요. 8차선인가 그렇게 됩니다. 4차선부터 오게 되는데. 언덕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교회당이 여기에 예쁘게 지어졌어요. 첨탑이 있구요. 마음에 드는 교회당입니다.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첨탑에다가 교회이름을 붙였더라구요. 첨탑 이렇게 이렇게 쌓여져 있어서 십자가가 달려 있어요. 첨탑에다가 이름을 세로로 썼습니다. 뭐냐하면요. 교회이름이. ‘우리들 교회’ 이건 가로로 썼는데 세로로 썼어요. 진량 읍내에 있다가 이쪽으로 옮긴 것 같아요. 처음이야 진량 통합측 교회 인것 같았는데 옮기면서 우리들 교회로 바뀌었네요. 요 앞에 식당이 있습니다. 자주 가는데인데요. 설렁탕 잘하거든요. 그 사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잘 몰랐다가 고 건너편에 교회당 지으면서 나보고 거기에 관련된 분이냐 묻다가 이야기를 하다가 알았습니다. 아. 아 교회 이름을 '우리들 교회'라고 지었을까? 신기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마가교회, 누가교회, 삼위일체교회 이런 교회 이름은 있는데 '우리들 교회' 같은 교회 이름은 온 세계에 한국밖에 없을걸요. 어떻게 이름을 이렇게 지을까요. 이런 거 말고도 우리나라에 이상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도 사실은 제가 보기에 교회이름으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지역 이름을 따는 것은 괜찮아요. 상주교회, 봉황교회, 진량교회. 형용사,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들 교회라고 처음 봤습니다. 물론 좋은 뜻으로 봐서 이 교회가 어떤 사람 개개인이 아니라 이 지역민들 전체의 교회다, 우리들 교회다, 그런 뜻을 담고 있으리라고 봅니다만 그러나 그런 형식적인 의미보다도 자기들 소유의 대상으로서 교회쪽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비평을 하다 보니 이런 것마저도 비판적으로 보네요. 죄송합니다. 교회가 뭐냐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 이름을 생각했기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우리들 교회다. 언제 우리는 이런 데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죠. 성령의 집이예요. 성령의 집, 그리스도의 몸, 그런데 우리들 교회다.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이게 실제적으로 많은 목사들이 그 장로님들이 중심되는 신자들이 그 교회는 우리교회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 슬픈 마음이 언짢은 사건이라서 그렇고요.

이런 것들이 모두가 다 신학적인, 신학이라고 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거창한 신학적 논리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신학은 우리의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영성의 문제인거예요.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지 우리 머리로 어떤 것을 하나님을 밝혀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자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예요. 가짜 신학자라고 하면들은 풍월만 읊겠지요. 그러나 어거스틴, 오르게네스, 루터 칼빈, 바르트, 몰트만도 마찬가지요. 융엘이라든지 오토라든지 이런 분들을 영성가라고 생각합니다. 틀림없이 영에 대한 경험에 근거해서 자기들의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학적 토대가 우리들에게 너무 부실하고, 신학이 거의 무용론으로 떨어져 있고, 신학 폐기론에 까지 이르는, 정서적으로 한국 교회 안에 그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미래를 향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토대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요. 조금 비관적입니다. 한국 교회에 대해서. 그래서 어떤 때는 '야 이것 목사로서 살아야 되느냐 마느냐' 생각을 할 때도 많이 있거든요. 우리교회 신자도 몇몇 있는데 내 이야기 심각하게 듣지 말아요. 정목사가 샘터교회 그만두려나. 그거 아닙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거예요. 한국에서 목사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의미있는 일이 못될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미래가, 우리의 영혼 인생 전체를 던질만한 공동체냐 아니냐 기독교 전체가 말이죠. 개신교가 말입니다. 그런데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게 참 불안한 거거든요. 현재 한국 교회 비전이 별로 없습니다. 국회의원 선거하는데 뭐 기독사랑실천당이라고 나왔나요. 이름을 직간접적으로 걸었던 사람들, 빠졌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정서들이 많이 있구 말이죠. 아... 그만 둡시다. 오늘 제가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나요.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
오늘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거도  우리가 신학공부니까 오늘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읽어 보시면 쉬우니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와의 차이점이 뭘까요? 그거를 저는 그것을 구원의 보편성이라고 이야기했는데요. 차이를 한 두가지 더 이야기하면 구약 신약, 구약은 주로 의로움에 대해서. 의로움,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을 의의 차원에서 많이 다뤄보았다고 한다면 신약은 사랑이라고 할까요? 혹은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늘 이것이 대립되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걸 전체 틀을 보고서 틀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고요. 그러나 의마저도 은총일 수 있구요. 사랑이 의로움으로 나타날 수 있는거니까 완전히 대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볼 때 이런 차이를 볼 수 있구요. 그리고 구약성서는 민족주의, 일종의 민족주의, 유대인의 민족, 하나의 민족, 신약성서는 세계 전체죠. 전 세계.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의 특수성에 집중한다면 신약성서는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구요.

여기는 구원이 주로, 구약은, 정치 경제적인 차원이 강하다면 신약은 정치 경제를 뛰어 넘는 무어라고 해야 될까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메시아니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유대인들이 말하는 메시아는 정치 경제적인 해방을 가져다준다면 기독교가 애기하는 그리스도는 경제정치적인 것은 하나의 결과이구요.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뭐라고 해야 될까요. 그리스도의 구원은 아 제가 이게 말이 궁하지요. 생각이 지금 잘 안나네요. 누가 도움을 주실 분 있으면 이야기 해보세요. 정치 경제와 유대인들의 메시아론이 그렇다면 기독교의 독특한 그리스도 이해는 그냥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인데요. 이거는 부활 생명, 정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정치경제는 이게 더 큰 거죠. 정치경제는 부활생명의 하부구조이예요. 여기서 그런 것들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진보주의자들은 자꾸만 정치경제 쪽으로만 나간단 말입니다. ‘전인구원. 좋습니다.’(게시판) 저도 진보적인 쪽에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 그 진보를 정치경제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그거는 인제 정치경제 문제는 일종의 복지차원, 복지향상 아니겠어요? 정치적인 면에서나 경제적인 면에서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차원으로 올라가자. 휴머니즘인거죠. 예. 이런 것들은 제가 보기에는 늘 상대적입니다. 이런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구요. 기독교 공동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복지 휴머니즘을 더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 인거죠. 이게 과연 뭔가 이야기를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만 복지와 휴머니즘을 우리가 아무리 발전시킨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우리의 삶이 참된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지요. 이건 제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어거스틴이 한 말이 옳습니다. 당신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든 참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런 기도를 했거든요.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니까 우리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이야기 했죠. 은총인 거예요. 복지와 휴머니즘은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가야 될 괜찮은 나라이구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주시는 거죠. 아 그거 말장난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것 아니냐?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잘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요. 그런 노력을 하면서도 노력자체를 끊임없이 상대화하는 것이죠. 결정적인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해서 무엇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하고 최소한 이것을 상대화하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에 우리의 영적인 초점을 놓는 거죠. 결국 그래서 저는 기독교 신앙은 기다림으로 생각합니다. 재림신앙이죠. 기본적으로는. 이거를 생명과 온전한 구원 이런 것들은, 제가 보기에는, 제가 보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신학이 설명하고 있는 그 방향에서 본다면 우리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나갔는데요. 고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 비판적 성찰이라는 글을 썼으니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성서는 주로 의로움, 유대민족, 그들이 살았던 삶의 특수성들, 그리고 정치 경제적인 해방, 시오니즘,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그러한 세계지배, 이것도 일종의 제국주의군요. 말하다보니까요. 유대적인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라고 하는 것이 모두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자기에게 두는 것 아니겠어요. 미국이 하는 일들이 다 그런 것처럼요. 그것을 선전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교묘하기도 하구요. 힘으로 하기도 하구요. 자기의 가치관을 온 세계에 확산하려고 하는 것, 그걸 제국주의라고 한다면 유대 민족들도 사실은 그 바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예요. 스스로 뭘 이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초대기독교는 그것을 기다리는 거예요. 심지어는 자기들이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신다. 재림하신다 그것까지 믿었잖아요. 임박한 종말론, 종말론도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실현된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하는 것처럼요. 신학자들이 그렇게 만들어 붙이는 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종말의 성격을 그러한 방식으로 해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성찰이 없으면 기독교 신학은 죽는 거예요. 그 참. 한국 교회 뭐야. 다비야 에서도 작은자라고 하는 닉네임 가진 친구가 그러한 글들을 썼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거든요. 자기의 작은 신앙적 정서에 기대갖고 그게 다인 것처럼 생각을 하는데 그래요. 보기가 조금 그런데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좋긴 하지요. 어쨌든 그러한 친구들의 정서가 한국 교회에 많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방식이라고 하면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냥 있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서 자기의 신앙적 정서에 의존하는 거죠. 믿는다고 하는 사실 말이죠.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정서, 심리가 아닙니다. 제가 젊은 목사들에게 상담목회할 생각을 하지마라. 교육목회 할 생각을 하려고 하지마라. 그건 다 정신과학, 심리과학이다. 기독교는 심리 정신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다.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말라. 상담하는 것 즉 마음을 읽는다는 것 아니겠어요. psychology죠. 대중 설교자들의 능력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대중들의 심리를 읽는 겁니다. 필요한 것 딱딱 제공해줍니다. 그게 설득력을 얻는 거거든요. 설득력이기도 하구 대중들이 속는 거거든요. 조금만 정신 차리고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 사람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자기 기분에 드는 것이 옳다고 믿고 싶습니다.

지역 감정이라는 것 아시죠. 지금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그러한 청중심리를 이용해야 해야 되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목사는 그러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 하느냐는 데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 보고자 하는 시민단체, 시민운동, 진보적인 운동들 하고 싶으면 하는거예요. 지식 지성인으로서 역사안에서 책임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죠. 그건 저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기독교의 구원론으로, 기독교의 구원론이 그런 것으로 대체되면 참 곤란하죠. 대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이것 참 안타깝기도 하구요. 제가 생태운동을 위해서, 시민운동하는 것 같이 참여하고 있구요.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나님 말씀과 교회 공동체는 다른 차원 어떤 것에 집중을 해야 되는 것이죠. 이 말이 잘 전달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신약의 형성, 원시공동체의 산물
신약성경은 그러한 유대의 구약성서와 차이가 있는데요. 그러면 전혀 다른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제가 그 차이만 말씀드린 거예요. 신약성서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구약성서를 이야기할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처음부터 그것이 결정된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구약도 그렇고 구전이라고 하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입으로 전달된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 사신 것에 대해서 그 제자들이 우리 주님은 메시아시니까 잘 적어가지고 어떻게 해야지. 후대사람들도 이거보고 예수 잘 믿게 해야지. 그런 생각 없었습니다. 조금 더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같이 공생애를 산거예요. 잘 모르고. 그러다 실망해서 떠나기도 하고 남기도 하구. 그렇게 처음부터 토대가 탄탄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역사는.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은 다음입니다. 십자가 처형당하시고 부활현현이 일어 났구요. 아주 특별한 사건으로요. 그리고 승천이라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같이 맞물리게 되었구요. 죽음, 부활과 승천, 부활과 승천은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궁극적 생명에 들어갔다는 그러한 일이기 때문에요. 그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현상적으로 나타났는데 부활 현현이라고 하지요. 부활체로서 현현했다. 만질수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그러한 현상, 그게 뭘까요. 저도 그게 알고 싶어요. 여러분들도 그렇죠. 그런데 그게 뭘까요? 그거는 물론 우리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개념적으로 설명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런 여러가지 관계에 대해서 등등 여러가지 관점에서 그런 것들을 자꾸만 해명해 나가는 것이 신학이거든요. 성서는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진리를 직면한 사람들의 당혹스러움이 복음서에 그대로 묻어나요. 그러니까 신약성서는요. 구약도 그렇다고 보지만. 신약성서는 어떠한 사실을 아주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학문적 문서가 아닙니다. 어떤 구원 현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시적인 고백, 표현이고 그렇습니다. 예수 부활이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어떠한 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 어떤 것으로도 해명할 수 없는 거 였습니다. 그냥 죽었다 산거 아닌 것 아시죠. 사실 생물학적으로 이런 몸으로 사신 것 아닌 것 아시잖아요.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사건이고 말이죠. 신앙의 눈으로,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나타난 부활현현,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보통 말해서 귀신본다 하는것보다 더한거죠. 귀신은 그냥 두렵기만 하죠. 예수님의 부활 현현은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과는 다른 어떤 생명의 궁극적 현실과의 만남이거든요. 말이 좀 그렇습니다. 생명의 궁극적 현실과의 만남이거든요. 생명의 궁극적 현실, Ultimate reality of life 제가 잘못하는 영어로 뜯어 맞추면 그렇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이게 문학적인 용어니까 개념들이잖아요. 이걸 일반 신자들은 아 골치 아프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목사들도 사실은 모르고 그것을 해명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어떤 reality, ultimate reality 이게 어떤 세계를 담고 있다고 하는 거는 알아야 되잖아요. 그리고 생명의 궁극적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게 얼마나 신비롭고 놀랍고 중층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 그 두려움과 당혹감속에 일단 들어가 봐야 되는 거잖아요.

그게 없어 제가 설교 듣기가 지루한 거예요. 독일어로 지루하다는 것, 랑바일리쉬. 그렇습니다. 랑바일리쉬. 다 예수 믿고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 맨날 뭐 하자는 이야기. 왜 사람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하는지 미칠 지경입니다. 사람. 그거는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거예요. 왜 예수 믿으니까 이렇게 되었고 저렇게 되었다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요. 조금 세상 살이를 알고 철이 난 사람은 교회 붙어 있지 못합니다. 나 같아도 뛰쳐 나갈 것 같아요. 사실 그게 아닌거 거든요.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생물학 물리학 세상 역사학, 이런 것들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그러한 생명의 궁극적 현실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이예요. 호소예요. 자기들이 그거를 논리적으로 해석하지 못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것을 자기들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걸 두서없이 이야기 한 겁니다. 놀라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 거죠. 네. 그거를 우리가 다는 모르더라도 좀 알려고 노력하고. 그걸 그렇군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제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알고 싶어 하는 것, 그것이 영성인거예요. 성령은 진리의 영이거든요. 진리를 알게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성령에 감동받는 것이 영성이지 않습니까? 성령과의 소통과 교제가운데 일어나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 이걸 영성이라고 하는데요. 예수의 부활, 예수의 재림 종말, 칭의, 천지의 창조 이런 모든 것들 정말 하나님의 통치를, 바실레이야, 그걸 정말 알고 싶어 사는 그러한 영적인 상태, 그건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것이 거꾸로 되었어요. 그걸 알고 싶어 하지 않아. 그거 대신 뭘 알고 싶어 하나요? 믿는다고 하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예요. 정말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 없습니다. 신자들이요. 이게 들어가 보면. 까놓고 보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 하나님은 그대로 있으면 되어요. 안방 늙은이처럼. 그렇게 놓고 우리들이 재미있으면 되요. 종교 놀이를 하는거예요. 종교 게임을 하는거예요. 그걸 모르시겠어요. 그걸 잘하면 교회가 재미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냐. 그건 신학이 없는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행위는 신학이 하는 거거든요. 신학은 하나님을 죽이고 뭐 딱딱하게 하고 이론적으로 만들고 정말 믿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건 정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요. 그런 말을 붙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교회 안에서 평생 살았지만 여태까지 들은 설교들, 교회 가르침에서 생명의 깊이를 열어주는 거를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설교 비평에서 몇몇 괜찮은 분들 했죠. 추천하면서 했죠. 그런 분들이 최선이었어요. 판넨베르크 설교를 통해서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로 하여금 어떤 데로 가도록 만들어요. 그 분의 설교가. <믿음의 기쁨>(Freude des Glaubens, 2001)이라는 설교집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이거 뭐 나혼자만 좋다고 혼자서 신나서 떠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부활 승천 생명의 깊이에 들어간 그 분, 그분이 제자들에게 현현하셨습니다. 나타나셨어요. 그 걸 경험한 사람들이 그 부활의 빛에 의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눈이 밝아져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조금씩 알게 된 거죠. 아주 천천히 천천히 기독교의 정체성이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순식간에 조직이 되어서 뭔가 된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예수님 그 전날 잡히시고 안식일 다음날 부활경험하고 갑자기 오순절 경험과 그렇게 된 것 아니예요. 사도행전에 그렇게 비슷하게 연대기 나오고 있습니다만 推定(추정)입니다. 어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그게 다 기억이기 때문에 사실로 남아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口傳(구전)이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시기가 상당히 길다는 것입니다. 구전이라고 하는 것은 다 記憶(기억)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도 예수님 곁에서 사무관으로 기록해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이 뭔지 안시죠. 모든게 일일이 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은 필요한 것만 기억나는 겁니다. 여러분과 저와 몇가지 관계, 지나간 것 기억하면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특별한 부분만 나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에 보면 이야기가 틀리죠. 틀릴 수 밖에 없는거예요. 그거는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 모양이 다를 수 있구요. 더군다나 그것만이 아니라 전승, 문서화되면서 조금 편집이 되구요. 최종편집자, 그걸 성서기자라고 하는데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취사선택이 되었구요. 그때는 신학적 바탕을 갖고 필요한 것들을 넣기도 하구 빼기도 하구 그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핵심이구요. 신약성서의 형성은 결정적으로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신앙에 의해서, 그들의 기억에 의해서,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요. 사도들에게 원하지 않았구요. 어쩌면 예수님은 성서가 쓰여 지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원시기독교 공동체 필요에 따라서 역사적 산물이라는 거예요. 요 표현도 중요하구요. 네 아주 구체적인 역사죠. 네. 삶의 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점을 짚었고요. 음... 기억이었구요. 전체적인 흐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전승된 것들이, 구전되고 전승되고 편집되고 그렇게 된, 많은 초기 기독교에 의한 역사적 문서들이 생성된 것 입니다. 제가 책을 쓰고 어떤 사람들이 책을 쓰듯이 그런 글들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해서 많이 만들어졌어요. 많은 분량의 복음서와 서신들이 쓰여 지면서 그게 서로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되었고 읽혀지면서 막 혼란이 생겼습니다.

학자들이 그걸 좀 정리한 거죠. 여기 표시한 사람들이 다 학자들이죠. 마르키온, 구약을 빼자고 주장했던 사람인데 이 사람은 140년경에 10편의 바울 서신과 바울편지와 누가복음만으로 인스트루멘툼(Instrumentum)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종의 정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영향을 미치던 교회에서는 이 성경을 쓴거죠. 바울편지와 누가복음, 복음서 중에서 누가복음, 나중에 복음서 이야기할때 나오겠습다만 네가지 복음을 썼을까? 이상하지요. 어쨌든 마르키온은 누가복음만 했습니다. 신기하죠? 왜 그랬을까요? 타키아노스는 160년경에 네 복음서의 차이점을 조화시킨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었는데 이게 나중에 시리아역으로 번역되어서 그 지역의 표준 정경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무라토리 단편(the Muratorian Fragment), 무라토리가 뭐하던 사람이죠.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많은 것을 잊어 버렸습니다. 남아 있던 것들이요. 하여튼 이 사람이 단편이라고 알려진 정경 목록이 있는데요. 네 복음서 사도행전 사도서신 13편을 포함해서 22편의 성서와 그리고 거기 제외된 지금 있는 정경에는 없는 베드로 계시록, 헤르마스 목회 서신등이 들어있습니다. 2세기 중엽 페스트라고 불리는 신약성서가 있는데 거기는 요런 것들을 제외한 오늘의 신약성서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20세게 후반 가장 후반 라틴어 성서역인 베트스라티나라고 하는 무라토리 단편과 거의 일치하는 그러한 것들을 경전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역마다 서로 성경이 달랐던 거죠. 이상합니까? 이상할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 당시 그랬어요.

그래서 전체 세계교회가 이런 방식으로 나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337년 카르타고, 유명한 회의,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선교사신, 이때는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때입니다. 313년에 밀랑칙령이 일어났지요. 3백8십몇년인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그랬어요. 이때는 강력한 로마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만약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처럼 단일한 성경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카르타고 종교회의가 로마국교가 된 여파로 가능한 이야기거든요. 이때 27권의 신약문서가 최종적으로 되었습니다. 27권이 되었는데요. 이거를 결정하는 기준은 두가지 였습니다. 내부적인 기준으로는 그 문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구요.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기존으로 그 저자가 사도적 권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거였습니다. 이 기준에 들어온 것만 27권 신약성서 경전으로 묶어졌습니다. 물론 복음서를 보면 마가와 누가는 사도가 아니었죠. 마태 요한과 달리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사도적 권위를 가진 속사도였기에 문제가 없었구요. 그러나 개중에는 좀 문제가 있기는 있었는데요.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때 그렇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 역사에 거론되는 아주 중요한 문서들이 정경에 포함되지 않기도 했다고 합니다. 바울행전, 헤르마스의 목자, 베드로 계시록, 바나바 편지, 디다케, 베드로 복음, 도마복음, 맛디아 어록, 안드레 행전, 클레멘스 서신, 이그나티우스 서신 폴리크로포스 서신들, 이러한 것들이 그 당시의 중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을 볼 때 오늘 우리가 어느 정도 영적인 가치가 있는 외경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은 딱 27권에 배타적 권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한데요. 이 좀 어려운 문제죠. 397년의 결정(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은 그 당시로서는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걸 너무 27권, 이거를 너무 뭐라고 해야 될까요?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조심스런 이야기라서 제가 끊어서 이야기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마틴 루터 같은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종교 개혁자들의 말을 빌자면 성서 복음서안에도 권위에 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로마 가톨릭교회에는 외경중에서도 괜찮은 것들을 신앙생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네. 어쨌든 27권을 그냥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구요. 다만 우리가 읽을 때 너무 패쇄적이거나 문자적인 자세는 벗어나야 하구요. 또 하나님의 영이 성경, 경전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하나님의 영은 그걸 더 뛰어 넘으시니까요. 폭넓은 진리론적인 자세로 신약성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읽기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성서읽기, 이건 조금더 신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역사비평이죠. 역사 비평적 성서읽기.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안 되고 있죠. 교회 안에서는. 신화적 성서읽기로 되어있죠. 성서안에 신화들을 그대로 따라가는.

어제도 기독교 tv에 보니까 장경동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시던데요. 진화론과 창조론 그런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분 왜 그런 것 말씀 하시나 몰라. 그런 것 하시지 말고 그냥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 하시더라도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기 때문에 신자들을 끌어갈 수 있을텐데 알지도 못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해서 말이죠. 기독교 설교가 보편적 토대를 잃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봤냐? 예를 들면 그런 식으로 청중들에게 질문하거든요. 진화론이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 근본적인 것, 사실을 오도하면서 성서를 말하려고 하면 참 말리기 힘듭니다.

신화적 성서읽기, 그런 것이 어필하는 이유는요. 신자들은 사실은, 제가 아까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없다고 말했는데, 성서에 대해서도 사실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뭘 알고 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이예요. 신앙이 자꾸 자기연민에 빠지는데요. 자기 연민을 자극하는 목사들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거든요. 그게 좋다면 할 수 없지요. 그게 옆에서 말려도 안 되는 것이거든요. 하여튼 저는 그렇습니다. 성서를 역사비평적으로 읽자. 이거는 성서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체 세계속으로 들어가는거다. 하나님의 실체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그럴 때만이 우리가 자기 중심을 벗어나서 영 중심으로, 명실상부한 성령론적인, 저는 그게 정말 성령론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진리론적인 것이 성령론적인거구요. 그런 생명의 신비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애기죠.

오늘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아서 본문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는데요. 그러나 이 본문은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간단한 것이니까 그냥 혼자서 읽으십시오. 제가 다음 강의는 신약성서 여기를 복음서 이거도 했다고 보구요. 그래도 한마디는 하겠습니다. 그때요. 주로 사도행전도 한마디를 하겠고, 주로 아 바울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신약성서중 가장 많은 분량을 쓴 바울과 기독교 제가 관심있는 분야이기 때문에요. 갈라디아서 3달 공부하면서 그 차이를 많이 공부했습니다. 바울이 기독교가 형성되는데 끼친 영향, 아. 그들과 대립되어 있었던 예수님의 사도들, 그 관계가 어떠냐 이게 신약성서를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요부분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책을 쓸 때는 갈라디아 공부를 충분하게 공부하지 못한 상태,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반적인 것만 썼습니다. 요걸 조금 수정하면서 이 부분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 목요일이 되겠군요. 복음서가 하나만 되지 왜 네개를 썼느냐? 사도행전은 역사서가 아니라 해석이다. 그 부분을 한마디씩하고 주로 바울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시간 있으신 분들은 주일 저녁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