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511) 성령강림-to be or not to be

오늘이 11일이군요. 저희 샘터교회에서는 오늘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사진도 여러장 찍었는데 나중에 골라서 다비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좋은 소풍이었구요. 날씨가 약간 바람이 불곤 해서 어린아이들한테는 힘들기는 했는데 좋았습니다.

오늘이 한국 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지키죠. 공교롭게도 어버이 주일이면서 성령강림주일이 겹쳤습니다. 매번 5월 될 때마다 설교 문제에 대해서 곤혹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왜 가정 문제를 설교 주제로 삼을까 하는거죠. 어린이 주일되면 어린이 어떻게 해라 그런 이야기하구요. 또 어버이 주일에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이야기. 또 부부들 사랑하라 이야기 말이죠.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런 것도 객관적인 기존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삶의 방식으로 그렇게 끌어 가야될 문제들인데 그런 것들을 설교의 주제로 삼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기본적인 소양이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다 검토된 부분들이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것들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뻔한 이야기들을  말하게 되면 주일 공동예배는 케리그마에 집중을 해야되는데 그런 점에서 아쉽습니다. 설교가 말하자면 나이브해진다 그러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의 존재 실존에 연관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 무늬만 바꿔서 생각해도 될 문제들 그것이 바로 나이브한거거든요. 오늘의 현대 취향 자체가 가벼움이기 때문에 그런 설교들 일종의 포퓰리즘이죠. 대중 취향적인, 어떤 패러다임을 바꾸는 방식이 아니고요. 그냥 모양만 조금 바꾸는 그러한 복음이 또 어필들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문제들에 대해서 제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요.

오늘이 어버이주일이면서 동시에 성령 강림절이었습니다. 저도 어버이 주일이어서 그 내용을 한마디 할까 하다가 그냥 성령강림에 대한 이야기만 했습니다. 이게 사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거구요. 뭐 중요하지 않는게 뭐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더 뿌리가 되는 게 있고 뿌리에서 조금 올라오는게 있다는 그러한 차원에서 보면 이건 그 뿌리에 속하는 거거든요. 설교에서 한마디 집었습니다만 성령이 누구냐? 성령의 현실성에 대한 문제요. 제가 현실성이란 말은 설교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만 바로 그걸 말하려고 하기는 했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애기니까. 프뉴마 혹은 holy Spirit 독일어로 하일리게 가이스트하면 되겠습니다. 거룩한 영의 현실성 말이죠. 이게 우리가 초기 기독교의 원초적 신앙과 일치할 수 있는 디딤돌이거든요.

오늘 저는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사실은 주일 저녁에는 여러분이 주신 질문을 대답하는 걸로 했는데 지난번에도 한두번 말씀드렸듯이 질문이 원활하게 나오지 않아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 나가야 되는지는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들이 많이 있을텐데 언제 어느 타입을 맞추어서 해야하느냐하는 것이 잡히지 않기 때문에 질문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 그럴 거라 생각을 하구요.

오늘은 어쨌든 성령의 문제를 애기를 하려고하는데요. 어떻게 질문을 시작해야 할까요? 성령이 무엇이인지 아십니까? 혹은 경험하셨습니까? 그러면 경험하셨다고 한다면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성령은 보이지 않잖아요. 들은 풍월은 있죠. 아마 가장 일반적인 성령경험이라고 한다면 기도하는 중에 뜨거운 체험, 방언이라든지 또는 아픈 사람에게 안수했더니 병이 나았다거나 신유의 은사 은사 중심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도 성령 경험의 한 부분들이기는 하겠죠. 오늘 제가 뭐를 어디서 얼마를 이야기해야할찌 감을 잡기 쉽지 않습니다. 먼저 이 성령의 문제가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려 드리기 위해 책을 한두권 소개할까 합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이 제가 다른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딱 결정되어서 그것만 외우면 되는 정도가 아니라 2천년 기독교 역사 만큼의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만큼이나 그러한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에게게 보여드리는 책이요. 생명의 영, 그 유명한 몰트만이 쓴 책입니다. 생명의 영하면 성령이니까요. 이 제목이 데어가이스트 데설레덴스 이렇게 되어 있네요. 생명의 영, 가이스트. 그리고 부제로 아이네 간즈사이트네 프뉴마톨로기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통전적인 전체적인 영, 성령론 번역으로는 통체적 성령론으로 되어 있네요. 안쪽을 보면 글씨가 작네요. 이게요 번역한 걸로 416쪽 되어 있습니다. 몰트만이 말하는 이 성령, 기독교 성령에 대한 총체적인 뭐 대답이라고는 할 수는 없는데요. 현대 신학자가 고유한 방식으로 어떤 것들을 집고 있구요. 이러한 논의들은 많습니다. 여기 책이 만약에 가능하다면 이런 책들도 같이 읽고 토론하고 하면 참 좋을 것 같네요. 그냥 큰 제목만 몇 개 말씀드리면요 다음과 같습니다.

1부에서 성령의 경험들 주욱 나왔구요. 하나님 경험, 역사경험, 삼위일체 영성 경험. 예. 성령의 경험들, 여러분들은 어떻게 경험하시는데요. 네. 두번 째는 성령안에서의 삶. 뭐 그냥 설교제목 같네요. 네. 예 그런 것들을 해방신학을 도입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네요. 요 부분이 꽤 깁니다. 성화의 문제도 있구요. 카리스마도 있구. 신비경험도 있고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성령의 사귐과 인격 이렇게 되어 있네요. 성령의 사귐. 네. 이 내용을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게 아니었구요. 우리가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이 그렇게 간단하게 나의 실존적인 뜨거운 경험, 그런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2천년 역사 전체, 생명전체 어쩌면 우주전체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들은 제가 따로 준비를 안했구요. 게크하르트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중에 있는 한부분이 있습니다. 한부분에 성령론이 나오거든요. ‘신앙의 용기’라는 제목으로 성령을 다루고 있습니다. 재미있어요. Article 이죠. 요 안에 들어있는. 그가 여기서, 음... 요거는 조금만 내용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기본적으로 성령의 문제를 기독교 신앙의 이해와 용기 그 차원으로 설명 합니다. 이해, 우리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알게 하는, 깨우치게하는 영이기도 하구요. 그걸 또 에벨링의 독특한 시각으로 용기로 애기 하더라구요. 이거는 단순히 용감하다 씩씩하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자기의 전체를 던지는 것이니까요. 그러한 참된 용기, 심지어는 자기가 무로 사라지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손안에 있다고 하는 거기에 자기의 삶을 던지는 그러한 용기들을 이야기하네요. 여기서 제가 아까 잠간 읽다가 이 에벨링이 인용한 마틴 루터의 글이 재미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릴까 합니다. 마틴 루터가 전집 5권 몇 쪽에서 신앙의 용기, 신앙의 사건은 용기다 하는 차원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에게 기대를 거는 자로서 사람이 도달할 곳이 있다면 자신의 무(없어짐, 없음) 외에 또 다른 곳을 생각할 수 있을까? 무로 사라질 자가 그가 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무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무로 돌아가는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피조물에서 벗어날 수는 있어도 만물을 한손에 쥔 하나님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말대로 그는 세계를 한손에 쥐고 있다. 그러니 세계를 뚫고 떨어지라 그때 너의 떨어질 곳은 어디인가? 역시 하나님의 손과 손안일 것이 아닌가?

예 에벨링이 루터의 말을 인용한 것은 신앙의 용기문제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을 보면 무가 된다는 것은 맞는데요. 그러나 그 무까지도 포함한 하나님의 손에 떨어진다고 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그런 것은 용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죠. 이것은 술한 잔 마시고 쓸데없이 시비를 걸거나 그런 용기가 아니라 존재와 무, 무와 존재 이러한 차원에까지 전적인 신뢰를 갖고 뛰어드는 삶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은 죽어도 천당 간다고 하는 그런 말들을 정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될 겁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을 복지를 극단화하는 잘먹고 잘사는 그러한 것들로 생각한다면 그건 용기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하고 있는것이죠. 이런 삶이 더 연장된다거나 더 풍요로와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완전히 무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에게 우리의 실존을 맡기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조금 구체적으로 에벨링이 성령을 말할때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말해야 된다고 집고 있습니다. 몇 가지를 정리하면요. 에벨링의 이야기인데요. 예.

첫째,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자기이해에서 생존의 표지였다. 성령을 받는다 제가 오늘 설교한 고린도 전서 2장 12절에 이하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받았다 이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네 요 말이 나왔으니까 그냥 질문을 드립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 내용에도 나와 있구요.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성서에 기록되어 있고 지금도 우리가 많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할 때 그 뭘까요? 그냥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성령을 받았다. 이건 뭘까요? 음악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계발하는 그런 차원일까요. 도대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사도행전 2장 아마 1절 이하에 주욱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한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을 때 바람과 불의 혀같은 것들이 방안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때를 오순절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부활절,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월절이죠. 유대교의 유월절, 유월절 50일 후가 오순절입니다. 그거는 종교적인 절기이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다 농사와 연관됩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유월절, 유대교로는 오순절이고 우리는 부활절이구요. 50일이후에 유대교로는 오순절, 기독교는 성령강림절로 우리가 지킵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음에 40일 동안 지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성령강림이 이루어졌으니까요. 승천하고 요 사이가 그냥 계산으로 따지면 10일이 나오구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너무 이렇게 숫자에 연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도 아니구요.

그리고 오순절에 딱 성령이 그들에게 특별히 임했다는 말은 이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미 존재했었던 거죠. 구약때는 창조때부터 활동하셨구요. 그 뒤로 이스라엘의 전쟁이라든지 여러가지 역사과정에서 성령이 활동하시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생명사건은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을 조금 더 폭넓게 생각하셔야되요. 폭넓다기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건 바로 생명의 영이니까요. 오순절에 딱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그건 기본적으로 말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생명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을 끌어 나가는 것이 영이었으니까. 이 영이죠. 구약 히브리에서는 루아흐라고 하구요. 신약에서는 프뉴마라고 하는 헬라어로. 재미있죠. 이 두 가지가 제가 말씀드렸겠습니다만 바람, 숨 영 등등 여러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생명이해지요. 이미 그때에도 구약시대에도 이미 성령이 활동하셨기 때문에 오순절에 바로 딱 성령이 임했다고만 말하는 것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뭐 그렇게 말했을까요? 제가 이 시간에 다 설명을 드릴 만큼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냥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거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해요. 사도행전은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지만 사실은 역사는 아니거든요.

사도행전을 제가 다시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거는 한마디만 다시 말씀드리면요. 사도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기 위한 누가의 초기 기독교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나와 있는 모든 사건들을 초기 기독교의 연대기적 사실이라 그렇게 볼 수 없죠. 그렇다고 해서 그냥 터무니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역사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이 된다고 사도행전은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다 연관된 문제입니다. 부활은 바로 승천이예요. 이것이 곧 성령의 사건입니다. 날자를 구분한 것은 고대인들의 하나의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해명을 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구요. 이것은 구약성서를 해석하면서 초기 기독교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 40일이라고 하는 숫자, 그리고 3일후에 부활하셨다고 하는 이러한 것들, 그래서 요엘서 같은 것에 보면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예언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특별한 이러한 부활현현, 이것은 아주 은폐된 생명 사건이었으니까요. 이것은 곧 승천과 연관되는 문제들이고 또 생명의 영이 성령이니까 성령의 임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그래요.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이러한 문제, 사도행전에서 바람과 불같은 것으로 임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이거는 실지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도 다 종교적인 메타포거든요. 그 당시는 이런 방식으로 어떤 궁극적인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제가 잘 설명을 해야 될까요? 아주 어린아이들, 그 아이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안겨서 어머니의 살 냄새를 맡으면서 어떤 궁극적인 것을 경험하지 않아요. 어머니를 느끼잖습니까? 그러나 거게 어머니 자체는 아니지만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를 경험합니다. 제가 고대인들이 루아흐와 프뉴마를 이야기했는데요. 영으로 똑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조금 틀린거죠.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니까 이것을 어떻게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예요. 오늘의 방식으로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이 영은 바람이 아니라 물리학에서 인정하는 장에 가까울 겁니다. 장이론이라고 있죠. Ground Theory. 그 시대의 어떤 세계관으로 생명의 궁극적 신비, 능력 그런 것들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네 성령, 초기 기독교의 성령은 그들의 생존에 관계된 문제. 기독교가 가능하냐 아니냐 그런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뭐 신학 시간도 아니고 그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인 문제들을 토대삼아 말씀을 드릴 만할 준비도 하지 않았구요. 그냥 일상적인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으셨나요? 어느때 어떤 경우에 성령이 내게 임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냥 질문으로 끝나겠습니다. 여기 에벨링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조금 읽어보겠습니다. 중요한 부분, 다는 읽지 않구요.  한 부분만 읽겠습니다.

신자에게, 기독교 신자에게 기독교가 지닌 새로운 것을 묻는다면 그것은 새 교훈을 지적하지 않고 성령의 새로운 현실성을 가리킬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는 이미 말세의 영이 말세에 임하게 될 영의 은사를 말한바 있다. 후기 유대교적 묵시문학에서 영의 수여, 영이 온다고 한다는 것과 종말론의 결합은 더 강화되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자신을 마지막 역사의 공동체로, 공동체 실존을 영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이해한 것은 아주 이것과 밀접한 연결된 것이다. 바울도 여기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에 의하며 옛 언약에 대한 새언약의 관계는 죽이는 문자에 대해 살리는 영의 관계와 같다. (고린도 후서 3:6절 )

네 그렇구요. 첫번째가 초기기독교의 생존의 문제였다고 하는 것이구요.

두 번째는 성령의 경험과 그리스도 신앙. 성령 비슷한 이야기 같네요. 성령경험과 기독교 신앙,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신학 성서를 꿰뚫고 있는 사상이라고 합니다. 간단하게 보죠.

세 번째는 신자는 누구나 세례를 통해서 신앙에서 그리스도와 합한 자로 성령에 참여한다는 신앙고백, 세례, 세례를 통해서 신앙에 참여한다는 신앙고백과, 성령은 여러 가지 다른 은사를 나눠주고 영적감동을 일으킨다고 본 초기 교회의 경험배후를 구별해야 한다. 은사, 세례를 통해 은사를 받는다고 하는 배후를 구별해야 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요. 그렇게 이야기하네요. 이 말은 에벨링의 설명에 의하면 영에서 오는 광신의 위험성을 이야기 하는거죠. 바울도 은사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말하죠. 질서있는 은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요. 초기 기독교에 이미 벌써 광신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번째, 성령은 인간의 생내적 성분도그리고 인간자신의 소유도 되지 않는다. 번역이 직역이라고 좀 그렇군요.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뭘까요? 성령은 인격자, 우리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라기 보다 위격이라고 하죠. 페르조나니까요. 페.르.조.나 우리가 그 성령을 이용해서 어떻게 하는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에게 소유당하는거죠. 오히려요.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는 거죠. 성령이 임하시기는 합니다만 우리가 성령을 이용해서 점을 친다거나 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도적인 것이죠. 이게 성령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적으로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는 우리의 주관성을 극복해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 우리 주관성이 너무 강합니다. 전부 나 중심인거예요.

지난주일 설교에 어떤 분이 댓글로 달았는데요. 믿음을 보고 예수님이 병을 고치지 않았느냐? 믿음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라고 하는 아주 본질적인 믿음이 아닌데도 그렇게 한게 아니냐. 그러니까 믿음이 어떤 역할을 한거다. 그런 것을 어떻게 구분을 할 수 있느냐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그 댓글에 다시 대답을 했습니다만 성서, 특별히 복음서를 읽을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부분은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냐 그 진술 자체보다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 기자의 눈을 봐야 합니다. 복음서 기자의 눈, 영적인 눈. 이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그 말씀에서 이 사람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거를 혼동을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지 예수님이 믿음을 보시고 어떻게 해주신다고 했지. 늘 그 믿음을 강조합니다. 제가 믿음 일원론의 위험성, 믿음 만능론, 이런 것들을 여러번 지적했는데요. 물론 성서안에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반 평신도들은 아 믿음이 중요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설교자들도 어느 성서 텍스트에서 그 믿음을 끌어다가 아 아브라함의 믿음, 아 누구의 믿음, 다니엘의 믿음 많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거기서 약간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성서로부터 그 다음에 청중에게 이르는 어떤 길을 내는 것이 설교자거든요. 성서말씀을 주석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 믿음이 좋다. 그런 방식으로 설교를 하면 오류로 빠질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 여기 어떤 필터가 필요한 거예요. 관통해야 합니다. 성서 텍스트가 청중에게 갈때까지 그것을 다시 인제 푼다고 할까. 아니면 걸러낸다고 할까. 필터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조직신학이거든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신학, 교의학에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갖고 있어야지만 어떤 한 텍스트에서 거론된 믿음이 아전인수나 침소봉대로 전달되지 않고 적절하게 정리되어서 청중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죠. 이 작업이 우리들에게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제가 큐티식 성서읽기가 위험하다고 말을 하는 거거든요. 평신도들이 성서 본문을 읽고 그 분들은 조직신학적 훈련을 충분하게 받지 않았구요. 신학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건 거의 힘들거든요. 충분하게 저희가 그쪽으로 공부하고 트이지 않는 한 잘 안되는데 그런 준비없이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도 그런데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어요. 그렇게 성서에서 어떻게 하죠? 자기의 마음에 맞는 것만 받는거요. 맞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거죠. 맞는다고 하는 것이 주관성인데 이 주관성도 전 이해가 되버린 거죠. 어떤 교육을 통해서, 교육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전 이해를 깨버리고 선입관을 깨는 보편적 진리라고 할까요. 성령적인, 성령론적인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아까 제가 생명의 영이라고 했는데요. 진리의 영, 종말의 영이기도 합니다. 이런 용어들이 조직 신학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있어요. 성령하면 창조,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종말의 영 쭈욱 연결되구요. 성령공동체, 교회를 성령공동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할때도 이것이 상당히 많은 내용들이 담고 있거든요.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몰트만 책이네요. 아하. 제가 주로 현대신학자로는 판넨베르크, 몰트만, 에벨링, 융엘 이런 사람들의 책들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책이 있습니다. 몰트만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그리고 교과서식으로 책을 아주 재미있게 씁니다. 책이 아주 쉽습니다. 이 분이 쓴 책 요거도요.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죠. 성령론, 아까 제가 드린 생명의 영 이거는 직접적으로 성령론이고. 이거는 교회론인데 성령론적인 교회론입니다. 그만큼 성령론이 중요합니다. 종말도 사실도 성령의 문제이구요. 요엘서가 말한 마지막때에 있게될 그러한 것들이 다 그렇구요. 아까 에벨링 책을 읽으면서도 그가 말했듯이 초기 기독교가 자기들을 종말론적인 공동체로 이해를 한 것은 바로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묵시문학적인거구요. 초기 기독교가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그 관점에서 했습니다. 성령이 요엘서와 에스겔서 등등이 말하고 있는 성령이 초기 기독교를 결정짓는 존재에 대한, 아주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과연. 네. 그들이 그렇게 몰두하고 있었던 성령이 뭐냐에 대해서 우리 일반신자들은 거의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요. 그냥 설교조로만 들은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흥회 스타일로 말이죠. 맨날 박수치면서 하는 거 있잖습니까? 저도 중고등학교 다닐 때 꽤나 그런데 쫓아다니고, 쫓아 다닌것이 아니라 교회 학생회장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참석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많이 그렇게 하구요. 또 주변에서 그렇게 하면 같이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빠른 박자로 손뼉치면서 찬송 부르면서 앞에서 북을 치구요. 그러면 다 흥분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댓곡 부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성령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옆으로 나간 말이니까 진정하구요.

우리들이 성령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냥 들은 풍월로 그리고 우리에게 전달되어진, 우리가 들었다고 한 그런 것도 신학적 토대가 전혀 거의 빠져버린, 그러니까 성서텍스트 몇 군데 나와 있는 것을 날것으로 먹는거죠. 표현이 맞네요. 날 것, 날 소고기, 삼결살도 날로 먹는거예요. 그거는 분명 고기가 맞습니다. 성서텍스트 하나하나에는 어떤 깊은 영적인 깊은 체험이 들어있는 것이죠. 거기에는 요리를 해야하는 겁니다. 사실은요. 요리가 아까 말씀드린 필터링을 하는겁니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성서텍스트를 자기 원하는 대로만, 그거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신자들이라고 한다면 청교도적인 그러한 영성, 경건주의 그러한 영성 거의 그 안에서 다 요리가 되버립니다. 요리도 아니죠. 이미 모든 성경을 볼 때마다 이미 그러한 시각으로 다 봐요. 다 은혜로운 거죠. 사실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만족일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이 주관성을 극복해야 되는데. 아. 네. 이게 어려운 것 같죠.

음. 네. 그러니까 성령에 대한 문제도, 에벨롱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소유가 아니다. 이거 여러분. 아. 정목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소유가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이게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뭔가 정확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소유가 아니라면 뭘까요? 존재겠죠. 존재. 성령이 바람처럼 자기의 의지대로 자기의 생각대로 그런 점에서 인격자라고 하는 것이죠. 불고 싶다면 붑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하루빨리 눈치 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뜻대로 아니라 그 분의 자유대로 하시는 거예요. 아까 제가 믿음보다. 우리는 자꾸 믿음 이야기하는데. 바울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거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다 이야기했거든요. 이 믿음을 자꾸만 우리가 자꾸만 강조하는데 믿음이 무익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과 상관없어요. 상관이 없다는 표현보다 그것을 뛰어넘는 분이예요. 우리가 믿음이 없어도 그 분이 원하시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과 의로움 받는 데 믿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느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거기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요. 우리가 믿음이라고 한때는, 복음의 차원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늘 뭘 상대적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뭐예요. 고거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보통 복음의 차원에서 믿음을 이야기할때는. 뭐죠. 율법인거예요. 율법과 상대적 의미에서 믿음인거죠. 우리가 어떤 노력, 업적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점수를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의존할 때 그때 우리가 의로와진다. 구원받는다. 그런 뜻이거든요. 제가 아까 믿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믿음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성서안에 있는 많은 내용들이 직접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건 날고기예요. 생고기예요. 구워 먹어야죠. 거기 굽고 요리하는 것이 2천년동안의 신학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죠. 신학의 역사, 조직신학입니다. 믿음이 우리들에게는 너무 과도하게 강조되어서 정작 이것의 한계도 모르고 이것이 의존해야 될 어떤 것도 모르고 이것만이 우리의 모든 것인것처럼 강조될 때가 많습니다.

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오직 어서 오시옵소서 간구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하나님이시니까요. 하나님은 소유할 수 없잖아요. 여러분 좀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의 믿음, 여러가지 노력들 조금 내려놓으시고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조금더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멍청히 가만 있으라고 하는 말이냐? 그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운행하시는가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떻게 완성하실 것인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부활의 사건을 일으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는가 그런 것들을 깊이 알게 되면 그다음에 우리가 저절로 행동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만큼 하게되죠. 제가 말이 자꾸만 말이 빙빙 돌은 것 같군요. 고만 하겠습니니다. 에벨링 이야기요. 뒤에도 몇가지 있는데 나중에 관심이 있는 분은 이 책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네. 혹시 질문있으면 말씀해주시고 없으면 조그만 것 한두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아까 한번 이야기했습니다만 성령의 문제에 대해서요. 초기 기독교는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을 생존의 문제로 생각했어요. 바울도 갈라디아에서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갈 3:3) 갈라디아서 5:16절에 보면 성령을 따라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거의 어떻게 보면 성령 만능론처럼, 성령에 대한 문제들입니다. 그렇게 강조했습니다. 예. 우리는 지금 일단 그거를 전제하고 과연 그들이 경험한 그 성령이 뭐냐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2천년동안. 기독교 역사에서요. 그거를 한 두마디로 끝내지는 못합니다. 예를 들자면 성령은 누구에서 왔느냐하는 질문에서도요.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거치면서 그 유명한 문구가 나오거든요. 필리오케filio quo라고 하죠. 이거는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라틴어인데요. 성령이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으로 이해했는데, 그렇게 정리를 했었는데요. 뒤에 문서를 정리하면서 필리오케가 들어간거예요. 필리오케가 문서로 포함되었어요. 아들로부터 성령을 규정하는 그 문장안에 원래는 하나님으로부터 라는 말만 있었는데 그 뒤에 그리고 아들로 부터라는 말이 살짝 들어간거죠. 예 인제 4세기때 왜 이러한 이야기를 했을까요? 성령에 대한 이해를 많이 풀어나가는 과정이었은데요. 저는 그런 것 다 말씀드릴 수도 없구요. 이 두 가지만 놓고 볼 때 성령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초대 교부들이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창조의 영이라고 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이 창조이니까요. 창조의 영, 창조하시는 분, 하나님의 사역은 다 성령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로부터 라고 하는 말이 들어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이런 것들도 다 성령으로 연관되는거거든요. 부활같은 것도 사실 성령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그러니까 이 영의 문제가 아버지, 아들 다 연관되어 있는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르쳐 삼위일체라고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았다거나 성령을 경험했다거나 하는 그런 말들을 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꼭 그러한 문제들이 고상한 신학을 통해서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성령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했었던 그 맥락을 무시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가 경험한 성령이 말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부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조금 더 나아가서 이것이 교회 공동체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 것인지 그러한 우리의 영적인  감수성 이런 것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사람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성령을 우리가 받았다고 하는 그런 말을 조금 깊이 있게 생각을 하시구요. 과연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성령이 무엇인지 대해서 공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제가 소개한 이러한 책들도 그렇구요.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체험, 우리가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구요. 현대신학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될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성령은 삼위일치 차원에서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자유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되고. 두 가지를 말씀드려야 되겠군요. 성령의 자유를 훼손시키지 말아야 되고, 자유. 어떤 범주나 어떤 한계 안에 꽉 닫아 가지고 요것만이다 라고 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리고 아들로부터 오고 말씀과 이런 것하고도 다 연관되기때문에 우리는 영을 성령을 아. 지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이해하는, 이게 서로 연관 되는 걸까요? 자유는 우리가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까지 할 수 잇는 어떤 힘이거든요. 자유는 미래의 힘이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사건들이 우리에게 올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우리는 닫아놓지 말아야 하구요. 놀랍죠? 성령이 어떠한 미래로 이 세계를 이끌어 가실지. 그거는 그 분이 하실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난 역사가 다 그 분의 활동이기 때문에 그 역사를 우리가 충분하게, 성령의 역사죠. 그거는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고 성서에 있는 성령의 활동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공부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거는 과거가 아닐까? 싶어요. 미래의 자유와 과거의 역사를 오늘 우리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잘 생각하고 이렇게 소통함으로서 이 사이에 우리 기독교인, 우리 믿는 신자가 현재, 신자는 현재, 성령의 현재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구도가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면서 도표식으로 좀 하는 것 같은데요. 여기에 이게 딱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흐름으로서는 틀리지 않는 것 같에요. 성령의 자유가 미래로 열려져있고 그리고 성령의 활동한 역사가 과거에 있으며 오늘 이시간 여기서 우리 신자는 성령의 현재를 우리가 삶으로 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겠네요. 네 시간이 되었죠. 질문 있으면 하시겠어요.

제가 몇가지가 더 있었는데 시간이 있으면 하려고 했는데 간단하게만 성령과 악령. 악한영이 있으니까요. 네 어떨까요? 뭐가 성령이고 뭐가 악령일까요? 악령도 모양은 예쁩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성령창조와 우리에게 사랑의 역동성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으로 성령이 우리를 끌어가시는데 또 우리가 어느 순간에 교만해지구요. 그러한 우리의 신앙적 노력들을 나를 나타내는 것으로 할 때가 있잖아요. 그건 우리가 악령에 끌려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좀 분별하자.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하자.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을까요? 어렵죠. 영 분별의 은사. 나우웬도 그런 이야기를 했나요. 누가 했나요. 대충. 됐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일 잘 지내셨겠구요. 목요일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문제들, 불변성의 문제와 비종교의 문제, 삼위일체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