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강(20080522) 받아쓰기- Docetism

<배경음악 있습니다. 스피커 켜세요.>

April come she will
When streams are ripe and swelled with rain

May, she will stay,
Resting in my arms again.

June, shell change her tune,
In restless walks shell prowl the night

July, she will fly
And give no warning to her flight.

August, die she must,
The autumn winds blow chilly and cold

September, I'll remember
A love once new has now grown old.

<사이먼&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

잘들린텐데요. 네 다 되었습니다. 사이먼엔가펑클 들어가구요. 그리고. 네. 카메라 이거, 녹화하는 것 조정하구요.

네 반갑습니다. 좋은 계절이기는 한데요. 5월 하순이라. 2008년 5월, 오늘 22일입니다. 이때 우리가 만났군요. 인터넷이라는 문명 이기를 통해서 시간 공간 구애 없이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구요. 기특하기도 합니다. 100년 전쯤의 사람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러한 소통의 공간이 시작된거군요. 앞으로 5백년 후의 우리의 후손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통을 할까요. 아마 전혀 지금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일이 벌어지겠죠. 참으로 신기합니다. 이렇게 좋은 계절이기는 한데요. 국내외적으로 좋지 않는 소식들이 계속 날라들고 있고 또 그게 해결될 기미가 많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이 좀 불편합니다. 그냥 우리 혼자라고 한다면 그런대로 조금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광우병 걸린 소고기를 먹고 10년 20년후에 발병된다고 하더라도 확율도 그렇게 높지 않고요. 막판에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어쩔수 없이 자기 운명이려니 받아들이고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것이 자기 하나만, 자기 개인의 안일한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서 행복할 수 없는 거거든요.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것이 Anthropology인데요. 이게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Anthropology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특징을 갖고 산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같이 나누고 자연 안에서만 산다고 하는 것은 종족보존에, 자기자신과 종족보존 하는 것에 모든 근거를 두고 사는 삶의 형태이거든요. 거기서는 죄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물들은 그저 자연 안에 들어가 있을 뿐이죠. 그들에게는 윤리가 가능하지 않고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착하나 아니냐는 큰 의미가 없는거요. 아 그냥 자연 안에서 삽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네 그렇습니다. 우리만이 자연 안에서 적응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불안한 거죠. 자연속에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문제도 동물들에게는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죄의식이 있을수가 없는거죠. 그냥 메카니즘속에서 살아가기만 합니다. 사람만이 이런 문제를 갖고 힘들어하구요. 그러니까 인간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문명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 문명이 실질적으로 구원론적으로 끌어가느냐 아니면 오히려 반 구원론적이냐 우리를 파괴하느냐는 것은 둘째로 내려놓고 어쨌든 우리가 동물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명을 이루고 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일단 우리가 그러한 방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자기만의 안일에 머물지 않구요. 주변사람들과의 연대감, solidarity 이거를 꾸준하게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이거는 거창한 의미에서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한 연대감 이거는 둘째치구요. 마틴 부버나 이런  사람이 이야기 했듯이 사람은 나와 너와의 관계를 통해서 어떤 사람의 삶,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거든요. 마틴 부버가 쓴 책,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읽어 보셨겠습니다만 ‘나 와 너’, 이 세계가 점점 운트, 나와 그것 사물의 관계가 되어가고 있는데 나와 너와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해야 되고 거기서만이 인간존재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점에서도 같이 더불어서 가는 삶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쇠고기 파동 이런 것도 지금 당장 내가 편하게 사는 것만 생각한다면 그렇게 신경 안써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 앞으로 30년, 40년 멀게는 100년 200년 까지 내다보면 어쩌면 미래에 인류 전체가 멸망당할지 모르는, 흡사 중세때 유럽에서 흑사병이 돌아서 30%가 몰살되었다고 말하는데요.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말 할 수 없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는 질병이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는 최대한 그러한 접촉할 기회를 막아야 하는 것이죠. 단지 지금 우리가 FTA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지금 당장 우리가 수출을 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이런 것, 미래를, 미래의 위험의 가능성을 담보로 현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려고 하는 것은 인간 본질로서도 굉장히 무책임한, 인간이 할 수 없는 그러한 일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좀 과격하게 이야기한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어쨌는 방향만은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수 만명이 죽었구요. 행불자도 많고 이미 미안마에서도 십 수 만명이 죽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대한민국는 삼천리 반도 하나님이 축복하셨구요. 그러나 대지진이나 사이클론, 해일이나 그러한 재해, 그런 것들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축복받는 땅에서 살고 그런 민족이다 그런 걸로 안도하고 넘어가야 될까요? 네 우리들에게 큰 재앙이 없다고 하는 것은 다행이겠죠. Catastrophe 의 문제, 대 재앙의 문제요. 우리가 조금 아까 말씀대로 연대라고 하는 점에서 볼 때 우리 대한민국 사람만이 아니라 모두가 지구안에 같이 사는 사람을 우리가 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점에서 그렇고 이러한 인류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해서도 그렇고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실제적으로 느끼셔야 되는 거예요.

이게 참 어렵습니다. 한계이기도 하구요. 이걸 어떻게 기독교 신자들, 한국의 다른 외국의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특히 인제 미국 쪽의 가벼운 복음주의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이게 우리에게 상품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에. 상품? 아시죠? 상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건 포장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건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책 다른데 있는데 인용을 못하겠는데요. 미국의 어떤 학자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의 교회는 상품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신자들이 큰 교회 나와서 대형 마트에 들어가서 골고루 물건을 구루마있죠. 카트라 하나요. 거기서 인제 실어서 사듯이 말이죠. 구매를 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은 소비자인 신자들에게 입맛에 맞는 그러한 것들을 진열하기에 바쁘다. 이게 뭔지 옳은지 그른지 먹고 설사가 나는지 모르고 그렇게 하고만 있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러한 상품으로서의 복음이 미국에 있는데요. 경향입니다. 트랜드예요. 미국에 있다고 다 그렇겠어요? 그거는 아니지만 그 나라가 나아가는 방향은 있는 겁니다. 그게 값싼 실용적인 복음주의라고 하는데요. 그게 우리나라에 그대로 직수입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들어온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다 죽을 쑤고 있구요. 루터교회도 그렇구요. 성공회도 그럴 거구요. 성공회가 영국에서 직접 들어왔는지 미국을 통해서 들어왔는지 제가 그걸 지금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정 할 수 못하겠는데요. 아마 영국 성공회에서 온 것으로 보고요. 루터교회는 당연히 그렇구요. 그러한 유럽에서 온 교회, 사실 뿌리가 있는 교회구요. 아.. 네 그렇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이야기가 나가지 말고 중심으로 돌아와야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 기독교 신앙이 실질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자의 의식의 문제, 생각하고 삶의 incarnation 이 되는 겁니다. 성육신이 되는 거예요. 신앙과 이건 여러분들이 하도 많이 들어서 제가 더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설명 듣는다고 깨달아 지는 게 아닙니다. 참  이상한 거죠. 공부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요. 신앙도 그렇고 이거는 낱말뜻 들어서 해결되는 것 아닙니다. 공부, 쿵후라고 하는 거죠. 뭐를 안다고 하는건데 실질적으로 안다고 하는데 안다고 하는 것, 정보차원에서 아는 것하고 실질적으로 자기 삶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 시작할 때부터, 그때부터 차근 차근히 그 신앙과 우리의 삶이 일치가 되어야 되는데 그런 훈련이 안되어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 그거 느끼시나 모르겠습니다. 목사님들, 오늘 여기에 카르디아 들어온 것 보니까 목사님 계신것 같구. 오랜만에 봐요. 목사님들도 사실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 보면 들어오게 되는데 그걸 모르고 다 놓치고 있어요. 기독교 신자들이 붕붕 떠서 다닙니다. 이렇게 착 가라앉지가 않아요. 이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일반적으로 살 때 어떤 사람보면 늘 들떠 있는 사람있지요. 사야되고 쏟아내야 되고 안정이 안 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늘 바깥으로만 영적 촉수를 내돌리고 말이죠. 그러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도 많이 들떠 있어요. 영성 영성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습득해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가지 기도의 방법을 안다거나 큐티를 어떻게 한다거나 이런걸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흉내 내면서 할 수 있는거예요. 어떻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이 들떠 있지 않고 밀착되느냐? 신앙의 Incarnation 인데 그것이 일치가 안 되는 경우가 아주, 정말  많습니다. 이거 느끼시죠.

제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쪽으로 나갔을까요. 약간 늦게 온 분을 위해서 한 두 마디를 드린다면 중국의 지진, 미얀마의 사이클론이 우리들에게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질문을 주냐 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거는 다만 인류보편적인 인간애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건 그쪽에서 한 차원이 있는거구요. 더 근본적으로는 신앙의 근본이 이것에 대해서 질문을 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않고 산다는 거예요. 우리의 신앙은 따로 있고 삶은 따로 있어요. 여러분. 이것은 늘 우리가 흔하게 들어오던 이야기인데요. 흔하게 들어도 사실은 스스로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의 지나온 삶의 경험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평생동안 신학공부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살아도 이게 기독교 신앙이 정말 내 삶과 밀착하는 경험은 그렇게 쉽게 주어지지 않더라구요. 이게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한다거나 세련된 종교의식, 기독교적인 포즈를 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기독교 신앙과 삶이 일치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중국의 지진과 미얀마의 사이클론 이러한 대재앙, 이러한 참사, 이 앞에서 기독교 신앙이 어떤 주제를 붙들고 하나님께 질문을 해야 될까요?

요즈음 수요일 저녁마다 샘터교회에서 시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다들 멀리 살기도 하구요. 서너명 모여서 공부하는데 저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 둘째 치고 제가 시편을 한 번씩 읽어가면서 공부도 많이 됩니다. 제가 어저께 느낀 건데요. 다시 한 번 확인한 건데. 시편 기자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 저주, 악독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갚아주시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시고 탄원도 하고 감사도 하고 시편 여러 유형의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렇게 된 이유가 뭐냐? 당신은 지금 침묵하느냐? 왜 없는것 처럼 세상이 돌아가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따지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삶의 궁극적인 질문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질문할 줄 알거든요. 기독교 신앙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러분, 빨리 그거를 여러분 눈치채야 하는데, 우리 앞에 벌어지는 현상적인 그러한 삶과 그리고 그러한 현상으로 나타난 삶의 내면에 어떤 것들이 작용하느냐고 하는 아주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질문과 대답과 그런 연관에 대한 진술, 그것이 바로 성서입니다. 그걸 찾을 수 있어야 되요. 아담의 문제도 그렇고.

오늘제가 어떤 여자 분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상담을 한다구요. 저는 잘 모르는 분이고 다비아를 통해서 들어왔던 분인 것 같습니다. 카인 아벨을 죽인 사건을 물어보고 등등 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러한 전승들을 사실적인 것, 역사적 사실로 들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이 아벨 지켜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두었으며, 카인은 왜 살인자인데 살려주어서 그렇게 하느냐 그러한 질문을 하는거예요. 그건 초등학교 하는 정도의 이야기인데 한국 교회 성도들이 그런 방식으로 밖에 성서를 읽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기자도 그렇고 큐티 아침마다, 밤에 써 갖고 올리지만요. 마가복음 큐티에서 마가복음 이야기하는 것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도 여러분, 어떤 질문이 있다고 생각하는거예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거예요. 거기는 이미 뻔하게 답을 주는 것처럼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답이 아니라니까요. 답의 방식을 통해서 어떤 것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답이라기보다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질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은 못 들어가죠? 성서기자들의 영성을 따라가야... 그게 들어오는 거죠. 괴테, 그러한 글들이나 휠더린의 시, 트라크의 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구요. 도덕경 등등 중국 고전들도 우리가 이해하려면 그 쓴 사람의 어떤 것을 따라가야 되는 것처럼 성서에서 우리가 가장 궁극적인 것을 질문할 수 있으려면 그런 쪽으로 우리가 자꾸만 한발 한발 딛고 나가야 됩니다. 이거를 우리가 못하거든요. 이게 어떻게 내가 이건 정말 오늘 제가 강의는 나가야 되겠는데 말을 하다 보니까 요 지점이 중요해서 앞으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서 텍스트가 과연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어렴풋이 나마 눈치를 채고 있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니까. 앞서 이야기한대로 유진 피터슨이군요. 그분이 이야기한대로 상품이 되어버렸어요. 그냥 내가 요리해서 먹으면 되어요. 예? 인스턴트 식품이 되어 버렸어요. 물에 넣어서 끓여서 먹으면 되는줄 생각하고 성서를 그냥 마구잡이로 먹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보십시오. 그게 우리의 영성을 조금이라도 풍요롭게 하는지.

미얀마 스촨성 대 참사, catastrophe 이런 참사 앞에서 우리가 어떤 신앙적 질문을 할 수 있겠어요.  이걸 가지고 사실은 밤잠을 자지 않아야만 그래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이 숙제를 갖고 씨름한다 말이죠. 이거는 아마 기본적으로 신정론의 문제일겁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들, 그러한 대체 좀 보십시오.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우리가 무엇으로 해결 하겠습니까? 학교들이 많이 붕괴되어서 열 다섯살, 여섯살 소녀들이 떼죽음을 당했잖아요.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계시나요. 지금 뭐하고 계십니까? 제가 돌아주는 주일날은 이 문제 가지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력에 따르는 설교를 3년동안 했는데요. 이번에는 이 사건이 너무 커서 잠간 교회력과 떨어져서 아마 돌아오는 주일은 성령강림 두번째 주일이죠. 지난 주일은 삼위일체 주일이었구요. 돌아오는 주일은 성령강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그래서 예정대로라고 한다면 성령에 대해 여전히 설교를 해야 되겠는데 요번에는 이 문제. 신정론의 문제,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사랑이 있고 전능하신 분인데 왜 이 땅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러한 불행들이 끊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 그런 문제 말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질문을 드린 거구요. 그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아픔으로 와 닿아야 되구요.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야 하느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사십시오.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가지의 긴장이 있어야 되겠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 가볍게 여기자, 자기자신. 네.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고 자기는 끝없이 가볍게 만들고 끝없이 축소시키고요.  거의 무화시킬 정도로 축소시키구요.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축소 자기무화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나라가 확대되는,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는, 그거는 좀 무겁고 자기는 가볍고, 그러면 지탱합니다. 사람이 힘든 거는요,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요. 저도 비슷합니다. 제가 도사처럼 이야기하는데 별거 아닌 거예요. 그런 경험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정말 사람들이 힘든 것은 자기 무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가벼워지면 그 외에 주변적인 것은 아무리 무거워도 무겁게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그러한 기독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야 될 텐데 그런 점에서 이러한 지구 전체를 참혹한 무력감속으로 빠지게 만드는, 이러한 참사 앞에서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포착해서 진지하게 질문하고, 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기도할 수 있는 거거든요. 기도하고 더불어서 이러한 어려움들을 뚫고 같이 나아가겠느냐? 그러한 주제들이 제방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것이 신앙적 담론으로 한국교회에서 살아나지 않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지난 십년동안 한국 개신교회가 좀 양적으로 줄어들었고 그런 이유들이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마는 영성의 문제가 제가 보기에는 가장 큰 것같습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뭐를 하느냐 하면 어게인 1907, 이런 것들이나 합니다. 일종의 그것은 노스탤지어라고 하나요. 향수병이라고 하나요. 복고주입니다. 복고주의, 결코 우리는 1907을 돌아가서도 안됩니다. 미래로 가야 되는 거죠. 그리고 1907에 있었던 일들이 그렇게 건강한 것도 아니거든요. 그냥 값싼 죄의식이라고 할까? 열강틈에서 무력감에서 빠진 사람들에게서 나온, 하여튼 그건 여러가지 문제들, 복잡한 사연들이 있어요. 건강하지 못한 영적인 운동이었었는데 하여튼 좋은 점이 있었다고 전제하구요. 다시 돌아가야 할 어떤 것, 원형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anthropology 문제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인간이 왜 이렇게 뜻하지 않는 사고를 만나서 죽느냐? 이 문제 갖고 우리가 고민 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삶이 도대체 무엇이냐?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느냐? 조금 더 만화 같은 질문을 한다면 우리 아버지가 칠십세쯤 돌아가셨는데요. 제가 만약 더 오래 산다면 90살 정도 산다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만날 때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아버지가 저보다 더 젊겠네요. 그냥 재미 있으라고 드린 말씀이구요. 도대체 인간이 삶, 생명이 이런것들이 무어냐 대한 질문이 우리들에게 진지하게 나와야 하는데 이게 우리들에게 없어요. 정말 진지해야 될 부분에서는 진지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넘어가야 부분에서는 진지해져버리는 그러한 어처구니 없는 기독교인들의 멘탈리티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까? 시청앞 광장에서 반북, 반핵 반김정일 이런 것에는요. 얼마나 살벌하게 열을 올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정론과 같은 이러한 중요한 문제들, 여기에는 인제 동성애 문제도 들어가구요. 우주보다 더 중요한 생명의 삶의 문제를 쉽게 처단해버리는 우리의 안목 이런 것 생각하면 정말 답답합니다.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교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군 대체복무 그런 것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평화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무조건 군대 안가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평화주의자로서 감옥에 갈 지언정 집총을 거부한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다면 우리가 옆에서 박수를 쳐야 되고 입법하는 과정을 우리가 도와야 되는데요. 어떻습니까? 거꾸로 하고 있어요. 한기총에서 공개적으로 그런 것을 반대하고 말이죠.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한국교회 미래가 있을까요? 오늘 저는 인간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요. 이게다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삶과 인간이 경험하는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브랜드, 그리고 각각 다른 방식의 성적취향들, 다른 종교, 예를 들자면. 그러한 많은 얽혀져 있는 삶의 문제들을 우리들이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방식, 때에 따라서는 단호하게 어떤 것을 끊어낼 필요도 있습니다.

그거는 제가 인정을 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가 이단 논쟁의 과정이었거든요. 그러한 이단논쟁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현재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방인 기독교 대표인 바울과 유대기독교인들의 대표인 예수님의 동생들과 제자들이 한바탕 싸움을 벌입니다. 이단논쟁을 벌입니다. 살벌했었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 논쟁, 대표적으로. 그런 것들과 더불어서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단 논쟁이 때에 따라서는 정치적인 것과 결탁해서요. 다비아에 첫날처럼님이 칼빈 이야기도 썼습니다만, 하여튼 정치적인 것과 연관해서 좀 하나님나라와는 걸맞지 않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없잖아 있었습니만 그러나 진리를 세워 나가는 데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부분적인 한계도 있었어요. 제가 거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할 수 없겠군요. 이러한 논쟁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집총거부라든지, 평화를 위한 대체복무, 이런 타종교가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지원해주지는 못할망정, 트집 잡기식으로 하고 있는 우리들의 최소한도 인간적 태도라든지 영성이라든지 인간 삶에 대한 이해가 과연 말이 되냐 하는거죠.

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기독교 신자들이, 우리 교회가 도케티즘에 빠져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도케티즘(δοκέω-docetism), 가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리사적 배경은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진짜 인간이 아니라 그냥 가짜로 나타난 그림자였을 뿐이다. 신성을 너무 강조하다가 보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한 초기 기독교의 이단 중에 하나인 도케티즘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이단논쟁이 많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이상이 아닙니다. 이단(異端)은 비슷한 겁니다. 한자로 보면 끝만 다른 것이 이단이잖습니까? 그러니까 이단적이 성향이 소위 정통이란 교회에 계속해서 붙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종이 한 장 차이예요. 제가 어디엔가 썼을 텐데요. 성령과 악령의 작용은 종이 한 장입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는 것은 전체가 다르면 확 드러나는 거죠. 그러나 거의 비슷하고 어떤 부분이 다르기에 이 도케티즘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구요. 다만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인성을 조금 약회시킨 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 신자들이 다 도케티즘에 빠져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온전하게 인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이미 예수님은 신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말할때 핵심적인 것이 베레호모 베레 데우스(vere homo, vere Deus)거든요. 참된 인간 참된 하나님. 제가 강의에서도 이야기했나요? 들었다고 하더라도 양해하고 조금만 들어보십시오. 이거는 반인반신 반쯤 인간이고 반쯤 신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온전한 베레, 순전한 인간, 우리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간의 모습의 한 부분도 예수님에게서 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교부 때부터 그런 것은 배척했습니다. 온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 total한 것입니다 화장실 가셔야 되고 사춘기때 어떠셨을까요? 그러한 인간이시고 온전한 신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 예수님의 존재 신비를 이해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지난주설교의 끝부분에 이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이 대개 이것을 들은풍월로만 이해를 하지 실제로는 하지 않아요. 이게 지금 문제입니다. 제가 그래서 글을 쓸 때나 설교할때나 묵상할 때도 늘 그것이 걸려요. 걸린다기 보다 혹시 오해 하는 사람이 나오면 어떨까 조금 염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대개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예수님은 이미 신이 되어 버리고 만거니까요. 그거는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적 공생애에 사셨던 그분의 인간성을 온전하게 확보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도케티즘적인 요소가 심각할 겁니다. 그래서 신앙자체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가현설적이예요. 그러니까 두발을 땅에 딛고 사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인의 머리속에는 자기가 되고 싶은 인간, 공중에 떠 있어요. 굉장히 건전하고 모범적이고 거의 천당에 들어갈 정도, 자기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그렇게 기대하구요. 그러한, 뭐라고 해야 될까요? 모범적인 바리새인의 전승이 있습니다. 타입이 있는 거에요. 그게 있으면 좋죠. 건전하게 산다면. 몰몬교도들이 세계 선교 나와서 우리나라에도 오구요. 정장하구 더울때도요. 그러한 것이 우리 머리에 그려지는 것처럼 반듯하게 살고 부동산 투기도 안하고 말이죠. 아주 그렇게 여러가지 면에서 모범적이 될 수 있으면 좋아요. 그러게 되지도 못하면서 어떤 기독교인것 같은 무늬 습니다. 독특한 것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집사님, 형제님, 자매님, 언어에서부터도 그런 것이 있어요. 제가 신학대학 다닐때 젊은 전도사 시절에 CCC출신들이 주변에 있었는데 그 친구들 늘 그렇거든요. 말을 형제님 자매님들 하면서,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혹시 그 출신들 오해하지 마세요. 어떤 형(型)이 있어요.

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건 좋다고 전제를 하면서 문제는 뭘까요? 자기가 좋아서 사는 것은 살라고 하지요. 다른 삶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다양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모양의 이것만 절대화 시켜서 이 안으로 끌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의 형들, 담배피지마 술마시지마. 어떤 norm을 정하는 거거든요. 혹은 category예요. 하여튼 카테고리로 넣는, 범주화하는 그러한 인간이해가 우리에게 아주 강합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는 동성애자들이 견디질 못하는 거죠. 숨이 막히는 거죠. 평화주의자들, 노조운동가들, 여러 유형의 인간의 삶이 있잖습니까? 창녀들이 있어야 되고 술집에 작부들도 있어야 되고. 등등 여러가지 그러한 삶들, 그런 것 나쁜 것 아니냐? 여러분들 그렇게 생각하실텐데요. 일단 그 생각에서 벗어나십시오. 제가 무율법주의 율법 무용론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윤리문제는 다음에 나올 것 같구요. 거기 까지는 나가지 말구요.

오늘 제가 답답한 마음이 있어서 흥분하는 것 같습니다. 좀 내버려두자.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내버려두자. 그냥 내버려두면 이 세상이 카오스로 빠지고 폭력이 난무하고 그런 것이 아니냐? 물론 이 세계 질서가 잡힐 수 있도록 최소한의 질서는 필요하겠지요. 그것마저 우리가 다 방기하자는 뜻은 아니구요. 각각 질서안에서 평화적으로 사는 다양한 삶, 그거요. 그걸 인정해야죠.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 분을 보십시오. 그냥 먹고 마시고 그 당시는 포도주죠. 주변의 사람들이 너 먹고 마시고 술주정뱅이 아니냐? 왜 이렇게 그러고 사냐? 인간이 참 이상하다. 아마 그렇게 속으로는 냉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꽤나 있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서 너 나쁘니까 반사회적이니까 손 씻고 그만두고 나 따라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도 매국노같은 짓 그만 두고 그리고 좀 깨끗하게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실로 있는 사람들을 그냥 인정한 거예요.

저도 제발 기독교가 다른 사람들 귀찮게 하지 말고 내버려두자 역설하고 있는 중입니다. 설교 비평집 3집이 나왔는데요. 설교의 절망과 희망. 요기 있는 그림이 오정현 목사고 여러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재미있는게 띠지도 만들었네요. 예쁘게 잘 나왔습니다. 요번에는 표지 날개 속에 지은이 소개에 사진도 한 장 넣었습니다. 1,2권에는 안 넣었어요. 마지막이니까 넣었습니다.

저 설교 비평에서도 제가 말할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좀 세련된 교회들, 강남지역에 있으면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저 방식이거든요. 사람들 바꾸려고 해요. 코미디죠. 코미디. 강남을 클린 강남, 오정현 목사님, 클린 강남, 옥한흠 목사님도 그런 식으로 제자훈련을 하셨을거예요. 강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클린 강남이 되었습니까? 계속해서 거기는 소수 엘리트들, 한국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자꾸 모여드는 곳이죠? 교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죠. 저는 그 옥한흠목사님을 제가 나쁜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교회가 잘 난척 하는거죠. 다 우리들은 구원받았고 괜찮게 살고 저 사람들을 정말 불쌍하게 생각하고 변화시키고 어떻게 하겠다. 요즘 말로 꿈깨는게 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 좋은 방식대로 살고, 기독교인들의 삶의 형식이 있으면 그렇게 살구요.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헌금하고 그렇게 사는 좋다면 그렇게 살면 되어요.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나 따라와” 이렇게, 일종의 계몽이죠. 그만두자. 설교 비평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계몽좀 그만하자. 성숙한 시대에는  그러한 잔소리방식의 말에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교회 나온다면 그 사람 유아적인적거죠. 본훼퍼가 옥중서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미 성숙한 시대다.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여전히 우리에게 먹히고 있다고 하는 것에서, 먹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만이 길이라고 하는 것처럼 나가고 있다는 것이 이게 우리 현실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네. 자기는 그렇게 살라고 두도록 하구. 다른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아까 예수님 이야기 하고 정리가 되었죠. 아 예수님과 연관해서 이야기해야 하겠네요. 다 이게 인간론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론이 너무 천박하다고 하는 겁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요. 예수님이, 우리는 바리새인 같아요. 예수님을 대입하면.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계몽하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 앞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전도한답시고 그런거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전도가 자칫 그런 쪽으로 비칠 수 있거든요.

예수님은 한 가지만 하셨어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안에서 사셨습니다. 바실레이야 인거예요. 바실레이야가 뭔지 알아야 우리가 또 이야기가 더 진행될 터인데 오늘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바실레이야 투데우 하나님 나라가 임박한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회의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한 사람들, 죄인과 세리 이런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정말 괜찮은 사람들을 만드려고 닥달하지 않고 그냥 그 사람들을 수용하고 초청한 것 뿐입니다. 안내한 것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 그쪽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려라. 그거죠. 그런데 여러분 설교쪼로 나가는 건가요? 이게 하나님의 나라 임박한 하나님 나라로 방향을 바꾸는게 세리와 죄인들은 가능한데  바리새인들은 그게 안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전형이라고 보면 좋아요. 역설적이죠? 이상하죠? 종교적이고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기도도 하고 헌금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로 전향하기 힘들까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었는데요. 아시겠죠? 제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아시죠? 핵심을. 제가 대답을 안하겠습니다. 뭔가를 나중에 다음 다음 제가 기억나면 대답해 드릴테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이 옳았나 틀렸나 맞춰 보시죠.

예. 우리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이가 없어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가 쓴 책 제목처럼. 그 책보셨어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썼는데요. 그러한 소설을 쓰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떤 인간 이해를 갖고  설교를 해야 하는가 어떻게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탄탄한 Anthropology 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선교에 참가할 것인가? 이거 참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하는데요. 하지 않거든요. 아주 가벼운 감수성, 자기연민, 상대방의 불안한 마음을 공격하구요. 그러한 죄책감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만들게 하고 그것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만드는 이 방식, 프로이트나 니체 이미 충분하게 분석해놓은 그러한 잘못을 우리가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일종의 도케티즘이다. 그래서 성서가 그 당시의 방식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삶의 형식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오늘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주입되고 마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게 무엇인지 잘 눈치를 채지 못하더라고요. 대학교 교수들이나 변호사나 의사되는 들도 왜 그런면에서는 그렇게 순진한지. 그게 믿음이라고 자꾸만 세뇌를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뭐 그렇게 따지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믿어라. 순종해라. 순종이 목사에 대한 순종에게까지 미치게 되구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좀 생각을 하는 좋은 뜻에서의 지성적 기독교인들이 설 땅이 공간이 한국 교회안에 없어요. 다 나가죠. 아예 교회를 그만두든가.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10년동안 성장하지 못하고 꼭 성장한다기 보다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점점 추락하고 교회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하고 있구요.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소형 수퍼들이 다 죽는 것처럼, 재래 시장이 다 죽는 것처럼 그건 뭐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서 그러니까 별수 없는데 모든 교회가 하나라고 하는 기독교 본질에 근거해서 이건 결코 건강한 모습이 아닌 병적인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대형교회는 더 커지고, 문 닫는 교회는 더 계속 많아지고 자립하지 못해서 목사들이 구걸하다시피 최소한의 목사의 체면유지하기도 힘든 상태를 그대로 방기하고 있는 이러한 상태입니다.

네. 기독교 인간이해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요. 제가 중간에 해야될 이야기들이 우리가 신학이, 신앙이 철저하게 인간론적이어야 된다고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이게 아마 제가 요즈음 쓰는 글하고 색깔이 다른게 아니냐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제 글을 유심히 읽어 보신 분들은요. 저는 주로 아 이 난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그 부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설교 비평을 몇년동안 진행하면서 주일 공동예배때만은 최소한도 케리그마, 케리그마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거든요.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주일 저녁이라든지 성경공부라든지 금요모임에는 디다케나 가르침이나 봉사를 좀 해도 좋겠지만 그런 것들은 구원과 직접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주일공동예배만은 여기에 집중해야 된다. 왜 목사님들이 주일예배때 도덕적인 설교, 아니면 좀 진보적인 사람들은 사회변혁에 대한 문제들을 왜 힘을 줘서 설교하냐? 비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자. 한국교회 설교의 문제, 설교와 더불어 예배까지 포함해서 하나님 망각이다. 내가보기에는. 그걸 강조한 겁니다. 하나님 망각, 너무 인간에 대한 초점으로 흐르는 것은 좋지 않다. 엇갈리는 서로 모순되는 말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어느 관점에서 이야기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포커스를 맞춰야 되는 것도 있구요 Anthropology 가 필요하다는 그러한 말도 됩니다.

직접 관계는 없는데 혹시나 우리 강의를 듣는 분들 중에서 깊이 생각, 너무 많이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봐 싶어서 제 변명삼아 한 말씀드렸습니다. 신앙 신학도 인간론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육, 역사, 철학 예술은 물론 정치, 경제 모든 것이 다 인간론이거든요. 의학도 그렇구요. 물리학이나 화학도 사실은 자연과학이라고 합니다만 인간론이 더 근본에 있습니다. 아이젠베르크가요. 김형준 선생이 번역한 ‘과학 에세이’란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이라는 영역이 문화를 논하고 더우기 철학과 종교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과학이라는 하나의 방법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책임과 의무는 과학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과학이 제시하는 지식의 축적이 오용되어 잘못을 초래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과학은 분명히 인간론이며, 과학적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도 인간적인데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의 구원, 자연까지 포함한 우주론적 구원을 관심을 갖고 이야기해야할 신앙과 신학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방향을 잘못 잡아서 쓸데없는 싸움에 우리의 영적 에너지를 소진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창조와 진화거든요. 창조론과 진화론. 오늘 시간이 많이 갔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자세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진화론 옳은 부분은 다 받아들이면 되면 되요. 진화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으로 보면 되지 않겠어요. 그 아무 문제도 아닌데 그것을 갖다가 이런 문제로 과학자들과 싸우는지 나는 이해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창조과학회류에 있는 그러한 과학자들도 있는데 성서에 있는 창조의 모든 방식과 진행이 과학적으로 옳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과학에 있어도 창조 과학회 주장들은 별로 받아 들여지지 않고 신학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양쪽에서 볼 때 다 사이비예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굉장한 과학자들의 모임인 것처럼 부각되고 있거든요. 웬만한 교회들이 창조과학에서 만든 영화나 이런 것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고 이건 쓸데없는 싸움이다 하지마라.

진화론에서 말하는 호모에렉투스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데 이거 재미있습니다. 2백년전에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인 어떤 그 유인원이라고 하겠지요. 그 친구가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대재앙 지진 같은 것이 일어나서요. 아프리카가 동서로 나누어졌다고 합니다. 서쪽으로는 삼림지대가 계속되었구요. 동쪽으로는 초원지대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초원쪽으로 나온 공동조상, 이 친구는 자기가 먹을것도 구하기 힘드니까, 몸도 가누기도 힘드니까 바로 앞 나무에 기어 올라가면서 넓적다리쪽 근육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지질학적 변화때문에 삼민지역에 떨어진 그 친구는 나무에서 그대로 살고 동쪽으로 나오게된 친구들은 서게 됩니다. 빨리 도망도 가게 되구요. 직립인, 직립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최초 인간적인 특징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럴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두요.

그래서 다음주에는. 말씀드린건요. 진화론 과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이해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보지 말자. 제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과학자들은 신학자입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정직하고 정말 과학자로 한다면 기술자가 아니고 과학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만드신 원리들을 연구하고 밝혀내는 것 아니겠어요. 하나님을 밝혀 내는 것 하고 똑 같습니다. 창조행위자체가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학자들하고 쓸데없이 싸우지 말자. 비록 그들이 진화론 논리를 세우면서 하나님이 없다 자연적으로 된거다 그것에 겁먹지 마세요.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 창조능력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구요.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만약에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100% 규정될 수 있다면 그런 하나님은 안계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것은 빨리 들어날수록 좋은것이죠. 우리가 속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어떤 과학자에 의해서도 창조의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행위들이 규정되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면 되요. 그들이 말하는 게 옳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구요.

그래서 그러한 호모에렉투스를 말씀드린 것이구요. 그렇다면 기독교의 인간이해의 독특성이 무엇이냐? 그냥 생물학이나 물리학이 이야기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끝이냐?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인간이해, 크리스천 앤트로폴로지가 있는거죠. 그걸 놓치지 않으면 되는거예요. 그게 신학적인 인간이해인데 그게 과학자들의 인간이해와 방식은 다르지만 그러나 뭔가 소통할 수 있는 근거는 있어요. 그게 뭐냐 그것을 자꾸 찾아나가는 게 인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인제 기독교의 독특한 인간이해가 뭐냐? 여러분이 알고 있을 듯한 이야기인데 깊이로 들어가는 공부를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그거 흙이라하고 하는 것부터 들어가거든요. 흙, 영, 그러니까 우리들은 쓸데없는 싸움하지 말고 그럴 시간 있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쪽으로 파고 들어가라는 이야기죠. 창조과학회류의 그런 책들 글을 읽지 말구요. 에벨링의 신앙의 본질, 오히려 그런 책을 읽는 게 백번 낳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중심이 무어냐에 대해서는 아주 얄팍하게 알고 그냥 카테이즘 정도, 세례문답 받을때 교리문답으로만 알고 그리고 교회를 비판할 때는 쓸데없이 돈키호테처럼 실체는 없는데 돈키호테처럼 우리가 그렇게 흥분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도케티즘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된 게 아니냐? 자 우리는 그러한 추상적인, 공중에 떠있는 인간이 아닌 두발을 딛고 피가 있구 슬프고 허무하고 이러한 실질적인 인간을 바탕에 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깊이있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요즘 봄날씨 참 좋은데요. 행복한데 큰 재앙이 있고. 국내외적으로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용기를 냅시다. 어떻게 버텨내야 하니까요. 그래도 심각한 문제도 그런대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사시고 주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는 주일 저녁에도 강의가 쉽니다. 속사정은요. 한국 신학교 목회학 박사과정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두 주간 동안 제가 강의를 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침 9시 50분서부터 세 시간씩 오전 오후 세시간씩 하거든요. 그래서 주일 저녁에 올라갑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또 뵙겠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