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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13(81~87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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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절망의 끝에 숨어 있는 새로운 시작- 작은 희망론』(Im Ende- der Anfang, 곽미숙 역, 대한기독교서회) 강독 13(81~87쪽), 대구 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하면 될까요? 5년 감옥에 가야 될 사람을 집행유예로 지금 풀어주는 겁니다. 그럼 집행 유예 때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뭐 그 벌이 배가가 되겠죠. 몇 골 좀 밀어주는 거예요. 요거 정확한 비유는 아닌데 일단 의로워졌다는 게 실제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예수 믿어도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까? 아주 파렴치게 살지는 않지만 죄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만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말장난처럼 들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네 그런 그 가르침이 뭐냐 그걸 연구하는 게 칭의론입니다. 칭의론의 신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적 고찰 전통적으로 말한 게 지금 제가 드린 내용이에요. 아주 간략하게 말한 겁니다. 근데 거기 있는 한계가 뭐냐 그런 것들을 예 몰트만이
이야기합니다. 제가 안경을 조금 다른 걸 좀 바꿔야 되겠네요. 이게 책을 읽을 때 쓰는 건데 그러다 보니까, 제 화면에 있는 게 너무 또 초점이 잘 맞지 않아서 약간 거리에 있는 걸로 바꿨습니다. 몰트만이 요 앞에서 요 대목은 뭐 꼭 읽어야 되는 건 아니다. 지나가도 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통적인 개념인 거죠. 그니까 알고 있다고 전제를 하는 건데 뭐 몰라도 책 읽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 간략하게 좀 보겠습니다. 20세기 말에 일본에요. 로마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는 네, 그렇게 했습니다.
1900몇 년돈가 80 몇년돈가 1980 몇 년도로 제가 기억하는데 로마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는 공동의 입장 표명과 공공의 공적 확인을 통해 16세기에 있었던 칭의론의 신학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종교 개혁 시대죠. 분열된 두 교회의 과거를 극복하려는 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공동의 미래로 인도하지는 못하였다.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두 교회를 400년 동안 분리시켰던 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미래의 일치를 위한 전제가 되지만 아직 일치 그 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칭의에 관한 이론의 틀 안에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칭의론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는 보다 더 절실하고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2번 루터 교회의 칭의론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칭의론 이 가톨릭의 공의회예요. 그것은 16세기에 참회 성사의 실천에서 생성되었으며 참회 성사 뷰 수필 정확하지 잘 보이지 않죠 흐릿해서요. 제가 책을 보겠습니다. 뷰스 자크라멘트입니다. 이 죄를 참회하는 종교의식이라는 뜻이에요. 자크라멘트 그 일주일 동안 살다가 성당이나 교회 와서 용서받고
거 하는 거 있지 않습니까? 가톨릭에서는 신부 앞에서도 종종 하죠. 옛날에는 가톨릭 교회가 거의 매주 신부 앞에 가서 미사드리기 전에 사죄 성사를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뭐 자주 안 하는 거 같더라고요. 가톨릭 신자들도 1년에 한 번 최소한도 한 번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개신교에도 예배 시간에 고런 사죄의 기도가 있어요. 고건 인제 참회성사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쓰지 않는 용어예요. 이런 실천에서 생성되었으며 그때 그에게 주어진 기본 조건들에 얽매어 있다. 그러니까 칭의론이 이 참회 성사에 얽매어 있다는 겁니다.
이 개인이 일주일 동안 잘못한 거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는 거 요 정도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고 하는 겁니다. 네 다음 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예 79 쪽에요. 그에게 주어진 기본 조건들에 얽매어 있다. 고해자의 의자 에서 문제되는 것은 고해자 신부 앞에서나 아니면 우리 개신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의자 앉잖아요. 사죄 할 때 하여튼 그 자리를 뜻하는 겁니다. 거기서 문제 되는 것은 죄의 고백 제가 뭐뭐 잘못했다. 참회 마음에 참회 마음으로 그거를 뉘우치는 건 실질적인 회복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는 응
문제를 해결하는 사제의 용서의 말씀이다. 믿음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선한 업적이 필요한가에 대한 신학적 질문은 죄 용서가 선언될 수 있는 조건들에 관한 실제적인 질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가톨릭에서는 선한 업적이 필요하다고 하고요. 개신교에서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얘기합니다. 이런 질문은 서로 양쪽에 어떤 조건 죄 용서의 조건들에 대한 문제다 자 요건 그냥지나갈까요? 이건 예 그냥 지나가는 게 낫겠습니다.
요 대목에서 몰트만이 말하려는 핵심은 칭의론이 우리가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소서라는 그 죄의 극복의 문제에서 핵심이긴 한데 그래서 그러한 칭의론이 계속 기독교 전통 안에서 내려왔는데 가톨릭과 개신교회가 좀 차이가 있으나 한계가 있다. 그겁니다. 이전에 말했던 칭의론은 개인의 그 잘못한 거를 용서 받는 거 아니 요정도로 제한적으로 이해됐다. 라는 겁니다. 근데 그걸 더 확대해야 된다는 거죠. 자 그러면 어떻게 확대하냐? 81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왜 이 칭의론을 얘기하는지를 아시겠죠.
이 악에 우리가 굴복 당하지 않습니까? 악행을 행하는 자나 당하는 자 다 악으로부터 에 지배당하는 거예요. 거기에 이제 정의가 이루어져야죠 회복돼야 되죠 해방돼야 되죠. 그런데서 그리스도교의 칭의론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전통적인 칭의론은 개인의 죄에 그리고 고거를 위로 받고 뭐 하여튼 그래 사죄 드리고 용서받고 하는 그런 정도로 끝났다는 겁니다. 전통적 칭의론의 한계라고 하는 거예요. 한계를 뛰어넘어야죠 어떤가 한번 봅시다 81쪽으로 가면 됩니다. 칭의론은 의롭게 되는 게 핵심이에요.
의롭다고 인정받는 거니까 지금 저 여러분들 화면에 보는 거 고문장 맨 뒤에 봐라 그 80쪽 한쪽 앞에 5번부터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된 자들의 삶은 의롭게 된 난 자들의 삶은 단지 자기 자신과 연관된 지속적인 참회 이상의 것이다. 주일날 와서 내가 뭐 거짓말했습니다. 누구 미워했습니다. 고런 걸 계속 이어가는 것 이상이다. 그리스도교가 얘기하는 칭의는 훨씬 더 포괄적이다. 이제 그 화면 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예 그렇죠.
차원이 확대되죠. 하나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그의 뜻을 행하며 그의 나라를 희망하며 그의 영원한 존재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가득할 것이다. 에 칭의가 실제 삶을 역동적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생명 중심성이 확 살아나는 거죠. 그게 이전에 전통적인 칭의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 개인의 그 용서받음 에서부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뭐 주기도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 나를 희망하고 예 영화로운 그런 삶으로 가득하는 겁니다.
자 2번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 칭의 문제가 어디까지 확대되냐 하는 것을 우리는 요 2번 제목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디에서 정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우리 삶의 역사 어느 곳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의에 대한 문제들이 인식될 수 있는가 우리는 먼저 개인적인 질문들과 개체들의 관점들과 함께 이 문제를 시작하고 나서 구조적인 질문들과 개체를 초월한 관점들을 다루고자 한다. 예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들도 있고 국가와 국가 관계가 있고요.
또 생태 차원도 있지 않습니까? 예 거기서 이제 해결되지 않는 정의가 있는 겁니다. 이 경제 정의도 거기에 포함되는 거죠. 빈익빈 부익부 이런 거를 그대로 놔두면서 우리가 칭의 신앙을 말할 순 없는 거죠. 자 하여튼 그런 관점으로 요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읽으시면 됩니다. 1번 첫 번째 부르짖음은 불의와 폭력과 기만을 당한 희생자들의 부르짖음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부르짖음은 정의와 진리에 대한 외침이다.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그들에게서 정의가 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은 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다 20세기에
대량 학살당한 희생자들은 숨 막힐 듯이 처절하게 정의를 부르짖음으로써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를 짓누른다 압제당한.. 내전도 많구요. 그 아프리카나 등등 압제당한 민족들의 말문이 맡길 것 같은 신음을 통해 우리는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정의에 대한 인간의 굶주림과 목마름을 뼈저리게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악의 막강한 힘의 무력 무기력하게 넘겨진 깊은 심연으로부터의 부르짖음이다. 그러나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부리짖음은 단지 우리 시대에 일어난 인류의 엄청난 범죄들을 통해 고난의 경험들 속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량 학살 그런 것들을 보지만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든 우연이든 개인적으로 우연이든 아니면 숙명이든 질병과 사고로 점철된 일상생활의 경험들 속에서도 나타난다 오죽 많습니까? 자동차 사고도 많죠 에 요즘은 좀 덜해졌는지 모르지만 가정에서 학대당하는 분들도 많죠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과 아이들도 있죠. 일상 생활의 경험 속에서 부리짖음이 나타나는 겁니다. 네 그런 것들을 다 외면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칭의를 얘기해 그런거는 제한적인 거죠.
어떤 사람은 살아남고 어떤 사람은 죽게 되는 우발적인 사고가 과연 정당한 일인가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일이 과연 공평한 일인가 그게 정의로운가 그렇죠. 음..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은 죽고 뭐그런 얘기가 쭉 나갑니다. 예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 이게 전통적인 칭의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의
칭의론에 속한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회적인 차원까지 칭의 문제를 의로움이잖아요. 이건 정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정의롭다고 얘기 말씀하신다는 그렇게 선언하신다는 믿음이 칭의론이잖아요. 그게 사회가 어떻게 빈익빈 부익부를 넘어서냐 하는 것도 칭의에 관한 문제예요. 그 뭐 생각할 부분이 많죠 자 그런 이야기가 그 뒤에 82 쪽부터도 계속됩니다. 예 그건 접어 두겠어요.
여기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 거기서 그 82 쪽에 중간 2번을 한번 읽어봐야 조금 보겠습니다. 그 이미지 파일은 안 나와요. 첫 번째 부르짖음이 여기 나왔죠 그것은 희생당한 자들의 부르짖음 그렇다면 또 하나의 부르짖음은 앞에서 나온 걸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행악자들의 부리짖음도 있습니다. 하마 행악자들이 부르짖음이 뭐건 불쌍하지도 않지 근데 거기까지 가는 겁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칭의가 거기까지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2번 이렇습니다. 악을 행한 자들이 희생자들에게 덤벼들어 그들을 압제하고 제가 책을 읽어요. 굴복시키거나 또는 살해 한 연후에 자신들이 악의 하수인이 된 것과 폭력을 휘두르는 지배자들이 지배자들의 종이 된 것을 뼈저리게 인식할 때 오는 행악자들의 부르짖음이 두 번째 부르짖음이다. 이걸 부르짖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뭐 뻔뻔한데 무슨 부르짖음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 뻔뻔하지만 내면에서는 부르짖는 겁니다. 자기들이 악의 하수인이 된다는 것 그것을 아주 정말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신이상자입니다. 고 이야기를 해요. 83 쪽에도 한 문장 읽어보겠습니다. 행악자들의 무신성은 그니까 악을 행하는 것이 무신성인 거예요. 하나님이 생각하지 않을 때 그걸 악을 행하죠. 무신성은 인류에 대한 엄청난 범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서 그리고 일상생활 중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의 세력들에 의해 항상 미리 조건 지게 된다. 우리 무의식 속에서 악을 행하게 되니까. 그거는 이미 그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거니까 그는 악의 하수인인 거죠.
악의 하수인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정의롭지 않은 거죠. 그러면 그 그런 생각 행동 자체가 부르짖음입니다. 그 해방받지 못한 사람의 태도예요. 조금 더 읽어 볼까요? 특히 우리가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배제해 버리는 것들에 의해 특별한 방법으로 조건 지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그 그 자기 악을 행하는 거는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배제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억누르며 우리가 원치 않는 잘못된 행동을 유발케 하는 경우가 많다 예 비슷한 이야기들이 쭉 이어갑니다. 뭐 여러 가지로 설명을 잘하고 있어요. 그건 지나가겠습니다. 두 가지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이 여기 나와요.
하나는 희생당한 자들의 부르짖음 아벨의 피가 부르짖듯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또 가인도 사실은 부르짖는 자죠. 악의 노예가 되는 거니까 뻔뻔하게 한 것 아닙니까 그 두 번째가 행악자들의 무신성이에요. 하나는 희생자들의 미안한데 행악자들의 부르짖음이에요. 첫 번째는 희생자들의 부르짖음이고 악에 의해서 삶이 파괴되었습니다. 곳곳에서 우리는 그걸 경험해요. 에 두 번째는 행악자들의 부르짖음입니다. 악의 악한 힘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런 것들을 쭉 이야기합니다. 예 고런 정도로 지나가고 고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 대목에서 뒷부분 잠깐 보겠습니다.
86 쪽으로 가보십시오. 86 쪽 자 이미지 파일로 올리겠습니다. 지금 몰트만은 정의 문제 칭의 이런 문제에서 희생자들만이 아니라 행악자까지 끌어들여서 정의로워져야 된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말이 자꾸 와닿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다시 반복하는 말씀입니다. 희생자들의 억울함은 풀어줘야지 그래서 희생자들의 부르짖음 정의를 향한 분위 왜 나만 내가 이렇게 고통당하나 자기 잘못이 아닌데 선천적인 장애로 태어난 사람들 얼마나 그게 불공정합니까? 뭐 그것만이 아니라 으 노동 현장에서 희생당한 젊은이들도 요즘 많죠 아마 등등 그런 희생자들의 부르짖음 좀 정의로운 세상을 원한다. 그거는 마땅한데 행악자들의 정의로움 이건 행악자들의 부르짖음 뭐 건 그게 뭐 말이 되나
그 생각을 하겠죠. 근데 그들의 영혼이 악의 지배를 받는 거라서 결국 그들도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기도를 들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예 신을 부정하기 때문에 아예 그런 게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그들이 이렇게 실제로 하나님을 말하냐? 안 하냐는 중요하지 않은 거예요. 여기서 지금 몰트만의 이 그래서 말입니다. 고 보겠습니다. 위에서 넷째, 줄 끝 부분 희생자들은 고난 속에 절망적으로 내 던져지며 행악자들은 자신들의 죄과와 함께 홀로
남겨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부르짖음은 여기 존재하며 인생들이 내 던져진 역사의 경험들에 비판적으로 대항한다.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과 하나님 없는 자들의 하나님에 대항한 부르짖음을 결합하게 한다. 와 참 멋진 표현입니다. 오늘 중요한 관점을 우리가 배웠어요. 이 부르짖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던 자들의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 이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 수 있는 고런 대목입니다. 근데 하나님 없는 자들이 행악자예요. 행악자 그들의 하나님의 대항한 부르짖음 이 독일어로 보면은 느낌이 확 다가올 것 같은데,
우리말로 읽으니까. 약간 덜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과 하나님에 대항한 부르짖음 요게 대별돼요. 하나님의 대항하는 거는 당연히 행악자들이고 하나님의 향한 부르짖음은 희생자들입니다. 예 결합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의는 희생자만이 아니라 이 행악자들에게까지 해당이 된다는 걸 전제하고 읽으세요. 그 하나님의 의가 그런 차원입니다. 희생자들의 불의한 고난과 행악자들의 불법적인 행동 그리고 제도화된 악과 타협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의의를 그냥 내버려두면 이건 적당하게 하고 지나가는 거죠.
또한 것을 그것은 악을 더 이상 악이 아니라고 불의를 더 이상 불의가 아니라고 거짓은 더 이상 거짓이 아니라고 그리고 고난을 더이상 고난이 아니라고 명시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세상 어디에 정의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겠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이 세상의 암울함 속에서 비인간성들에 대항하여 항변하겠는가 이리하여 죄의 세력으로서의 악은 악의 종이 되어 버린 행악자들의 죄과 위에 군림하며 또한 악의 희생물이 된 자들의 권한 위에 군림한다. 예 계속 그때 대비되죠. 행악자들과 희생자들이에요. 요러면 요렇게 대비될 때는 원 독일어를 읽어야 확 의미가 다가오는데요. 그건 전치사가 중요하거든요.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이 향한 이고 하나님을 저항하는 있잖아요. 쭈곳 그리고 아끼겐 곳 이럴 겁니다. 전치사가 달라요. 악은 인 영혼의 질병과 인간의 내적으로 의존돼 있는 육체의 결함과 연관하여 그리고 인간이 외적으로 내던져진 역사의 우연과 숙명과 연관하여 하 6.25 전쟁 그런게 그런데 죽은 아이들이 또 얼마나 많이 청년들도 많고 그 다 우연과 숙명과 연관해서 일어나는 일들 아니겠어요. 삶의 역사 속에 서 있다. 죄는 죽음으로 향하는 공동의 질병이다. 예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세력으로서의 악과 거짓은 인간의 행악자들과 예 희생자들로 만들며 종종 희생물이
된 행악자들과 자발적인 희생자들로 만드는 그런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체질들 속에서 작용한다. 자 87 쪽 위에 나온 거 잠깐 읽고 요번 강독은 13강 마쳐도 되겠습니다. 앞에서 읽었던 거 이어지는 겁니다. 조금 흐리네요. 죄의 세력을 행악자들의 죄과로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의에 능력을 그들의 죄의 용서로 축소시키며 의롭다 칭함, 곧 칭의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것은 상당히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게 결론입니다. 고 대목에서요 정의를 향한 부르짖음이라는 2번 단락의 결론이에요.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 그리고 우리 죄에 요기에 제안해서 그 칭의를 얘기하는 것은 그건 충분하지 않다 희생당한 자들 행악자들 모두를 아우러내는 하나님의 칭의 하나님의 정의 이 차원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뭐 잘못한 것도 없고 뭐 다 용서하자는 얘기냐 그게 아니에요. 자 뭐 중요한 관점이었는데. 뭐 전달이 됐을 거로 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