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답시간(080601) 받아쓰기-하나님 경험

더불어숲 - 신영복 詩

나무 하나 잘 자라면 커다란 그늘이 된다
무더운 하늘이 무섭지 않다
나무  하나 손 내밀어 속삭이며 고백하기를
나는 너와 더불어 숲이고 싶다

더불어 숲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디며
아름다운 추억 그물망 되어
나는 너와 더불어 숲이고 싶다
나무가 나무를 만나
키 작은 나무들을 낳고 기르며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풀꽃들이
피고 지는 숲을 위하여

나무하나 손 내밀어 속삭이며 고백하기를
나는 너와 더불어 숲이고 싶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디며
아름다운 추억 그물 망 되어
나는 너와 더불어 숲이고 싶다

더불어숲

주일 잘 지냈셨어요. 6월 첫째 주일입니다. 기분 같아서는 촛불시위에 우리도 같이 나갔으면 좋겠는데요. 네. 이런 저런 사정이 있기도 하고 또 우리가 공부한 약속, 해야되기 때문에 오늘 여기 다시 인터넷에 앉았습니다. 일들이 점진적으로 잘 풀어져야 될텐데. 이명박대통령이 공연한 고집을 많이 피우는 것 같습니다. 그쪽을 생각하면 어떤 정치적인 입장 둘째치고 같은 기독교 공동체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좀 민망한 구석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구요. 오늘 우리는 일단 그러한 사회적 이슈가 불거져 있지만 접어놓고요.

어저께 제가 서울 오프모임에 갔다 내려오면서 시청앞에 내려서 그 덕수궁 3분 출구 지하철 나오서 한 3천정도 되나요. 다비아 촛불시위하는데 참석하고 왔는데 그 장면이 생생한데요. 동성로에서도 모임이 있을 것 같구요. 네 어쨌든 그러한 문제 잠간 접어두고요. 오늘은 한 시간 동안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저도 머리속에 이런저런 그림들이 많이 있어서 빨리 강의안으로 들어와야 되겠어요.

우리가 지난 두주간에 걸쳐서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었고 하나는 인간에 대해서 했습니다. 오늘은 이 두가지 다 묶는 이야기가 되겠군요. 주일 저녁에는 본강의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충시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두 주간에 걸쳐서 이 이야기를 같이 묶어서 하는 한번 이야기하는 시간이죠. 그래서 큰 제목으로는 하나님 경험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고 이 경험은 인간이 해야되니까요. 이 두관계가 되겠습니다. 하나님 경험이요.

이렇게 질문해야 되겠군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시나요? 오늘은 우리가 조금 진솔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질문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기독교 신앙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거나 혹은 자기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봤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신앙적 현상이예요. 실질적으로 들어가면 아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나라 부활 창조, 성서 믿음 칭의 성화 성만찬 세례 이루 헤아릴 수 없죠. 많은 기독교 신앙을 거의 알지를 못합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은 신학을 공부해야 하겠습니다만 정식 신학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느정도 기독교 신앙 연조가 깊으면 당연하게 생각해야 될 부분인데 별로 생각하지 않고 지나다가 결국은 텅 비어버린 그러한 신앙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속이 비어 있는 거예요.

이런 문제들은 여러분, 인격의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코. 신앙하고 인격하고는 어떤 부분에서는 비례하는 것은 있어요. 인격이 좋아야 신앙도 원만하다는 것인데요. 신앙의 본질로 치고 들어가는 그러한 것은, 그러한 태도는 인격이 좋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원만하고 괜찮거든요. 특별히 모난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면 대개 전반적인 한국교회신자들이 소위 말해서 평신도들이 괜찮습니다. 어떻게 교육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기본 바탕은 제가 보기에는 괜찮아요. 그런 문제들이 인격의 문제로 해결될 수 없는거거든요. 인격이 있다고 해서 신앙의 본질로 들어가는 거는 아니라는 것은 말입니다. 그렇게 주욱 신앙생활 하다보면 나이가 5,60, 70 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속이 비어 있어요. 아까 바로 말씀드린 그것입니다. 텅비었어요. 그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채워지지 않고 비어 있게 되면요. 결과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게 소위 쉽게 이야기하면 영성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빈곤. 이건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게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겠습니다만 젊었을 때는 출발이 비슷해요. 다 삶에 대해서 flexibility 하죠. 민감하게 반응하구요. 굳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큰 차이가 나고 늙으면 70, 80살 되면 그건 거의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한쪽 사람은 영성에 풍요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어떤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게 되거든요. 일반 삶에서도 그렇고 우리 신앙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영성이 빈곤해지면 허전해지는 거거든요.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내용이 채워지지 않는 신앙, 신앙의 형식이 있는데, 형식과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내용이 채워져야만 형식이 유지가 되는데요. 이런 것들이 잘 안되어서 결국은 형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신앙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두 가지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죠. 내용을 계속 채워나가고 풍요롭게 채워나가는 방식과 형식을 아주 딴딴하게 만드는 것 말이죠. 전혀 다른데 신자들이 그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 경험을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제가 그 질문이거든요. 우리 신앙의 내용을 채운다고 하는 측면에서, 인문학적 성경읽기 다비아의 기본적인 방향이 그거거든요. 이미 기독교의 형식은 그런것들은 기본적으로 주어졌으니까 내용들을 채워나가자는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앞에 제가 반복해서 강조했던 것처럼 신앙의 내용들이 너무 부실하다고 하는 것이죠. 사실 그렇게 부실해도 신앙생활 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어요. 이 세상 삶에 있어서도 삶이 뭐냐 죽음이 뭐냐 시간이나 그러한 늙음이라든지 일종의 철학적 질문인데요. 그런 것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잖아요.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찰나적이고 즉흥적이고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편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그러한 모습들은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솔직하게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대답해 보시죠. 하나님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경험하시나요? 경험하셨나요? 이 질문은 어저께 서울 오프에서 한 이야기와 연관됩니다. 어제 참가하실 분들에게는 조금 중복될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같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방향은 그렇습니다. 하나님 경험인데요. 어떻게 경험하십니까? 보통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거든요. 특히 복음주의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 거의 많이 그렇죠. 예수님을 영접해서 그 분을 모시고 뜨거운 마음으로 내가 산다. 그분을 모시고 전적으로 내 삶이 변했다. 그런 것은 좋습니다. 네 여기에도 함정은 있는거예요. 과연 그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가 누군가 하는 것이죠.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가. 그런 것에 대한, 물론 세례 문답받을때 우리가 전해 받은 거 있죠. 하나님의 아들, 보혜사, 다시 오실분, 대심판자, 인자 이런 여러가지 표현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의미, 신학적 의미는 모른 채 꼭 알아야 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좀 어려운 점이 있어서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다만 이런 예수님 영접이라고 할때는 대개 신자의 실존적 신앙체험, 이게 강조되는 거예요. 네. 실존적으로 저희가 예수님을 만났다고하는 거죠. 네 사실 보세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예수님은 2천년전에 계시던 분인데 그 분을 실제적으로 만나나요? 만날 수는 없는거거든요. 지금은 안계시니까요. 그 분은요.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물론 이 말은 그냥 어떤 것을 그냥 강조하기 위해서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삼위일체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것은 맞습니다. 그건 제가 뒤에 조금 더 설명을 하도록 할거구요. 예수님 영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다고 하는 가장 일반적인 신앙형태가 과연 정당하냐 아니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대개 실존적인 건데요. 실존적인 것은 어떤면에서는 심리적인 그런거요. 제가 대학교 다닐때 한창 CCC가 한국 대학교 청년운동에 뿌리를 내릴때였거요. 이때 그런 운동이 많아졌구요. 또 빌리그래함 목사의 전도 집회 그런 것들이 거의가 이런 방식들입니다. 이게 다 미국신앙이거든요. 개인의 회심을 강조하고.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근거로 한 도덕적 회심이라든지 하여튼 CCC있는 사람들이 많이 강조했습니다.

이런 것들이요. 심리적인 상태로 떨어질 때가 많이 있어요. 제가 심리적인 신앙의 위험성을 몇번 이야기했는데요. 우리 인간에게 심리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심리보다 더 중요한 부분들이 있는데 그걸 놓쳐 버리고 심리에 매몰되게 되는 하나의 위험성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청년들 같이 산상집회 많이 하잖아요. 거기가서 은혜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정신적인 억압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구요. 다 그렇다고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만요. 예를 들면 자기가 아버지와 갈등이 심해서 집을 뛰쳐 나왔던  사람이 산상집회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 순수성, 진정성들을 제가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예수영접이라고 하는 것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심리적으로 아버지와 심리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수단이 될 때가 많이 있어요. 이런 것들은 이미 뭐 니체나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비판을 많이 했구요. 다른 데서도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구요. 어 이상 말씀드리지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했다는 사실을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세요. 영접을 하려면 그분이 과연 그분이 누구인지 않아야 하잖아요.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고 그리고 그분을 우리 삶의 토대로 받아들이는 경험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것은 잘 모르고 예수가 누군지 들은 풍월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 믿으려면 그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런 것들이 정말 무엇인지 소상하게 알고 그 예수님을 믿은 건지 알고 간단하게 몇 마디로 그치고 그냥 내 마음의 심리작용이었는지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예수님을 영접하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이 또 이게 하나님 경험이라고 보통 애기들을 많이 하는데 또 어떤 때 경험하세요? 제가 이렇게 질문을 드리는 거는요.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그런 것들을 너무 쉽게 생각해버리고요. 하나님 믿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분의 구원사역이고 생명사건인데 그런 것들을 그냥 나의 주관적인 작은 경험 안에 딱 뭉쳐두고 말이죠. 요거에만 몰두해버리고 마는 여기에 축소되어 버리고 마는, 거기에만 집중해버리고 마는, 나에게 아까 아버지와의 심리적 갈등을 산상집회에 와서 해소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하는 어떤 청년들처럼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님 경험이라는 것을 앞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영접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을 많이 야기합니다. 확신을 많이 강조합니다. 도대체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실 구원이라는 것도 잘 모르면서 확신에 강조를 두거든요. 사실은 확신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우리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적인 확신이 아니기 때문에, 광신이 아니기 때문에, 확신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진리론적 해석, 혹은 진리론적 근거들, 이런 것 없는 확신은 좀 우스운 거죠.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거든요. 하나님 경험했다고 하는 것,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우리는 마음, 뜨거운 그러한 개인의 주관적 체험으로만 몰고 가거든요. 그래서 보통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든지 하여튼 그러한 공식, 하나의 형식이죠. 그런 것을 강렬하게, 강렬한 방식으로 신자들에게 주입시키는 그러한 신앙이 오늘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것이 어떤 진리론적 근거가 있는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이 외골수로 나갈 수 있는 위험성이구요. 영성입니다.

그걸 제가 경계하면서 우리 하나님 경험이 얼마나 확실하냐는 것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심리적인, 정서적인 부분들 때로는 그 사람의 약점을 타고 들면서 강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기독교의 가르침, 이런 것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거죠. 흡사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아놓고 건강식품 파는 것처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약점을 파고 드는 거죠. 아 당신들, 일단 즐겁게 해주고. 약을 팔때요. 아주 재미있고 즐겁게 해줘서 방어기ㄷ재를 다  해체 시킨 다음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솔깃하게끔 심리적인 장애요소들을 다 제거하는 거죠. 즐겁게 해주는 거죠. 그런 다음에 당신 아들 달들 믿을 필요없다. 지금 살아 있을때 당신들 건강 챙겨라. 노후 잘 챙겨라. 미끼를 던지죠. 그래서 건강식품 비싼 것 사게 하는 것하고 기독교 복음 선포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가끔 생각해봅니다. 이게요. 건강식품을 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중에 먹고서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거든요.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처음에는 솔깃하다가 나중에 내용이 채워지지 않으면서 속았다는 느낌이 많이 들거구요. 조금 더 나아가서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받은 그것이 속임수가 아니란 쪽으로 자기를 또 자기 세뇌라고 할까요. 심리적으로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보세요. 평생동안 헌금 많이 하고 고생많이 했는데. 그거 별로 그렇게 중요한 것 아니다. 그런 소리 들으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돈 한푼이라도 떼어 먹으면 하나님 도둑질한 거다 그러한 일종의 노이로제, 종교적인 노이로제 현상이죠.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아 그거는 유대인들의 하나의 생활 습관에서 나온 그들의 전통이었다. 오늘은 오늘의 방식으로 교회의 재정문제들은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방식으로 열어놓아야 한다면 그러면 그건 못견디는 거거든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진리에 대한 의식이 굉장히 빈약합니다. 그걸 용납하지 않으려고  그러면 자기 인생이 다 허물어질 것 것 같으니까 매달리고 집착하는 거죠. 어디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은 건강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 일종의 임상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강박관념이라든지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나 그러한 광신은 아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는 도덕적 회심이라든지 도덕성, 이런 것들은 제가 몇번 말씀 드렸는데요. 이미 말씀이 나왔기 때문에 연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회심, 이런 쪽으로 하나님 경험하려는 사람들도 있구요. 또 이런데 저런데 다 연관됩니다만 여러분들 어떻게 경험하십니까? 난 예수님 믿고 기쁨, 평화가 가득하다. 그런면 좋습니다. 어떠한 통로를 통해서 들어갔던지 여러분들이 평화, 기쁨 이런 것들을 심층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며 아마 그것이 하나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그런 기쁨이 얼마나 지속적인가. 그냥 진통제 먹듯이 그런 방식으로 잠간 즐겁다 마는 것이 아닌가? 평화라고 하는 것이 자기도취에 빠져서 자기 망상에 빠져서 돈키호테처럼 아주 망상적인 그러한 평화라는 것은 아닌가? 그런 질문을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됩니다. 왜냐하면 어러분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진리의 문제인겁니다. 참된거라고 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는 그 근거가 과연 진리인가 아닌가 이걸 질문해야 하는거예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은요. 그러한 진리에 대한 질문, 진리론적 근거를 찾지 않으면서 살 수 있어요.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무슨 예를 들을까요? 공산주의 옛날에요. 그들이 그것을 종교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게 진리론적 차원에서 보면 허구가 많이 있는데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매달리게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이비이단들 역시 진리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물론 자기들은 진리라고 이야기하죠. 자기들이 일반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하고 진리론적 해석, 진리론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 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네. 의처증 걸린 남편, 혹은 주기적으로 가족을 구타하는 아버지나 그 남편과 살면서도 아 나는 행복하다 아 기쁘다 그렇게 말하는 여자가 있다면 모르겠어요. 그런 기쁨과 그러한 경험들이 그 여자에게는 그렇게 경험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는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죠.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 경험, 그리고 그러한 믿음들이 과연 진리의 차원에서 옳으냐 그르냐는 질문은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죽을때까지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차원에서 질문을 해야 할까요? 또 그리고 어떤 근거를 찾아야 할 까요? 판넨베르크가 말하고 있는 부분을 여기서 조금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그거는 이책이예요. 사도신경해설, 네 색깔이 주홍글씨라서 글씨가 잘 안보이죠. 판넨베르크 사도신경해설, 요즘 제 시간 있을때 다비야 사이트에 한장 한장 올리고 있습니다. 5장까지 올렸나요. 1장이 나는 믿습니다는 거거든요. 우리 다비아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이런 좋은 것들은 잘 읽지 않으시네요. 이런 것들이 참 좋은데. 기회가 있으면 모르겠습니다. 후반기에 제가 계속할지 않을지 어떨지요. 동영상 말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딱 정해놓고 하는 것은 힘들 것 같아요. 여러분들도 시간을 맞추어서 들어오는 것도 힘들고 저도 6월 한 달만 더하면 되는데 이렇게 6개월동안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하려니까 조금 힘들어요. 다음에는 제가 정해진 말고 제가 자유롭게 녹화를 해서 올리는 방식으로 할까? 아니면 당분간 쉴까? 이런 생각입니다. 어쨌던 하게 되면 사도신경해설을 해볼까 이게 참 좋은 책이니까?

여기에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제1장 중간쯤에 판넨베르크가 기독교의 신뢰 문제, 신앙문제 믿는다고 하는 그 사실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해요. 기독교 신앙의, 우리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죠.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죠. 우리가 하난미 이런 것들 기독교의 가르침 참되다고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어떤 근거가 있느냐? 무턱대고 믿으면 진리론적 근거가 희박하니까요? 어떤 근거가 있느냐? 세가지 차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드라구요. 사실 좀 정확하게 읽으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참됨에 대한 인식이, 진리예요 세가지 지평에서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진리인식과 믿음이 세 가지 지평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첫째는 현존 세계안에 있는 가시적인 근거, 현존 세계안에 있는 가시적 근거, 이게 오늘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오늘 들어오지 않았던 분은 손해일거요. 다른 강의보다 판넨베르크 선생의 요 대목을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영양가가 높습니다. 현존세계에 있는 가시적 근거, 이게 바로 우리의 진리인식과 믿음이 연결되는 세 지평 중에 첫번째, 하나입니다. 이거는 창조의 세계구요. 그리고 역사적 예수, 역사문제지요. 역사적 예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이거는 하나님이 만든 세계죠. 그리고 지금 창조가 유지되는 것은 성령의 활동이시죠. 그리고 예수가 살았던 역사가 분명히 있지요. 예수, 창조의 하나님, 창조를 유지하는 성령, 삼위일체적론인 관점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현존의 세계, 그 근거들, 이게 우리가 믿는 대상이 진리라고 하는 것을 설명해야 될 근거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 이야기가 좀 신학적 표현인데 이해가 되시죠. 정말 중요한 겁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안에서 자주 듣지 않던 개념이라 낯설 텐데요. 이런 것들이 일상적으로 아주 쉽게 여러분 생각 속에서 정리가 되어야만 여러분들이 신학의 세계속으로 들어갈 수 있구요. 그렇게 영성이 풍요로워 질 수 있습니다. 신학과 영성은 일치되는 거예요. 이 문제를 빨리 우리가 극복해야 되는데요. 이 문제를 사람들이 신학은 자꾸 이론적이고 딱딱하고 관념주의고 영성 믿음 이런 것들은 정말 실질적이다 이야기하는데 코메디 같은 이야기입니다. 신학적 통찰이 없으면 제가 보기에는 영성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어요.

제가 여러분들과 같이 6개월동안 시간을 같이하고 있는데요. 아마 낯선 개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꾸만 듣다보면 여러 상황에 따라서 다른 경우에 그 용어들이 반복되잖아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을겁니다. 창조, 이거는 성령과 하나님이 되는 문제구요. 예수 역사의 문제, 이러한 세계, 창조세계와 역사문제를 우리가 등한히 하면 안되죠. 그안에서 왜 기독교 신앙이 바라고 있는 신뢰하고 있는 대상이 옳은가 그것을 설명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가시적인거죠. 이건 분명하게 우리앞에 놓여 있는 거죠. 창조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귀를 기울어야 되구요. 역사의 문제는 역사, 사회, 인문학자 철학자들이 역사를 이야기하잖아습니까? 여기에 근거해서라도 하더라도 하나님과 성령과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해명할 수 이어야 합니다. 쉴레징어하든지 하이덴베르크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양자역학에서 볼때 성령이 왜 근거가 있는지 이런것까지 오늘 현대신학이 오늘 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데까지 우리의 기독교 해명이 놓여져야 되는거죠.

교회에서 그런것 안하죠. 이게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주관성안에 매몰되어있다고 하는 증거합니다. 기껏해봐야 우리는 매일 기도한다고 하고요. 기도도 자기확신이구요. 우리의 기도가 드려야질 그 대상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이요. 계속 자기애예요. 이건 반복 드린 말씀입니다만 할 수 없어요. 그게 깨어져야만 여러분들이 신앙이 새로와지니까요. 자기 연민이예요. 틀림없습니다. 신앙의 모습들이 다 여기에 놓여 있어요. 어린 청년들은 예민하니까 더욱 그렇고 청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이든 사람 모두가 다 자기연민, 자기 개교회주의도 자기 연민이거든요. 우리 교회만이라고 하는 것 자기 중심이거든요. 이게 죄예요. 성서에서 말하는 죄, 하마르티아가 자기중심성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한 우리는 성령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하더라도 자기의 심리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창조와 종말과 개방적인 역사를 향해서 개방적인 그러한 하나님, 삼위일체의 한 존재방식인 성령과 소통은 아닌거죠. 네 참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상당이 풍요로운 거예요. 그리고 우주론적입니다. 빨리 여러분 눈치를 채셔야 되요. 자기 혼자 자기 안에만 머물러 있어갖구 마마보이처럼 어머니 치마폭에 사여 있는 상태로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기독교 신앙생활하는 것이요. 가시적인 근거다.

두번째 이러한 가시적인 근거에 의해, 거길 토대로 해서 우리의 신뢰가 실제로 관계되어 있는 불가시적 현실성. 네 조금 이거 어려운 말이죠. 우리가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다는 거는요. 껍질을 깨고 자꾸만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러한 용어들이 좀 낯설어도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길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힘들더라도 이걸 뚫고 나가야 됩니다. 불가시적 현실성, 여기를 visible ground 그라운드라고 한다면 여기는 Invisible real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시적 근거는 꼭 필요합니다. 창조된 세계, 현존 세계와 역사의 문제, 이거를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해명하는 근거로 삼아야 되는 거구요. 이걸 토대로 해서 우리 기독교 신앙이 실제적으로 불가시적 현실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놓치면 안됩니다. 이 부분을 판넨베르크가 불가시적 현실성, 여러분들 느낌이 오죠? 보통 사람들은 가시적이어야 확실하도 생각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가시적 근거도 들지만 불가시적, 불가시적이라고 해서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 우리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제한적인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오감을 벗어난 것을 없다고 생각하면 곤란하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오감안에 들어오지 않는 불가시적인 그러나 확실한 것 리얼리티죠.

이거를 다시 세가지로 나눠어야죠. 삼위일체론적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서 말씀드렸죠. 불가시적 현실성, 비. 대비되는 것 아시겠죠. 가시적 근거와 불가시적 현실성, 여기는 하나님의 현실성, 오늘 아 정말 신학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현실성은 불가시적입니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요. 성경구절이 어디인지 제가 끄집어 내지 못하겠어요. 강의 듣는 분중에서 아시는 분은 쪽지로라도 보내주세요. 제가 꼭 필요한데. 그거를 제가 기억을 못하겠어요.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그거는 우리가 이 땅의 생명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간접적인 거예요. 하나님은 현재 불가시적입니다. 불가시적인 창조자시고 종말에 완성하실 그 하나님, 설명을 더 해야 되겠군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경험할 수 없다는 그 말은 요. 창조 시작부터 종말까지, 종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씀드렸구요. 창조와 종말 이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구요.

하나님은 요 전체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사람이 우리는 지금 요거만 경험하잖아요. 요거는 일부잖아요. 일부를 갖고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요. 호랑이 털 하나 경험하고서 고거 갖구 호랑이를 안다고 하는 것은 우습죠. 그거와 같습니다. 우리의 경험은요. 하나님의 현실성은 불가시적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거는 막연하다 추상적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서만 자기를 나타내시는 분이라고 하는 그거를 의미하는 거죠. 그러한 하나님의 현실성.

두번째, 삼위일체론적인 면에서는 두 번째 누가 나와야 되요?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에 계시던 분인데 지금은 들림을 받았습니다. 들림받은 예수의 현실성, 역사안에 계실 때는 가시적인 근거에요. 무슨 일 하셨나? 공생애 동안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승천 우리는 이것을 들림받았다고 하느거예요. 다른 생명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는 거구요. 그러니까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거구요. 당연히 이거는 불가시적인거죠. 들림받은 예수님의 현실성이구요.

세 번째는 당연히 누가 나와야 되요? 성령이죠. 판넨베르크의 말을 그냥 직접 인용해야 하겠네요. 책을 봐야 하겠네요. 제가 요약한 것은 정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번째는요, ‘교회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거와 같이 비밀이 충만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입니다.’ 성령의 현실성, 여러분들이 저와 같이 강의를 하고 듣는 자주 듣는 용어가 있었을텐데 그중에 하나가 현실성이죠. 요거만 여러분들이 6개월 동안에 전해 들었어도 여러분들이 수강료 낸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은폐성, 우연성 이러한 이야기들이죠. 또 뒤에 이야기를 해야될텐데. 생명, 이런 문제들 있죠.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이중에서 몇가지만이라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면 그러면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령의 현실성인데 이거는 교회에 물론 교회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교회안에서 비밀 가득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 불가시적인거죠.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들입니다.

지금 제가 전체적으로 말씀드린 흐름을 이해하시겠죠? 기독교의 하나님 경험이라고 한 것이 그냥 내가 믿습니다해서 자기 확신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론적 근거를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광신주의 가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다른 신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우리의 믿음이 진리인식과 세 가지 차원에서 연관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중이예요. 첫번째 가시적 근거, 창조한 세계, 우리 역사 이런 문제에서 우리 진리 인식과 믿음이 만나야 되어야되요. 그런 것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가시적 현실성입니다. 오늘현실의 삶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리얼하게 작동하고 있는 세 현실성이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비밀충만함, 들림받은 초월적인 성령, 이러한 기독교 인 독특성, 다른 것도 독특하기도 한데요. 여기는 조금 일반적인 거죠. 가시적인 거니까 과학자나 역사학자나 인문학자들도 다 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거는 기독교 신앙만이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거는 조금 더 보편적 영역이라고 한다면 이거는 기독교 독특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이야기를 해야되죠. 불가시적연현실성, 이게 두번째 였었구요. 세 번째 지평이 뭐냐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신뢰는-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겠죠. 우리의 믿음을 이야기하겠죠-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조금 말이 전달이 쉽지 앟죠. 우리가 의지할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한다. 아 이거를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첫 번 째는 가시적 근거, 불가시적인 현실적, 제가 의역으로 해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설명하겠습니다. 미래적 희망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요. 아마 이런 것을 의미할 겁니다. 판넨베르크가 말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의지할 만한 것에 대한 확신을 기대하는 것과 연관된다.

이게 사도신경에서는 세 가지 항목으로 나온다고 하네요. 하나는 죄의 용서, 두 번째는 죽은 자의 부활, 세 번째는 영생, 사도신경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할만한 것들에 대한 확신을 기대한다. 일종의 이거는 일종의 기대하는 건데요. 나중에 일어나게 될, 지금은 아직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인정받는 거죠. 실제적으로 용서받았다고 믿기는 힘들죠. 우리가 세례 받아도 또 죄를 짓잖아요. 이게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는 겁니다. 궁극적 죄의 용서는 마지막 심판때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이미 그것이 우리들에게 세례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지금 우리는 믿고 있는데 이미 우리들에게 성취되었지만 아직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구요. 그거는 종말론적으로 우리가 그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자의 부활, 죽은자로부터의 부활,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건데요. 아직도 우리는 부활을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것으로 희망하고 있을  뿐이지 부활의 실질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영생도 마찬가지구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지 그게 뭔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영원하다고만 말한다면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냥 영원하다고 하면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그리고 영원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들에게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계속된다고 하는 것이 뭘까요? 그러니까 이 영생은 무조건 계속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이야기할 겁니다. 참된 생명.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한 것은 유한하구요. 잠정적이고 불완전하잖아요. 그걸 뛰어넘는 생명을 가르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제 기대하는거죠. 이런 것들의 어떻게 우리의 신앙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여기서 설명해 낼 수 있느냐 하는거죠. 설명이 잘 되었나 모르겠네요.

첫 번째로 다시 돌아가서요. 이거는 가시적 근거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시제상으로 보면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된거니까. 가시적 근거, 이 세상이 이미 이렇게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불가시적 현실성에 대한 것, 이거는 현재의 심충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이거는 미래에 대한, 과거, 현재, 미래, 전체. 제가 시간으로 그렇게 구도를 짜보았는데 판넨베르크라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지 아닌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말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이러한 형식으로 구분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씀드린 거예요.

고거는 고정도로 두고요. 제가 사실 이 전체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경험을 하느냐 그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경험하세요? 질문이 들어왔군요.

사람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비밀충만한  심층적 차원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현실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뭐예요? 뭘까요? 모든 교회의 삶이 그렇죠. 모든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요. 오늘 저희 교회에서 성만찬을 했는데요. 매월 한번씩 합니다. 떡과 포도주, 그게 어떻게 예수의 몸과 피냐? 우리는 그렇게 신뢰하고 받아들입니다. 그거는 심층적인 차원을 이야기하는 거죠. 하나님이 몸을 입으셨다고 하는, 성령이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심층적인 생명경험을, 혹은 구원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 습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도 많이 있고 하겠습니다만 그러나 교회 본질중에 하나가 성령의,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 또 성령의 친교인가요? 지금 제가 다른 생각하다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런 것처럼 성령의 친교, 성령이 우리의 교회의 삶에 심층적으로 활동한다. 싸우고 볶고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네 전체 지금 설명하는 것이 다 이게 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경험하느냐 그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세요? 그건 아까 제가 몇가지 말씀드렸어요. 예수의 영접, 회심 변화, 도덕적 변화, 평화 그런 것 하나의 형식들이구요. 실질적으로 여기서요.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다고 하는데요. 그걸 느끼나요. 감정으로만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것, 그걸 얼마나 우리가 리얼하게 인식하고 경험하느냐는 겁니다. 예배시간에도 그게 없으면 우리는 집중할 수 없어요. 예배드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시죠
예배 순서들도 다 사람들이 앞에 나서는 것들이죠. 이게 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자기 과시 일수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면 들으면 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독서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약간만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집중하지 못하고 그렇습니다. 하나님 경험도 그런거거든요. 그걸 우리가 그냥 믿음만 좋으면 좋치. 믿즐겁게 살고 봉사하고 그렇게 살면 되지. 그런 정도로 넘어가지 말구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뭐 삶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고 쉽게 쉽게 큰 문제 없이 살아도 큰 문제는 없는데 우리는 인문학적 성서읽기이기도 하구요.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자는 차원에서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일종의 영성가가 되어야 되니까요. 신비주의자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것에 직면하자는 거죠. 삶과 죽음, 시간 이런 것들이요.

하나님 경험이 어떠냐? 앞서 말한 것들은 형식들이구요. 실질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내 옆에 아니면 나와 동시에 지금 여기에 제가 강의하고 있는 이 작은 방안에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함께 하신다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거죠? 뭘까요? 대답이? 어떻게 경험하세요? 그것은 생명경험입니다. 하나님 경험과 생명경험은 일치한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듯이 생명도 우리들에게 전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가서야 부활이 우리들에게 직접 경험될 때야 우리는 생명이 뭐냐 하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게 이렇게 잠정적이고 무상한 지금 이 생명에 어떻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이 개입해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들어와 있는가도 그때가면 다 알게 된텐데요. 그러나 지금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하나님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듯이 생명도 부분적으로 아는데 결국 이 두 가지는 일치한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 경험은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자꾸 관념적으로 생각하시니까 제가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너무 막연해. 하나님이 입에만 붙어있어요. 느껴지지가 않아요. 느껴져봐야 자기의 개인적인 어떤 경험, 간증류의 뭐 안되었던 것이 되었다든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한다는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럴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 경험할 때 아버지가 용돈을 주면 군것질 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경험했다고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건 아버지 어머니 경험이 아니잖아요. 거기에만 만족한다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그리고 그런 훈련도 아예 되지 않구요. 좀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속으로 들어가자. 그렇다고 해서 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뭐냐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하는 거죠. 오늘 우리가 다 이것을 다 할 수 없구요. 벌써 시간이 지났군요. 하나님과 생명 그렇게 화두만 던지는 것으로 끝나도 될 것 같습니다. 이건 뭐 한두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 숨을 쉬죠? 루하흐. 숨이에요. 인간관계 악수하구요. 접촉하면서 인간애를 느끼는 것도 생명 경험일수도 있구요. 여러가지 많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이 있겠죠. 우리가 지난 두주간 공부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흙과 영이라고 했는데요. 이 두개가 같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통전적 관계, 생물학적인 단백질적이 우리 인간의 몸이구요. 이런 것들을 초월하는 힘들인데요.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을까요? 계속 그런 질문이구요. 두가지 속성들, 다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성격으로 볼때요. 이런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 생명 경험이 하나님 경험이예요. 출애굽 엑소더스 사건있지요. 유대인들이 왜 그것을 역사적으로 보존해 왔겠습니까? 그게 자기들의 살아간다는 경험인거요. 생명은 삶이죠. 쉽게 생각해서 살아있다는 거죠.

살아있다. 뭐가 살아있는가 생각해보세요. 이거 질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이야기를 했는데 바위덩어리가 있다 이거는 생명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럴까요? 바위는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까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우리가 전제한다면 위의 오감속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일뿐이지 우리가 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 후손을 번식하는 방식으로만, 뇌와 신경이 살아있는 것만으로 새명을 축소시키느냐 하는 거죠. 거기까지 나갈 필요 없고. 그냥 두고요. 생명을 이 자리에서 늘 호흡하듯이 진지하게 리얼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생명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삼위일체론적이잖아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오늘 우리 오늘의 역사에 심층적으로 활동하는 성령, 생명의 영인데 전체적인 관계속에서 생명을 아주 구체적으로 그러나 세속적이지 않고 물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생명의 차원으로 돌입해야 됩니다. 그게 영성이예요.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말이죠. 네. 하나님의 경험이 당신이 우리의 낭만 로맨티시즘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이 안되는 것 되게 하는 긍정의 힘이라는 든지 이런 방식의 자기확신도 아니다. 진리의 문제, 이런 쪽으로 우리 신앙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심화해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촛불집회 때문에 마음이 그렇구요. 하여튼 이명박 대통령이 곧 시국담화인가 뭔가 한다고 하니까요. 쇠고기 재협상한다카고. 국민들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부시하고 싸우는 것이 낳지 않겠습니까? 그런 쪽으로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네. 여러분들 한주간 잘 보내시고 다음 목요일 날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아 동영상을 하지 못했네요. 카메라를 하 거참. 카메라를 설치만 해놓고 돌리지 않았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저런 것도 놓칩니다. 혹시 누가 영상으로 담아둔 사람이 있으면 연락주세요. 캠코더를 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