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창세기 읽기 오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창세기 1장 20절부터 시작합니다. 23절까지 다섯째 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쭉 읽어보겠습니다.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저런 문장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사람은 어떻게 깨달을까,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이미 말씀드렸겠지만 지금 녹화하면서 제가 말을 하고 여러분들이 소리로 듣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람이 듣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은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무엇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라고 느끼는 걸까요?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자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종교 언어라는 걸 꼭 기억하십쇼. 상징 즉 메타포에요. 신학 용어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것을 깨달은 어떤 저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이어질 겁니다. 그 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저렇게 쓸 수도 있지 않냐. 물론 그럴 수 있어요.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엉터리들이 훨씬 많죠. 성경이 옳은가 아닌가 그걸 검증해야 합니다. 검증받아야 해요. 검증받아서 살아남은 게 66권 신구약 성경입니다. 처음부터 66권이 저렇게 있었던 게 아니란 건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외경도 있고 위경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면 자꾸만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시적으로 이해하십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만물을 만드셨다, 이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을 쓸 때는 저자가 그가 살고 있었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빅뱅을 몰랐을 거고, 진화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 시간에서도 몇 번 나온 표현인데 그래서 “물”이 그렇게 강조가 되는 거예요. 이건 물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빛은 없어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데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고대인들은 특별히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물을 더 근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이 저 바닷속에도 있고, 그 당시에는 우주가 삼층으로 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지하요. 지하를 직접 파고 들어갈 수 없으니까 바다를 보면 알잖아요. 저 깊이 모든 게 물이에요. 밑바닥도, 하늘 공간 위에도 물이고. 이 사이에 궁창이 있는 거에요. 물이 본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은 우리가 저 우주에 물이 있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거기는 흑암 물질이 있어요. 그 당시 우주관으로 볼 때 물이 핵심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물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생물학적으로 정확한 이야기에요. 물이 생명의 밑바닥이니까요. 물이 없으면 안되니까요. 여러분들이 다 아시듯이 생명체가 바다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물고기가 나오고 조금씩 진화돼 왔습니다. 진화론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진화론을 전혀 몰랐던 고대 창조 전승에 속한 유대 어떤 저술가는 물을 이미 뚫어본 거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렇게 시적으로 표현하죠.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바다가 나오고 물이 또 나오죠. 앞장에서도 물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가 창조됩니다. 창조 초기에도 보면 첫째 날 빛이 있기 전에 수면이 나오잖아요, 물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저 위에와 밑에가 다 물이에요, 가운데 궁창이 있어서 물과 물로 나뉘게 하셨다, 그 당시 우주관이 저랬습니다. 물에 대한 강조가 창조 이야기에 반복되고 있어요. 계속해서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면 정말 좋은 거죠. 우리는 좋지 않게 보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 포악한 짐승들 징그럽거나 보기 흉한 것들, 이런 것들이요. 저도 시골 일반 주택에 사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봅니다. 바깥에서도 많이 보지만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봐요. 2013년 2월에 이사 왔나, 환갑 때 들어와서 칠십이 됐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니까 벌레들이 좀 덜 들어오네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벌레들이 많이 집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내는 질겁을 하죠. 딸도 기겁을 해요. 나를 부릅니다. 본인들이 해결하면 좋은데. 우리들이 볼 때 좀 징그럽다거나 상쾌하지 않은 거라도 다 좋은 거다 생각해야 되겠어요.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모든 것들에게 복을 주셨잖아요. 바다 짐승들, 공중에 새들, 다른 것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어류와 조류를 창조했습니다.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마지막 하루가 남았죠. 마지막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 볼까요?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진화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네요. 진화에서는 바다의 생물들, 땅의 것들, 기어다니는 것들, 그 다음에 새가 나오잖아요. 여기서는 공중의 새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24절, “가축과 기는 것도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흙, 땅, 물, 공중 이런 우주가 생명체를 내는 거죠.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형상과 모양이 비슷한 단어잖아요. 철학적으론 다른 거죠. 형상은 어떤 모양을 가리킨다기보다 본질을 가리킵니다. 형상과 질료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개념에서 질료는 기본이 되는 물질이고 형상은 본질을 가리켜요.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의 재료인 나무는 질료죠. 책상이라고 하는 자체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상 형태 그건 모양이고요, 본질은 형상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모습이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태가 아니라 본질을 얘기하는 거예요.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조 이야기에는 계속 복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면서 생명체들에게는 복을 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사람들에게 특별히 정복하라는 명령을 더 주십니다. 이런 말들이 오해될 수도 있죠.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같은 데 식민지 만들면서 말씀을 따랐다 이렇게 말하면 곤란한 거죠.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정복해야 될 때도 있고 다스려야 될 때도 있는데 섬기라는 의미가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에게 복을 줬고 충만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일을 하는 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거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가 복을 받고 번성하면서 충만하게 되도록 사람이 특별한 역할을 하는 거, 이게 바로 정복하라는 의미이고 다스리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사람에게만 준 명령이에요.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비슷한 생명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본능도 비슷하게 있어요. 먹어야 되고, 남녀 관계를 가져야 되고 후손을 가져야 되고 등등 비슷한 게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도 많죠.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다르긴 합니다.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하니까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인간만 자연에 예속되지 않아요. 다른 모든 동물들은 자연친화적입니다. 자연과 일치가 됐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시간도 없어요. 인간은 자연에서부터 소외된 겁니다. 자연과 같이 돌아가지가 않아요. 고독하고 의심하고 걱정되고 두려워하고 그렇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속성에 의해서 땅을 정복할, 다스리라, 이런 명령을 고유한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인간론 문제는 한두 마디로 정리할 문제는 아니에요.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보세요, 모든 먹을거리가 기본적으로 채소네요. 채식주의가 이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맞는 겁니다. 동물들을 주면서 이게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는 얘기는 안 하시잖아요. 동물들, 짐승들은 물고기부터 새와 모든 짐승은 복 받고 번성해야 되는데 채소는 먹을거리로 준다고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네요. 채식주의 실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전문가들 얘기 들어보니 그 방식으로 건강이 유지되지 않는다 얘길하네요. 동물성 단백질도 우리 몸에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오랜 진화에 따라서 우리 몸이 그렇게 최적화된 것 같습니다. 채식주의로 실천하기는 어려운데 동물복지만은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죠. 29절만 본다면 채식주의가 맞아요. 30절,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새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다른 짐승들에게도 기본적으로는 먹을거리를 주시는 거죠. 창세기 이 대목을 여러 번 읽고 공부도 하고 했는데 우리에게 먹을거리로는 채식만 줬다는 거는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꼭 그렇게 살라는 말씀은 아니에요. 창세기 1장을 근거로 해서 육식은 맞지 않는 거죠.
31절, “하나님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니라”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이 다 끝납니다. 좀 특이한 게 여섯째 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맨 나중에 창조하셨다고 기억하잖아요. 앞에서 많은 게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 가축, 기는 것, 짐승들이 같이 창조됐어요. 우리와 같은 날 된 겁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동물 만들고 같은 날에 사람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몇째 날에 뭐를 만들고 어떻게 했다, 그거 기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다. 창조된 세계는 아름답다. 번성하고 충만해야 된다. 그 모든 생명체가 복되게 살도록 특별한 역할을 해야 될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이 이야기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강의는 맥락과 상관없이 한 번 크게 웃었는데요,
스님들의 채식주의와 사리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신 부분요.
본문 받아적기에서는 제가 임의로 삭제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들어보셔요.ㅎㅎ
안녕하십니까? 창세기 읽기 오늘 세 번째 시간입니다. 창세기 1장 20절부터 시작합니다. 23절까지 다섯째 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번 쭉 읽어보겠습니다.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저런 문장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사람은 어떻게 깨달을까, 알아들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이미 말씀드렸겠지만 지금 녹화하면서 제가 말을 하고 여러분들이 소리로 듣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사람이 듣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표현은 성경에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무엇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라고 느끼는 걸까요?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자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종교 언어라는 걸 꼭 기억하십쇼. 상징 즉 메타포에요. 신학 용어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시는 거예요. 그것을 깨달은 어떤 저자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이어질 겁니다. 그 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저렇게 쓸 수도 있지 않냐. 물론 그럴 수 있어요.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엉터리들이 훨씬 많죠. 성경이 옳은가 아닌가 그걸 검증해야 합니다. 검증받아야 해요. 검증받아서 살아남은 게 66권 신구약 성경입니다. 처음부터 66권이 저렇게 있었던 게 아니란 건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외경도 있고 위경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면 자꾸만 문자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시적으로 이해하십시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만물을 만드셨다, 이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이것을 쓸 때는 저자가 그가 살고 있었던 세계관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빅뱅을 몰랐을 거고, 진화가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 시간에서도 몇 번 나온 표현인데 그래서 “물”이 그렇게 강조가 되는 거예요. 이건 물리적으로 옳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빛은 없어도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데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고대인들은 특별히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물을 더 근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물이 저 바닷속에도 있고, 그 당시에는 우주가 삼층으로 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지하요. 지하를 직접 파고 들어갈 수 없으니까 바다를 보면 알잖아요. 저 깊이 모든 게 물이에요. 밑바닥도, 하늘 공간 위에도 물이고. 이 사이에 궁창이 있는 거에요. 물이 본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은 우리가 저 우주에 물이 있다고 누가 생각합니까. 거기는 흑암 물질이 있어요. 그 당시 우주관으로 볼 때 물이 핵심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물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20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생물학적으로 정확한 이야기에요. 물이 생명의 밑바닥이니까요. 물이 없으면 안되니까요. 여러분들이 다 아시듯이 생명체가 바다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물고기가 나오고 조금씩 진화돼 왔습니다. 진화론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진화론을 전혀 몰랐던 고대 창조 전승에 속한 유대 어떤 저술가는 물을 이미 뚫어본 거죠.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저렇게 시적으로 표현하죠.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바다가 나오고 물이 또 나오죠. 앞장에서도 물을 중심으로 해서 우주가 창조됩니다. 창조 초기에도 보면 첫째 날 빛이 있기 전에 수면이 나오잖아요, 물이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저 위에와 밑에가 다 물이에요, 가운데 궁창이 있어서 물과 물로 나뉘게 하셨다, 그 당시 우주관이 저랬습니다. 물에 대한 강조가 창조 이야기에 반복되고 있어요. 계속해서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면 정말 좋은 거죠. 우리는 좋지 않게 보는 것도 있잖아요. 우리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 포악한 짐승들 징그럽거나 보기 흉한 것들, 이런 것들이요. 저도 시골 일반 주택에 사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봅니다. 바깥에서도 많이 보지만 집안에 들어오는 것도 봐요. 2013년 2월에 이사 왔나, 환갑 때 들어와서 칠십이 됐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니까 벌레들이 좀 덜 들어오네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벌레들이 많이 집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내는 질겁을 하죠. 딸도 기겁을 해요. 나를 부릅니다. 본인들이 해결하면 좋은데. 우리들이 볼 때 좀 징그럽다거나 상쾌하지 않은 거라도 다 좋은 거다 생각해야 되겠어요.
22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모든 것들에게 복을 주셨잖아요. 바다 짐승들, 공중에 새들, 다른 것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날에는 어류와 조류를 창조했습니다.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마지막 하루가 남았죠. 마지막 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따라가 볼까요? 24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진화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네요. 진화에서는 바다의 생물들, 땅의 것들, 기어다니는 것들, 그 다음에 새가 나오잖아요. 여기서는 공중의 새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에 24절, “가축과 기는 것도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흙, 땅, 물, 공중 이런 우주가 생명체를 내는 거죠.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형상과 모양이 비슷한 단어잖아요. 철학적으론 다른 거죠. 형상은 어떤 모양을 가리킨다기보다 본질을 가리킵니다. 형상과 질료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개념에서 질료는 기본이 되는 물질이고 형상은 본질을 가리켜요. 책상을 예로 들면 책상의 재료인 나무는 질료죠. 책상이라고 하는 자체는 형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상 형태 그건 모양이고요, 본질은 형상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모습이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태가 아니라 본질을 얘기하는 거예요.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조 이야기에는 계속 복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하면서 생명체들에게는 복을 줘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사람들에게 특별히 정복하라는 명령을 더 주십니다. 이런 말들이 오해될 수도 있죠.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같은 데 식민지 만들면서 말씀을 따랐다 이렇게 말하면 곤란한 거죠.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걸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정복해야 될 때도 있고 다스려야 될 때도 있는데 섬기라는 의미가 더 강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에게 복을 줬고 충만하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일을 하는 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거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체가 복을 받고 번성하면서 충만하게 되도록 사람이 특별한 역할을 하는 거, 이게 바로 정복하라는 의미이고 다스리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사람에게만 준 명령이에요. 사람은 다른 생명체와 비슷한 생명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본능도 비슷하게 있어요. 먹어야 되고, 남녀 관계를 가져야 되고 후손을 가져야 되고 등등 비슷한 게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들과 구별되는 것도 많죠.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서로 입장이 다르긴 합니다.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하니까 특별히 의미가 있는 겁니다. 인간만 자연에 예속되지 않아요. 다른 모든 동물들은 자연친화적입니다. 자연과 일치가 됐어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시간도 없어요. 인간은 자연에서부터 소외된 겁니다. 자연과 같이 돌아가지가 않아요. 고독하고 의심하고 걱정되고 두려워하고 그렇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속성에 의해서 땅을 정복할, 다스리라, 이런 명령을 고유한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인간론 문제는 한두 마디로 정리할 문제는 아니에요.
29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보세요, 모든 먹을거리가 기본적으로 채소네요. 채식주의가 이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맞는 겁니다. 동물들을 주면서 이게 너희 먹을거리가 되리라는 얘기는 안 하시잖아요. 동물들, 짐승들은 물고기부터 새와 모든 짐승은 복 받고 번성해야 되는데 채소는 먹을거리로 준다고 명시적으로 언급돼 있네요. 채식주의 실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면 좋겠는데 전문가들 얘기 들어보니 그 방식으로 건강이 유지되지 않는다 얘길하네요. 동물성 단백질도 우리 몸에 꼭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오랜 진화에 따라서 우리 몸이 그렇게 최적화된 것 같습니다. 채식주의로 실천하기는 어려운데 동물복지만은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죠. 29절만 본다면 채식주의가 맞아요. 30절,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새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다른 짐승들에게도 기본적으로는 먹을거리를 주시는 거죠. 창세기 이 대목을 여러 번 읽고 공부도 하고 했는데 우리에게 먹을거리로는 채식만 줬다는 거는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꼭 그렇게 살라는 말씀은 아니에요. 창세기 1장을 근거로 해서 육식은 맞지 않는 거죠.
31절, “하나님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니라”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이 다 끝납니다. 좀 특이한 게 여섯째 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맨 나중에 창조하셨다고 기억하잖아요. 앞에서 많은 게 진행됐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 가축, 기는 것, 짐승들이 같이 창조됐어요. 우리와 같은 날 된 겁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동물 만들고 같은 날에 사람을 만들었어요. 여기서 몇째 날에 뭐를 만들고 어떻게 했다, 그거 기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다. 창조된 세계는 아름답다. 번성하고 충만해야 된다. 그 모든 생명체가 복되게 살도록 특별한 역할을 해야 될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이 이야기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