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강 강의 받아쓰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아마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암 박지원. 答京之와 素玩亭記, 答某?) 어항속의 물고기가 자기가 물과 다르다는 것을 알겠나? 물고기는 물을 구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던져져 있는 것이죠. 물과 구분하려면 바깥에 나와야 합니다. 물과 물고기는 안에 들어있으면 그게 불가능합니다. 철학자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냐 하면 살다보면 철학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죠. 살다보면 직관하는 것 다양하게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Philosophy Pilos+Sopia,  知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지는 근본에 대한 것이겠지요. 철학, 신학도 철학의 한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시대때의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 에 따라서 여러파가 나누어졌습니다. 교부의 중요한 사람 제가 이름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오리게네스인가? 터툴리안인가?  "신학은 가장 참된 철학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하잖아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표상, 앞에 던진다. 포쉐일롱이라고 합니다. 전치사 fore ... 앞에 놓는다. 생각을 앞에 놓고 그린것 표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자기의 삶을 끌어가는 힘들. 쇼펜하우어나 니체 이런 사람들이 절대의지, 권력 하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증언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철학에서 지에 대한 사랑하고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근원에 접근한다는 면에서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신학이 철학과 똑같다는 말이냐 그건 아닙니다. 접어두고요.

왜 철학자들이 물고기와 물의 관계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살지요. 철학자들은 깨어, 각성하고 있으니까 자기를 늘. 깨어있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 반성하는 것이죠. 리플랙션 자기 위치, 과거 두루 두루 살피는데 그걸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안에 들어와 있어서 세상이 뭔지 모르는거예요. 미안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게 세상이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가능성이 상당히 많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알고 있거든요. 현상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우리의 빨간 안경을 쓰고 있으면 세상이 빨갛게 보이듯이 우리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고 있어서 이게 세상인지는 더 질문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질문을 하는 신학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대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하나님으로 부터의 대답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질문하는 것에 대해 대답을 받거든요. 계시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노출한다고 계시론,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고가 아니다. 계시는 곧 하나님인거예요. 이게 여러분 별거 아닌것 같지만 하나님과 시간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라기보다 통치와 힘이잖아요. 그 자체가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뀐다고 하잖아요. 옥황상제 하나님이 어디 있고 그분이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안에서는 하나님의 한 것 행위 운동 변화 자체가 하나님이신 것예요. 계시는 자기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질문이 가능한 사람에 대해서 가능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신탁을 받았잖아요. 신이 자기의 뜻을 사람 하 고지 사건 신탁이라고 하는데 멍하게 있는 사람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할 줄 아는거예요? 역사가 왜 이러냐? 뻔뻔한 사람이 잘 되냐? 이런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사건이 신탁이고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질문을 던지는데 신학을 하고 사실은 전문적으로 신학학위를 받은 사람들만 신이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서 그 관계안에서 자기 삶을 끌어가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이잖아요. 철학자들의 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세상 안에 던져져 있기 때문에 이걸 다 모른다.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이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거예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죽음이구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천국이라고 정말 그런데 이 세계는 우리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가끔 상담을 받고 하는데 우리 교회 신자들 말구요. 딴 분들이 질문을 합니다. 도대체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거기서 우리 죽었던 아들 딸 만날 수 있냐 이런 질문들입니다. 아주 절박한 것이겠지요. 우리들은 여기서 경험한 것들을 연장시켜서 그것이 극대화된 어떤 세계, 그걸 천당이라고 보통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범주안에 들어오지 않는거예요. 우리는 물속에 있는 물고기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의하자면 동굴안에 있기 때 동굴밖은 상상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요한계시록 천당, 새땅, 새하늘, 새예루살렘 묘사들이 많이 있는데 묵시문학라고 그러는데요. 그러한 방식으로 땅속에서 용이 나오고 일곱촛대가 있고 이러한 극단적인 상징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 생명의 세계 부활의 세계 이 땅의 경험으로서는 담아낼 수 없는 그러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하나님의 고유한 행위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생각이 나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의 삶과 이후의 부활의 생명과의 관계,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늘 생각해야 될텐데 그게 이 땅의 경험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는 담기 힘들다 그 이야기입니다.

두번째 강의 제목은 다른 복음입니다. 제목을 그렇게 정했습니다. 6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오늘은 교독하는데 여자분 먼저 읽겠습니다.

6.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그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사람이 여러분을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것 뿐입니다.
8. 그러나 우리들이나, 또는 하늘에서 온 천사일지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하였지만, 이제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미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10. 내 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까 ?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습니까 ?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네. 바울이 지난 주 우리가 읽은 복음에서도 그런거를 발견했습니다만 상당히 비장미를 자기의 사도권을 주장했다고 했습니다. 그게 끝나자 마자 뜸도 들이지 않고 본론으로 직접 치고 들어갑니다. 과격한 언어, 언사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웬만하면 덕담도 하고 지나갈만도 한데 거의 없죠. 지난주에 은혜와 평화를 한마디 했구요. 영광이라는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만 잠간 인사를 한거구요. 갈라디아 교회 형편들을 살피면서 이렇게 저렇게 덕담을 나눌 만도 한데 바울은 노골적으로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믿을 수 없다. 이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다급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거는 다른 복음이라고 하는거 복음의 내용이 문제이고 자주 다른 복음이 도대체 무엇이냐? 여러분이 성경을 잘 이해하시려면 지금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당시로 돌아가야 하는거예요. 시간여행을 하자. 간혹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하나 문제고 그것이 미치게될 여파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소아시아의 오른쪽 터어키 중심인데요 그 지역은 로마 문명이 일찍 엘리트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상당히 지성적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구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것이 점점 허물어지고 다른 이질적인 가르침이 거기에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상당히 마음이 아팠겠지요. 내용과 여파. 이 두가지입니다. 강의안에도 썼습니다만 조금 실감나게 하자면 제가 포항에 다섯 군데 교회를 개척하고 다른곳에서 하고 있는데 다섯교회가 신천지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정도로 다급한 실정입니다. 그럴 수 없다. 의리도 없나. 그런식으로 바울이 자기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태를 리얼하다고 할까요.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단어가 다른 복음입니다. 도대체가 복음이 복음이지 다른 복음이 있느냐? 복음이 유안겔리온. 복음하면 여러분 잘 아십니다. 내용도 아시고 낱말 뜻도 다 아실거예요. 모든 개념들은 어떤 것과 대결,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거 하나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안에 있는 어떤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율법하고 있는 문제거든요.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그거에 의해서 성격이 규정되는 것입니다. 지나가면서 또 한마디 해야 되겠습니다. 왜 상황이 중요하면요 이걸 떼어 버리면 그것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칼빈이 이야기한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툭하면 난해구절이 나오면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넘어갑니다. 성령이 조명하면 주술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런 생각이 많습니다. 종교개혁의 대가, 여러가지 면에서 그런 사람이 말한 것이 권위가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죠. 그 말을 칼빈이 한 말, 성령의 조명이란 말만 따로 떼어서 쓰면 크게 오해되는 겁니다. 칼빈이 왜 그 말을 했는가 알아야 합니다. 마틴 루터에게서도 마찬가집니다.  Sola scriptura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성서만이다. 그것만 따로 끊어서 이야기하면 왜곡될 염려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 다 이야기하자면 많은 교회사, 교리사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만하구요.

칼빈이 말한 것 하나만 상황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마틴 루터도 비슷하기도 합니다만. 칼빈이 왜 성령의 조명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느냐하는 배경인 것이죠. 그 당시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서 해석은 그 권위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는 주로 성직자구요. 성직자의 수장인 교황에 의해서만 성서가 해석될 수 있다. 거의 교황과 성서가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칼빈이 교황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다. 그런데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말을 따다가 해석학적 훈련, 신학적 훈련없이 기도 많이 하여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서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인양, 그렇게 칼빈의 말을 인용했다치면 왜곡이지요. 복음도 율법과의 관계에서 접근을 해야 하는데 갈라디아 공부중 계속 나오는 문제입니다.

복음은 복음이지 다른 복음이 있겠느냐 여기서 다른 복음? 과연 그게 뭘까? 직접 설명하지 않구요. 그 당시의 상황 안으로 좀 모실까 합니다. 제 역할은 문화유산을 잘 감상하실 수 있도록 설명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한다고 해서 문화유산에 조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한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선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머리에 넣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처음부터 완성품을 생각을 해요. 완성품이 아니었고 상당히 천천히 천천히 어떤 틀을 잡아왔습니다. 그게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초기 기독교사 조금 책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만 이단 논쟁이 많았거든요. 그런 것들이 복음이 형성되는 과정들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 뭐가 민주주의입니까?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나요? 아니잖아요. 그것이 역사가 진행되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여러면에서 민주주의가 되어있지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스웨덴은 완성되었을까요? 스위스는 완성된 민주주의일까요? 그건 아니잖아요. 어떤 것들이 다 살아있는 겁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교리, 이거는 다 포함됩니다. 아마 지난 주간에 말씀 드린 것 같은데 십자가랑 부활도 마찬가지예요. 이거를 완성된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면 결코 우리는 그 안에 종말로 열려있는 교리를 담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맛볼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거죠.

제가 여담입니다마는 설교비평을 하면서 느끼는 가장 큰 문제가 목사님들이 기독교 교리를 상품처럼 펼쳐 놓을려고 하는 거예요. 이미 그러니까 상품, 보험 상품이라도 좋고 자동차라도 좋고 그것은 일단 만들어진 거기 때문에 어떻게 선전을 잘하나 포장을 잘하나 그게 많게 파냐 적게 파냐 기준이 되는 것처럼요. 신자들로 하여금 그 복음이 형성된 세계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활동하시는 성령과의 관계를 조금씩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완성되어 있는 것을 주입식으로 무조건 받아들이게 하면 뭐가 문제가 되는가. 아시죠? 금방 지루한 거예요. 그래서 빅이벤트라든지 다른 것으로 보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처음부터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과정중에 있다. 지금도 그러한 과정중에 있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마는 이게 예수님이 가르침이 뭐냐?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직 잘 모르는거예요. 왜 당신 자꾸 모른다고 이야기하냐? 그래갖구 신자들의 신앙이 성장하겠냐? 그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독교 신앙은 자기 확신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힘들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구나에 대한 영적인 교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신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부분들을 모르는 것이다 잘 생각해봐라 그렇게 열어주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신자 몇 명 앉아 있습니다만 제 설교 들으면서 한쪽으로 답답한게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뜨겁고 화끈하게 뭔가를 기대할지 모릅니다만 속으로는 더 영적으로 더 에너지가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가르침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예를 드릴까요?  왼뺨을 치는 자에게 너의 오른 뺨을 돌려대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이게 뭡니까?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긴 있겠지만 정답이 있냐? 그걸 누가 아냐? 아니죠. 계속 우리는 그런 질문 속에 있습니다.

어제께 샘터 교회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설교 제목은 ‘하늘이 열린다’ 였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이었습니다. 마태 3:13-17절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와 예수님께 임재했다. 비둘기같은 성령이 임하셨다.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기자가 거기서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말입니다. 하늘이 열렸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해하세요? 하늘이 열린다니. 하늘은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열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서기자는 그것을 열린다고 이야기를 할까요? 그들은 하늘을 뭐로 생각할까요?

복음이라고 하는 것, 기독교 교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라 많은 논쟁 가운데서 완성되어 왔다. 과정이 있다. 그래서 다른 복음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바울이 말하고 다른 복음이 있고 그것외에도 다른 복음이 있는거예요. 논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논쟁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진행되요. 정용섭 목사가 이야기하는 설교의 복음이 있고 조용기 목사님이 하는 복음이 따로 있을겁니다. 아마. 그게 얼마나 다르냐 또 다른 문제이구요. 성서기자가 이야기하는 하늘이 열린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느냐 그런 거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120억년전 하늘 문제를 제가 좀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어들이 우리가 성서를 이해하는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아는 것처럼 서로 생각하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하늘은 그 당시 고대인들이 생각할때 궁극적인 생명이 잉태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만큼 생명의 신비를 생각했다고 하는거죠.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그걸 하늘, 예수님도 승천하셨다 승천하셨다고 하는 것은 1992년도에 있었던 다미선교회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그냥 우리가 재림할때 휴거 당한다 이런 방식의, 이런 우주의 공간 이런 그게 아니라 생명이 감춰져 있는 곳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승천과 부활이 다른게 아니예요. 똑같은 사건을 그렇게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예요. 보통 우리는 예수님은 부활 하시고 40일동안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셨다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40일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해석하기 위해서 들어온 것 뿐이고 예수님에게 일어난 특별한 사건, 부활사건이라고 하는것, 그런 것을 한쪽으로는 부활로 또 한 쪽으로는 그 분이 계속 이 땅에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으니까요. 그런 면에서는 승천이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승천이나 부활이나 똑같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으로 변화된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개념이 우주공간이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이 은폐된 곳.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하늘이 열린다는 성서의 진술을 우리는 지금 실증적으로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아시겠어요? 그런 성서의 진술들요. 그런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 혹은 우리가 계속 계속하려고 하는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고 그런점에서 논쟁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것이죠. 이 논쟁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강의안 두번째 쪽 두번째 파라그래프를 보십시오.

무슨 말인가? 하늘이 열린다는 성서의 진술을 우리가 아직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의 가르침이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다면 복음도 분명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논쟁은 초기 기독교부터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복음은 평화와 사랑인데 무슨 논쟁이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복음이 논쟁적이라는 사실은 아주 명백하다. 바울 이전에 예수의 삶에서 우리는 복음의 이런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복음이 주변과 무조건으로 화해만 해야 한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 싸움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 처형이었다. 예를 하나 더 들자. 예수님은 어느 안식일에 장애인을 치료하신 적이 있다. 예수님을 향해 색안경을 끼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그를 고쳤다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병든 자의 구원이라는 주님의 뜻도 실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에 그를 고침으로 결국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분노를 샀다. 매우 투쟁적이지 않는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은 투쟁적이지 않냐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왜 바리새인들과 논쟁적이고 투쟁적이었을까요?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트집잡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복음은 기본적으로 평화지향적입니다. 그러나 그 주변세계가 복음에 본질적이지 못하고 변질하거나 왜곡 시키고 있을때 그때 문제인거죠. 하나님의 구원을 사람의 손으로 쥐락 펴락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교권, 그런 것들 강건너 불처럼 구경할 수는 없겠죠. 그러면서 복음적이다 라고 할 수 없겠죠.

이런 일들은 종교 개혁시대에도 반복되었습니다.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로마교황청과 일전불사할 수 밖에 없었구요.  그렇습니다. 요즘도 한국 교회가 교권이 복음을 억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기총 신임회장은 후보로 나서서 10억을 헌금하겠다고 약속했구요. 당선된 다음에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이 좋은게 좋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왕 누구든지 회장을 하기는 해야하니까 그렇다면 돈 좀 푸는것도 좋치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으로 생각을 시작해버리면 종교개혁때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동기라 할 수 있는 면죄부 판매 이것도 타당합니다. 합리성이 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뭐 그렇게 설명이 필요없습니다만. 카톨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세 군데로 나눠진다고 하죠. 천당, 연옥, 지하세계, 우리 개신교는 두가지로 생각하는데요. 이게 두가지가 맞느냐 세가지가 맞느냐는 것은 싸워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종말에 가서야 알게되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부분적이다. 거울로 보는 것은 희미하다.” 저는 이 말이 굉장히 와 닿습니다. 희미하다. 거울로 보는 것, 그 당시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희미하게 윤곽만 보게 되거든요. 이 세계가 제 눈에는 윤곽처럼 보입니다. 제가 아까 물 속에 들어가 있는 물고기 이야기를 했는데요. 던져져 버렸어요.  피투적인 존재라고 보통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거는 아마 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서 천당, 연옥, 지옥, 로마 카톨릭 이렇게 이야기한 것에 누가 잘못되었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더냐? 어떻게 구원받을 수 없느냐? 그 당시 면죄부를 파는 사람들을 논리였습니다. 먼저 죽은 자기 가족들의 영혼들을 위해서 면죄부를 사서 헌금통에 넣으면 땡그랑 소리와 함께 그 영혼이 천국에 간다. 좀 선동적이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해서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했고 그걸로 로마 베드로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과거에 있었던 역사의 위대한 건물들은 다, 억압적인 역사가 다 숨겨져 있습니다. 거의 모든 유적들, 지금 우리가 만리장성 굉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사는 슬픔, 비극이거든요. 그렇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독재자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유물을 엄청난 건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큰 건축물들이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하하하) 결국 그렇게 살아온 성당을 위해서 돈이 들어가게 된 것이죠. 이해하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확신이 없어서 그들이 천당 갔는지 연옥갔는지 지옥갔는지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면죄부 사가지고 확신주면 누이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 거거든요. 그걸 아무도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요.

기독교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중들이 살기 힘든데 예수님 믿고 십일조하고나면 하나님께서 창고 채워주고 그렇게 위로받고  그렇게 살게 하면 다 좋지 않느냐? 이런식으로 나가게 되면 모든 것이 다 합리화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점에서 때로는 투쟁적이예요. 때로는 평화지향적인데 긴장가운데 있습니다.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쟁과 평화가 같이 나가게 되는데 정말 평화지향적인 사람은 결정적인때 투쟁적인때가 있고 이게 같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걸 언제 우리가 투쟁해야 할 때고 언제 골방에 앉아서 기도하고 말씀읽고 할 때인가 분석 판단할 수 객관적인 기준을 누가 제시할 수는 없죠. 자기에게 주어진 영성 안에서 판단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복음공동체라고 한다면 좌우에 날선 검처럼 시대도 분별하고 자기 있는 위치도 보고 교회 안에서 자기 역할도 좀하고 교회안에서 자기 보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늘 불평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기 교회 개혁적이도 하고 신앙이 모자란 사람과 함께 평화적으로 나가면서 한국 교회 전체가 복음을 잃지 않고 역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냐 그러한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바울이 가르쳐 준 것처럼 기도하고 쉬지않는 깨어 있는 영성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학공부도 그 중의 일환이라 할 수 있겠죠.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 한 교회에다 쓴 편지가 아니라 여러 교회에게 쓴 편지인데요. 다른 복음을 따라가 버렸다는 바울의 진술의 무엇인지 조금더 새겨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강의안)
초기 기독교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크게는 세 분파이다. 첫째는 히브리어를 쓰는 기독교인(팔레스틴), 둘째는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 기독교인, 셋째는 헬라어나 로마어를 쓰는 이방인 기독교인이다. 그 안에서도 또 세부적인 분파가 나뉘었다. 예컨대 고린도 교회를 예를 들자면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심지어 그리스도파가 나뉘어져 있었다. 각각의 신앙적 특징에 따라서 이런 파가 나뉘면서 복음의 정체성이 천천히 역사하면서 자리 매김되었다. 위의 내용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부를 성격을 기준으로 하는 구분이라고 한다면, 유대교와의 관계에 따르는 구분은 공동체 외부를 기준으로 하는 구분이다. 유대교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가, 아니면 느슨하게 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또는 완전히 단절하는가에 따라서 서로 달라졌다.

여러분들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그림처럼 좀 설명을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3년동안 공생애 생활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본인이 의도하진 않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고 예수님이 생각하셨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한다는 교리가 잘못되었냐?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건 우리가 앞으로 지나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뭐 복음서 자체가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가능하면 이 잔을 물리쳐 달라는 그러한 예수님의 실존적 고백 그런 것도 들어있고요. 십자가 상에서 일곱마디 하셨는데 그중에 하나가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으로 부터 유기인 것입니다.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야기하듯이 예수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유기당한 가장 절망당한 상태였습니다. 그걸 경험해 보셨어요. '하나님 안계신 게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이건 그냥 감상적인 자기 신세한탄 정도가 아니라 세계 전체를 직관하고 역사와 삶을 뚫어 보는 가운데서 나오는데서 나오는 철저한 무력감. 그런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을 잘 모르는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꾸만 '하나님이 있다 있다' 생각하시는 거예요. 일종의 유신론이거든요.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실체론적 유신론’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헬라시대 때부터 나온 실체론과 유기론 것 같은데요. Substance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시간과 공간 입자 분명하게 있다. 그런 것 속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런쪽으로 계시는 존재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충분하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제가 어떻게 설명을 할까요? 이미 노자나 장자가 이야기를 했고요. 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이 관점을 여러분들 바꿔보세요. 하나님은 있음만이 아니라 없음도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말장난같이 생각되시나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미래가 전혀 없다는 절박감, 그런 것을 뚫고 나와야 그다음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게 눈에 조금씩 들어오게 됩니다. 저는 죽은 다음에 천당 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오랫동안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배고픔도 없고 과실도 많고 강도 흐르고 아주 이땅에서 최고의 복지가 보장된 어떤 나라 처럼 사람들은 천국을 사람들이 생각하거든요 그런 나라 가보고 싶으세요. 그러면 굉장히 지루할 겁니다. 지금 우리 시간과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끝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거거든요. 지금 이 상태 계속 살고 싶으세요. (대답없음) 계속 살고 싶은가 보네요. (하하하하) 우리의 삶의 허무하다 의미없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찰나적이고 순간적이고 무상한 우리의 삶이지만 여기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들어와 있어서 이것을 우리가 자꾸만 실체론적으로 유신론적적으로, 기독교 신론에서는 유신론 무신론 논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다 없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구요. 신학에서는 그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 뿐이예요.

어쩌면 하나님은 행위하지 않음으로서 행위하십니다. 이해하시겠죠.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서 느낄 수 있죠. 아이들을 자꾸만 간섭하면 아이들이 이상해지거든요. 아이들에게 간섭을 하지 않음으로서 아이들이 더 생명 지향적이고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보세요. 이 세상에 하나님이 정말 행위하시는 분이라면 왜 불의한 자를 내버려 두십니까? 왜 장애인 태어나자 아이들 죽게하고 그러한 권한, 신정론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롭고 사랑이 있는 분인데 왜 악이 존재하냐 이런 질문이죠. 이런 문제들은 항상 유신론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불의한 것을 내 버려두심으로 심판하시는 것이죠.  절묘하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기독교가 선명한 빛깔을 갖고 시작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데 아니었어요. 막연했어요. 부활 경험도 굉장히 뚜렷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중에 신앙고백입니다. 복음서는 그 당시일어났던 사건을 신문기자가 받아쓰고 보도한 것이 아니라 수십년 지난 다음에 공동체안에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쓴 문헌들이거든요. 그만큼 근거가 없다는 것으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게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역사하셨는가 그것을 이제 우리가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겠지요.

초기 기독교의 막연하고 중구난방이었어요. 제 표현이 그렇습니다. 여러 특징들을 가지고 발전해 왔는데 그중에 하나의 파, 바울입니다. 많은 파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의 파예요. 왕따 당한 작은 파, 별로 환영받지 못한 사람이 밀려서 점점 타의에 의해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와 로마 이런 쪽으로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요. 아주 독특한 색깔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오늘 역사적 기독교는 없을 수 있는 개연성이 높고요 있다고 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종류의 복음일겁니다. 예루살렘교회 예수님의 동생과 제자들이 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교회가 여전히 세계교회 중심이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 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자꾸만 논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죠. 그런 과정에서 교회가 역사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드러내는 그 과정 가운데서 수많은 사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고 있어요.

그중에 하나만 이야기한다면 로마의 장군 Titus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70년에 예루살렘 교회가 힘을 잃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바울이 전파한 헬라파 교회가 세계의 주류가 됩니다.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게 오늘의 역사의 교회가 등장하게 된 그 사건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우리가 예상하기 힘듭니다. 남태평양에서 나비 한마리가 펄럭이는 것이 결국은 이쪽에 태풍이 온다는 이론이 있잖습니까? Buttery Effect 그게 사실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흐름이 있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를 너무 선명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의 왜곡

여러파가 있었는데 예루살렘파가 바울이 개척해 놓은 교우들을 교란 시켜서 복음을 왜곡시켰다 이게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핵심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화해 할 수 없는 거죠. 복음을 별질, 왜곡 시켰으니까요. 바울은 굉장히  과격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작품이고 신학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일종의 열광적인 그래서 성령에 대한 강조 가 많고 자유에 대한 강조가 많고 하나님의 계시 그러한 직접 표현도 많습니다. 노골적입니다. 그렇게 표현하는군요. 교란시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시켰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보기에 따라 이런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사람들도 여전히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고 있기 때문에 토라와 할례를 겸해서 이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말이 일리가 있어요. 그건 나중에 나옵니다. 중반쯤 가면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울에 의해서 공격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굉장히 분명한 사람들이고 정직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복음에 대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달라 뭔가가. 다른 것이 무엇인가 그런 것은 우리가 깊이 더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다 똑같다 이것이 무어그리 중요한가. 아마 이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만 잘났냐? 이야기했을것입니다.

복음을 왜곡시키는 사람들, 굉장히 강한 표현이군요. 오늘날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긴 있는데 바울이 옳은지 바울의 비판을 받고 있는 다른 복음을 전한 사람들이 옳은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지금 살아남은 거는 바울의 복음이예요. 다른 복음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역사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아시죠. 구약성서도 다 승자의 기록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승자잖아요. 다윗왕조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신명기 사가의 흐름이 구약성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서기자들이 혹은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어떤 전승들이 그렇게 무식하게 한 것은 아니고 어쨌든 기본적으로는 다윗왕조를 부각시키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까지 심판하신다는 그걸 이이야기를 하는 거죠.

우리는 어쨌든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 진행된 복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미 바울의 후배, 신앙적인 후배니까 바울이 옳다고 이야기를 해야 되고 또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마지막 결정은 최후의 심판, 그때 그 자리로 유보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 복음이 확실하지 않다 바울의 복음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고요. 우리 신앙적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독단적으로 하지말자. 그 이야기입니다. 결국 모든 것의 판단을 마지막때 하시니까 최후의 판단을 그분에게 맡겨두면서 현재 옳고 그름을 판단해 나가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심판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오른쪽 왼쪽, 양과 염소그 기준이 자기는 오른쪽에 가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왼쪽에 가고 왼쪽에 가야 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오른쪽으로 가버립니다.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예수 믿으면 오른쪽에 가고 믿지 않으면 왼쪽에 가는구나 생각하면 그거는 이얼령 비얼령식(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이렇게도 저렇게 도 될 수 있음을 비유)으로 성서를 이해하는 겁니다. 성서를 그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꾸 예수구원 불신지옥 이런 패러다임으로 한국 교회가 고착화된다면 이거는 성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고 부분에서 한 마디 한다면 저는 만인 구원론이 더 옳지 않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이 우리도 모르는 방식으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구원하시리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 지렁이나 민들레나 모든 것들,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구원하시리라 그렇게 희망을 하고 그렇게 기대하고 그런 쪽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무어하려고 예수 믿냐? 그렇게 말하면, 여기는 저한테 그렇게 질문하실 분 안계시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리라 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끼리만 구원받자 이게 무슨 신앙이겠어요? 우리 목사님, 그렇다고 신자들에게 그렇게 설교하면 안되겠죠. 설교는 또 다른 문제니까. 그러한 쪽을 지향하는 게 기독교인으로 당연하다. 보편적 구원쪽으로...

이런 걸 이야기하면 논쟁적으로 됩니다. 싸움이 되는데 싸움하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을 풀어내려면 만인 구원이냐 선택적구원이냐 칼빈이 그걸 많이 강조했죠? 선택적으로 구원받고 지옥 갈 사람 결정되어 있다. 칼빈은 아마 그거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칼빈의 핵심은 그거잖아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 선택적 구원을 이야기하고 모든 신학의 흐름이 그 자체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가 말씀드렸죠? 무엇을 말하기 위한 하나의 손가락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말이죠. 그러한 많은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하는 사실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며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구원이 무엇일까? 구원론. 이거 모든 게 다 연관됩니다. 교회론 구원론 종말론 창조론 성서론 이게 다 유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하나 하나 띄어 갖고는 독단에 빠집니다. 구원론(Soteriology). 천당에 가서 우리나라는 보통 천당에 대한 개념이 戱畵化 되어 있습니다. 천당에 가면 충성 많이 한 사람들은 황금 면류관 쓰고 못한 사람, 겨우 구원 받는 사람은 개털모자 쓰고. 천당 갔다 온 사람이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맨션에 살고 어떤 사람들은 오막살이에 살더라. 이것처럼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그 자체가 구원이라고 한다면, 사후 보상 사후 상급론, 아주 허황된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신앙, 유치한데 거기에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먹힌다는 겁니다. 그걸 자꾸 부추기면 신자들이 거기에 빠져듭니다. 순간적으로 빠져들지 모르지만 영생이 아니기에 결국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겁니다.  

구원이 뭐냐? 나중에 잘 살고 잘 먹고 그런쪽으로 생각하면 한국적 구원으로 빠질 수 있어요.  그러나 다른 구원을 생각해 보세요. 물속에서 바깥에 나와야 물이 보이듯이 지금 우리는 여기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을걸요. 그러니까 우리가 물이 되어 버린다. 아니면 우리의 모든 육체가 이 지구나 우주의 하나의 원소가 되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우리의 개개의 존재성이 유지되는 것, 그게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도 있는거예요. 우리는 모르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 빨리 지우십시오. 몰라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게 일종의 상상력이거든요. 예언적 상상력, 신학적 상상력, 성서적 상상력. 하나님 나라는 어쩌면 그런 상상력과 굉장히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잘 먹고 잘사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우리가 어렸을 때 딱지 따먹기, 구슬치기해서 많이 따면 흡족하고 그랬었는데 나이가 들면 재미없잖아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와 생명을 발견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생명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차원을 달리하게 된다면 아마 모든 이들의 구원 그걸 당연히 우리가 기대하게 될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YMCA 성서공부라서 아멘이 안 나오는군요.(와하하하하)

복음의 왜곡, 누가 옳은지 아직까지 모르지만 그러나 바울의 후예로서 우리는 다른 복음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복음. 이것을 믿고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종말로 조금 유보하자는 거죠. 그때 가게 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모든 세계가 실체가 온전히 드러나게 되어서 모든 비밀이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게 너무 막연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막연한 것은 이게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막연합니다. 여기서 뭐 확인할 수 있는 게 있나요. 기독교인들은 이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아요. 역사는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말과의 연관,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종말은, 한마디만 붙인다면 막연하게 미래에 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역사철학입니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가 기독교에서는 종말론 Eschatology 거기에 모든 기독교 가르침과 진리의 근거가 놓여있다, 종말론적이다는 거죠.

바울이 다른 복음과 구별할 때 핵심은 이겁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적인 주제이니까 이것은 알아 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종, 구속, 바울의 복음은 그 특징이 뭐냐? 자유와 아들. 갈라디아서에서 계속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복음? 바울하고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러한 복음, 그것이 갈라디아 교우들을 자유롭게 했다면 바울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자유하게 못하는데 거기 매달려 있으니까, 이 문제, 이상하죠? 자유롭지 않는데 인간이 왜 거기에 매달리냐?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유를 만끽하기 힘든거예요. 자유가 오히려 들어붙습니다. 꽉 몸을 조여 주어야 그게 나를 사랑하는 겁니다. 거기서 만족감을 얻습니다. 심리학자들이 하는 용어이겠네요. 이게. 메조키즘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자기학대죠. 이상하죠 그게? 그게 정신적인 질병 현상인데 인간은 그런 경우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죠. 질병은 질병인데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우들이 그러한 종을 만들고 부자유하게 하는, 그쪽으로 자꾸만 따라가는 거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거죠. 왜 그렇게 되느냐는 그 배경이 있습니다. 그거는 뒤에 가면 나오게 될테니까요 그때 우리가 더 이야기하기로 하구요.

자유, 저는 그것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현실과 여러분의 신앙생활과 연관되는 거구요. 성서공부를 하자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서를 정보로서 아는 이해, 신학적 개념으로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적 실존하고 연관되는 문제일겁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이 과연 자유로우냐? 우리의 영혼을 더 자유롭게 하고 있느냐? 아니면 더 억압하고 있는가? 그것을 좀 깊이 생각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대다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할걸요. 두려울걸요. 여러 가지면에서 그렇습니다. 십일조만 하더라도 ‘아, 내가 이거 얼마나 해야되나?’ 이게 계산이 되구요. 어떤 사람은 새벽기도회 한번 안 나왔다고 해서 불안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의 영성은 죄책감영성입니다. 회심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죄인이야. 용서받았어. 맨 날 죄인이예요. 맨날 죄예요.

청교도 영성이라고 하는데 그건 교리사적으로 더 복잡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청교도 각성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부흥운동이 되거든요. 요나단 에드워즈 1차 2차 3차 각성운동하고 보통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부흥강사들이 다 그런 쪽입니다. 결국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의 신앙은 회심영성, 사람이 죄인이니가 용서받고 살자고 하는 것이 잘못이겠습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죄가 굉장히 심리적인데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머물러 있게 되면 악순환이 되는 거예요. 결국 중요한 때에 윤리적인 결단을 못하는거죠. 책임감도 없고 말이죠. 민주화 운동할때도 상당히 보수적인 교회는 내몰라라 했거든요. 나도 죄인이면 너도 죄인이다. 너 잘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 식이었죠.

오래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내 탓이요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계신분도 있겠죠. 그 의미를 제가 훼손시킬 생각이 없습니다마는 그것이 아주 보편적인 되어 버리면 병들게 하는 하나의 슬로건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탓은 내탓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정확히 사회윤리학면에서 시시비비를 따질때는 따져야한다는 것이죠. 한국교회 신자들이 그렇게 눈물많이 흘리고 도덕주의적인 설교도 듣고 하지만 한국이라고 하는 사회속에서 실질적인 면에서의 윤리성, 확보하고 있느냐?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신앙과 삶이 유리된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죄책감속에 머물러 있는 거죠. 아마 이런 점에서 목사들을 비롯해서 한국의 신자들의 심리테스트를 하면 건강하지 않을 쪽을 나올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너희들이 전한다. 허튼 소리가 아닌 것 맞죠? 자유를 훼손시키는 것. 우리 이러한 성서를 계속 읽고 복음서에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계속 들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복음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율법적이고 어떤 데에 묶여 있는 것이죠. 복음의 왜곡은 한국교회에 전방위적으로 나타나는데요 강의안에 있는 내용들인데요 나중에 보시죠. 그냥 요거 하나만 집고 끝내겠습니다.

왜곡의 죄책감 제가 애기했고요. 회심중심의 영성, 이건 병든 거다. 성찬식 할 때마다 우는 사람들 내가보기에는 그건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런 지나치게 심리적인 죄성가운데 빠지는 영성이구요. 또 하나는 예배를 인터넷으로 참여해서 그것을 기독교 사상에 올린 것이 잇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굉장히 열광적인 그러한 예배인데요. 굉장히 세련된, 흡사 열린 음악회와 같은 예배였지만 하나님이 영광받는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 좋은거예요. 자기들끼리만 은혜를 받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에서는 은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은혜가 아니라 영광 Doxology 문제예요. 제가 이야기했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제사지낼 때 그 참여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까? 조상에 대한 예의이거든요.  하나님께 liturgy와 sacrament, 교회력 이런 것을 따라서 영광을 돌리면 충분한데 우리는 그것을 참아내지 못해요. 우리가 즐거워야 한다는 이런 생각에서 열린 예배를 나가는 것, 이건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영성을 훼손시키는 복음의 왜곡, 변질중에 하나입니다.

- 조교님 녹음의 끝이 조금 짤린 듯해요.